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연신의 차량이 천천히 단지 앞에 미끄러졌다.한지영은 집 앞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벨트를 풀고 고맙다고 한 다음 차 문에 손을 올렸다.그런데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때 백연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남자와는 사귀기라도 할 생각이야?”한지영은 그 말에 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3초 정도 지난 후에야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챘다.“우진 씨 괜찮은 사람이에요. 연봉도 높고 직장도 안정적이고 나랑 대화도 잘 통하고요. 그리고 얼굴도 준수하죠. 만약 우진 씨만 괜찮다면 나는 사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한지영이 말했다.“고작 그런 조건 때문에 사귄다고? 그 남자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지?”백연신이 한지영을 노려보며 말했다.한지영은 순간 그의 태도가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마음에 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우진 씨 정도면 1등 신랑감이에요.”“한지영!”백연신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지고 이제는 분노까지 서렸다.한지영은 그의 이런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대체 뭐에 화를 내는 거지? 다른 남자를 만난 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자기는 여자친구도 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지?“백연신 씨, 아까 레스토랑 앞에 나타난 거 정말 우연 맞아요? 혹시 나 보러 일부러 온 거예요? 날 왜 찾아온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나는 연신 씨랑 더 이상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리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난 연신 씨와 고은채 씨 사이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도 없고 방해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한지영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난 우리가 헤어졌어도 연신 씨가 행복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요.”백연신은 그녀가 마음을 다해 사랑한 유일한 남자였다. 사랑이 식어서 헤어진 것이 아니라 그에게 도움을 주지 못해서 헤어진 것이기에 헤어졌어도 그에게는 이런 식의 축복을 얼마든지 빌어줄 수 있었다.한지영은 백연신과 마지막 작별인사라도 하려는 듯 먼저 악수를 청했다.“잘 가요.”하지만 백연신은 그녀의 손을 잡지
“뭐야, 티 났어? 잘 감췄다고 생각했는데...”한지영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너랑 친구 한 세월이 얼만데 내가 그것도 눈치 못 채겠어?”며칠 전에 한지영의 전화를 받았을 때 임유진은 단번에 그녀가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챘다. 한지영이 너무나도 하이 텐션이었기 때문이다.한지영은 아예 대놓고 고민 있는 얼굴을 할 때도 있지만 이렇듯 과한 텐션으로 자기감정을 감출 때도 있었다.“그래서 무슨 일인 건데?”임유진이 걱정된다는 얼굴로 물었다.한지영은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되자 한숨을 내쉬며 곧바로 그녀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백연신을 만났어.”“혹시 찾아간 거야?”임유진도 얼마 전 백연신이 이곳으로 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아니. 백연신이 내 앞에 나타났어. 단순히 우연인 건지 아니면 일부러 찾아온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 그때는 취하기도 했고 또 머리가 엉망이라 모든 게 혼란스러웠어.”“너 설마...”“걱정하지 마. 다시 이어지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 뛰어들지는 않을 테니까.”한지영은 애써 미소를 짓더니 이내 화제를 돌렸다.“그보다 이틀 뒤에 강지혁이랑 파티에 참석하게 됐다며. 너 아직 드레스 못 고른 거 아니야? 마침 근처에 유명한 드레스 샵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두 사람은 카페에서 나와 드레스 샵으로 들어갔다.유명한 샵이라 그런지 안으로 들어가 보니 드레스들이 하나같이 비쌌다.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5년 만에 돌아와 처음으로 참석하는 파티인 만큼 저렴한 드레스를 입을 수는 없었기에 임유진은 그냥 이곳에서 고르려고 했다.임유진과 한지영은 가게 안을 둘러보며 드레스를 골랐다. 두 사람 모두 오늘은 캐주얼한 차림으로 입었던 터라 임유진이 실버 드레스를 골랐을 때 따라다니던 직원이 곧바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죄송하지만 해당 드레스는 전시용으로만 사용되는 드레스라 시착이 불가능하세요.”임유진은 그 말에 이상함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그때 다른 고객을 상대하고 있던 직원 한 명이 아무 말도 없이 다가와
