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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을 떠나 강남의 봄을 만났다

후작을 떠나 강남의 봄을 만났다

By:  설융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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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최근 무안후부에는 하루 동안 후부 전체가 고작 십 문만 쓸 수 있다는 새로운 규칙이 생겼다. 이 황당한 규칙은 부자를 혐오하는 연꽃을 따는 여인 소은영이 후부에 들어오면서 생겨났다. 후작 부인인 조서연은 고작 일 문을 더 썼다는 이유로 끌려가 채찍 스무 대를 맞았다. 짝! 채찍이 조서연의 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살이 터지는 섬뜩한 소리가 고요한 뜰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부인!" 시녀 홍주가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그만두십시오! 제발 그만두십시오! 부인께서는 몸이 약하셔서 이런 매질을 견디지 못하십니다!" 조서연은 창백한 얼굴로 뜰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입가에는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고, 몰라볼 만큼 야윈 몸에 걸친 흰옷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땅바닥을 세게 움켜쥔 손은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후부의 규칙은 누구도 어길 수 없습니다." 소은영은 소박한 옷차림으로 처마 밑에 서서 싸늘한 눈빛으로 조서연을 내려다보았다. "일 문을 더 쓰면 스무 대입니다. 후작께서 직접 허락하신 일입니다." 조서연은 용서를 빌지 않고 입술만 깨물었다. 빌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소은영이 후부에 들어온 뒤로 서정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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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장

몽롱한 시야 너머로 훤칠한 사내가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먹빛 비단 도포에 옥관으로 머리를 단정히 묶은 서정윤은 여전히 빼어난 외모와 서늘한 기품을 풍겼다.

"무슨 일이냐?"

홍주는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붙잡은 듯 달려가 그의 발치에 엎드렸다.

"후작! 부인께서는 원래 해수병을 앓고 계십니다. 오늘 약을 사느라 일 문을 더 썼다는 이유로 소은영 아가씨께서 부인을 스무 대나 때리려 하십니다! 몸도 약하신 분이 어떻게 이런 벌을 견디겠습니까?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서정윤은 피투성이가 된 조서연의 등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눈빛에는 순간 안쓰러움이 어렸다.

"은영아, 그만하면 됐다."

그러자 소은영은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후작께서 저를 후부로 데려오실 때 이곳 사람들은 모두 제 말을 따라야 한다고 분명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부인 때문에 규칙을 깨면 앞으로 누구나 똑같이 굴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부의 살림을 더는 맡지 않겠습니다!"

소은영이 돌아서려 하자 서정윤은 다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관여하지 않으마."

그는 손을 들어 소은영의 눈을 살며시 가리며 다정하게 달랬다.

"너무 잔인한 광경이니 보지 마라."

조서연은 넋을 잃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도려내지는 듯 아파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한때 나를 죽도록 사랑한다던 서정윤이 어떻게 이토록 변할 수 있었을까? 어째서 세상에서 가장 쉽게 변하는 것이 진심이란 말인가?'

고작 삼 년이었다.

삼 년 전, 강남(江南)으로 내려온 서정윤은 조서연을 처음 만났다.

그날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조서연이 고개를 들자, 미소 띤 서정윤과 눈이 마주쳤다.

"낭자, 수건을 떨어뜨리셨습니다."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녀는 나중에야 수건을 주워 준 그 도련님이 조정에서 가장 젊은 무안후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그녀를 위해 수없이 무모한 일을 벌였다.

조서연이 모란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자, 낙양(洛陽)에서 진귀한 모란 열 화분을 밤새 들여왔다. 모란만이 진정한 국색이라 할 만큼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추위를 탄다는 말에는 눈보라를 뚫고 흰 여우를 사냥해 왔다. 손수 털옷을 짓다가 바늘에 찔려 손끝이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가장 아찔했던 날에는 산적에게 납치된 그녀를 구하려 홀로 말을 달려 산채로 뛰어들어 가슴에 화살을 맞고도 끝까지 그녀를 감쌌고, 반쪽 옷자락이 피로 흠뻑 젖었다.

