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폴이 나타나 나를 두들겨 패 준 덕분이지.""널 찾고도 바로 오지 못한 건..."그가 바짓단을 걷어 전자감독 장치를 드러냈다.체념한 듯 말했다."가장 유명한 변호사를 선임해서 아주 오랫동안 법정 싸움을 벌였어.""그래서 형 집행을 일 년 유예받을 수 있었고.""이렇게 널 만나러 올 기회도 얻었어.""내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해도 네가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그래도 한 번은 널 보고 싶었어.""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고.""미안해. 전부 내가 잘못했어.""사랑해, 보민아. 내 마음을 더 일찍 알아차렸어야 했는데.""내가 사랑한 사람은 너야.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신디, 빨리 와!"앞에서 팀원이 나를 불렀다.서지훈의 말은 끝맺지 못한 채 멈췄다.그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입가에 옅은 웃음을 머금고 줄곧 나를 바라봤다.내 얼굴을 머릿속 깊이 새겨 넣으려는 것처럼.나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말 다 하셨어요? 전 이제 가 볼게요."서지훈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길을 비켜 주었다.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보민아."나는 걸음을 잠시 멈췄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그의 목소리는 애원하듯 떨리고 있었다."가능하다면 가끔 돌아와서 나를 봐 주면 안 될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대로 도보 여행팀 사이로 들어갔다.뒤편 개울물 소리 사이로 남자의 흐느낌이 희미하게 들렸다.팀원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저 동양인 남자는 누구야? 진짜 잘생겼네."나는 담담히 대답했다."예전에 알던 사람이야."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등산 스틱에 몸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고개를 들자 익숙한 두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폴과 윤서영이 내게 달려왔다.두 사람은 생일 케이크를 들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팀원들도 함께 노래했다.모두가 내 주위를 둘러싸고 큰 소리로 축하했다."생일 축하해!"내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웃
2년 뒤, 나는 미국의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국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전 서원그룹 대표이사 서지훈은 성폭행 교사 및 고의 살인 혐의로 기소 당국에 기소됐습니다. 2년간의 재판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형 집행은 1년간 유예되고 정치적 권리는 종신 박탈됐습니다.]그 소식에 손에 든 커피잔이 살짝 흔들렸다.하지만 곧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등 뒤에서 폴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누나, 또 물건을 두고 갔어요."그가 내 가방을 건넸다."정말 같이 안 가도 돼요?"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우리 도보 여행팀은 전부 여자야. 그래도 따라오고 싶어?"폴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그는 원래 여자들이 떠들썩하게 몰려 있는 자리를 가장 귀찮아했다.온화하고 조용한 내 곁에서는 늘 편안해 보였지만, 시끄러운 여자들 틈에서는 늘 질린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지 거듭 당부했다."힘들거나 무슨 일 생기면 꼭 전화해요. 바로 데리러 갈게요."말을 하고도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 얼굴이었다."그냥 차로 뒤에서 따라가며 지켜 줄까요?"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정말 괜찮아. 그 코스는 아주 안전하고 벌써 다섯 번이나 가 봤어."그제야 폴은 더 말하지 않았다.짧게 깎은 머리를 쓸어 만졌다.한참 망설이다 손목시계 하나를 내밀었다."길에서 봤는데, 누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나는 웃으며 받아 손목에 정성껏 찼다.시계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흉터를 꼭 가려 주었다."고마워. 정말 예뻐! 계속 차고 다닐게."폴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마음에 들면 됐어요."그러고는 내 짐을 들어 셔틀버스에 실어 주었다.함께 가는 친구들이 웃으며 놀렸다."신디, 남자 친구야?"폴은 얼굴이 붉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웃으며 바로잡았다."내 남동생이야."친구 하나가 폴의 푸른 눈을 가리키며 또 웃었다."거짓말. 딱 봐도 혼혈이잖아."그 말에 모두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폴만 웃지 않았다.이
