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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Author: 무구

제1화

Author: 무구
“우리 이혼하자. 재산 정리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

“이혼한 뒤에는 우리 사이에 더는 어떤...”

침대 끝에 앉은 윤단미는 머릿속으로 준비한 말을 다시 되짚고 있었다.

그때 욕실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단미는 몸을 굳혔다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 쪽을 바라봤다.

2초 뒤, 문이 완전히 열렸다.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가 허리에 달랑 수건 한 장만 두른 채 걸어 나왔다.

은은한 침실 조명 아래, 덜 마른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반듯한 턱선을 타고 내려간 물방울은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 위에 맺혔다.

지호건이 점점 가까워지자 단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깊게 숨을 들이쉰 뒤, 머릿속에서 수십 번이나 다듬었던 말을 차근차근 꺼내려 했다.

“우리...”

단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호건이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곧이어 큰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쥔 채 고개를 숙여 입술을 덮었다.

“읏...”

남은 말은 뜨거운 키스에 막혔다.

단미가 호건의 맨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호건은 허리를 단단히 감아쥐고 깊게 입을 맞추며 침대 쪽으로 이끌었다.

호건은 평소 차분하고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침대 위에서는 달랐다.

억눌러 둔 열기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사람처럼 거침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단미를 침대 위로 눕힌 채 입술을 놓지 않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익숙하고 능숙하게 단미가 입은 잠옷의 허리끈을 풀었다.

“잠깐...”

단미는 겨우 입술을 피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나 할 말 있어.”

호건의 움직임이 멎었다. 뜨겁고 가쁜 숨이 가까운 거리에서 얽혔다.

단미를 내려다보는 검은 눈에는 욕망이 짙게 번져 있었다.

“끝나고 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떨어지자 호건은 다시 단미의 입술을 물었다.

단미가 웅얼거리며 꺼내려던 말까지 모조리 삼켜 버리듯 깊고 집요했다.

숨이 흐트러진 단미는 머릿속까지 희미해지는 기분에 눈을 감았다.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내며 다시 말하려 했지만, 호건은 오히려 두 손목을 붙잡아 양옆으로 눌렀다.

이 순간 호건은 늘 말이 적었다. 대신 행동으로 밀어붙였다.

낮은 조명 아래, 침대 위에서 겹친 두 사람 주위로 뜨거운 숨결과 짙은 기류가 번졌다.

...

자정을 훌쩍 넘기고서야 길었던 정사가 끝났다.

밤새 시달린 단미는 기운이 다 빠졌다.

평소라면 이대로 호건의 넓은 품에 파고들어 잠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아직 이혼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준비했던 문장은 이미 엉망이 됐지만, 그래도 말해야 했다.

“나...”

단미는 호건의 가슴에 댄 손으로 밀어내려 했다. 격렬한 정사 뒤라 온몸에 힘이 풀려, 그 힘은 밀어내기보다는 가볍게 건드리는 수준에 가까웠다.

은은한 빛 아래 단미가 눈을 들었다.

눈에는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고, 촉촉한 눈동자는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아 흐릿하게 빛났다.

숨을 고르며 꺼내는 목소리마저 자신도 모르게 부드럽고 달았다.

“나 하고 싶은데... 당신이랑...”

‘당신이랑 이혼하고 싶어.’

그 말을 끝까지 꺼내기도 전에 호건이 몸을 뒤집어 다시 단미 위를 덮었다.

“오늘은 꽤 적극적이네?”

호건이 귓불을 가볍게 깨물며 낮게 웃었다. 잠긴 목소리에는 은근한 뜻과 함께, 기분이 좋아진 사람 특유의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아직 정신이 멍한 단미는 눈만 크게 떴다.

‘뭐라는 거야?’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키스가 귓가에서 뺨으로 옮겨왔다.

“나랑 또 하고 싶어?”

“그럼 해줄게.”

호건은 한 손으로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당겼다. 말이 끝나자마자 입술을 깊게 겹쳤다.

윤단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해준다는 건데?’

‘내가 원한 게 그거라고?’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든 거야?’