결국 조서연은 그토록 절절한 마음을 외면하지 못하고 혼인을 받아들였다.

서정윤은 황제에게 조서를 청해 십 리에 이르는 혼수 행렬을 꾸리고, 평생 조서연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며 성대한 혼례를 올렸다.

혼인한 뒤에도 그는 조서연을 보배처럼 아꼈다. 궁의 비빈들조차 웃으며 감탄할 정도였다.

"무안후 부인은 천하에서 가장 복된 여인일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여인이 그들이 탄 마차를 가로막았다.

그 여인은 금구슬 한 움큼을 집어 서정윤에게 내던졌다.

"저는 당신 같은 권세가들이 제일 싫습니다! 돈만 있으면 진심까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평소 살벌하고 결단력 있던 서정윤이 미소를 머금은 채 다정한 눈빛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이었다.

"후작, 저 여인은 누구입니까?"

조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정윤은 거리낌 없이 답했다.

"서연, 연꽃을 따는 여인을 만났는데 마음이 많이 가는구나. 그녀를 정실과 동등한 둘째 부인으로 삼고 싶다."

조서연의 손끝이 떨렸다.

"그럼 저는 어찌합니까? 저와 평생 서로만 바라보며 살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서정윤은 미안하면서도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연, 너를 속이고 싶지는 않다. 분명 그런 약속을 했지만 그때는 은영을 만나기 전이었다. 이제야 내가 너를 그리 사랑한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았다. 은영을 먼저 만났다면 너와 함께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서연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 버렸다.

서정윤이 말을 이었다.

"너와 혼인하려고 폐하께 조서를 청했으니 황실의 뜻으로 맺어진 혼인을 우리 마음대로 끝낼 수는 없다. 앞으로도 너는 이 후부의 안주인이지만, 그 명분을 제외한 내 모든 사랑은 은영에게 줄 것이다."

조서연은 무너졌다. 날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서정윤의 마음이 잠시 흔들렸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정윤은 소은영을 후부로 데려왔다.

소은영이 사치를 혐오하고 권세가를 미워하자, 그는 그녀를 이렇게 달랬다.

"앞으로 후부의 살림은 네게 맡기마. 원하는 대로 지내다가 마음이 흡족해지면 나와 정식으로 혼인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날부터 후부 사람들의 삶은 고통으로 변했다.

그중에서도 조서연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매달 받던 돈은 깎였고 끼니조차 배불리 먹지 못했다.

해수병이 도져도 소은영은 사치라는 이유로 약값을 내주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은 고작 일 문을 더 썼다는 이유로 사람들 앞에서 채찍질까지 당했다.

마지막 채찍이 떨어지자 조서연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자신의 처소로 옮겨진 뒤였다.

맥을 짚던 의원이 말했다.

"부인의 상처가 깊습니다. 밤낮으로 약을 드셔야 합니다."

의원이 처방전을 홍주에게 건넸다.

홍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나 필요합니까?"

"석 냥입니다."

"외상으로... 해 주실 수 있습니까?"

홍주는 끝내 목이 메었다.

의원은 후부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평소 조서연에게 받은 은혜도 있어 고개를 끄덕이려던 참이었다.

"안 된다!"

문밖에서 소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싸늘한 얼굴로 방 안에 들어섰다.

"후부가 어찌 외상을 진단 말이냐? 돈을 낼 수 없다면 약을 짓지 않으면 된다."

분노한 홍주가 쏘아붙였다.

"부인께서 지금 약을 드시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부자를 미워해도 정도가 있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굶고 병들어 의원 한번 찾지 못해야 만족하시겠습니까?"

소은영의 낯빛이 굳었다. 그녀가 반박하려는 순간, 조서연이 힘겹게 홍주의 팔을 붙잡았다.

"내 혼수가 아직 남아 있다. 그걸 쓰면..."

"안 된다!"

소은영이 단호하게 잘랐다.

"후부에 시집온 이상 당신의 혼수도 후부의 재산이다. 어찌 마음대로 쓸 수 있겠느냐?"