직원과 달리 사장의 태도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이분은 저희한테 서비스를 제공할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다른 직원으로 바꿔주세요.”임유진이 차분하게 말했다.“불쾌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사장은 간단하게 사과를 전한 후 곧바로 해당 가게에서 제일 젊은 직원을 불렀다.임유진은 직원의 명패에 달린 이름과 조금 긴장한 듯 얼굴이 빨개져 있는 신입 직원을 보고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요구하는 색상과 디자인을 얘기해주었다.신입 직원은 그녀의 요구에 따라 열심히 드레스를 검색했다.“이대로 끝이라고? 아까 너도 봤잖아. 서비스업 종사자로서의 소양 같은 게 하나도 없는 거.”“사장을 불렀는데도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는데 거기서 뭐라고 더 하겠어. 입만 아프지. 걱정하지 마. 이따 반드시 후회할 거니까.”한지영은 그 말에 다시 얌전히 드레스를 구경했다.그때 신입 직원이 다가와 임유진에게 드레스 몇 벌을 소개해 주었다. 대여섯 벌 되는 드레스 중에 한정판인 드레스가 한 벌 있었는데 신입인 그녀로서는 임유진에게 바로 시착하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만약 임유진이 만약 마음에 든다고 하면 사장에게 권한을 신청해야만 했다.임유진은 직원이 한정판이라고 소개한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다이아몬드가 군데군데 박혀있는 해당 블랙 드레스는 신비로운 느낌을 주며 은은하게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5년 만에 돌아와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얼굴을 내비치는 만큼 드레스도 예쁜 것이어야 했기에 임유진은 곧바로 눈을 반짝였다.“와! 유진아, 이거 아까 네가 골랐던 드레스보다 더 예쁜데?”한지영이 감탄하며 말했다.“이거로 할게요. 시착 가능하죠?”임유진이 묻자 직원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물론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잠시 후, 직원은 블랙 드레스를 들고 오며 임유진을 탈의실로 안내했다.그리고 한지영은 임유진이 시착을 마칠 동안 소파에 앉아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아까 그들에게 불친절했던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를 향해 살갑게 웃어 보이는 것
“여기는 그쪽 같은 사람이 함부로 들어올 만한 곳이 아니에요.”소민아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한지영은 그런 그녀가 우습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지금 함부로라고 했어요? 지금 그쪽이 누리고 있는 건 모두 딸이 강씨 가문의 양녀가 된 덕에 얻을 수 있었던 거 아닌가? 그전에는 학력도 나보다 낮고 커리어도 별 볼 일 없던데 대체 무슨 배짱으로 자격 운운하는 건지 모르겠네?”소민아는 인플루언서였다고는 하나 벌어들이는 수입은 한지영보다 훨씬 낮았고 다른 조건을 비교해봐도 어디 하나 당당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소민아는 한지영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아까 직원이 건넨 물컵을 한지영 쪽으로 확 기울였다.한지영은 소민아를 도발하며 줄곧 경계하고 있었기에 소민아가 손목을 꺾는 순간 바로 다시 반대로 꺾어 컵 안의 물이 전부 다 소민아에게로 쏟아지게 했다.“아악! 이게 뭐 하는 짓이야!”소민아의 날 선 외침에 가게 안 손님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두 사람 쪽으로 집중됐다.사장은 깜짝 놀라 다가오더니 소민아의 옷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며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그러자 소민아가 손가락을 길게 뻗으며 한지영을 가리켰다.“저 여자가 나한테 물을 끼얹었어요!”한지영은 이에 담담하게 대꾸했다.“입은 삐뚤어도 말은 바로 해야죠. 먼저 나한테 물을 끼얹으려고 했던 게 누군데.”사장은 두 사람을 한번씩 훑어보더니 곧바로 한지영을 향해 말했다.“손님, 소민아 씨에게 당장 사과해주세요. 뭐가 됐든 손님이 물을 끼얹었잖아요.”한지영은 우습다는 듯 사장을 바라보았다.“원인은 다 제쳐주고 결과만 보겠다는 건가요?”“소민아 씨는 고객님 때문에 옷을 버렸어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 잘잘못을 따져봤자 무슨 소용이 있죠? 만약 사과 못 하시겠다면 저희는 강제로 손님을 내보낼 수밖에 없어요. 물론 소민아 씨가 손님께 어떤 책임을 묻든 저희는 일절 관여하지 않을 거고요.”사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소민아에게 아부하던 직원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임유진이 드레스를 먼저 찜한 이상 소민아에게 해당 드레스를 욕심낼 기회는 없었다.“임유진 씨... 우연이네요.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소민아가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먼저 말을 건넸다.“소리 지르는 소리가 탈의실까지 전해오던데 그게 소민아 씨였군요?”임유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얘기했다.“그리고 분명히 사모님이라고 부르라고 혁이가 얘기하지 않았나요?”소민아는 그 말에 이를 더 꽉 깨물었다.혁이라는 애칭을 부르며 강지혁과의 관계를 다시금 상기시켜주려는 그녀의 말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일전에 그녀가 관계를 좁히기 위해 강지혁을 ‘지혁 씨’라고 불렀을 때 강지혁은 바로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굳히며 다시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꼭 그녀에게는 이름조차 허락할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네, 사모님...”소민아가 어색하게 웃었다.“방금은 오해가 좀 있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오해라뇨! 