‘누가 이걸 원한다고 했어?’

“나... 그게 아니라...”

입술 사이로 겨우 흘러나온 설명은 호건의 열기에 다시 묻혔다. 뜨겁고 강한 기세가 단미를 빈틈없이 감쌌다.

단미는 오래 버티지 못한 채 다시 시작된 격렬한 밤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날 밤은 끝이 길었다.

...

다음 날, 단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정오였다.

그녀는 온몸이 뻐근한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예상대로 방 안에는 호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강울시를 대표하는 대기업 JF그룹의 대표 호건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일 중독자였다.

결혼한 2년 동안 두 사람이 제대로 마주하는 시간은 밤뿐인 날이 많았다. 낮에는 함께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 잦은 출장은 호건의 일상이었다.

단미는 협탁 위 핸드폰을 집어 시간을 보려다 호건이 남긴 메시지를 발견했다.

[오늘 홍주시로 출장 간다. 사흘 뒤에 돌아와.]

‘어쩐지 어젯밤 유난히 급하더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인 이유가 있었다.

단미는 생리 때문에 일주일 가까이 호건과 거리를 뒀던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오늘부터 출장이 예정되어 있었다.

호건은 출장을 앞둔 전날이면 유난히 집요했다. 며칠치 몫을 한꺼번에 미리 채워 두려는 사람처럼 단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단미는 더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은 길지 않았다. 익숙하게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어?]

단미의 손끝이 살짝 오므라들었다.

“응.”

잠깐 정적이 흘렀다. 단미는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지금 통화 괜찮아? 할 말 있어.”

[무슨 일인데?]

“나...”

막 입을 열려던 때, 수화기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먼저 수영복 갈아입고 올게. 이따 수영장에서 봐!]

그 목소리를 듣자 머릿속이 울리는 듯했다. 단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주채림의 목소리였다.

‘그럼 주채림이랑 같이 홍주시에 간 거야?’

‘수영복을 갈아입고, 수영장에서 만난다고?’

‘출장이라며?’

전화기 너머가 몇 초간 조용해진 뒤, 호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지금 처리할 일이 있어. 할 말 있으면 돌아가서 듣지. 먼저 끊을게.]

호건이 먼저 통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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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제30화

    월요일 아침, 병원.의사에게 지금 몸 상태로는 임신중절수술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자 단미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굳었다.“왜요?”단미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지난번 상담할 때는 안 된다는 말씀이 없으셨잖아요.”“그때는 기본 검사만 한 상태였고, 오늘 수술 전에 필요한 정밀검사까지 끝낸 뒤 다 확인한 결과입니다.”담당 의사는 아침에 다시 진행한 검사 결과들을 펼쳐 놓았다.“현재 상태에서 무리하게 임신을 중지하면 출혈과 회복 문제를 포함해 산모의 건강 위험이 상당히 커질 수 있습니다.”“이후 임신 가능성에도 영향을 줄 수 있고, 다른 합병증이 생길 가능성도 있어서 저는 수술을 권할 수 없습니다.”...여린은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문이 열리고 단미가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나오자, 여린은 겁이 나서 그러는 줄 알고 바로 달려가 손을 붙잡았다.“무서워하지 마. 요즘은 마취도 하잖아. 잠깐 눈 감고 있으면 금방 끝날 거야.”단미는 천천히 여린을 바라봤다.“의사 선생님이 내 몸 상태 때문에 수술하면 안 된대.”“뭐? 못 한다고?”여린은 완전히 멍해졌다.“몸이 어떻게 안 좋으면 수술도 못 해?”“나도 정확히 모르겠어.” 단미 역시 정신이 없었다.“전문용어를 너무 많이 설명해서 다 이해는 못 했는데, 쉽게 말하면... 나는 이 아이를 없애면 안 된다는 뜻이래.”여린은 급히 단미를 부축해 옆 의자에 앉혔다. 같이 걱정스러운 얼굴이 됐다.“그럼 이제 어떡해?”단미는 답답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다 핸드폰 알림음을 들었다.화면을 확인하자 호건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알았어.]그 위에는 단미가 아침에 병원에 도착해 보낸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나 지금 병원에 왔어. 오늘 오전 임신중절수술 받을 예정이야. 오후 2시 30분 가정법원 확인기일에는 늦지 말아 줘.]여린이 말했다. “수술을 못 한다면 그것도 운명 아닐까? 이 아이랑 인연이 있다는 뜻일 수도 있잖아.”“그럼 마음 편하게 낳는 쪽도 생각