홍주가 온몸을 떨며 따지려 하자 소은영은 의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료비를 내지 못하는 환자가 오면 평소에는 어떻게 합니까?"

의원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성 밖에 나가 약초를 캐 와 빚을 갚게... 합니다."

소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부인께서 직접 약초를 캐 오시면 되겠습니다."

홍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부인은 중상을 입으셨습니다. 어떻게 약초를 캐러 간단 말입니까?"

소은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후작 부인이라는 이유로 규칙을 어길 수는 없다."

"무슨 소란이냐?"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정윤이 뒷짐을 진 채 문 앞에 서서 사람들을 무심히 훑어보았다.

홍주는 또다시 살길을 찾은 듯 무릎으로 기어가 그의 앞에 엎드렸다.

"후작! 부인께서 중상을 입으셨는데도 소은영 아가씨께서 직접 약초를 캐 오라 하셨습니다. 이는 부인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소은영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후작께서 오늘 저 여인을 도우신다면 저는 당장 후부를 떠나겠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서정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모두 은영의 뜻대로 하라."

조서연은 눈을 감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은 등의 채찍 자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가겠습니다."

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성 밖으로 이어진 산길은 험했다. 조서연은 병든 몸을 이끌고 절벽 가장자리에서 약초를 캤다.

가시에 긁힌 손가락은 피범벅이 되었고, 등에 난 채찍 자국이 쑤실 때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몇 시진이 흐른 뒤에야 약초를 모두 모은 그녀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후부로 돌아왔다.

소은영의 처소 앞을 지나던 조서연은 서정윤이 붓을 들고 그녀의 눈썹을 그려 주는 모습을 보았다.

다정한 눈빛과 조심스러운 손길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다루는 듯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조서연은 문득 그해 상원절 밤을 떠올렸다. 서정윤은 그때도 똑같이 그녀의 눈썹을 그려 주었다.

"서연의 눈썹은 먼 산을 닮았구나. 평생 내 손으로 그려 주마."

온 성을 뒤덮은 불꽃 아래에서 수많은 규수들이 그녀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제 그 손길도, 그 다정함도 모두 다른 여인의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쉽게 변하는 것은 역시 진심이었다.

조서연은 웃었지만 웃을수록 눈물이 차올라 시야를 흐렸다.

처소로 돌아오자 홍주는 피와 흙으로 뒤덮인 그녀를 보고 눈물을 쏟았다.

"아가씨, 이런 나날을 언제까지 견디실 생각입니까?"

조서연이 핏기 없는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 그만두련다. 그 사람과 갈라서겠다."

홍주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아가씨와 후작의 혼인은 폐하께서 하사하신 것이 아닙니까? 폐하의 허락 없이는 부부의 연을 끊을 수 없습니다!"

조서연은 창백한 얼굴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예전에 조씨 가문이 폐하를 구한 공으로 글자가 쓰이지 않은 조서 한 장을 하사받았어. 우리 왕조의 법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무엇을 적든 폐하께서 허락해 주시겠다고 하셨지."

