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태오의 직설적이고도 다정한 격려에 혜진은 가슴이 터질 것처럼 세차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늘 오지랖 넓은 코치라고 생각했는데, 이 삭막한 파주의 훈련장 위에서 오직 자신만을 온전히 믿고 배후를 받쳐주는 그의 존재는 혜진의 발밑에 그 어떤 방패보다 단단한 용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정말 코치님은 사람 부끄럽게 만드는 데 무슨 재주가 있으신 것 같아요. 알았으니까 이 손 좀 놓으세요, 감독님이 보십니다."
혜진이 볼을 붉히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태오는 나직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가락을 가볍게 한 번 더 꽉 쥔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훈련 끝나고 숙소 복귀하면 내 방으로 와요. 북한 주전 미드필더들의 고질적인 역동작 데이터를 비디오로 보여줄 테니까. 다치지 말고 마저 뛰고 와요, 내 사랑스러운 미드필더."
"코치님, 진짜 아름이 앞인데 자꾸 부끄럽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저 가방 챙겨서 나갈 거니까 소리 좀 낮추세요.""하하, 전 국민이 우리 연애하는 거 다 아는데 뭐가 부끄럽습니까? 혜진 씨, 오늘 밤 만찬 코스는 내 지갑이 완전히 찢어질 정도로 비싼 곳으로 준비했으니까 기대해도 좋아요. 자, 가시죠. 내 사랑스러운 미드필더."태오가 혜진의 가녀린 손가락을 자신의 큰 손안에 가만히 얽어 쥐었다. 혜진은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단단하고 따뜻한 온기에 손을 맡긴 채 순순히 발걸음을 옮겼다.삭막한 주전 경쟁과 파벌의 가혹한 벽 속에서 홀로 독종처럼 버텨왔던 그녀에게, 오직 자신만을 온전히 바라보며 완벽한 정서적 안식처이자 배후를 자처하는 남자의 존재는 그 어떤 우승 메달보다 더 찬란한 사랑의 구원이었다.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짓는 깊은 미소를 등 뒤로하며, 서윤 역시 아름의 어깨를 토닥여준 뒤 치료실을 나섰다.오후 5시, 서산으로 넘어가는 붉은 노을이 레이븐스 아레나의 거대한 스탠드와 초록색 잔디 위를 온통 금빛과 붉은색의 화려한 잉크로 물들이고 있었다. 비시즌의 텅 빈 스타디움은 지독하리만큼 고요했고, 가을바람이 잔디에 스치는 소리만이 광활한 구장 전체를 평화롭게 메우고 있었다.서윤은 홀로 맨발로 잔디를 밟으며 경기장 한가운데, 자신이 시즌 내내 중원을 지배했던 바로 그 레지스타의 자리에 섰다.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잔디의 차갑고 서늘한 촉감이 지난 40경기의 잔혹했던 대장정과 메가 타이거즈를 향한 복수극의 기억들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게 만들었다.만년 꼴찌 팀의 완장을
도욱은 아무런 말 없이 손을 뻗어 서윤의 허리를 자신 쪽으로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안았다. 그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자신의 품 안에 온전히 가두어 보호하려는, 지독하리만큼 깊은 온기와 신뢰가 담긴 묵직한 포옹이었다.서윤은 그의 단단한 어깨에 두 손을 얹으며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기자회견장에서 그런 무모한 고백을 감행할 줄은 몰랐다, 한서윤. 감독의 전술적 계산을 완전히 벗어난 돌발 행동이었어."도욱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큼 낮고 다정했다. 운동장에서 냉혹하게 호령하던 폭군 감독의 가면을 내려놓고, 오직 자신의 곁에 남아 기적을 완성해 준 여인을 향한 짙은 사랑과 독점욕이 뒤섞인 남자의 날 것 그대로의 음성이었다.서윤은 고개를 살짝 돌려 그의 깊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은은한 밤하늘의 달빛 아래로 그의 눈동자가 기분 좋게 일렁이고 있었다."왜? 전 국민 앞에서 내 오빠라고 부른 게 부끄러웠어? 난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어. 내가 왜 스페인의 그 화려한 제안을 거절하고 이 잔디 위에 남았는지, 내 심장이 어디를 향해 뛰고 있는지 온 세상이 똑똑히 알아야 하니까. 오늘 내 고백, 정말 마음에 안 들었어? 도욱 오빠."서윤이 달콤한 호칭을 쓰며 반말로 나직하게 속삭이자, 도욱의 짙은 눈썹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투정과 애교가 그의 이성을 사정없이 흔들었음이 분명했다.도욱은 서윤의 뺨을 자신의 거친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쥐며 상체를 숙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하프스페이스의 거리 속에서 남자의 묵직한 숨결이 흩뿌려졌다."마음에
