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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eur: 수박빙수
이헌이 떠난 뒤, 아림은 차에 올라탔다. 팔이 가늘게 떨리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림은 차 안에서 바로 잔잔한 음악을 틀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 눈을 감았다. 흔들리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아림이 겪었던 심리적 문제가 몸으로 나타난 신체화 증상이었다.

아림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헌과 지희를 다시 마주한 순간, 오래도록 외면당하고 버려졌던 시간이 한꺼번에 아림의 의식 속으로 밀려들었다.

아림은 어려서부터 소광섭 부부의 손에서 자랐다.

소광섭 부부는 장사로 갑자기 대단한 부를 거머쥐었지만, 사고방식만큼은 케케묵은 남아 선호 사상이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어른들 눈 밖에 난 아림은 어릴 때부터 사람을 몇이나 부릴 수 있는 집에서 자라면서도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다.

집안 사람들은 모두 아림을 군식구로, 돈만 축내는 쓸데없는 딸처럼 취급했다.

아림이 5살이 되던 해, 남동생 소우진이 태어났다.

소씨 집안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고, 우진은 넘치도록 사랑받았다.

아림을 향한 냉대와 구박은 더 심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린 우진이 한결같이 아림을 잘 따랐다는 사실이었다.

식구들이 누나를 괴롭히고 깎아내릴 때면, 우진은 늘 허리에 손을 얹고 앞을 가로막고 서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우리 누나는 밥 축내는 애 아니야! 세상에서 제일 좋은 누난데, 나중엔 다들 감히 우리 누나 쳐다보지도 못할걸!”

고되고 메마른 세월 속에서 남동생은 아림의 삶에 남은 유일한 빛이었다.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집안 사업이 흔들리자 양부모는 모질게도 아림을 다락방에 가두고 학교까지 자퇴 처리해 수능 원서 접수조차 하지 못하게 막았다.

대신 빚을 갚는 조건으로 느물거리는 중년의 졸부에게 시집보내려 했고, 아림이 아무리 빌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수능 당일, 절망 끝에 아림은 삶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그때 흙먼지를 뒤집어쓴 우진이 헐레벌떡 찾아왔다.

우진은 아림의 손을 잡고 그 집에서 도망쳤다.

아림은 바라던 대로 시험을 치렀고, 단번에 수능 전국 수석의 영예를 차지했다.

하지만 시험장 밖에서 기다리던 우진은 쫓아온 양부모를 막다가, 길 건너편 경비초소로 도움을 청하러 뛰어가던 중 트럭에 치였다.

우진은 의식을 잃은 채 깨어나지 못하고 식물인간이 되었다.

병원에서 양부모는 모든 책임을 아림에게 돌렸다. 사람들 앞에서 아림을 때리고 욕하며 분풀이했다.

심지어 깨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우진의 치료까지 포기하려 했다.

아림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했고, 끝내는 협박까지 해 가며 동생의 목숨을 지켜 냈다.

수능 점수가 발표되던 날, 아림이 전국 수석이라는 사실은 소씨 집안의 체면을 세우기에 충분했다.

양부 소광섭은 떠들썩하게 축하 자리를 벌였다.

이후 아림의 지원서를 경영학과로 바꾸려 했다.

아림을 이용해 더 큰 이익을 얻으려는 속셈이었다.

아림은 굳이 다투고 싶지 않았지만, 우연히 우진의 가방에서 일기장을 발견했다.

그때 아림은 알았다. 늘 밝아 보이던 남동생이 오랫동안 우울감 속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뒤틀린 집안과 무거운 압박을 혼자 견디면서도, 온 힘을 다해 아림을 그 지옥에서 구하려 했다는 것을.

아림은 그날 밤 지원서를 바꾸었다. 금령대학교 의과대학을 택했다. 언젠가 우진이 깨어나면, 아림이 직접 남동생을 치료하고 더 많은 사람을 회복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아림은 우진을 금령시에 있는 시립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틈틈이 남동생을 돌봤으며, 밤이면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벌어 간신히 병원비를 충당했다.

졸업 후 봉사활동을 하던 어느 해, 친부모가 아림을 찾아왔다.

그 무렵, 뒤바뀐 운명 속에서 자란 지희는 막 해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상태였다.