그녀가 고개를 들자 눈빛에는 미련 없이 떠나겠다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 조서를 써서 다시는 그와 만나지 않을 것이다. 홍주야, 어서 강남으로 돌아가 조서를 가져오너라. 조서가 도착하는 즉시 우리는 이곳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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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몽롱한 시야 너머로 훤칠한 사내가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먹빛 비단 도포에 옥관으로 머리를 단정히 묶은 서정윤은 여전히 빼어난 외모와 서늘한 기품을 풍겼다."무슨 일이냐?"홍주는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붙잡은 듯 달려가 그의 발치에 엎드렸다."후작! 부인께서는 원래 해수병을 앓고 계십니다. 오늘 약을 사느라 일 문을 더 썼다는 이유로 소은영 아가씨께서 부인을 스무 대나 때리려 하십니다! 몸도 약하신 분이 어떻게 이런 벌을 견디겠습니까?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서정윤은 피투성이가 된 조서연의 등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눈빛에는 순간 안쓰러움이 어렸다."은영아, 그만하면 됐다."그러자 소은영은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후작께서 저를 후부로 데려오실 때 이곳 사람들은 모두 제 말을 따라야 한다고 분명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부인 때문에 규칙을 깨면 앞으로 누구나 똑같이 굴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부의 살림을 더는 맡지 않겠습니다!"소은영이 돌아서려 하자 서정윤은 다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알았다, 알았어. 내가 관여하지 않으마."그는 손을 들어 소은영의 눈을 살며시 가리며 다정하게 달랬다."너무 잔인한 광경이니 보지 마라."조서연은 넋을 잃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도려내지는 듯 아파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한때 나를 죽도록 사랑한다던 서정윤이 어떻게 이토록 변할 수 있었을까? 어째서 세상에서 가장 쉽게 변하는 것이 진심이란 말인가?'고작 삼 년이었다.삼 년 전, 강남(江南)으로 내려온 서정윤은 조서연을 처음 만났다.그날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조서연이 고개를 들자, 미소 띤 서정윤과 눈이 마주쳤다."낭자, 수건을 떨어뜨리셨습니다."맑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그녀는 나중에야 수건을 주워 준 그 도련님이 조정에서 가장 젊은 무안후라는 사실을 알았다.그는 그녀를 위해 수없이 무모한 일을 벌였다.조서연이 모란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자, 낙양(洛陽)에서 진귀한 모란 열 화분을 밤새 들여왔다. 모란만이 진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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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홍주가 떠난 뒤 조서연은 홀로 방에 남아 상처를 돌보았다.창밖에서는 매미가 쉴 새 없이 울어 댔다. 한여름의 열기와 고통이 한데 뒤엉켜 그녀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황후의 생일잔치가 열리는 날, 조서연은 아직 낫지도 않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치장해야 했다.그런데 후부 정문에 이르니 서정윤이 벌써 말을 끌고 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소은영은 그의 곁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서연."서정윤이 눈을 들어 담담히 말했다."후부에서 하루에 쓸 수 있는 돈이 십 문뿐이라 말도 한 필만 빌렸다. 두 사람밖에 탈 수 없으니 내가 은영을 데리고 먼저 황궁에 가마. 너는 걸어서 오너라."조서연은 떨리는 손끝으로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후부에서 황궁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반 시진은 걸렸다.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결국 나직이 답했다."알겠습니다."서정윤은 소은영을 말에 태운 뒤 자신도 올라타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멀어지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남은 조서연은 문득 삼 년 전을 떠올렸다.처음 입궁하던 날, 서정윤은 그녀가 말 타기를 힘들어할까 염려해 일부러 푹신한 가마를 마련하고 줄곧 곁을 지켰다."내 부인은 티끌만 한 설움도 겪어서는 안 된다."'그 말은 이제 다른 여인에게 하고 있겠지.'조서연이 홀로 궁으로 향하는 길에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콩알만 한 빗방울이 쏟아지더니 순식간에 온몸을 흠뻑 적셨다.초라한 몰골로 황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생일잔치가 시작된 뒤였다.환하게 불을 밝힌 연회장에는 악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술잔이 오가는 사이로 후작 부인이 앉아야 할 자리에 소은영이 버젓이 자리한 모습이 보였다."저기 서 있는 사람, 무안후 부인 아닌가?""요즘 후작이 그 연꽃 따던 여인에게 푹 빠져 있다더군. 후작 마음에는 진작 부인이 설 자리가 없어진 모양이군.""쯧쯧. 예전에 혼인하려고 사흘 밤낮을 무릎 꿇어 받아 낸 조서라던데, 지금은..."