LOGIN"늘 기다리라고만 했지. 내가 어떤 처지인지는 생각해 봤어? 꼬박 칠 년을 기다렸는데 돌아온 게 뭐였지? 다른 아이가 널 아버지라 부르고, 너는 나더러 첩이 되라더라! 네가 집까지 찾아와 모욕한 것도 모자라, 난영이는 아이를 데리고 태학에 가서 아버지까지 모욕했어!""네가 아무 잘못도 없다고? 그럼 말해 봐. 나는 뭘 잘못했는데? 칠 년을 기다린 것도 모자라 아무 잘못 없이 이런 일까지 당해야 해?"서겸이 말문을 잃었다.입술을 달싹였지만 변명 한마디 하지 못했다."내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어. 앞으로 네게 잘해 줄 시간은 얼마든지 남았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어. 연서야, 한 번만 만회할 기회를 주면 안 될까?"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최서겸, 한두 번 잘못했을 때는 기회가 있을 수 있어. 그렇다고 잘못을 거듭할 기회까지 주어지는 건 아니야. 기회를 안 준 것도 아니잖아.""칠 년 동안 편지를 일곱 통이나 보내면서 내게 미안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 내가 널 좋아하고 너와 혼약을 맺었다는 이유만으로 언제까지나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지.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고.""이제 다 끝났어. 최서겸, 네게도 아내와 아이가 있잖아. 이미 내게 잘못했으면 그 사람들에게까지 상처 주지는 마."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서겸이 뒤따르려 했지만 윤겸이 앞을 막았다."장군, 분수를 지키게."서겸은 망연한 얼굴로 멀어지는 나를 바라보았다. 내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스스로 서북쪽을 지키러 가겠다고 청했다.백령국의 새 국왕이 즉위해 이 나라에 전쟁을 선포했다.두 나라는 치열하게 맞붙었다.군량이 모자라 황제는 안절부절못했다.그때 백령국 왕실에서 왕비와 어린 왕자를 데려가겠다는 서신을 보내왔다.거듭 고심한 끝에 황제는 난영과 승원을 백령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도성을 떠날 때 난영은 얼굴이 흠뻑 젖도록 울었다.황제도 몹시 아쉬워했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이번에는 서겸이 난영을 따라 백령국으로 가지 않았다.
"그날 뒤편 정자 곁 연못을 지나다 마침 비단잉어 한 마리가 물 위로 뛰어오르는 걸 보았소. 그때 그 아씨는 분명 복이 있는 사람이겠구나 싶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소."그 뒤로 그만큼 마음에 남는 여인은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스승님이 혼사를 청하러 오셨을 때도 그래서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었다.그랬구나.듣고 보니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내 기억에는 없었다. 그래도 그의 말에는 앞뒤가 맞았고, 봄이면 복숭아꽃으로 화관을 엮곤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그때 이미 나를 본 적이 있었구나.윤겸이 조금 수줍은 기색으로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그날 태학에서 아버지를 대신해 모욕을 감수하고 현판에 글을 쓰는 모습을 직접 보았소. 그래서 오늘은 그 현판을 반드시 우리 저택으로 가져와, 그대가 당한 모욕을 꼭 되갚아 주리라 마음먹었소."그날 태학에도 있었다니. 뜻밖이었다.그토록 치욕스러운 모습은 다른 이에게 들키지 않은 줄 알았다.그 자리에서 나서지 않아 준 게 다행이었다.그랬다면 아버지께서는 더 큰 모욕을 느끼셨을 테니.가볍게 입술을 다물었다."이렇게 된 것도 괜찮습니다. 제 사정은 다 아셨을 테니, 앞으로 그 집안과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겠습니다."윤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나는 개의치 않소. 최서겸 하나와 견주어 밀릴 것 같지는 않구려."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난 윤겸이 침상 위, 내 곁에 앉아 있었다."부인, 좋은 때를 놓쳐서야 되겠소? 이제 첫날밤을 보내야 할 듯하오."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무거운 봉관을 벗었다.붉은 휘장 안으로 고요하고 긴 밤이 흘렀다.이튿날 아침 일찍, 윤겸은 집안의 재산을 모두 내게 맡겼다.간밤에 했던 말은 농담인 줄 알았다.그런데 저택의 장부는 정말 산더미 같았다.섭정왕으로서 받은 하사품부터 헤아릴 수 없었다.그가 가진 전답과 가게도 셀 수 없이 많았다.직접 맡아 꾸리려면 하루 종일 장부를 들여다보고 셈을 해도 끝이 없을 판이었다.다행히 믿을 만한 이들이
