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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eur: 수박빙수
이헌이 떠난 뒤, 아림은 차에 올라탔다. 팔이 가늘게 떨리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림은 차 안에서 바로 잔잔한 음악을 틀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 눈을 감았다. 흔들리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아림이 겪었던 심리적 문제가 몸으로 나타난 신체화 증상이었다.

아림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헌과 지희를 다시 마주한 순간, 오래도록 외면당하고 버려졌던 시간이 한꺼번에 아림의 의식 속으로 밀려들었다.

아림은 어려서부터 소광섭 부부의 손에서 자랐다.

소광섭 부부는 장사로 갑자기 대단한 부를 거머쥐었지만, 사고방식만큼은 케케묵은 남아 선호 사상이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어른들 눈 밖에 난 아림은 어릴 때부터 사람을 몇이나 부릴 수 있는 집에서 자라면서도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다.

집안 사람들은 모두 아림을 군식구로, 돈만 축내는 쓸데없는 딸처럼 취급했다.

아림이 5살이 되던 해, 남동생 소우진이 태어났다.

소씨 집안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고, 우진은 넘치도록 사랑받았다.

아림을 향한 냉대와 구박은 더 심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린 우진이 한결같이 아림을 잘 따랐다는 사실이었다.

식구들이 누나를 괴롭히고 깎아내릴 때면, 우진은 늘 허리에 손을 얹고 앞을 가로막고 서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우리 누나는 밥 축내는 애 아니야! 세상에서 제일 좋은 누난데, 나중엔 다들 감히 우리 누나 쳐다보지도 못할걸!”

고되고 메마른 세월 속에서 남동생은 아림의 삶에 남은 유일한 빛이었다.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집안 사업이 흔들리자 양부모는 모질게도 아림을 다락방에 가두고 학교까지 자퇴 처리해 수능 원서 접수조차 하지 못하게 막았다.

대신 빚을 갚는 조건으로 느물거리는 중년의 졸부에게 시집보내려 했고, 아림이 아무리 빌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수능 당일, 절망 끝에 아림은 삶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그때 흙먼지를 뒤집어쓴 우진이 헐레벌떡 찾아왔다.

우진은 아림의 손을 잡고 그 집에서 도망쳤다.

아림은 바라던 대로 시험을 치렀고, 단번에 수능 전국 수석의 영예를 차지했다.

하지만 시험장 밖에서 기다리던 우진은 쫓아온 양부모를 막다가, 길 건너편 경비초소로 도움을 청하러 뛰어가던 중 트럭에 치였다.

우진은 의식을 잃은 채 깨어나지 못하고 식물인간이 되었다.

병원에서 양부모는 모든 책임을 아림에게 돌렸다. 사람들 앞에서 아림을 때리고 욕하며 분풀이했다.

심지어 깨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우진의 치료까지 포기하려 했다.

아림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했고, 끝내는 협박까지 해 가며 동생의 목숨을 지켜 냈다.

수능 점수가 발표되던 날, 아림이 전국 수석이라는 사실은 소씨 집안의 체면을 세우기에 충분했다.

양부 소광섭은 떠들썩하게 축하 자리를 벌였다.

이후 아림의 지원서를 경영학과로 바꾸려 했다.

아림을 이용해 더 큰 이익을 얻으려는 속셈이었다.

아림은 굳이 다투고 싶지 않았지만, 우연히 우진의 가방에서 일기장을 발견했다.

그때 아림은 알았다. 늘 밝아 보이던 남동생이 오랫동안 우울감 속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뒤틀린 집안과 무거운 압박을 혼자 견디면서도, 온 힘을 다해 아림을 그 지옥에서 구하려 했다는 것을.

아림은 그날 밤 지원서를 바꾸었다. 금령대학교 의과대학을 택했다. 언젠가 우진이 깨어나면, 아림이 직접 남동생을 치료하고 더 많은 사람을 회복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아림은 우진을 금령시에 있는 시립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틈틈이 남동생을 돌봤으며, 밤이면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벌어 간신히 병원비를 충당했다.

졸업 후 봉사활동을 하던 어느 해, 친부모가 아림을 찾아왔다.

그 무렵, 뒤바뀐 운명 속에서 자란 지희는 막 해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상태였다.