그녀는 이미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신예 피아니스트였다.

진실을 알게 된 소광섭 부부는 18년 동안 뒤바뀌어 남의 손에서 자란 친딸을 기어이 되찾아 오겠다고 고집했다.

반면 아림의 친부모인 최태성 부부는 끝까지 내켜 하지 않았다. 온 정성을 다해 키워 온 귀한 딸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떠나보낼 수 있을까?

특히 아림의 친어머니인 민혜정의 태도는 단호했다.

소광섭 부부가 큰 보상금을 받고 두 딸 모두 최씨 집안에 남기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없던 일처럼 평생 서로 모르는 척하자는 것이었다.

소광섭 부부는 분하고 억울하며, 친딸을 발판 삼아 상류층의 삶을 누려 보려 했지만, 최태성 부부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자 결국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일을 키웠다.

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모자라,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까지 제보한 것이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법이었다.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최씨 일가가 운영하는 CM그룹의 주가도 연일 흔들렸다.

결국 최태성 부부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최태성 부부는 출생의 진실을 세상에 밝히되, 지희를 양녀로 들였다.

소광섭 부부 역시 친딸인 지희의 비위를 맞추느라, 그녀가 원하는 대로 성도 이름도 그대로 두게 해 주었다.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아림의 뜻을 물어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핸드폰 벨 소리가 아림의 생각을 끊었다.

아림은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엄마.”

[아림아, 오늘 집에 올 거니?]

아림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밤이었다. 지난 몇 해 동안 최씨 집안의 딸로서, 아림은 누가 묻기 전부터 아무리 바빠도 시간 맞춰 집에 갔다.

물음처럼 들렸지만, 민혜정이 원하는 답은 뻔했다.

아림은 대답했다.

“안 가요. 병원에 일이 남아서요. 식구끼리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전화 너머가 오래 조용해졌다. 끝에 가서는 거의 들리지 않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희랑 이헌이 아까 전화했더라. 너희들 마주쳤다는 얘기는 엄마도 들었어. 그 둘은 이제 막 귀국했고 애까지 데리고 있는데, 한집에 있으면 아무래도 서로 불편하잖니? 그냥 밥 한 끼 먹는 거야. 네가 언니니까 지희를 조금 더 이해해 줘.]

[그때 일을 원망하려면 우리를 원망해라. 지희가 이헌이를 계속 좋아했다는 걸 우리가 알았더라면, 우리 친딸이 아니라서 참고 있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우리도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박 서방에게 시집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수도 없이 들은 말이었다. 아림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아림은 차에 시동을 걸고 병원으로 향했다. 운전대를 잡은 채 민혜정의 말을 끊었다.

“네, 알아요. 그럼 로아는 장 기사님께 부탁해서 제 아파트로 보내 주세요. 제가 돌봐 주시는 분을 보내 놓을게요.”

아림이 이해한 듯 말하자, 전화 너머의 민혜정은 그제야 만족한 듯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번거롭게 뭘 그러니? 애들은 애들끼리 모여 있어야 시끌벅적하고 좋지.]

아림은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금령시 최상위 명문가를 꼽을 때면, 박씨와 최씨 집안은 늘 빠지지 않았다.

아림은 최태성과 민혜정이 되찾아 온 친딸이었지만, 단 한 번도 마음속에 진짜 딸로 여긴 적은 없었다.

5년 전, 아림이 악플 사태의 한가운데에서 허우적댈 때조차 친부모인 최태성 부부는 손 한 번 내밀지 않았다.

이후 이헌이 병원에 압력을 넣어 아림을 내쫓은 뒤로는, 금령시의 어느 병원도 감히 그녀를 받아 주지 못했다.

막다른 길에 몰린 아림은 홀로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개원하고 개업의가 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어렵고 막막했다. 그래도 다행히 운이 따라 주었다.

시립병원에서도 치료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자폐스펙트럼장애 아동 몇 명을 연이어 맡아 증상 완화와 사회 적응을 도왔고, 그 일로 아림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환자와 보호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업계에서 주는 굵직한 상도 여럿 거머쥐었다.

정상급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임상심리전문가들 역시 하나둘 그녀가 세운 심리치료 병원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던 중 해외 학술지에 실은 전공 논문 한 편이 우연히 백요한 교수의 눈에 들었다.