"진작 말했잖아. 네 편지도, 처음 썼던 혼인 서약서도 벌써 다 태웠다고. 그 순간부터 우리 혼약은 끝났어. 칠 년이나 난영이를 지키더니, 이제 함께 도성으로 돌아와 바라던 혼인까지 했네. 둘이 잘 살아.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지 말고.""아버지께서는 태학의 태부(太傅: 황실의 교육을 맡은 고위 관직) 자리도 내려놓으셨어. 앞으로 두 사람이 아버지를 귀찮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 특히 너, 다시는 우리 집 문턱을 넘지 마."몸을 돌려 떠나려는데 윤겸이 내 손에서 차용증을 빼 들었다."장군, 내 왕비에게 빚진 돈은 서둘러 내 저택으로 보내게. 동전 한 닢이라도 모자라면 내가 직접 찾아가 받겠네."그 말을 끝으로 윤겸은 내 손을 잡고 가마에 태워 주었다.가마의 발이 내려지자 서겸의 시선도 완전히 가려졌다.흥겨운 혼례 악기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가마는 집에서 점점 멀어졌다.밤이 되어 나는 침상 가에 조용히 앉아 윤겸을 기다렸다.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신방으로 들어왔다.술 냄새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다만 잔 두 개를 들고 와 나와 함께 혼례 술을 마셨다.그러고는 저울대로 머리에 드리운 붉은 면사포를 살며시 걷어 올렸다."왕비가 참으로 곱구려."빙긋 웃는 얼굴은 나보다도 고왔다."왕야, 어찌 저를 아내로 맞으신 겁니까?"이렇게 윤겸에게 시집왔다는 사실이 아직도 선뜻 믿기지 않았다.그가 의자를 끌어와 내 앞에 앉았다.평소의 매섭고 냉혹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그대의 아버지는 내게 처음 글을 가르쳐 주신 스승이오. 얼마 전 찾아오셔서 몹시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따님이 있다며, 내게 마음에 둔 이가 없다면 혼인을 맺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셨소."뜻밖의 말에 멍해졌다.평소 엄격하고 빈틈없던 아버지께서 내 혼인을 위해 그렇게 뛰어다니셨을 줄이야."그래서 승낙하신 겁니까?""내 혼인을 그리 쉽게 정했겠소?"윤겸이 웃으며 내 코를 살짝 집었다."아내로 맞을 사람인데, 어떤 성품인지 살펴는 봐야 하지 않겠소?""전에 큰길에서 그대를 보았
말이 구경꾼들 앞에 멈췄다. 말 위에는 혼례복을 입은 섭정왕 서윤겸이 앉아 있었다.난영이 흠칫했다."숙부님? 어찌 여기에 오셨습니까? 오늘은 서겸이 첩을 들이는 날인데, 어찌..."혼례복 차림의 윤겸을 보며 난영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그의 옷을 자세히 살핀 뒤 연서의 혼례복과 번갈아 보았다.두 사람의 옷에 수놓인 무늬가 똑같았다.'설마... 정말 저 말이 사실이었나? 오늘 혼인할 사람이 서겸이 아니었다고?'서겸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몸을 돌려 윤겸에게 예를 올렸다."왕야, 오늘 소관이 첩을 들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제 저택에 오셔서 혼례 술 한 잔 받아 주십시오."윤겸이 웃었다."마침 나도 오늘 아내를 맞는 날이네."나를 돌아보는 눈빛이 부드럽게 풀렸다."왜 그리 멍하니 서 있소? 어서 내 곁으로 오시오."나도 얼떨떨했다.부모님께서 혼처를 정해 주셨다는 건 알았지만, 그 상대가 윤겸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서겸을 기다리며 칠 년을 보냈으니 좋은 혼처는 틀렸다고 여겼다. 나보다 못한 집안에 시집가는 것만이 남은 길인 줄 알았다.오늘 혼인할 사람이 윤겸일 줄이야.항렬은 높아도 나이는 젊었다. 나보다 고작 서너 살 위였다.여태 혼인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그가 맞을 왕비가 나일 거라고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더 커졌다."세상에, 부연서가 시집갈 사람이 섭정왕이었소!""폐하 다음가는 권세를 쥔 분 아니오. 백령국에 가서 칠 년이나 돌아오지 않은 장군에게 시집가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소?""나라면 칠 년이 아니라 십 년이라도 기다리겠소. 섭정왕께서 맞아 주신다면야."여전히 수군거렸지만 처음의 동정도, 남의 불행을 즐기던 기색도 사라졌다.부모님을 돌아보았다.두 분은 다정하게 웃고 계셨다. 용기를 내라고 말씀하시는 듯했다."너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단다!"천천히 다가가 윤겸에게 손을 내밀었다."왕야, 가시겠습니까?"뒤이어 그의 혼례 행렬도 도착했다. 서겸