그녀는 이미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신예 피아니스트였다.

진실을 알게 된 소광섭 부부는 18년 동안 뒤바뀌어 남의 손에서 자란 친딸을 기어이 되찾아 오겠다고 고집했다.

반면 아림의 친부모인 최태성 부부는 끝까지 내켜 하지 않았다. 온 정성을 다해 키워 온 귀한 딸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떠나보낼 수 있을까?

특히 아림의 친어머니인 민혜정의 태도는 단호했다.

소광섭 부부가 큰 보상금을 받고 두 딸 모두 최씨 집안에 남기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없던 일처럼 평생 서로 모르는 척하자는 것이었다.

소광섭 부부는 분하고 억울하며, 친딸을 발판 삼아 상류층의 삶을 누려 보려 했지만, 최태성 부부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자 결국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일을 키웠다.

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모자라,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까지 제보한 것이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법이었다.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최씨 일가가 운영하는 CM그룹의 주가도 연일 흔들렸다.

결국 최태성 부부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최태성 부부는 출생의 진실을 세상에 밝히되, 지희를 양녀로 들였다.

소광섭 부부 역시 친딸인 지희의 비위를 맞추느라, 그녀가 원하는 대로 성도 이름도 그대로 두게 해 주었다.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아림의 뜻을 물어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핸드폰 벨 소리가 아림의 생각을 끊었다.

아림은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엄마.”

[아림아, 오늘 집에 올 거니?]

아림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밤이었다. 지난 몇 해 동안 최씨 집안의 딸로서, 아림은 누가 묻기 전부터 아무리 바빠도 시간 맞춰 집에 갔다.

물음처럼 들렸지만, 민혜정이 원하는 답은 뻔했다.

아림은 대답했다.

“안 가요. 병원에 일이 남아서요. 식구끼리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전화 너머가 오래 조용해졌다. 끝에 가서는 거의 들리지 않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희랑 이헌이 아까 전화했더라. 너희들 마주쳤다는 얘기는 엄마도 들었어. 그 둘은 이제 막 귀국했고 애까지 데리고 있는데, 한집에 있으면 아무래도 서로 불편하잖니? 그냥 밥 한 끼 먹는 거야. 네가 언니니까 지희를 조금 더 이해해 줘.]

[그때 일을 원망하려면 우리를 원망해라. 지희가 이헌이를 계속 좋아했다는 걸 우리가 알았더라면, 우리 친딸이 아니라서 참고 있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우리도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박 서방에게 시집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수도 없이 들은 말이었다. 아림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아림은 차에 시동을 걸고 병원으로 향했다. 운전대를 잡은 채 민혜정의 말을 끊었다.

“네, 알아요. 그럼 로아는 장 기사님께 부탁해서 제 아파트로 보내 주세요. 제가 돌봐 주시는 분을 보내 놓을게요.”

아림이 이해한 듯 말하자, 전화 너머의 민혜정은 그제야 만족한 듯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번거롭게 뭘 그러니? 애들은 애들끼리 모여 있어야 시끌벅적하고 좋지.]

아림은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금령시 최상위 명문가를 꼽을 때면, 박씨와 최씨 집안은 늘 빠지지 않았다.

아림은 최태성과 민혜정이 되찾아 온 친딸이었지만, 단 한 번도 마음속에 진짜 딸로 여긴 적은 없었다.

5년 전, 아림이 악플 사태의 한가운데에서 허우적댈 때조차 친부모인 최태성 부부는 손 한 번 내밀지 않았다.

이후 이헌이 병원에 압력을 넣어 아림을 내쫓은 뒤로는, 금령시의 어느 병원도 감히 그녀를 받아 주지 못했다.

막다른 길에 몰린 아림은 홀로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개원하고 개업의가 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어렵고 막막했다. 그래도 다행히 운이 따라 주었다.

시립병원에서도 치료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자폐스펙트럼장애 아동 몇 명을 연이어 맡아 증상 완화와 사회 적응을 도왔고, 그 일로 아림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환자와 보호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업계에서 주는 굵직한 상도 여럿 거머쥐었다.

정상급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임상심리전문가들 역시 하나둘 그녀가 세운 심리치료 병원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던 중 해외 학술지에 실은 전공 논문 한 편이 우연히 백요한 교수의 눈에 들었다.

