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그건 너무 오버야.”일개 배달원이 휴가 한 번 낸다고 S 시 강지혁 도련님을 시켜 대타를 찾게 하다니, 소문이라도 새어나가면 모두가 입이 쩍 벌어질 것이다.강지혁은 대체 왜 이렇게 사람 마음을 홀리는 거냐고!임유진은 그에게 흠뻑 빠져버렸다.잘생긴 외모도 한몫한다는 걸 그녀는 비로소 체감하는 바였다.“유진 씨? 유진 씨?!”탁유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임유진은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었다.“네, 언니, 왜요?”“나야말로 묻고 싶네요. 오늘 대체 왜 이렇게 넋이 나가 있는 거예요? 무슨 일 있어요?”탁유미가 되물었다.“아, 아니요.”임유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아 참, 아주머니 다리는 좀 나으셨어요?”임유진이 물었다.어제 탁유미 엄마가 발을 삐끗하여 넘어지는 바람에 탁유미도 일찍 가게 문을 닫고 엄마를 병원으로 모셔갔다.“너무 심각한 건 아니고 의사가 내일 작은 수술을 해야 한대요.”탁유미가 대답했다.“내일이요? 근데 내일은 윤이가 학원 가는 날이잖아요.”임유진이 되물었다. 내일 가는 곳은 인공와우를 착용한 아이들이 학교 가서 공부할 때 인공와우에 더 잘 적응하고 서로 다른 발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가르쳐주는 학원이다.즉 다시 말해 수업 시간에 윤이의 듣기와 말하기를 더 빨리 배우도록 적응시켜주는 학원이다.“내일은 아마도 윤이를 학원에 못 보낼 것 같아요. 엄마가 수술하려면 옆에 가족이 있어야 하거든요.”탁유미가 말했다.“그럼 윤이는 내가 학원까지 바래다줄게요.”임유진이 흔쾌히 말했다.“유진 씨가요?”탁유미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네. 어차피 내일 오후에 마침 휴식하니까 내가 윤이 데리고 학원 갈게요. 윤이가 지금 많이 나아졌고 게다가 매일 수업하는 걸 엄청 기대하고 있던데요.”매번 수업 보고 다음 날이 되면 아이는 그녀 앞에서 잔뜩 흥분한 채로 앙증맞은 소리를 내며 쉬운 단어들을 말하곤 한다.지금 듣기와 말하기가 아이의 마음의 문을 열어준 것만 같다.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맞아. 영화 시사회 보는 거 안 좋아해?”강지혁이 되물었다.“아니, 그게 아니라.”그녀는 힘껏 고개를 내저었다.‘시사회를 일반인이 볼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현장에 가면 수많은 연예인들을 구경할 수 있을 텐데. 이건 정말...’하지만 임유진은 결국 사욕을 참고 윤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기로 했다.“나 윤이 학원 보내야 해서 시사회는 못 갈 것 같아.”그녀가 말했다.강지혁은 또다시 그녀 옆의 꼬맹이에게 시선을 옮겼다.“왜 누나가 얘 학원 보내줘?”그의 말투 속에 질투가 살짝 섞여 있었다.“유미 언니 어머님이 다리를 상해서 오늘 오후에 수술하신대. 언니는 어머님 간호하러 병원에 갔고 내가 선뜻 윤이 학원 바래다주겠다고 했거든.”“...”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 한편 임유진의 옆에 있던 녀석은 그의 눈빛이 조금 불편했는지 임유진에게 몸을 기대며 작은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임유진은 아이의 정서 변화를 바로 느끼고 쪼그리고 앉아서 달래주기 시작했다.“윤이야 괜찮아, 두려워하지 마. 이 아저씨는 이모 친구야. 이모처럼 윤이를 좋아하게 될 거야.”임유진은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최대한 천천히 말하며 수어도 했다.말을 마친 그녀는 강지혁에게 일침했다.“윤이한테 부드럽게 대하고 자주 웃어. 안 그러면 아이가 무서워한단 말이야.”강지혁은 눈썹을 들썩거렸다. 그녀는 이미 아이 대신 강지혁에게 불만을 표했다.하지만 방금 그녀의 말투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말투란 걸 임유진은 모를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강지혁은 불쾌했을지 몰라도 그녀이기에 전혀 짜증이 나지 않았다.심지어... 이렇게 막 다루는 그녀의 태도가 더 좋았다. 예전에는 조심스러운 말투였을 뿐인데 지금은 마치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누나 요구라면 바로 들어주지.”강지혁이 말하면서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입꼬리를 씩 올리고 살벌한 압박감을 최대한 자제했다.탁윤은 두 눈을 깜빡이면서 살짝 의아한 눈길