서윤의 시선이 도욱에게로 향하자, 기자들의 자판 소리가 순간적으로 뚝 끊겼다. 묘한 긴장감이 실내를 지배했다. 서윤은 숨을 가만히 고른 뒤, 전 국민이 지켜보는 중계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거침없는 선언을 이어 나갔다."저의 유일한 지휘관이자, 제 축구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파트너인 강도욱 감독님께 이 모든 영광을 바칩니다. 그분이 설계한 정교한 잔디 위의 리듬이 없었다면, 레이븐스의 완장도, 오늘의 레지스타 한서윤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그리고 감독님, 오빠가 제 뒤에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단단한 성벽으로 버티고 서 있어 주었기에, 저는 단 한 순간도 두려워하지 않고 중원을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빠."‘오빠.’ 공식 석상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지독하리만큼 달콤하고 사적인 호칭이 서윤의 입술을 떠나 스피커를 울린 그 순간, 기자회견장은 그야말로 폭탄이 투하된 듯한 거대한 충격과 광기 어린 환호성으로 뒤집어졌다."방금 오빠라고 한 게 맞습니까?""한서윤 선수, 강도욱 감독과의 열애 사실을 공식 인정하시는 겁니까?"질문이 사방에서 폭죽처럼 터져 나오고 카메라 플래시가 번개처럼 실내를 하얗게 태워버리는 와중에도, 도욱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당황하여 얼굴을 붉힐 것이라는 기자들의 예상과 달리, 도욱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윤의 맑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짙은 눈썹 밑, 깊은 눈동자 속에서 오직 한 여자만을 향한 무한한 자부심과 지독한 소유욕이 거친 불꽃이 되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도욱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땀으로 얼룩진 서윤의 하얀 손을 가만히 맞잡았다. 부서질 듯한 손아귀의
출렁하는 청량한 소리와 함께 메가 타이거즈의 골망이 세차게 흔들렸다. 전반 28분, 레이븐스의 선제골이었다.1 대 0.관중석 맨 앞줄, 휠체어에 앉아 담요를 덮은 채 지켜보던 민아름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주먹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언니들이 자신의 복수를 위해 잔디 위에서 온 몸을 던지는 모습을 보며 막내의 눈에서 뜨거운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혜진은 골을 넣자마자 벤치로 달려가 백태오 코치의 품에 안기듯 하이파이브를 나눴고, 이어서 서윤의 품에 안겨 환호했다.서윤은 동료들의 축하 속에서 고개를 들어 벤치 뒤편의 도욱을 바라보았다. 도욱은 팔짱을 낀 채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는 세상 그 누구보다 깊은 자부심이 서린 미소가 아스라이 걸려 있었다. 오직 단둘만이 공유하는 승리의 주파수였다.후반전에 접어들자 조급해진 메가 타이거즈는 더욱 거칠게 레이븐스를 몰아붙였다. 최성희는 실점의 만회를 위해 서윤을 향해 고의적인 백태클까지 감행하며 악을 썼으나, 각성한 서윤의 중원 조율은 저들의 얄팍한 반칙 따위에 가두어질 수준이 아니었다. 서윤은 반 박자 빠른 원터치 패스로 상대의 압박 리듬을 완벽하게 무력화시켰다.후반 35분, 서윤이 페널티 박스 정면에서 직접 슈팅을 날릴 듯 오른발을 크게 휘둘렀다.수비수 세 명이 일제히 몸을 던진 순간, 서윤은 공을 차지 않고 발바닥으로 가볍게 뒤로 긁어주었다. 완벽한 노룩 패스였다. 배후에서 쇄도하던 김정희가 강력한 중거리 슈팅으로 골망 상단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2 대 0. 메가 타이거즈의 완벽한 파멸이자 레이븐스의 위대한 반격이었다. 최성희
"응. 나 후회 안 해, 오빠. 오빠가 만들어준 이 리듬으로 주말 경기에서 저 오만한 놈들을 완벽하게 짓밟아버릴게. 리그에서도 우승 트로피 얻을 거고, 내 그 반지 기쁜 마음으로 받을 테니까 오빠는 내 뒤에서 든든하게 응원해 줘."서윤은 그의 목덜미를 가냘프게 감싸 안으며 그의 입술에 조심스럽고도 달콤한 입맞춤을 건넸다. 은은한 거실 조명 아래로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완벽하게 같은 속도로 요동치고 있었다.큰 시련을 넘기며 한층 더 견고해진 두 사람의 유대감은 이제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거대한 신화가 되어, 다가올 복수전의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잔혹한 복수극대한민국 여자 축구 리그의 명운이 걸린 운명의 라운드가 열리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은 경기 시작 세 시간 전부터 이미 거대한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었다.리그 1위 메가 타이거즈와 그들의 턱밑까지 승점 1점 차로 바짝 추격해 온 2위 레이븐스의 맞대결. 하지만 오늘 경기는 단순한 순위 싸움이나 우승컵의 향방을 가리는 것 이상의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그것은 레이븐스의 가장 날카로운 화살촉이었던 민아름의 발목을 잔인하게 부러뜨린 세력을 향한 가차 없는 복수전이었다.원정 라커룸의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닫히자 내부에는 지혜진이 축구화 스터드로 바닥을 찍는 소리와 선수들의 무거운 숨소리만이 감돌았다.한서윤은 자리에 앉아 하얀색 테이핑을 왼쪽 발목에 꼼꼼하게 감아내렸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팽팽한 탄력감이 심장의 박동을 터질 것처럼 끌어올렸다. 유니폼 상의에