사방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귀가 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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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조서연은 벼락을 맞은 듯 굳어 버렸고,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제가 부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이토록 큰 잘못을 저지르게 했습니다."서정윤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고모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새 생일 예물을 마련해 다시 올리겠습니다."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서연의 가슴에 깊이 박혀, 입을 열고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조씨."황후가 실망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너는 경성에서도 현숙하고 덕이 높기로 이름난 여인이었다. 본궁도 늘 너를 아꼈거늘, 이제 와 이런 큰 잘못을 저지르다니 참으로 실망스럽구나. 후작 부인이라는 점을 참작해 목숨은 살려 주겠다. 하지만 벌은 피할 수 없다. 여봐라! 뺨을 백 대 쳐라!""마마, 살펴 주십시오!"조서연은 무릎으로 두어 걸음 앞으로 기어갔다."신첩은 억울합니다!"그러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상궁 둘이 달려들어 억센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짝!곧바로 첫 번째 따귀가 날아오자 얼굴 한쪽의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입안에는 비릿한 맛이 번졌으며, 이내 입가를 타고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짝!두 번째 따귀는 더욱 매서웠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귀가 울렸으며, 뺨은 달군 쇠를 댄 듯 화끈거렸다....서정윤은 곁에 선 채 조서연이 바닥에 눌려 연달아 뺨을 맞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입가에서 흐른 피가 옷깃을 붉게 물들였다.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더니,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려 했다."후작..."소은영이 갑자기 그의 소매를 붙들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저, 무섭습니다. 진작 이런 예물을 올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서정윤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이미 평온을 되찾은 뒤였다.그는 소은영의 눈을 가리고 부드럽게 말했다."네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내가 지켜 줄 테니 두려워하지 마라."백 대의 형벌이 끝났을 때 조서연은 이미 정신이 흐릿했다.쫓겨나다시피 후부로 돌아온 조서연은 사당에 갇혀 자신의 피로 경문을 베껴 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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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차가운 호숫물이 조서연의 온몸을 휘감고 몸이 깊이 가라앉자 시야도 점점 흐려졌다.의식을 잃기 직전, 그녀의 눈앞에 그해 강남에서 눈보다 흰 옷을 입은 서정윤이 말을 달려와 손을 내밀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서연, 나와 함께 경성으로 돌아가겠느냐? 평생 너를 지켜 주마.""부인! 부인!"조서연은 눈을 번쩍 뜨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눈시울이 붉어진 어린 시녀가 침상 곁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드디어 깨어나셨습니다!"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침소였다. 하지만 방 안에는 그 어린 시녀 말고 아무도 없었다.호숫물에 잠겼을 때의 숨 막히던 감각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고, 자신을 두고 돌아서던 서정윤의 뒷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이 미어졌다."누가... 나를 구했느냐?""주방의 하인 유씨가 부인께서 물에 빠진 것을 보고 사람들을 불러 구해 냈습니다."조서연은 허탈하게 웃었다.명색이 후작 부인인데 물에 빠진 자신을 구한 사람은 하인이었고, 정작 부군은 지금 다른 여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그 뒤로 조서연은 계속 침상에 누워 요양했다.창밖의 매미 울음 사이로 하인들의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후작께서 어제 소은영 아가씨의 약을 손수 달이시다 손을 데셨는데도 개의치 않으셨대.""오늘 아침에는 소은영 아가씨께서 성 남쪽의 계화떡을 먹고 싶다고 하시니 날이 밝기도 전에 말을 달려 사 오셨다더군.""소은영 아가씨께서 혹시라도 다칠까 봐 밤새 금실로 짠 연갑까지 만들게 하셨대. 정말 끔찍이 아끼시나 봐."그 말을 들은 조서연은 가슴이 아팠다.그녀가 처음 후부에 시집와 풍한을 앓았을 때 서정윤도 이처럼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약까지 직접 맛본 뒤에야 먹여 주었다."서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도 살지 않겠다."그때는 그렇게 말했었지만 지금은 조서연이 익사할 뻔했는데도 그는 얼굴 한번 비치지 않았다.사흘 뒤, 조서연이 겨우 침상에서 내려와 걸을 수 있게 되자 소은영이 갑자기 들이닥쳤다."부인, 오늘은 후부에서 물건을 사는 날입니다. 