"내보내 줘! 제발 내보내 줘! 여기 있기 싫어!"문이 굳게 닫혔다.서지훈은 옆방으로 들어갔다.임범준의 급소를 발로 걷어찼다.급히 만들어 온 DNA 친자 확인 결과서를 훑어봤다.다시 한번 차가운 헛웃음이 흘렀다."감히 둘이 짜고 나를 속여?"임범준은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대표님, 믿든 말든 나도 속았어요."서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몸을 돌려 나가며 한마디씩 또박또박 뱉었다."네 아이 데리고 꺼져."임범준이 뒤에서 물었다."그럼 저 여자는요?"서지훈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흘렀다."보민이한테 사죄하러 저승으로 내려가야지."서지훈은 그대로 문밖에 앉았다.방 안에서는 정나연의 욕설과 비명이 들려왔다."건드리지 마! 아악, 나한테 손대지 마!""서지훈, 내가 잘못했어! 제발 살려 줘!""누가 좀 살려 줘. 제발!"서지훈은 의자에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품에는 유골함이 안겨 있었다.손끝으로 몇 번이고 유골함을 쓸어내렸다."보민아, 네 복수는 해 줬어. 듣고 있어?""정나연이 낳은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었어."말을 잇던 그가 갑자기 낮게 웃었다."나는 그 여자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 때문에 우리 아이를 내 손으로 죽였어.""보민아, 내가 이렇게까지 크게 잘못했어.""이제는 나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지?"그는 미친 사람처럼 허공을 향해 끝없이 말을 늘어놓았다.뒤에는 보디가드들이 한 줄로 서 있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방 안이 완전히 조용해진 뒤에야 남자들이 무리 지어 밖으로 나왔다.서지훈이 갑자기 권총을 꺼내 들었다.남자들을 모조리 쏴 죽였다.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차갑게 웃었다."내 여자에게 손댄 놈은 다 죽어야 해."주변 사람들은 그가 말한 여자가 어느 쪽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서지훈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방 안으로 들어갔다.처참한 몰골로 숨만 겨우 붙어 있는 정나연을 내려다봤다.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
서지훈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휴대전화에 남은 메일을 눈앞에 내밀었다.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목소리였지만 뼛속까지 얼어붙는 냉기가 배어 있었다."이 메일, 네가 보낸 거지?"정나연은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분명 지웠는데, 어떻게..."서지훈은 헛웃음을 흘렸다.그러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이토록 허술한 속임수 하나 때문에 자기 손으로 아내를 막다른 곳까지 몰아붙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가 갑자기 정나연의 목을 움켜쥐었다."왜 그랬어? 보민이는 네 가장 친한 친구였잖아. 왜 죽음으로 몰아넣었어?""보민이는 아무 잘못도 없어. 바람피우고 배신한 건 우리야. 우리가 잘못했다고!""너는 죽어 마땅해. 널 죽이고 보민이한테 사죄할 거야!"목이 졸린 정나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곧 숨이 넘어갈 듯했다.임범준이 힘껏 서지훈을 떼어 냈다.정나연을 제 뒤로 감쌌다.서지훈이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을 줄은 몰랐다.임범준도 그제야 겁을 먹었다."대표님, 사람을 죽이면 범죄예요."정신을 되찾은 서지훈이 갑자기 입꼬리를 비틀었다."네 말이 맞아.""너희를 쉽게 죽게 둘 수는 없지. 보민이가 겪은 고통을 한 치도 빠짐없이 전부 되돌려 주겠어!"정나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서지훈을 바라봤다.체면도 잊은 채 악을 썼다."서지훈, 너 미쳤어!""우리가 몇 년을 함께했는데? 감히 나한테 이래?""강보민은 이미 죽었어. 이제 와서 누구 보라고 사랑꾼 행세야?""나랑 잘 때는 강보민 생각 따위 하지도 않았잖아.""강보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나 하나뿐인 줄 알아? 진짜 죽인 건 바로 너야, 서지훈.""강보민이랑 사귀면서도 나와 끊지 못했잖아. 그 여자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준 건 너야.""나는 그저 마지막으로 등을 떠밀어 완전히 마음을 접게 했을 뿐이야.""누가 그렇게 멍청하게 죽을 줄 알았겠어."말을 마친 그녀가 갑자기 웃었다."하긴, 강보민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대학 때부터 멍청했으니까.""유통기한