그 일을 계기로 아림은 뒤늦게 뮤엔병원 연수 과정에 초청받았고, 마침내 백요한 교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머지않아 금령시에서는 세계적 규모의 정신건강의학 국제학술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 자리에는 세계적인 정신건강의학계 권위자들과 트라우마 치료 분야의 최정상급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일 예정이었다.

학술대회의 핵심은 아림과 선배, 그리고 백요한 교수 백요한 교수가 5년 동안 매달려 온 연구 과제의 발표였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즉 PTSD의 개입과 치료에 관한 새로운 성과였다.

과장 없이 말해, 그 성과가 임상에 적용되기만 한다면 치료 반응과 회복 가능성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다만 아직, 마지막으로 검토해야 할 세부 사항이 조금 남아 있었다.

아림은 차창을 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남아 있던 혼란을 씻어 갔다.

인생은 짧았다. 아직 할 수 있는 일도, 이루고 싶은 가치도 많았다. 이미 지나간 수렁에 발목을 붙잡힌 채 자신을 옭아맬 이유는 없었다.

...

밤 8시.

아림은 선배 조엄준, 그리고 백요한 교수와 함께한 화상 회의를 막 끝낸 참이었다.

그녀는 커피를 한 잔 따라 들고 조용히 테라스로 나갔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도시는 불빛으로 가득했다.

길 위의 차들은 흐르는 빛줄기처럼 이어졌고, 연말을 맞아 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이 밤하늘에 차례차례 요란하게 피어났다.

아림은 말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백요한 교수가 제기한 핵심 쟁점이 맴돌고 있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치료에서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약물치료를 통한 급성 증상의 안정화와 위기 개입이 우선인가, 아니면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치료 동맹을 바탕으로 트라우마에 초점을 두고 심리치료를 단계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우선인가?

아림과 선배 엄준은 상반된 위치에 서 있었다.

아림은 그것을 직접 겪어 본 사람이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란 단순히 감정이 깊숙이 눌려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외상 기억과 과각성 반응이 몸과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환자가 이미 그 ‘트라우마’에 길들어 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조차 본능적으로 피하게 된다.

그러니 먼저 약물치료를 통해 수면과 불안, 과각성 증상을 안정시키고 난 뒤, 상처의 뿌리를 하나씩 풀어내야 한다는 것이 아림의 생각이었다.

반면 엄준은 환자 본인의 마음을 먼저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감과 상담을 통해 마음의 매듭을 풀어 가는 과정이 우선이며, 섣부른 약물치료는 오히려 반발심을 키울 뿐이라고 보았다.

약물에만 의존하는 치료는 결국 겉으로 드러난 증상만 다스릴 뿐, 상처의 근본에는 닿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아림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이 조용히 빠져나갔다.

그 자리에 따뜻한 우유 한 잔이 대신 놓였다.

“커피는 감정 안정에 별로야. 제니, 언제쯤 선배 말을 제대로 들을래?”

선배 엄준이었다.

엄준은 190센티미터에 가까운 큰 키의 소유자였다.

캐멀색 코트에 금테 안경을 쓴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아림의 곁에 섰다.

단정하고 지적인 분위기 속에 어딘가 느슨한 반항기가 섞여 있었다.

아림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정과 걱정이 함께 담겨 있었다.

아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조금 찔린 듯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라테에도 우유는 들어가잖아요.”

엄준은 눈썹을 치켜올린 채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결국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그는 아림의 곁에 서서 함께 도시를 바라보았다. 굽이치는 명주천과 강변의 불빛, 그리고 사람 사는 기척이 짙게 펼쳐져 있었다.

한참 말이 없던 엄준이 문득 입을 열었다.