“그럼 충분해. 시사회가 오후 다섯 시에 열리거든. 윤이 학원 끝나고 시사회 보러 가면 돼.”“정말? 그래도 돼?”임유진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사회를 볼 기회가 생기다니, 그녀는 너무 기뻤다.“당연하지.”강지혁이 실소를 터트렸다.“진짜 시간이 없어도 누나만 원하면 내가 시사회 한 번 더 만들어줄 수 있어.”임유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만을 위해 시사회를 열어준단 말인가? 이건... 스케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닐까? 다만 다시 생각해보니 강지혁이라면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닌 듯싶었다.임유진은 그가 진짜 번거롭게 시사회를 다시 열어주길 바라지 않았지만 말만 들어도 마음이 훈훈해졌다.강지혁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임유진이 아이의 손을 꼭 잡고서 차에서 내렸다. 강지혁도 두 사람과 함께 학원 교실까지 가주었다.이곳에는 인공와우를 착용한 아이들이 꽤 많았는데 다들 학부모와 함께 교실로 들어갔다.강지혁은 아이를 교실까지 바래다주고 선생님께 맡기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임유진이 떡하니 윤이의 곁에 앉았다.“여기 수업은 학부모가 함께 도와줘야 해. 너 지루하면 밖에 나가 돌아다닐래? 수업 끝나고 전화할게.”임유진이 말했다.강지혁은 입술을 앙다물고 의자를 끌어와 아이의 옆에 앉았다.“그럼 나도 함께 남아있어야지.”임유진이 활짝 웃었다.그녀와 강지혁은 처음 이곳에 왔지만 여기 있는 다른 학부모들은 윤이를 일찌감치 알고 있어 하나같이 이상한 눈길로 두 어른을 쳐다봤다. 전에 윤이랑 같이 온 학부모는 두 사람이 아니었으니까.그중에서도 강지혁이 내뿜는 카리스마와 출중한 외모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윤이의 앞에 앉은 아이의 학부모는 고개 돌려 임유진에게 물었다.“윤이 엄마는 오늘 왜 안 오시고...”“저는 윤이의 이모예요.”임유진이 자기소개했다. 어차피 윤이가 그녀를 이모라고 부르니까 문제 될 건 없다.“그럼 이분은...”학부모의 시선이 또다시 강지혁에게 쏠렸다.유난
그 학부모는 부러움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렇군요. 남자친구분이 참 좋으시네요. 함께 윤이를 데리고 학원까지 오고 말이에요. 앞으로 두 분 결혼해서 아이 생기면 분명 좋은 아빠가 되실 거예요. 요즘 남자들은 이렇게 인내심 있기가 참 드물어요. 우릴 좀 보세요. 대부분 엄마들만 함께 왔잖아요.”아이가 생긴다고... 임유진의 두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 학부모와 얘기를 나눈 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 평평한 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요즘 그녀는 줄곧 약 먹으며 몸조리를 했는데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희망은 생겼다. 적어도 지금 그녀는 ‘아이’문제가 언급돼도 예전처럼 절망적이진 않으니까.문득 그녀의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나중에 우리한테 아이가 생기면 난 꼭 좋은 아빠가 될 거야.”임유진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렸는데 강지혁이 어느새 그녀 옆에 바짝 다가와 얼굴을 거의 맞대고 있었다. 결국 고개를 돌린 순간 그의 입술이 그녀의 볼에 닿았고 임유진은 얼굴이 화끈거렸다.“너랑 아이 꼭 잘 지켜줄 거야. 맹세해.”강지혁은 아이에게 어떠한 그늘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부성애를 남김없이 쏟을 테고 그녀 또한 모성애를 아낌없이 줄 것이다.임유진은 그의 엄마처럼 아이를 빌미로 삼다가 목적에 도달할 수 없게 되면 모질게 버리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아직... 아이도 없는데 웬 유난이야.”임유진은 얼굴이 너무 화끈거려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강지혁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누나만 원하면 우린 바로 아이 가질 수 있어!”임유진은 잠시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단호한 그의 말투는 마치 그녀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에 봉착해도 전부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둘만의 아이라... 그게 가능하다면 그녀도 너무 갖고 싶었다!“이모...”윤이의 목소리에 임유진은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이는 고개 들어 의아한 눈길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임유진은 얼른 마음을 다잡고 아이에게 괜찮다며 수어로 알려주었