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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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조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소은영을 바라보았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사람을 구하려면 그 정도 희생은 할 수 있지 않습니까?"소은영은 오히려 당당했다."저 할머니가 얼마나 불쌍합니까!"억지스러운 말에 화가 난 조서연이 돌아서려는 순간, 갑자기 뒷목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조서연은 웃고 있는 소은영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뒤 의식을 잃었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지독한 분 냄새가 코를 찔러 연신 기침이 나왔다.조서연은 붉은 휘장이 드리워진 침상에 매미 날개처럼 얇은 옷 한 벌만 걸친 채 누워 있어 맨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어머, 깨어났네?"짙게 화장한 포주가 턱을 붙잡고 그녀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이미 혼인한 여인이지만 얼굴은 참으로 곱구나."포주가 고개를 돌려 밖을 향해 소리쳤다."얘들아, 오늘 밤부터 손님을 받아야 하니 이 아가씨를 단장시켜라!""무엄하다!"조서연은 몸부림치며 일어났다."나는 무안후의 부인이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려는 것이냐!"포주는 손을 휘둘러 조서연의 뺨을 후려쳤다."네가 무안후 부인이라면 나는 황후마마다! 이곳에 팔려 온 이상 손님을 받아야 하니, 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없다!"그녀가 문밖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들어오거라! 말을 잘 들을 때까지 두들겨 패거라!"건장한 사내 대여섯 명이 몽둥이를 들고 뛰어들어 다짜고짜 조서연을 내리쳤다.몽둥이가 몸에 닿을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바닥에 웅크린 조서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피를 토했다."좋게 말할 때 들었으면 매를 맞을 일도 없었을 텐데!"포주가 비웃었다."다시 묻겠다. 손님을 받을 테냐, 말 테냐?"조서연은 피 섞인 침을 뱉고 이를 악물었다."나를 건드리면 후부에서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계속 쳐라!"몽둥이가 다시 떨어지려던 순간, 굳게 닫힌 문이 걷어차였다.역광 속에 낯익은 사람이 서서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멈추거라!"조서연이 힘겹게 고개를 들자 흐릿한 시야 너머로 살기가 가득한 채 문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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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조서연은 며칠째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홍주마저 떠나자 이야기를 나눌 사람조차 없어진 조서연은 날마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황실 사냥 대회가 열리는 날이 되어서야 조서연은 채 낫지 않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치장했다.사냥터에는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고,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황족과 귀족들로 북적였다.먹빛 기마복 차림의 서정윤은 소은영이 말에 오르도록 조심스럽게 부축하고 있었다."후작, 무섭습니다."소은영은 애교를 부리며 서정윤의 품에 파고들었다."내가 가르쳐 줄 테니 두려워하지 말거라."조서연은 말없이 자기 말에 올라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서정윤은 소은영의 손을 잡고 활시위를 당기는 법을 가르치며 자세를 하나하나 바로잡아 주었는데, 예전에 조서연에게 해 주던 것과 똑같았다."부인께서도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한 귀족 아가씨가 활과 화살을 건넸다.조서연은 활을 받아 멀리 있는 사슴 한 마리를 겨누고 화살을 날렸다."명중했습니다!"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조서연이 막 사슴에게 다가가려는데 소은영이 환호했다."참으로 아름다운 사슴입니다. 무척 마음에 듭니다!"서정윤이 조서연을 돌아보았다."서연, 저 사슴을 은영에게 양보하면 안 되겠느냐?"조서연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지만, 그녀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마음에서 서정윤을 완전히 지우고 다시는 그 때문에 아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사냥터에 처음 온 소은영은 모든 것을 신기해하며 가는 곳마다 걸음을 멈췄고, 그 탓에 세 사람은 금세 대열에서 멀어졌다.돌아갈 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고, 세 사람이 막 길을 나서려는 순간 날씨가 갑자기 변했다.울창한 숲에서 굶주린 늑대 수십 마리가 갑자기 튀어나왔고, 녹색 눈은 땅거미 속에서 섬뜩하게 번뜩였다.서정윤은 재빨리 화살을 메겨 시위를 당겼다. 허공을 가르는 화살이 잇달아 늑대 몇 마리를 쓰러뜨렸다.하지만 화살은 금세 동이 났다.소은영은 순식간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모두 제 잘못입니다. 돈을 아끼려 화살을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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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조서연의 몸이 굳었다.