저 몰상식한 여자가 물을 끼얹었잖아요!”소민아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직원은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이에 소민아는 입술을 깨물며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아니 그게... 그러니까...”“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CCTV를 돌려보면 되겠네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CCTV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만약 제 친구가 억울한 상황이면 명예훼손죄로 고소할 테니 그렇게 아세요.”소민아는 그 말에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오해였을 뿐인데 굳이 일을 키울 필요가 있을까요?”“일을 키운 건 내가 아닐 텐데요?”임유진은 타협 따위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한지영에게 쏘아붙였던 사장과 직원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우물쭈물하는 소민아의 모습에 그제야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소민아는 지금 행여라도 임유진을 건드릴까 봐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있었다.그때 세 명의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은 다름 아닌 고이준이었다.고이준은 안으로 들어온 후 곧바로 임유진의 앞으로
눈앞 여자의 정체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어마어마한 거물의 아내임은 틀림없었다.사장과 소민아에게 잘 보이려 했던 직원은 속으로 동시에 이 생각을 하고는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버렸다.임유진은 고이준에게서 카드를 건네받은 후 바로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신입 직원을 바라보았다.“이 드레스로 할게요. 마음에 드네요.”“네... 네! 알겠습니다!”신입은 얼떨떨한 얼굴로 허리를 바짝 편 채 대답했다. 입사한 지 불과 몇 개월 안 된 자신이 이러한 큰 주문을 따낼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소민아는 임유진 쪽으로 확 기운 분위기에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불려 세워지고 말았다.“소민아 씨, 지금 어디 가는 겁니까? 소민아 씨와도 관계되는 일이니 함께 CCTV를 보는 게 어때요?”임유진이 물었다.“아, 아니요. 그럴 필요는... 제가 실수로 물을 맞아버린 것뿐인데요.”소민아는 상황을 무마하려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아까는 내 친구가 물을 끼얹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것 때문에 고래고래 소리까지 질렀잖아요. 뭐, 좋아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오해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럼 이제 억울한 내 친구한테 사과해야겠죠?”임유진의 말에 소민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사과요?”“그럼 이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사과 한마디 없이 사건이 해결될 줄 알았어요?”임유진의 목소리가 삽시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소민아의 얼굴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소안나가 강씨 가문의 양녀로 들어간 후로 그녀는 늘 자신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던 콧대 높은 여자들마저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를 떨었으니까.그러니 누군가에게 사과한다는 일은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다. 그것도 평범하디 평범한 한지영에게는 더더욱 말이다.게다가 지금은 가게 직원들 앞이라 만약 정말 사과하게 되면 체면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질 게 분명했다.“소민아 씨, 사
“알고 있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소민아는 말을 마친 후 빠르게 가게를 벗어났다.그날 밤.임유진은 아이 둘을 다 재운 후 곧바로 침실로 돌아와 백연신의 기사를 검색했다.현이는 자신만의 방이 다 마련되었음에도 오빠와 함께 자고 싶다며 잠잘 때만 되면 강선율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잠들 때까지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임유진은 그런 딸의 모습에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율이도 썩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고 또 두 아이가 함께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 좋아 결국에는 두 사람이 함께 자는 것을 허락했다.강선율은 이야기를 읽어달라는 동생의 말에 처음에는 조금 난감해하더니 이내 진지하게 동화책을 고르며 현이에게 이야기를 읽어주었다. 게다가 매 밤 한 권도 아니고 적어도 세 권의 책은 읽어주었다.오빠라는 호칭에 책임감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피가 당겨서인지 율이는 당황한 표정은 가끔 지을지언정 짜증이나 화는 한번도 내지 않았다.임유진은 아이들의 생각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그때 머리 바로 위쪽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연신 회장 얼굴이 네 취향인가 보지? 