“당연히 되지.”강지혁이 대답했다. 아이 한 명 늘어난다고 그에게 딱히 문제 될 건 없다.“근데 윤이가 정말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임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비록 그 영화가 전체연령 관람가이긴 하지만 아이가 아직 너무 어리고 대부분의 소리와 언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그래도 영화를 보는 건 나름대로 새로운 체험이니 그때 가서 수어로 설명해주거나 옆에서 조금씩 도와주면 될 듯싶었다.임유진은 빨리 함께 영화를 보고 싶어졌다! 윤이와 함께 영화 보는 장면이 너무 기대됐다.그녀는 수어로 아이에게 영화 보기 좋아하는지 물었고 아이는 머리를 내저으며 본 적이 없다고 했다.“그럼 이따가 이모랑 함께 영화 보러 갈래?”그녀는 물으면서 아이가 못 알아들을까 봐 수어까지 결부했다.아이는 작은 머리를 끄덕이며 신나는 표정을 지었다.윤이는 영화라는 단어만 이해하고 있지만 내심 기대에 찬 모습이었다.그런 아이의 모습에 임유진은 살짝 유감스러웠다. 오늘 만약 윤이와 함께 만화영화를 봤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하지만... 만약 아이가 영화 보는 걸 좋아하면 다음에 또 함께 만화영화 보러 가면 된다.차는 극장으로 향했지만 정문에 세우지는 않았다. 정문 쪽에는 언론 매체들이 너무 많았고 그녀가 기자들의 주목을 받는 걸 아주 꺼린다는 것을 강지혁은 잘 아니까.게다가 강지혁 본인도 기자들이 매우 싫었다.옆문엔 경호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강지혁의 차를 확인하자마자 공손하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강지혁과 임유진, 탁윤까지 나란히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내부에는 기자들이 딱히 없고 상영관에 축하 화환들과 시사회에 참석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임유진은 그 사람들을 쭉 둘러봤는데 전부 눈에 익었고 스크린에서 자주 봐왔던 유명한 배우들이었다. 게다가 국내외 유명 감독들도 있었고 평상시 정재계 뉴스로만 봐왔던 유명인사들도 있었다.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고주원이 현재 인지도가 높긴 하나 이 정도까진 아닌데... 또한, 이번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업계
게다가 강지혁 옆에 있는 여자는 또 어떻게 된 거지?!이런 장소는 스캔들이 나기 가장 쉬운 장소였다. 임유진은 자신과 윤이를 향한 이상야릇한 눈빛을 쳐다보며 문득 사람들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저기... 이 사람들 뭔가 오해한 것 같아.”그녀가 나지막이 복화술로 강지혁에게 말했다.강지혁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오해? 무슨 오해?”그는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강지혁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드는 걸까? 그녀는 두 눈을 깜빡이며 강지혁을 물끄러미 쳐다봤고 도화살 가득한 영롱한 그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하고 맑아 보였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윤이가 우리 아이라고 오해하는 것 같단 말이야!”“그럼 오해하라고 하지 뭐.”강지혁은 되레 담담하게 말했다.뭐라고?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해하게 놔두라니? 이게 말이 돼?“하지만...”“괜찮아. 문제 될 거 없어.”강지혁이 말을 이었다.“어차피 우리도 조만간 아이가 생길 거 아니야. 저 사람들 몇 년 일찍 오해하라고 하지 뭐. 아무 일 아니야.”“...”그의 대답을 들은 임유진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가자, 이만.”그는 탁윤의 다른 한 손을 잡고 안으로 걸어갔다.이 모습에 추측이 난무하던 사람들은 셋의 관계를 더 확신하는 것만 같았다. 두 남녀가 한 아이의 손을 잡고 있으니 한 가족 말고 또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그렇지만 강지혁은 외부에 결혼 사실을 알린 적이 없는데 3, 4살 돼 보이는 아이까지 있다니?!설마 비밀결혼? 그것도 아니면 단지 애인일 뿐이라고? 이 아이는 그럼 사생아란 말인가? 문득 많은 사람들이 동정 어린 눈길로 임유진을 쳐다봤다.그렇지만 부러움에 휩싸인 눈빛이 절대다수였다. 아들까지 낳아줬는데 안방마님으로 등극할 수 없을까? 설사 강씨 일가에 발을 들이진 못한다 해도 평생 넉넉하게 살 순 있잖아!이 영화감독은 강지혁과 친분이 있다. 전에 시사회 초대장을 나눠줄 때 강지혁이 비서를 시
