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삼 년 전, 맑고 고결한 세자 서지우가 찻잎을 따던 여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는 소문이 온 경성에 퍼졌다. 삼 년 후, 경성에는 또 하나의 소문이 퍼졌다. 세자빈을 목숨보다 아끼던 세자 서지우가 연꽃을 따던 여인을 평처(平妻)로 들인다는 소식이었다. 채연은 윤안화의 허리를 감싼 서지우의 손을 바라보았다. "서방님, 이 혼인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서지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채연, 안화는 연약한 여인인 데다 기억까지 잃었다. 지금은 봄이라 연꽃도 없어 살아갈 방도조차 없다. 너도 한때 찻잎을 따며 생계를 이어 가지 않았느냐? 어찌 남의 처지를 헤아려 주지 못하느냐?" 채연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끝없는 서글픔이 배어 있었다. "서방님께서 그저 안화를 돕고 싶은 것뿐이라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지요. 집을 마련해 주거나, 돈을 내어주거나, 어울리는 사내를 찾아주..." "어울리는 사내"라는 말이 나오자, 서지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채연! 네게 알리는 것이지, 네 뜻을 묻는 게 아니다. 사흘 뒤 안화를 데려올 것이다!" "그렇다면... 서방님과 저의 인연도 여기서 끝인 듯싶습니다."
View More얼마 지나지 않아 경성의 한 세자가 조정에 청하여 비적 토벌에 나섰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성을 함락시키고 적진을 무너뜨릴 때마다 목숨을 내던진 듯 싸웠다고 했다.그가 경성 주변에 수십 년간 뿌리내린 비적 소굴을 소탕하는 데 단 석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친히 그를 충용후(忠勇侯)로 봉했다.그 후 본래라면 경성 사방으로 나아가 계속 비적을 토벌해야 할 충용후는 뜻밖에도 가장 먼저 친위대를 이끌고 요주로 향했다. 요주에서 가장 뿌리 깊은 비적 소굴을 없애고, 그곳에 거점을 세워 백성들이 비적의 피해를 보지 않도록 지켰다.일 년 후, 채연은 찻집을 열었고, 백현진은 그 옆에 의원을 열었다.붉은 천을 걷어 내는 순간, 채연은 멀리서 익숙한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것을 보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서지우가 온 것이었다.'그녀는 백현진과 함께 웃으며 찾아와 준 손님들을 맞이했고, 다시는 바깥을 바라보지 않았다.백현진은 웃으며 채연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같은 개업인데 어찌하여 네 찻집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내 의원은 파리만 날리는 것이냐?"채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찔렀다."거긴 의원입니다! 의원이 문전성시를 이루길 바라십니까? 그건 오히려 큰일이지요!"백현진은 웃으며 두 걸음 물러났다."네. 주인장께서 참으로 현명하십니다!"채연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받아쳤다."제가 당연히 현명하지요. 당신이 제 얼굴로 실험한 것까지 알고 있으니까요!"그러면서 그녀는 그에게 몇 대 쥐어박으려 했다.백현진은 그 광경을 보자 목을 움츠리고 달아났다."그래도 내가 결국 고쳐 주지 않았느냐? 게다가 내가 익숙하다고 한 적도 없잖니?"서지우는 찻집 안에서 웃고 떠들며 장난치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문득 자신과 채연이 함께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녀는 늘 세자빈이라는 명분에 짓눌려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이 아무리 아껴 주어도 그녀는 한 번도 이렇게 거리낌없이 자신을 대하지 못했다.서지우의 눈가가 시큰했다.그가 없을 때야 그녀
"처음 제가 당신에게 시집간 것은 확실히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언젠가 사라지는 법입니다. 당신이 윤안화를 데려서 돌아오고, 윤안화가 녹차떡을 먹는 일이 우리 어머니의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듯 행동했을 때, 어머니가 저에게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알면서도 윤안화를 위해 어머니에게 저승 혼례를 억지로 치렀을 때, 제가 목이 터질 만큼 애원했지만, 돌아온 것은 뺨뿐이었을 때,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당신과 당신의 새 여인을 위해 피를 내어 경문을 베껴야 했을 때...""그런데도 제가 품었던 그 허무한 감정이 아직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맞습니다. 당신은 저를 두 번 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당신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제 목숨을 가져가셔도 됩니다. 어차피 세자이시고, 당신의 권세 앞에서 저는 한낱 미물일 뿐입니다.""제게는 확실히 맞설 힘이 없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언제든 스스로 끊어 버릴 수 있는 이 목숨 하나뿐입니다.""서지우, 우리 사이에는 제 어머니의 목숨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더는 미래도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미 오래전에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그녀의 목소리는 바람처럼 가벼웠고 슬픔도 분노도 없었다. 마치 오늘 아침 찹쌀떡을 먹었다는 말하는 것처럼 담담했다.서지우의 온몸이 떨렸다. 그는 채연이 자신에게 남긴 그 혈서를 떠올렸다."화리조차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이제는 사별로 끝내겠습니다.""이제는 사별로 끝내겠습니다!"'그렇다. 그토록 단호한 사람이 어찌 다시 돌아오겠는가?'정말 마음이 완전히 죽어 버린 것이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제 그의 자리는 없었다. 오직 그만을 위해 뛰던 그 마음을, 그가 제 손으로 부숴 버린 것이다.채연은 말을 마치고 약그릇을 내려놓은 뒤 문밖으로 나갔다. 백현진은 줄곧 문밖에 앉아 있었다.그는 눈앞의 다원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녀는 그의 곁