그 일을 계기로 아림은 뒤늦게 뮤엔병원 연수 과정에 초청받았고, 마침내 백요한 교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머지않아 금령시에서는 세계적 규모의 정신건강의학 국제학술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 자리에는 세계적인 정신건강의학계 권위자들과 트라우마 치료 분야의 최정상급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일 예정이었다.

학술대회의 핵심은 아림과 선배, 그리고 백요한 교수 백요한 교수가 5년 동안 매달려 온 연구 과제의 발표였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즉 PTSD의 개입과 치료에 관한 새로운 성과였다.

과장 없이 말해, 그 성과가 임상에 적용되기만 한다면 치료 반응과 회복 가능성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다만 아직, 마지막으로 검토해야 할 세부 사항이 조금 남아 있었다.

아림은 차창을 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남아 있던 혼란을 씻어 갔다.

인생은 짧았다. 아직 할 수 있는 일도, 이루고 싶은 가치도 많았다. 이미 지나간 수렁에 발목을 붙잡힌 채 자신을 옭아맬 이유는 없었다.

...

밤 8시.

아림은 선배 조엄준, 그리고 백요한 교수와 함께한 화상 회의를 막 끝낸 참이었다.

그녀는 커피를 한 잔 따라 들고 조용히 테라스로 나갔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도시는 불빛으로 가득했다.

길 위의 차들은 흐르는 빛줄기처럼 이어졌고, 연말을 맞아 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이 밤하늘에 차례차례 요란하게 피어났다.

아림은 말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백요한 교수가 제기한 핵심 쟁점이 맴돌고 있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치료에서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약물치료를 통한 급성 증상의 안정화와 위기 개입이 우선인가, 아니면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치료 동맹을 바탕으로 트라우마에 초점을 두고 심리치료를 단계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우선인가?

아림과 선배 엄준은 상반된 위치에 서 있었다.

아림은 그것을 직접 겪어 본 사람이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란 단순히 감정이 깊숙이 눌려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외상 기억과 과각성 반응이 몸과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환자가 이미 그 ‘트라우마’에 길들어 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조차 본능적으로 피하게 된다.

그러니 먼저 약물치료를 통해 수면과 불안, 과각성 증상을 안정시키고 난 뒤, 상처의 뿌리를 하나씩 풀어내야 한다는 것이 아림의 생각이었다.

반면 엄준은 환자 본인의 마음을 먼저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감과 상담을 통해 마음의 매듭을 풀어 가는 과정이 우선이며, 섣부른 약물치료는 오히려 반발심을 키울 뿐이라고 보았다.

약물에만 의존하는 치료는 결국 겉으로 드러난 증상만 다스릴 뿐, 상처의 근본에는 닿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아림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이 조용히 빠져나갔다.

그 자리에 따뜻한 우유 한 잔이 대신 놓였다.

“커피는 감정 안정에 별로야. 제니, 언제쯤 선배 말을 제대로 들을래?”

선배 엄준이었다.

엄준은 190센티미터에 가까운 큰 키의 소유자였다.

캐멀색 코트에 금테 안경을 쓴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아림의 곁에 섰다.

단정하고 지적인 분위기 속에 어딘가 느슨한 반항기가 섞여 있었다.

아림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정과 걱정이 함께 담겨 있었다.

아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조금 찔린 듯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라테에도 우유는 들어가잖아요.”

엄준은 눈썹을 치켜올린 채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결국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그는 아림의 곁에 서서 함께 도시를 바라보았다. 굽이치는 명주천과 강변의 불빛, 그리고 사람 사는 기척이 짙게 펼쳐져 있었다.

한참 말이 없던 엄준이 문득 입을 열었다.