그제야 깨달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 숨 쉬던 사람이 이제는 작은 유골함 하나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순간 서지훈은 울음에 목이 메었다."미안해. 정말 미안해!"그러나 이제 그의 말에 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별빛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한밤중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내밀 사람도 다시는 없었다.그는 위장을 휘감는 통증을 그대로 견뎠다.일부러 자신을 벌주려는 사람처럼.진통제가 침대 옆 협탁 위에 있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품속의 유골함이 다음 순간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그때 현관문 잠금장치가 돌아갔다.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대표님, 나연 씨가 찾아왔습니다."빛을 잃은 서지훈의 눈동자가 그제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가 쉰 목소리로 추궁했다."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비서는 조심스럽게 답했다."대, 대표님께서 저희에게 보내신 메일 때문입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서지훈이 벌떡 일어섰다.눈빛에 살기가 번뜩였다."내가 언제 그런 메일을 보냈어?"비서는 당황한 나머지 차마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고개를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사, 사모님을 그 방에 데려가시기 직전입니다."서지훈은 휴대전화를 꺼내 메일함을 열었다.실제로 발송된 메일 한 통이 있었다.내용은 짧은 두 마디뿐이었다.[연기 말고 진짜로 해. 현장 생중계해.]휴대전화를 쥔 손이 떨렸다. 그는 그 메일을 보낸 적도, 그런 명령을 내린 적도 없었다.서지훈은 시선을 내리깔고 무언가를 곰곰이 짚어 나갔다.잠시 뒤 고개를 번쩍 들었다.유골함을 조심히 장 안에 넣고 문을 잠갔다.그러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그 무렵 줄곧 곁에 있었던 사람은 정나연뿐이었다.그의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도 정나연뿐이었다.그의 휴대전화로 그 메일을 보낼 수 있었던 사람은 정나연밖에 없었다.서지훈은 분노를 안고 정나연의 병실로 향했다.그러나 문밖에서 정나연과 한 남자의 대화가 들려왔다."서지훈한테 아이가 네
서지훈이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례가 시작된 뒤였다.흐느낌이 가득한 가운데 고개를 든 그는 영정을 보았다.무심코 눈을 비볐다.자신이 잘못 본 줄 알았다.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더는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서지훈은 눈앞의 광경을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봤다.그가 중얼거렸다."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죽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매니저 윤서영은 눈시울을 붉힌 채 증오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여긴 왜 온 거예요?""나가요. 당장 나가라고요!""언니는 당신 보고 싶어 하지 않아요. 어서 나가요!"서지훈은 아직도 강보민의 사망 소식이 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화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한 줄기 희망을 붙잡은 눈으로 윤서영을 바라봤다."강보민 안 죽었지? 어디 숨겨 둔 거야?""당장 나오라고 해. 연기는 이제 그만하라고.""영상은 전부 지우게 했어. 나연이한테 한 짓도 더는 따지지 않을 테니까.""돌아오라고 해."뻔뻔하게 할 말을 늘어놓는 모습에 윤서영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입 다물어요!""언니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당신이 언니를 죽여 놓고 죄까지 뒤집어씌웠잖아요!""정말 역겨운 인간이네요.""언니는 이미 떠나기로 했어요. 당신이 정나연 그년과 잘되라고 다 포기했는데 왜 끝까지 언니한테 이런 짓을 한 거예요?"서지훈은 또다시 멍해져 중얼거렸다."이미 떠나기로 했구나."그러더니 다시 되뇌었다."강보민 어디 있어? 나 만나러 나오라고 해."윤서영은 한가운데 놓인 유골함을 가리켰다.그러고는 사망 진단서를 서지훈의 가슴팍에 내리쳤다.목소리를 높였다."죽었어요. 언니는 이미 죽었다고요! 똑똑히 들어요. 바로 저기 있잖아요!"윤서영이 경비원들을 향해 소리쳤다."저 사람 끌어내요."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렸다."윤 매니저님, 그만하세요. 보민 씨 남편이기도 하고 서원그룹 대표이사인데..."윤서영이 큰 소리로 말을 잘랐다."저 사람이 누구든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