팀의 가장 날카로운 무기를 잃었다는 절망은, 어느새 그 무기를 꺾어버린 자들을 향한 가차 없는 적개심과 끈끈한 결속력으로 승화하고 있었다. 클럽하우스 마당을 채운 선수들의 다짐은 그 어떤 전술 훈련보다 더 단단하게 레이븐스의 배후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아름이를 기숙사 방에 바래다주고 나온 오후, 훈련장 구석의 벤치에는 묘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지혜진은 전방 침투 훈련의 후유증으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얼음주머니를 허벅지에 대고 있었다. 그때 타이밍 분석표를 든 백태오 코치가 슬그머니 그녀의 옆자리에 걸터앉았다.태오는 평소의 장난기 어린 눈빛 대신, 혜진의 멍든 다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얼음주머니를 건네받아 혜진의 허벅지 위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꾹꾹 눌러주기 시작했다."오늘 2선 침투 타이밍은 지난 경기보다 0.2초 빨라졌습니다. 감독님이 요구하신 플랜 C의 궤적에 거의 완벽하게 진입했어요. 하지만 혜진 선수 근육 상태가 엉망이네요. 속상하게 진짜."태오의 낮고 다정한 어조에 혜진은 괜히 고개를 돌리며 운동화 끈을 매만졌다. 연인이 된 이후로도 여전히 그의 노골적인 염려는 혜진의 서툰 마음을 자꾸만 붉게 물들였다."코치님, 저 진짜 괜찮다니까요. 아름이 돌아온 거 보셨잖아요. 지금 다리 아픈 게 문제가 아니에요. 무조건 메가 타이거즈 수비진을 찢어놓아야 해요.""아름이의 복수도 좋고 우승도 좋은데, 내 눈에는 지혜진이라는 선수가 다치지 않는 게 제일 먼저입니다. 축구장 안에서는 맹수처럼 뛰더라도, 내 앞에서는 제발 몸 좀 아껴요. 주말에 최종전 끝나면 내가 진짜 맛있는 거 사주면서 하루 종일 간호해 줄 테니까
“박소희! 멍청하게 서 있을 거야? 내가 공간 보라고 했지!”터치라인에 선 강도욱의 고함이 경기장을 울렸다. 박소희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서윤은 필사적으로 뛰었다. 강도욱이 준 새 축구화 덕분인지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팀의 전체적인 균형이 무너지니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전반전이 끝났을 때 스코어는 0-3이었다. 선수들은 벤치로 돌아와 주저앉았다. 강도욱은 물병 하나 건네지 않고 그들 앞에 섰다. 그의 얼굴은 분노를 넘어 차가운 멸시로 가득했다.“이게 너희의 수준이다. 투 터치? 공간? 개뿔. 너희는 공을 무서
'반드시 증명하겠어. 당신이 틀렸다는 걸. 그리고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걸.'서윤의 눈에 서린 열기는 밤공기를 뚫고 타올랐다. 최악의 팀과 독종 감독,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싸늘한 시선 속에서 전설의 서막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다음 날 새벽 4시 50분. 서윤은 평소보다 더 일찍 운동장에 나왔다. 하지만 그녀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강도욱이었다. 그는 이미 잔디 위에 작은 콘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해두고 있었다. 밤새 전술 고민을 한 듯, 그의 눈 밑은 약간 거뭇했지만 기세는 여전히 서슬 퍼랬다.
"네가 어제 경기에서 뛴 거리가 6km도 안 돼. 골키퍼보다 조금 더 뛴 수준이지.공격수라는 인간이 상대 진영에서 압박 한 번 제대로 안 하고 숨만 고르고 있던데, 그게 네 최선이라면 넌 축구에 재능이 없는 거다. 재능 없는 인간이 노력도 안 하면 쓰레기지. 당장 짐 싸서 집에 가.""뭐라고요? 저, 저는 이 팀의 주득점원입니다!""주득점원? 한 시즌에 3골 넣은 게 주득점원이면, 이 팀 수준이 알만하군. 내 팀에 무능한 최선은 필요 없어. 증명하지 못하면 사라지는 게 프로다. 한 번 더 말대꾸하면 그 즉시 계약 해지다."
* 독종의 부임전광판의 숫자는 잔인할 정도로 선명했다.0-7. 홈 구장에서 열린 시즌 마지막 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관중석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남은 관객들조차 응원보다는 야유와 오물을 던지며 자리를 뜨고 있었다. 잔디 위에 주저앉은 한서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흙투성이가 된 유니폼을 내려다보았다.가슴에 새겨진 ‘레이븐스’라는 팀명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고 치욕스러웠다. 리그 최하위, 역대 최다 실점, 최다 패배. 그것이 현재 그들이 마주한 성적표였다.심판의 종료 휘슬이 울리자 서윤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