“제니... 네 전남편이랑 그 여동생, 돌아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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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30화

    로아는 소파에서 뛰어내렸다. 상자 주위를 한 바퀴, 또 한 바퀴 돌았다. 신이 난 로아의 작은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로봇 친구야!”주방에서 과일을 씻던 아림이 기척에 나와 보니, 거실의 포장 상자와 그 곁에 심상한 얼굴로 선 이헌이 한눈에 들어왔다.미간이 좁혀지며, 걸음이 잠깐 멎었다.“지금 이게...?”“오해하지 마. 마침 회사 신제품이 나와서, 이건 로아 주는 거야. 아... 아저씨의 성의라고 해 두지.”‘아빠’라는 두 글자를, 이헌은 억지로 삼키고 ‘아저씨’로 바꿨다. 그는 가끔 자신과 아림의 결혼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잊곤 했다.이헌의 목소리는 여전히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로아가 몹시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가슴 깊은 곳 어딘가가 먹먹해졌다.로아가 촉촉한 큰 눈을 깜빡이며 두 손으로 입을 채, 놀람과 기쁨 가득한 얼굴로 아림을 올려다보았다.“엄마, 진짜 로아한테 주는 거랬어. 뜯어봐도 돼?”아림이 대답하기도 전에 계단 쪽에서 지희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지희는 연노란색 홈웨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느슨하게 올려 묶었고, 안색은 괜찮아 보였다.그리고 시선은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아림과 들뜬 로아를 스치고, 이내 고급 포장 상자에 닿았다.“이거 신제품이야?”지희는 상자에 찍힌 로고를 손끝으로 쓸며 웃었다.“오빠도 참 아이를 너무 예뻐한다니까. 우리 유빈이 새 로봇 갖고 싶다고 한마디한 것뿐인데 바로 사람 시켜 보냈네.”로아는 큰 눈을 깜빡였다. 얼굴에 피었던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아림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유빈은 이헌의 ‘첫사랑’이 낳은 아이였다.다만 로아가 마음 쓰였다. 딸이 속상해할까 봐, 그게 겁났다.이헌의 미간이 알아채기 힘들 만큼 좁아졌다. “유빈이는 이미 많잖아. 집에만 적어도 네다섯 대는 있고. 이건 로아 거야.”“로아한테... 준다고?”지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목소리가 높아졌고, 말투에는 억울함이 묻어났다.“유빈이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그걸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29화

    방금 민혜정이 아림을 부른 말에도 반가움보다는 의아함에 가까웠다.왜 이 시간에 아림이 여기 있느냐고 묻는 듯한 소리였다.창현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곧 시선을 거두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올린 채 아림을 바라보았다. 말투는 아까보다 더 가벼워졌다.“아림 씨, 아까 저랑 같이 식사하기로 했잖아요. 더 늦으면 음식 다 식어요.”그는 자연스럽게 아림의 숄더백을 받아 자기 어깨에 걸쳤다.민혜정이 몇 마디 더 캐물으려 했지만, 창현은 벌써 차 문을 열고 아림에게 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창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씨 집안 사람들을 대하는 차갑고 거리감 있는 태도와 아림을 대하는 부드럽고 세심한 태도는 누가 보아도 알 정도로 선명하게 대비됐다.이헌의 검은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늘 감정이 없던 듯한 준수한 얼굴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긴 것 같았다.지희는 이헌 곁에 오래 있었기에 그의 성향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지금 이헌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도 금방 알 수 있었다.지희의 눈이 어두워졌다. 곧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숨이 가쁜 듯 말했다.“오빠, 나... 나 너무 힘들어... 숨이 잘 안 쉬어져...”‘최아림 그 몹쓸 것에게 이헌 오빠를 또 빼앗길 순 없어!’‘오빠도, TG그룹 안주인 자리도, 다 내 거여야 해!!’지희의 ‘숨이 안 쉬어진다’라는 말은 모두의 시선을 단번에 돌렸다.민혜정이 가장 먼저 당황했다.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연달아 물었다. 목소리에는 진한 걱정이 묻어났다.“지희야! 왜 그래? 아까 너무 빨리 걸었니?”이헌은 고개를 돌려 지희의 허리를 받쳤다. 눈빛 하나에 기사가 곧바로 차를 가지러 뛰었다.같은 시간에, 뒤쪽의 마이바흐 문은 이미 닫혔다.아림과 창현은 떠났다.이헌은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며칠 뒤.요 며칠 이헌은 자꾸 이유 없이 딴생각에 빠졌다. 서류를 볼 때도, 회의 중에도 그랬다.그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잔뜩 구겨진 미간을 짚고 있는데, 비서 기찬이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28화