조서연은 잠시 침묵하다 머리에 꽂은 옥비녀를 빼 의원에게 내밀었다."의원님, 이것을 진료비 대신 받아 주십시오."후부로 돌아가던 길, 소은영의 처소 앞에서는 서정윤이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을 대하듯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에게 약을 한 모금씩 먹이고 있었다."돌아왔느냐?"서정윤은 고개를 들어 조서연을 한번 흘끗 보더니 다시 소은영을 달랬다."한 모금만 더 마시자. 응?"조서연은 대답하지 않고 곧장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그런데 그날 밤, 뜻밖에도 불미스러운 소문이 순식간에 후부 전체로 퍼졌다."부인을 발견했을 때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더군.""그러게. 몸에 지니던 비녀까지 낯선 의원에게 주었다지 않느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아니겠느냐.""쯧쯧, 후부의 명예를 더럽혔구나."소문은 갈수록 부풀어 마침내 경성 전체에 퍼졌다.서정윤이 집사에게 헛소문을 잠재우라 명하려는데 소은영이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후작, 소문을 잠재우려면 은자가 너무 많이 듭니다. 그저 남들의 수군거림일 뿐인데, 몇 마디 듣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서정윤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끝내 들었던 손을 내렸다.그가 조서연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서연, 나만 너를 믿으면 충분하지 않느냐."조서연은 그 말을 듣고 처량하게 웃었다. 이제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다행히 그날 밤, 홍주가 마침내 조서를 들고 먼 길을 달려 돌아왔다.조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황금빛 비단을 펼친 뒤 붓에 먹을 묻혀 한 획씩 글자를 써 내려갔다. 글자 하나를 쓸 때마다 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신첩 조서연은 무안후 서정윤과 부부의 연을 끊고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기를 청합니다.'조서연은 조서를 홍주에게 건네며 그날 밤 곧장 궁으로 가져가 황제의 어새를 받아 달라고 했다.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홍주의 모습을 바라보던 조서연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그날 밤 수많은 기억이 떠올랐다.눈밭에 무릎을 꿇고 혼인을 청하던 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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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연회장이 발칵 뒤집혔다.소은영은 입술을 깨물고 조서연을 똑바로 쏘아보았다."후작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마음은 모두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실과 동등한 둘째 부인이 된다 해도 부인께서는 본래 귀한 신분이시지 않습니까? 저는 시골에서 자란 평민에 불과한데, 후부에 들어간 뒤 부인께서 저를 괴롭히시면 어찌합니까?""내가 있는데 감히 너를 괴롭히겠느냐.""그것은 모르는 일입니다."소은영이 조서연을 흘끗 보았다."한 가지 조건만 들어주신다면...""무슨 조건이냐?"서정윤이 다그쳐 물었다."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가 직접 부인께 법도를 가르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부인의 몸에 제 손으로 은침 구백구십구 개를 꽂도록 허락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부인도 다시는 제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저를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연회장이 다시 술렁였고, 손님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본 채 말을 잃었다.조서연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잠시 침묵하던 서정윤은 천천히 조서연 앞으로 걸어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서연, 이번 한 번만 참아라. 비록..."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내가 은영을 더 사랑하지만, 후부에 들어온 뒤에는 두 사람을 똑같이 대하마.""어찌 똑같이 대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조서연은 웃음을 터뜨렸고, 웃을수록 눈물이 쏟아졌다."후작, 그 여인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저를 이렇게 짓밟아야겠습니까?""서연, 이번 한 번만 참으라고 했잖느냐."서정윤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내저었다."여봐라, 부인을 붙잡거라!"건장한 하인들이 곧장 달려들어 조서연을 붉은 나무 의자에 눌러 앉힌 뒤 꼼짝 못 하게 붙잡았다.소은영이 손에 든 은침은 햇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였다.첫 번째 은침이 조서연의 팔에 박히자 그녀는 고통에 온몸을 떨며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악!"