다만 소찬호 감독은 티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하죠. 고주원 씨도 이런 팬분이 있다는 걸 엄청 좋아하실 거예요.”둘은 또 몇 마디 담소를 나누다가 소찬호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임유진도 의외이긴 마찬가지였다. 강지혁이 그녀를 위해 고주원과 만날 기회를 마련해주다니, 덕질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왜 그래?”그는 멍하니 넋 놓은 임유진에게 물었다.“고주원 씨랑 사진 찍고 사인받을 생각에 넋이 나갔어?”“기쁘긴 한데 그런 기쁜 마음이 아니라...”임유진은 말을 더듬거렸다. 기쁘긴 한데 고주원을 가까이에서 보고 사진도 찍고 사인받을 기회가 생겨서 기쁜 것보다 강지혁이 무심코 그녈 위해 신경 써준 모든 것이 그녀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그녀는 더이상 쓸모없는 년이 아니고, 귀찮게 한 명 더 늘어난 계집애가 아니고,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하찮은 인간이 아닌, 심지어 가족들에게 구박받는 재수 없는 년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소중히 다루어지는 귀한 존재인 것만 같았다.“됐어, 어떤 기쁨이든 다 좋아. 누나 소원이라면 뭐든 다 이뤄줄게.”강지혁이 나지막이 말하며 몸을 기울이더니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조건은 단 하나, 누나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나여야 해, 알겠지? 이건 영원히 변할 수 없어.”감미로운 목소리로 사람 마음을 홀릴 듯한 말들을 내뱉으며 애틋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데 이건 단지 그의 다짐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맹세도 원하고 있었다.임유진은 저도 몰래 머리를 끄덕였다.“알겠어.”그녀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강지혁이었다. 사랑받는다는 느낌과 소중히 다뤄진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고 있으니까.이 세상에 그녀를 보석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존재했다니, 이토록 깊이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니, 이 모든 걸 강지혁이 그녀에게 절실히 알려주고 있었다!강지혁은 흡족한 미소를 날렸고 둘 사이에 끼운 탁윤은 턱을 치키고 예쁜 눈동자로 둘을 쳐다봤다. 어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의아한 눈길로 쳐
이 광경을 본 임유진도 드디어 마음이 놓였다. 아이가 너무 어려 이런 영화를 지루해할 줄 알았고,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상영관을 나가겠다고 떼쓰면 안고 나갈 생각까지 다 했는데 뜻밖의 경사였다!그녀도 드디어 영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이 영화는 캐릭터와 캐스팅 설정이 조화를 이루었고 CG 효과도 예뻤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단조로운 느낌은 안 들었다.고주원도 기존 이미지를 깨고 새로 이미지 변신한 셈인데 이건 또 다른 장르에 대한 도전이었다.임유진은 고주원의 연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영화 속 캐릭터를 아주 완벽하게 소화했다.심지어 하이라이트로 접어들 땐 그녀도 참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눈물이 흘러내린 순간 임유진은 제 모습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잘 우는 편이 아니다. 전에 영화 볼 때 옆에서 아무리 대성통곡을 해도 그녀는 딱히 울지 않는다.영화 내용이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그랬던 그녀가 이 영화의 감정선에 흠뻑 도취해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영화 속 캐릭터가 그녀와 너무 닮아서 제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흐느낀 듯싶다.평범하던 데로부터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갔지만 상상했던 진정한 완벽함을 이루지 못한 채 가장 어두운 곳으로 떨어졌다. 그 뒤로 또다시 본인 노력으로 한 걸음씩 더 나아가 밝은 미래를 맞이했다.영화에서 익살스럽게 이 과정을 연출했지만 그 속에 담긴 아픔은 임유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그 고통을...그녀가 휴지를 꺼내 눈물을 닦으려 할 때 강지혁이 선뜻 손 내밀어 그녀의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었다.“왜 울어?”“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영화가 너무 감동적이라.”임유진이 코를 훌쩍거리며 대답했다.“이렇게 우는 거 보니까 괜히 데려왔나 싶어.”강지혁은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울면 강지혁도 속상하니까.영화가 감동돼서 그렇다 해도 그는 여전히 임유진을 울게 하고 싶지 않았다.“영화가 재미있으니까 우는 거지. 웃기