    아림은 잠깐 멈췄다. 눈빛은 맑았지만 철저히 거리감을 유지했다.“걱정 고마워. 나 괜찮아.”그 말을 남기고 바로 나갔다.이헌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곧 마음을 다잡고 다시 서류를 펼쳤다.겨우 두 줄을 읽었지만, 단어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생각이 자꾸 흩어졌다.지난 이틀 동안 진료 구역에서 아림과 마주칠 때마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나 병실에서 필요한 말만 주고받을 때나,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동시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뚝딱거리는 감각도 함께 찾아왔다.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하면, 서로를 방해하지 않아도 평소보다 숨이 편했다.그런 느낌은 평생 냉정하고 절제된 규칙 속에서 살아온 이헌을 처음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이틀 뒤 오전.간호사실에서 서명을 마친 아림은 진료실로 돌아가 흰 가운을 벗어 걸고 퇴근 준비를 했다.어제 야간 당직이었던 터라, 인수인계만 마치면 바로 퇴근할 수 있었다.건물 정문을 나서자마자, 멀리 익숙한 마이바흐가 보였다. 차 앞에는 짙은 네이비색 캐주얼 차림의 창현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흰색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오늘의 차림은 사업장에서 보이던 날카로운 분위기가 덜했다. 대신 느긋함과 여유, 또 지나치게 눈에 띄는 분위기가 있었다.아림은 피식 웃음이 샜다. 왠지 지금 창현의 모습은 꽁지깃을 활짝 편 공작새 같았다.아림이 나오자마자 창현은 바로 그녀를 알아봤다. 입가에 웃음이 번졌고, 긴 다리로 몇 걸음 만에 다가와 꽃다발을 내밀었다.“퇴근이에요?”아림이 꽃다발을 받아 향기를 맡으며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오늘 야간 당직이라는 소식을 입수해서, 퇴근길 마중 나왔죠.” 창현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그윽했다.“아림 씨 아직 식사 전일 것 같아서 식당에 자리도 잡아 놨어요. 전망 좋은 자리로... 시간 좀 내 주시죠?”“권 대표님...”아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27화

    점심때가 되자 최태성 부부가 도착했다.민혜정은 보온통을 들고 있었다. 평소의 단정한 여유는 온데간데없고, 긴장과 걱정이 얼굴 가득했다.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눈시울을 붉히고 지희의 뺨을 어루만졌다.“살이 많이 빠졌네.”최태성은 뒤따라 들어왔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표정은 엄했지만, 눈에 담긴 걱정은 숨기지 못했다.이어 지희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기가 아림이 병원이니 마음 놓고 지내라. 필요한 게 있으면 아림이에게 말하고.”그 한마디로 최태성은 지희를 아림에게 맡겼다.지희는 병상에 기대어 앉아 가족들에게 둘러싸였다. 눈가를 붉힌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괜찮아요. 그동안 오빠가 잘 돌봐 줬어요.”말투에는 진한 어리광이 묻어났다.민혜정은 마음이 아파 어쩔 줄 몰랐다. 침대 옆에 앉아 지희의 손을 꼭 잡고, ‘우리 보물 같은 딸이 고생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최태성은 곁에 서 있었다. 말수는 적었지만, 지희를 보는 눈에는 아낌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병실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아림은 흰 가운을 입은 채 문가에 서 있었다. 발이 바닥에 붙어버리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못했다.손에는 입원 서류가 들려 있었다. 지희의 서명을 받으려던 참이었다.하지만 병실 안에 가득한 온기를 보자, 차마 끼어들기가 어려웠다.문가에 선 아림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민혜정은 오래 끓인 전복죽을 지희에게 떠 주며 말했다.“엄마가 아침 내내 끓였어.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지희의 시선이 무심코 문가를 스쳤다. 입꼬리에 도발적인 미소가 어렸다. 곧 두 손으로 그릇을 받아 한입 먹고 감탄했다.“엄마가 끓여 준 건 역시 최고예요!”‘흥, 몹쓸 것. 내 엄마를 빼앗아 가면 뭐 해?’‘지금 네 엄마가 제일 아끼는 건 결국 나잖아?!’“맛있으면 엄마가 내일도 해줄게.”민혜정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목소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다정했다.“왜 안 들어와?”이헌이 먼저 문가에 선 아림을 발견했다.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26화