"그럼... 나는 어떠하냐?"백현진은 조심스럽게 면사 너머로 생각에 잠긴 여인을 바라보았다.채연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그가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나는 네 마음속에서 아무 의미 없는 과객이 되고 싶지 않다."백현진은 품속에서 나무 비녀 하나를 꺼냈다. 직접 조각한 것이고, 위에 새겨진 연꽃은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했다."채연, 나는 너를 좋아한다.""스승님...""그리 빨리 답하지 않아도 된다. 나도 알고 있다.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다만... 언젠가 그런 마음이 생긴다면, 그때는 나를 먼저 떠올려 주거라."말을 마친 그는 나무 비녀를 그녀의 손에 넣었다."생일 축하한다."채연은 나무 비녀를 손에 쥔 채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지금의 삶은 좋았다. 그녀도 이 삶을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 누구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그녀가 고개를 들자, 멀리서 수많은 사람이 보석과 옥기를 줄줄이 다원 안으로 들이는 모습이 보였다.채연은 황급히 달려가 문 앞을 막고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녀는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듯한 서지우를 고집스럽게 바라보았다.그는 마치 더는 자기 몸을 지탱하지 못할 듯했다."채연, 생일 축하한다.""채연, 윤안화는 곧 죽게 될 것이다. 그년이 너에게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나도 안다. 그리고 윤안화는 마땅한 벌을 받았다. 지금의 내가 너에게 용서를 구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반드시 노력해서 삼 년 전처럼 너에게 잘해 주겠다.""채연, 네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다는 걸 안다. 그렇지 않다면 너도 굳이..."채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서지우, 더 이상 혼자서 착각하지 마십시오. 계속 저를 몰아붙인다면 저는 이곳을 떠날 것입니다. 제가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는 걸 아시잖습니까?"서지우의 몸이 휘청였다. 그녀 손에 있는 나무 비녀를 본 그의 눈에는 억눌린 감정이 스쳤다. 다른 사내가 그녀에게
채연은 다원을 가꾸고 나서 매일 백현진을 따라다니며 진료를 나갔다. 요주에는 이미 두 사람을 아는 이들이 많았지만, 채연의 얼굴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사람들은 모두 그를 공손히 "의원님"이라 부르고, 그녀를 "낭자"라고 불렀다.서지우는 찻집에 앉아 분주히 움직이는 채연을 줄곧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 뒤의 연못을 스쳐 지나갔다. 한창 여름이라 연꽃은 만개했고, 연방은 푸르게 익어 있었다.문득 채연이 예전에 연못에 숨어 연밥을 먹는 것을 무척 좋아했던 일이 떠올랐다.그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작은 배 한 척이 있었다.서지우가 배에 올라서자,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물속에 빠졌다.그는 수면에서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지만, 채연은 그를 보지 못한 것처럼 태연히 멀리 있는 배에 올라 연못 안으로 들어갔다.서지우는 초라한 모습으로 겨우 기슭에 올라왔다. 그때 면사를 쓴 채연이 배를 물가에 대고, 연못 주인장에게 동전 몇 닢을 건넨 뒤 기쁜 얼굴로 백현진에게 달려가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그녀의 품에는 연꽃과 연잎, 연밥이 가득 있었다. 맑고 청아한 그녀의 목소리는 의혹하고 흔들리던 서지우의 마음을 꿰뚫었다."드셔 보십시오. 방금 딴 연밥이라 가장 달고 향긋합니다. 이 가장 알찬 것은 스승님께 드리겠습니다."그 장면은 어딘가 익숙했다.그 순간, 그는 확신했다.'저 여인은 분명 나의 채연이었다!'"채연!"그는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며 물었다."어찌... 나를 모르는 척하는 것이냐?"백현진은 단숨에 그를 밀어냈다."이미 사람을 잘못 보셨다고 했거늘 어찌 이리 계속 얽히려 하십니까?"평소의 차가운 모습을 잃은 서지우의 눈에는 경고의 뜻이 가득했다. 그는 백현진을 거칠게 밀어냈다."꺼지거라! 이것은 나와 내 부인 사이의 일이다. 남인 너랑 무슨 상관이냐?"채연은 이대로 계속된다면 자신과 스승에게 폐만 끼칠 뿐이고, 아무런 이득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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