아버지께서는 이틀간 쉬겠다고 알리셨다. 우리 세 식구가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겸이 성난 기세로 들이닥쳤다."연서야, 승원이는 어린아이인데 왜 괴롭힌 거야?"영문을 몰라 그를 바라보았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최서겸,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오늘 난영이가 승원이를 데리고 간 건 네 아버님을 존경해서 가르침을 청하려던 것뿐이야. 다른 뜻은 없었어!""그런데 왜 아이에게 벼루를 던졌어? 재빨리 피하지 않았으면 크게 다쳤을 거야. 지금도 놀라서 고열에 경련까지 일으키고 있어!"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세상에 난영처럼 뻔뻔한 사람이 또 있을까."네 혼수에 신의가 빚은 영수단이 있었지. 경련을 멎게 하고 온갖 병을 고친다던데, 그걸 내게 줘. 잘못을 뉘우치고 만회하는 셈 치고."기가 막힐 따름이었다.그런데 문득 눈빛이 달라졌다. 나는 말투를 누그러뜨렸다."영수단을 빌려줄 수는 있어. 대신 차용증에 네 이름을 적고 관인까지 찍어야 해."서겸의 낯빛이 살짝 달라졌다."연서야, 관인을 장난으로 찍을 수는 없잖아."무심한 얼굴로 답했다."서승원의 병을 고치려고 진심으로 약을 구하는 거라면 차용증 한 장이 뭐가 대수야? 설마 정4품 대장군씩이나 되면서 영수단 한 알 값도 못 갚겠어?"자존심을 건드리자 서겸은 예상대로 넘어왔다."종이와 붓을 가져와라!"차용증을 쓰고 관인을 찍는 것까지 눈앞에서 지켜본 뒤에야 시녀에게 영수단을 가져다주라 일렀다.서겸은 흡족한 얼굴로 돌아갔다.반면 시녀는 근심을 감추지 못했다."아씨,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영수단을 정말 그렇게 내주셔도 되는 겁니까?"빙긋 웃었다."영수단은 십 년이 지나면 효력이 사라지는데, 그 기한이 진작 지났어. 지금은 평범한 약환일 뿐이니 그걸로 차용증을 얻었으면 오히려 남는 장사지."차용증을 움켜쥔 채 눈빛을 가라앉혔다.혼례 날, 들뜬 마음으로 혼례복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그런데 문밖에는 혼례복을 입은 서겸이 나를 맞을 행렬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오늘은 아이의 스승을 청하러만 온 것이 아닙니다. 서겸이 저를 백령국까지 데려다주느라 급히 도성을 떠나면서 예물조차 보내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참으로 옳지 못한 일이었습니다.""이제 제가 정실이니 부군께서 첩을 들이실 때 쓸 예물도 제가 대신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난영이 손뼉을 치자 하인들이 물건을 들고 나와 아버지의 책상 위에 하나씩 내려놓았다.나무 상자 두 개 안에서는 검은 집오리 두 마리가 파닥거리고 있었다.아버지의 낯빛이 굳어졌다. 강당에는 아끼는 제자 수십 명도 앉아 있었다.문간에 선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에 그대로 얼어붙었다."정실을 맞을 때는 기러기를 예물로 보낸다 들었습니다만, 첩을 들이는 데야 그리 격식을 차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리 두 마리라도 멀리서 보면 기러기인 줄 알지 않겠습니까?"아버지는 "예기"(禮記)를 손에 든 채 우두커니 서 계셨다.낯빛이 창백하게 질리고 입술이 떨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대대로 글을 배운 집안에서 자라 겸손히 예를 지키셨다. 그런 아버지께서 언제 이토록 모욕을 당해 보셨겠는가.그때 난영이 아들 서승원을 살짝 떠밀었다."자, 승원아. 스승님께 인사드려야지."아이는 신호라도 받은 듯했다.옆에 있던 학생의 벼루를 와락 집어 들더니 아버지께 힘껏 던졌다."퉤! 이런 사람한테는 안 배워! 딸이 칠 년이나 기다려서 우리 아버지 첩이 되겠다는데, 그런 딸을 가르친 사람이 남을 가르칠 자격이나 있어?"퍽, 벼루가 아버지의 이마를 때렸다.이어 바닥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이마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아버지!"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달려가 아버지를 부축했다."서난영, 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그런데 난영은 몹시 당황한 얼굴을 했다."스승님,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아이가 말을 함부로 했습니다.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책상 모서리를 짚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저는 우리 백성들을 위해 백령국으로 시집갔습니다. 아들을 낳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