“제니... 네 전남편이랑 그 여동생, 돌아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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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100화

    명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기고 아림에게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빠져나갔다.두 사람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말을 대놓고 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가 서로에게 남겨 줄 수 있는 마지막 예의였다.아림은 메뉴판을 내려놓고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이헌은 로아에게 일회용 턱받이를 둘러 주고 있었다.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짧게 답했다. “응.”“지금 뭐 하는 거야?”“로아 밥 먹이려고.”아림은 이헌을 바라봤다. 가슴에 눌러 두던 화가 점점 커졌다. 결국 가방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로아야, 가자.”“근데 엄마...”이헌이 고개를 들어 아림을 바라봤다. 지나칠 만큼 차분한 표정이었고 목소리에도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로아 아직 밥 못 먹었어.”아림은 걸음을 멈췄다. 가방끈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갔다.결국 아림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도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이헌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식당을 나갈 때 로아를 안고 문 앞까지 갔는데 뒤에서 이헌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그 의사는 너랑 안 맞아.”이헌은 문 안쪽에 서 있었다. 천장의 밝은 조명이 훤칠한 몸 뒤로 긴 그림자를 늘어뜨렸다.아림은 이헌의 말에 대답하지도,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명훈이 자리를 피했다는 이야기는 결국 민혜정의 귀에도 들어갔다.민혜정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며칠 뒤 다시 전화를 걸어 다른 사람 이야기를 꺼냈다.[아림아, 이번에는 명희 이모가 소개해 준 사람이야. 금융 쪽에서 일하고 조건도 괜찮대. 하나 걸리는 건... 그쪽도 이혼했고 아이가 하나 있어.]아림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그리고 너무 따지지만 마. 너도 이혼했고 로아 키우고 있잖아. 직장 조건이나 수입도 그쪽이 더 낫다는데 일단 만나기라도 해봐. 얘기가 잘 통할 수도 있지.]아림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여기서 거절하면 민혜정이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걸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99화

    로아는 이상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전화 끊어진 거예요? 이모부, 이모부?”[응.]이헌은 주먹을 쥔 채 낮게 물었다. [누가 그런 말 했어?]“외할머니... 엄마 오늘 소개팅 갔는데... 잘되면 그 사람이 엄마 남자친구 된대요.” 로아는 작은 코를 찡긋거렸다. “남자친구가 뭐예요?”통화 너머가 다시 조용해졌다.“이모부...”[로아야. 다음에 엄마가 또 약속 있다고 하면 이모부한테 전화해. 그때 이모부가 남자친구가 뭔지 설명해 줄게.]이헌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통화를 끝냈다.로아는 꺼진 화면을 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아직 안 알려줬는데요...”...사흘 뒤.명훈은 아림에게 도심에 있는 일식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아림은 짙은 남색 허리선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높게 묶었다. 차분하고 맑은 분위기가 두드러졌다.아림이 도착했을 때 명훈은 이미 식당에 도착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림에게 의자를 빼 주는 행동도 자연스러웠다.약속 시간을 정확히 지킨 것만으로도 아림에게는 꽤 좋은 인상이 더해졌다.“아림 씨, 입맛을 정확히 몰라서 제가 먼저 주문하지는 않았어요.” 명훈은 메뉴판을 아림 쪽으로 밀고 직원에게 주문을 조금 기다려 달라는 눈짓을 보냈다.아림은 자리에 앉아 편하게 메뉴판을 들었다. 메뉴를 고르려던 중 시야 한쪽에 낯익은 사람이 들어왔다.키가 크고 늘씬한 남자가 짙은 회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있었다. 목에는 네이비색 머플러를 느슨하게 둘렀고 한 손은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었다.그보다 눈에 더 들어온 것은 이헌이 양갈래 머리를 한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아림은 놀라서 그대로 굳어졌다. 이헌과 로아였다.로아는 아림을 보자마자 이헌의 큰 손을 놓고 짧은 다리로 힘껏 달려왔다. “엄마!”명훈은 멈칫했다. 시선이 아림에게서 아이에게로, 다시 뒤따라오는 이헌에게로 옮겨 갔다.이헌은 훤칠한 체격에 선명하고 차가운 이목구비를 지녔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사람을 저절로 긴장시키는 압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98화