입꼬리가 귀에 걸렸네.”임유진은 그 말에 화들짝 놀라 바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온 건지 등 바로 뒤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백연신의 기사를 보고 있는 강지혁의 얼굴이 보였다.백연신의 사진을 켜둔 채로 웃어버린 바람에 아무래도 그 미소의 상대가 백연신이라고 오해한 듯했다.“아니야! 방금은 현이랑 율이 생각하느라 괜히 좋아져서 그래. 그리고 백연신 씨는 지영이 전 남자친구잖아. 지영이 일로 백연신 씨 기사 좀 검색해 본 것뿐이야. 정말이야!”임유진은 혹여 강지혁이 이상한 오해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해명했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너 혹시... 백연신 씨랑 지영이가 사귀었던 사실도 잊어버렸어?”임유진은 강지혁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 알
강지혁은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조금 풀어진 얼굴로 임유진의 오른손을 잡았다.“다른 남자한테는 찰나의 시선도 주지 마. 너한테 남자는 오직 나뿐이니까.”임유진은 소유욕 짙은 그의 말에 문득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이 떠올랐다.예전에도 그는 그녀의 곁에 남자가 접근하는 꼴을 보지 못했고 늘 자기만 바라보며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해주기를 바랐다.집착 가득했던 당시의 그 말도 어떤 감정으로 한 건지 모를 지금 이 말도 임유진은 그저 달콤하게만 느껴졌다.그때 귓가에 따끔한 감각이 전해지고 임유진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번쩍 차렸다. 강지혁이 허리를 숙인 채 그녀의 귀를 깨물고 있었다.임유진은 그의 입술이 닿은 귓가가 한순간에 확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에 몸을 움찔 떨며 반사적으로 귀를 막으려고 했다.“혁아, 간지러워...”하지만 귀 쪽으로 손을 올리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잡혀버렸다.강지혁은 마치 달콤한 디저트라도 맛보듯 입술을 떼려 하지 않았다.“그러고 보니 오늘 드레스 샵에서... 흡... 꽤 많은 돈을 썼는데... 괜찮지?”임유진은 그의 움직임을 제지하기 위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만약 이대로 조금만 더하다가는 금세 분위기에 취해 이상한 기류로 흘러갈지도 몰랐으니까.“쓰라고 준 카드야. 원하는 대로 써. 그리고 내가 가진 재산 중 절반은 원래 네 몫이야.”“내가 네 돈만 보고 좋아한 거면 어쩌려고 이런 말을 하지?”임유진이 농담 섞인 말투로 물었다.“돈 때문이야?”강지혁이 조금 가라앉은 말투로 물으며 임유진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랑했던 공기가 한순간에 차갑게 바뀌었다.임유진은 마치 자신의 모든 걸 꿰뚫어 보려는 듯한 그의 눈빛에 괜히 목이 마르는 것 같았다.“아니.”그녀의 답에 강지혁이 다시 웃었다.“그럴 줄 알았어. 만약 너와 나를 이었던 게 돈이었으면 그렇게도 많은 일을 겪지 않았겠지.”강지혁은 임유진의 손가락을 매만지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오늘 드레스 샵에서 소민아와 트러블이
“응, 말해.”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임유진과 눈을 맞췄다.“그... 김승수 말이야. 전에 나랑 스승님이 짜고 치고 자기를 감옥살이시켰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김승수가 그 일로 나랑 스승님을 고소했더라고. 사건은 이미 검찰로 송치된 상태야. 아마 조만간 검찰 측에서는 그때 사건이랑 스승님 관련해서 나한테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오게 될 거야. 근데... 조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고 그러면 높은 확률로 헛소문이 돌게 돼. 어쩌면 그 영향으로 GH 그룹에 영향이 갈 수도...”“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강지혁이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네가 권건우 변호사를 단지 스승으로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는 거 알아. 오해 안 해. 라온시에 있을 때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어주신 분이잖아. 회사 걱정은 하지 마. 고작 언론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한 회사가 아니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일로 강지혁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또한 그가 뭘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임유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화분 떨어질 때 나 구해줬던 사람, 소민준이야.”아마 강지혁이라면 진작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임유진은 자기 입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이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다.“알아.”강지혁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류 자료를 다시 집어 임유진에게 건넸다.“볼래? 소민준에 관한 자료야. 꽤 힘들게 살아온 것 같더라고.”임유진은 그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자료를 건네받았다.자료 안에는 소민준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