서정윤은 고개를 돌리고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소매를 움켜쥐었지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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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조서의 내용을 들은 서정윤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황제가 직접 두 사람의 혼인 관계를 끝내라고 명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반면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조서연은 마침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듯 힘겹게 몸을 일으켜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절했다."성은이 망극합니다. 신첩, 삼가 조서를 받들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서를 받아 들고 몸을 일으켜 서정윤을 바라보았다.금슬 좋은 부부에서 낯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까지, 함께한 삼 년의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고작 삼 년이었지만 한평생처럼 아득했다.삼 년 전의 조서연은 자신과 서정윤에게 이런 날이 오리라고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삼 년이 지난 지금은...'조서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조서를 서정윤 앞에 남겨 두었다."후작, 오늘부터 우리는 다시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소은영과 백년해로하시기 바랍니다."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홍주만 데리고 후부를 떠났다.조서를 모두 읽은 총관 내시는 후부 곳곳에 걸린 화려한 장식을 보고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후작께서 조씨와 갈라서신 것은 새로 혼인하기 위해서였던 모양입니다. 소씨를 향한 후작의 마음이 지극하다는 소문은 진작부터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소인이 후작과 장차 후작 부인이 되실 분께 미리 축하드리겠습니다."그 말을 남기고 일행이 궁으로 돌아가려 했다.그제야 완전히 정신을 차린 서정윤이 총관 내시의 소매를 붙잡고 품에서 은자 한 덩이를 꺼냈다."총관,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아닙니까? 나는 은영을 정실과 동등한 둘째 부인으로 삼겠다고 했을 뿐, 서연과 갈라설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서의 내용이 잘못 전해진 것은 아닙니까?"내시는 은자에 시선을 두었다. 늘 있는 일이기에 손을 뻗어 받으려던 순간, 소은영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후작, 후부에서는 하루에 십 문만 쓰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소한 일에 어찌 그리 큰돈을 쓰십니까?"그녀가 은자 덩이를 낚아챘다.이런 일을 처음 겪은 내시의 얼굴이 굳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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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조서연과 갈라선 이튿날, 후부에서는 곧바로 혼례 준비를 시작해 곳곳에 붉은 등과 비단을 내걸었다. 마치 두 사람의 혼인을 온 세상에 알리려는 듯했다.후부의 씀씀이도 예전과는 딴판이었다.소은영이 장식품 가운데 가장 비싼 것만 고르는 모습을 보던 서정윤이 장난스럽게 물었다."후부에서는 하루에 십 문만 쓰기로 하지 않았느냐? 이제 그 규칙은 없어진 것이냐?"소은영은 애교를 부리며 웃었다."그건 평소에나 지킬 규칙입니다. 이번에는 저희 혼례이지 않습니까? 설마 후작께서 제게 십 문짜리 예물만 주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서정윤은 당연히 돈이 아깝지 않았다. 더구나 혼례를 초라하게 치르면 체면도 서지 않을 것이다.그가 허락하려던 순간,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두 분의 혼례가 조서연 부인의 목숨보다 더 중요합니까?"시녀가 분노에 찬 눈으로 서정윤을 바라보다가 털썩 무릎을 꿇고 맑고 또렷한 목소리로 외쳤다."후작, 예전에 조서연 부인께서 병으로 몸져누우셨을 때 치료비는 석 냥이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소은영 아가씨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혼례에 쓰시는 돈은 석 냥이 아니라 삼백 냥, 삼천 냥도 넘습니다. 후작께는 조서연 부인의 목숨보다 소은영 아가씨와 성대한 혼례를 치르는 체면이 더 중요합니까?"소은영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서정윤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문득 조서연이 오랫동안 해수병을 앓아 매달 약을 지어 먹어야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후부 전체가 한 달 동안 하루에 십 문밖에 쓰지 못했는데, 서연은 그동안 어떻게 약을 지어 먹은 것이지?'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녀의 병세를 살피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예전에는 직접 약을 달여 눈앞에서 모두 마시는 것을 확인해야 마음을 놓았지만, 이제는 그때의 일이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았다.서정윤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은영과의 혼례이니 당연히 모든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준비해야 한다. 시녀 주제에 말대꾸는 제법 잘하는구나."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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