    토요일 오후.민혜정은 맞선 자리를 어떻게든 성사시키려고 일찌감치 아림의 아파트로 왔다.아림이 로아를 자신에게 맡기고 먹빛이 도는 회색 원피스로 갈아입은 뒤 화장까지 마친 것을 확인하고서야 민혜정은 안심한 표정으로 로아를 데리고 나갔다.상대는 진명훈이었다. 금테 안경을 썼고 키는 180센티미터가 조금 넘었다. 오늘은 베이지색 캐주얼 재킷을 입고 있었다.아림이 도착했을 때 명훈은 이미 자리에 앉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차분한 인상이었다.아림이 앉은 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한번 살펴보고 간단히 자기소개를 나눴다.예상대로 명훈은 점잖고 말수가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다만 말할 때는 여유 있고 분명해서 아림에게 꽤 괜찮은 첫인상을 남겼다.명훈은 돌려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림에게 좋은 인상을 받은 만큼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아림 씨, 저는 말을 돌려 하는 편이 아닙니다. 아림 씨 첫인상이 정말 좋았어요. 아림 씨도 괜찮으시면 몇 번 더 만나 보고 싶습니다.”“제 기본적인 상황은 어느 정도 들으셨을 테니, 듣지 못하셨을 만한 얘기를 할게요.”아림은 찻잔을 든 채 명훈을 바라보며 차분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병원 일이 바쁘고 갑자기 수술이 잡힐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만나더라도 자주 시간을 내지 못할 수 있어요.”“진명훈 씨.” 아림은 찻잔을 내려놓고 조심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도 불편한 점은 없어요. 몇 번 더 만나면서 서로 알아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명훈의 눈빛이 밝아졌다. 안경을 한번 올려 쓰고는 배려하듯 먼저 대화할 만한 주제를 꺼냈다.이후의 분위기는 아림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편안하고 안정적이었다.식사는 거의 한 시간 반 정도 이어졌다. 두 사람은 각자의 생활 습관을 얘기했고 명훈은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계획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아림은 내내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명훈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자신이 예상했던 만큼의 거부감이 없었다.명훈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97화

    가장 아끼는 제자에게 환자가 고의로 상처를 입혔다. 백요한은 이 일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지희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치맛자락을 쥔 손에 긴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CCTV 영상은 안 돼. 절대로 이헌 오빠가 보면 안 돼.’그 생각이 떠오르자 지희는 목까지 차오른 불만을 억지로 삼켰다. 고개를 숙이고 몸이 불편한 사람처럼 힘없는 기색을 보였다.“오빠, 나... 몸이 안 좋아. 집으로 데려다줘.”이헌은 지희의 말에 바로 답하지 않고 백요한을 바라봤다.백요한은 표정이 굳은 채 이헌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이헌도 굳게 다문 입술로 가볍게 목례를 건넨 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지희의 표정은 몇 번이나 바뀌었다. 결국 급히 발걸음을 옮겨 이헌을 따라 나갔다....이헌은 저녁 무렵 아림의 집을 찾아왔다.문이 열리자 안쪽에서 은은한 연고 냄새가 흘러나왔다.이헌이 시선을 내리자 아림의 하얀 팔과 손등에 화상 연고가 두껍게 발라져 있는 게 바로 보였다.이헌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입을 열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아림은 미간을 좁히며 현관 앞에 선 이헌을 바라봤다.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꼿꼿하게 서 있는 남자를 대하는 눈은 맑고 차갑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이헌이 손에 든 봉투를 아림 쪽으로 내밀었다.약국에서 나온 봉투였다.“화상 연고랑 소염제.”아림은 받지 않았다.“이것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야?”이헌은 약 봉투를 현관 바닥 한쪽에 내려놓고 반걸음 물러났다. “오늘 일은 미안해.”“됐어.” 아림은 감정이 읽히지 않는 평범한 목소리로 끊었다. “나랑 최지희 사이의 일은 당신이 사과할 필요 없어.”“그동안은 지희 상태랑 치료를 생각해서 문제 삼지 않았어. 이제 내가 치료를 맡는 것도 아니고.” 아림의 표정은 차분하게 굳어 있었다. “앞으로 비슷한 일이 또 생기면 그땐 그냥 넘기지 않을 거야.”이헌은 입술을 다문 채 아림을 바라봤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림은 잠시 기다렸다. 이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96화