    하얗게 질린 얼굴, 잘게 떨리는 입술, 흐려진 눈. 아림의 이런 모습에 지희의 눈에 쾌감 한 줄기가 스쳤다.‘몹쓸 것!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잘 살아?’‘내 것을 전부 빼앗아 갔으면서. 사라졌어야 하는 사람은 너잖아!’바로 그때 문이 열렸다.이헌이 문가에 서 있었다. 한 손은 문고리에 얹은 채였다.시선이 먼저 상태가 이상한 아림을 훑으며 미간이 좁혀졌다가, 이어 지희에게 닿았다.지희가 눈물에 젖은 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 그는 곧장 몇 걸음 다가가 지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무슨 일이야?”지희는 말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한가득 억울한데도 아림을 탓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참고 있는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곁눈질로 아림의 반응을 살피며 일부러 이헌의 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팔을 뻗어 이헌의 허리를 감았다.이헌의 몸이 살짝 굳었다. 미간이 더 깊게 구겨졌지만, 끝내 지희를 밀어내지는 않았다.따뜻하고 묵직한 손이 지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다독이듯, 힘이 실리지 않은 손길이었다.그는 조금 전부터 밖에 있었다. 지희가 억울하고도 고집스럽게 묻던 말들을 들었다.지금 지희의 병세는 불안정했다. 그는 자신 때문에 지희의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이헌은 아림을 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그 사실을 깨닫자 아림의 손 떨림은 더 심해졌다. 죽을 것 같은 질식감이 밀려와 숨을 조여 왔다.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신체화 발작이었다.아림은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발걸음이 비틀렸고, 급히 문 쪽으로 향했다.아림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여기에 더 있다가는 죽을 것 같았다.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이헌의 고요한 눈 안쪽에 억눌린 감정이 스쳤다.‘아림이 상태가 이상했는데... 왜 저러지?’오래지 않아 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 이헌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들어온 사람은 아림이 아니었다. 아림에게 아멜디 초콜릿을 선물했던 남자, 엄준이었다.“오늘 치료는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25화

    [이제 괜찮아.]“정말?”[응.]이헌의 말투는 대수롭지 않았다. 마치 별것 아닌 사소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하지만 대답을 마친 뒤, 시선은 무심코 오른팔에 내려앉았다. 그곳에는 아림이 직접 감아 준 붕대가 그대로 있었다.이헌은 무슨 마음이었는지 그날 이후로 병원에 가서 드레싱을 갈지 않았다.아림은 노트를 덮고 뻐근한 콧등을 눌렀다.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당신은 귀한 몸이니, 웬만하면 병원에 가서 사진이라도 찍어 봐. 괜히 미루지 말고.”아림은 남에게 빚지는 일을 싫어했다. 상대가 이헌이라면, 더더욱.[됐어.]아림의 거리감 있는 태도에 이헌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그 차가운에 아림은 짜증이 치밀었다. 더는 권하지 않았다.“마음대로 해. 그럼 이만.”아림은 먼저 전화를 끊었다.그 뒤 핸드폰을 책상 위에 엎어 두고 일어나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랐다.반 잔쯤 마시고 창가에서 한동안 숨을 고른 뒤에야, 자리로 돌아가 보고서 정리를 이어 갔다....금요일.지희는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했다.첫 치료 때의 긴장과 달리, 이번에는 베이지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화장은 정돈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온화하고 예쁜 인상이었다.“교수님, 아림 언니.”지희가 먼저 인사했다. 목소리도 가벼웠다.백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아림은 지희의 혈압을 재고, 지난 며칠 동안 수면과 식사 상태를 물었다. 항목별로 기록을 남겼다.지희의 협조도는 높았다. 답변은 명확했고, 가끔은 먼저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백요한은 지난 치료 기록을 넘겨 보고 안경테를 코 위로 밀어 올렸다.“지희 씨, 오늘 치료 절차는 지난번과 같습니다. 시간은 대략 40분 정도 걸릴 겁니다. 중간에 불편한 점이 생기면 바로 말하세요.”“네.”치료가 시작되자 아림은 곁에서 기록을 맡았다.지희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고, 호흡도 고르게 유지됐다.첫 치료 때 중간중간 울먹이고 떨며 감정이 격해졌던 것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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