당시의 강지혁 역시 소민준처럼 수수방관하며 강씨 가문의 이익만 챙겼으니까.‘소민준한테는 이렇게도 가차 없으면서 왜... 왜 나는 용서해줬어? 아니, 애초에 정말 용서한 게 맞기는 하나...? 사실은 용서한 적이 없는데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용서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강지혁은 이를 꽉 깨물며 강제로 생각을 멈췄다.그때 임유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오늘 일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소민준한테 마땅한 보상도 할 거야. 하지만 그게 다야. 만약 소민준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날 구했어도 난 똑같이 했을 거야.”“그럼 나는? 나는 안 불쌍해...? 네가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도 포함이 돼?”강지혁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애처롭게 물었다.그러자 임유진은 실소를 터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질문이야. 나는 널 좋아하는 건 물론이고 사랑해, 혁아. 그리고 내가 왜 널 불쌍하게 여겨? 혹시 소민준 때문에 그래?”그녀는 말을 하며 두 손으로 강지혁의 얼굴을 살포시 감쌌다.“소민준이 내 마음에 다시 들어오는 일은 영원히 없어. 마침표를 찍은 것처럼 이미 끝난 사이라고. 혁이 너랑은 달라.”임유진은 말을 마친 후 그대로 강지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강지혁에게 마르지 않는 안정감을 주고 싶었다. 더는 5년 전처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뇌리에 각인이 되게 알려주고 싶었다.“혁아, 사랑해. 나는 앞으로도 너만 사랑할 거야. 이미 그렇게 정했어.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강지혁은 임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작게 중얼거렸다.“평생 내 곁에만 있어. 나만 보고 나만 사랑해줘...”...며칠 후, 임유진은 검찰 측의 연락을 받고 검사실에 도착했다. 검사의 질문에 그녀는 회피하는 답변 없이 솔직하게 다 얘기했다. 거짓말을 할 것도 없었으니까.그런데 조사를 거의 다 마쳤을 무렵 한 여성 검사가 임유진을 향해 물었다.“듣기로 근 2년간 라온시의 변호사 업계에서 이름 좀 날렸다고 하던데 그
“응, 말해.”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임유진과 눈을 맞췄다.“그... 김승수 말이야. 전에 나랑 스승님이 짜고 치고 자기를 감옥살이시켰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김승수가 그 일로 나랑 스승님을 고소했더라고. 사건은 이미 검찰로 송치된 상태야. 아마 조만간 검찰 측에서는 그때 사건이랑 스승님 관련해서 나한테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오게 될 거야. 근데... 조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고 그러면 높은 확률로 헛소문이 돌게 돼. 어쩌면 그 영향으로 GH 그룹에 영향이 갈 수도...”“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강지혁이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네가 권건우 변호사를 단지 스승으로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는 거 알아. 오해 안 해. 라온시에 있을 때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어주신 분이잖아. 회사 걱정은 하지 마. 고작 언론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한 회사가 아니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일로 강지혁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또한 그가 뭘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임유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화분 떨어질 때 나 구해줬던 사람, 소민준이야.”아마 강지혁이라면 진작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임유진은 자기 입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이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다.“알아.”강지혁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류 자료를 다시 집어 임유진에게 건넸다.“볼래? 소민준에 관한 자료야. 꽤 힘들게 살아온 것 같더라고.”임유진은 그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자료를 건네받았다.자료 안에는 소민준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