    아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텀블러 안에 든 뜨거운 물이 오른 손등과 팔뚝 위로 그대로 쏟아졌다. 텀블러에 물이 반쯤밖에 없었던 게 다행이었지만 흰 가운의 소매가 넓게 젖어 버렸다.아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따가운 통증에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고, 곧바로 흰 가운을 벗었다.문밖에서 기다리던 이헌은 안에서 소리가 나자 바로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들어서자 반소매 셔츠 차림의 아림이 보였다. 손등부터 팔뚝까지 피부가 넓게 붉어져 있어 누가 봐도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책상 위에는 엎어진 텀블러와 물에 흠뻑 젖은 기록지가 널려 있었고 바닥에도 물이 흥건했다.상황을 짐작한 듯 이헌의 미간이 저절로 좁아졌다.“무슨 일이야?”마침 그때 상담실 문이 다시 열리고 백요한이 돌아왔다.아끼는 제자의 팔이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을 보자 백요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이게 무슨 일이야?”지희는 아림을 보며 뜻대로 됐다는 듯 아주 옅게 웃었다.하지만 곧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가를 붉히며 놀란 척 표정을 바꿨다.“언니, 죄송해요. 저,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괜찮으세요?”“너 일부러 그랬잖아.”지희는 속으로 흠칫했지만 곧 이헌의 팔을 붙잡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제가 어떻게 일부러 뜨거운 물을 언니한테 끼얹겠어요? 저 정말 실수한 거예요.”“오빠, 나 믿지?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너 방금 분명히...”“그만해.” 아림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헌이 미간을 찌푸리며 끊었다. “지희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해.”아림은 멍하니 이헌을 바라봤다. 가슴 안쪽에 눌러 둔 상처가 조금씩 번졌다.지희는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아림을 바라보는 눈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도발이 담겨 있었다.‘이제 박이헌의 마음속... 네 위치가 어디인지 알겠지?’‘내가 일부러 그랬으면 뭐 어때?’‘이헌 오빠도 결국 나한테 뭐라고 못 하잖아.’아림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숙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손등을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95화

    아림은 군더더기 없이 논리를 정리해 말했다. 다만 아직 조금씩 떨리는 손끝만이 뒤늦게 몰려온 공포를 드러냈다.이헌은 아림을 한참 바라봤다. 목울대가 낮게 한번 움직였다.무슨 말을 하려던 때 지희가 눈물범벅이 된 채로 달려왔다. “오빠, 오빠, 괜찮아? 아까 왜 그렇게까지...”말을 끝내기도 전에 지희는 아림을 매섭게 노려봤다.‘다 저 여자 때문이야. 다 최아림 때문이라고.’‘최아림만 아니었으면 이헌 오빠가 자기 몸 생각도 안 하고 뛰어들 일은 없었어.’이헌은 지희에게 대답하지 않고 품에서 유빈을 받아 안았다.유빈은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작은 얼굴을 이헌의 목에 묻은 채 어깨를 계속 들썩였다.그때 창현도 로아를 안고 빠르게 다가왔다.창현은 먼저 아림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급히 살폈다. 다친 곳이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눈을 들어 이헌을 느긋하게 훑었다.이헌의 품에서 울음을 삼키는 유빈과, 옆에서 눈물 맺힌 채 이헌의 팔을 붙잡고 있는 지희를 번갈아 봤다.창현이 낮게 비웃었다. “박 대표님, 정말 바쁘시네요.”느슨한 말투에 비꼬는 기색이 섞였다. “자기 아내랑 아이 챙기기도 바쁠 텐데, 이혼한 전 아내와 아이까지 직접 챙길 여유가 있으시고요.”이헌의 표정이 가라앉았다.창현은 대꾸할 틈을 주지 않았다. 아림 앞을 자연스럽게 가린 뒤 고개를 숙여 말했다. “가요, 아림 씨. 로아도 많이 지쳤어요. 뭐라도 먹으러 가죠.”아림은 더 말하지 않고 창현의 품에서 로아를 받아 안았다.“엄마...”로아는 두 팔로 아림의 목을 꼭 감싸고 얼굴을 어깨에 묻고 작은 목소리로 아림을 불렀다.창현은 자연스럽게 아림의 등 뒤로 손을 뻗어 아직 어수선한 사람들과 거리를 만들어 주며 테마파크 출구 쪽으로 걸었다.세 사람의 뒷모습은 곧 붐비는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로아가 아림의 어깨에 엎드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아까 나쁜 사람 잡으러 간 거야?”“엄마는 도와주러 간 거야.” 창현이 아림을 한번 내려다보고 대신 설명했다. “로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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