  •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제29화

    호건에게 화가 나서인지 단미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그러면 됐지?”호건은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입술을 다물었다.단미에게는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대답처럼 보였다.더 말하지 않고 호건을 지나쳐 걸었다.몇 걸음 가지 못해 손목이 붙잡혔다.단미는 돌아서 미간을 찌푸렸다. “또 뭐가 문제야?”호건의 눈빛이 한결 누그러졌다. “임신했잖아. 집까지 데려다줄게.”“필요 없어.”단미는 호건의 손을 힘주어 밀어내고 큰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외래동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단미야!”단미가 돌아보자 여린이 뛰어오고 있었다.“여린아? 네가 왜 여기 있어?”“너 병원에서 검사받는다는데 내가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걱정돼서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여린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 의사가 뭐래? 위가 안 좋은 거래?”단미의 속눈썹이 내려갔다. “병 아니래. 임신이야.”“뭐?”여린의 목소리가 크게 튀었다. 시선이 바로 단미의 배로 내려갔다.“너, 임신했어?”“그럼 이게 좋은 일이야, 나쁜 일이야? 너 지호건이랑 내일이면 이혼 절차 끝나잖아. 지호건한테 말할 거야? 이혼은 어떻게 하고?”호건 이야기가 나오자 단미의 표정이 차가워졌다.“이미 알아. 다음 주 월요일에 임신중절수술 받고 이혼할 거야.”여린이 눈을 크게 떴다. “벌써 말했어? 설마 지호건이 아이 없애라고 한 거야?”단미는 고개를 저었다.병원에서 우연히 호건과 마주쳤고, 검사지를 들킨 일부터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그러니까 네가 스스로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한 거네?”여린은 단미의 손을 붙잡았다. “단미야, 정말... 괜찮겠어?”단미는 평평한 자기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목소리가 낮아졌다.“이 아이는 애초에 기다리던 아이가 아니었어.”아이를 낳으면 호건은 지씨 집안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양육 문제에 개입할 것이다.권력도 배경도 비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미가 호건과 다투면 결국 아이가 지씨 집안으로 갈 가

  •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제28화

    단미는 검사지를 등 뒤로 감춘 채 세게 움켜쥐었다. 떨리는 손끝에 종이가 금세 구겨졌다.임신 사실 자체가 너무 갑작스러웠다. 단미도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내일이면 숙려기간이 끝나고 법원 확인기일이 잡혀 있었다.이 중요한 때 호건이 임신 사실을 알면 이혼 절차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었다.“아무 병도 아니야. 그냥 머리가 좀 ...”말하던 중 호건이 큰 몸을 가까이 붙였다.단미는 긴장해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손에 쥐고 있던 검사지를 먼저 빼앗겼다.“돌려줘!”단미는 놀라 호건의 팔을 붙잡았다.호건은 왼팔을 잡힌 채 오른손으로 검사지를 높이 들어 내용을 읽었다.“임신?”그 두 글자에 단미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호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단미를 봤다. “지금 네가 임신한 채로 이혼하자는 거야? 나 몰래 아이까지 데리고 나가려고?”단미는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무슨 누명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씌워?’‘정말 자기 멋대로 생각하네.’“눈이 있으면 제대로 봐.”단미는 화가 나 검사지를 되찾아 임신 주수가 적힌 부분을 호건 눈앞에 들이밀었다.“임신한 시기가 언제인지 똑똑히 봐. 내가 한 달 전에 내가 임신할 걸 미리 알고 이혼하자고 했겠어?”“이건 당신 때문이잖아.” 단미는 검사지를 호건 가슴 쪽으로 던지며 화를 냈다. “그날 밤 당신이 무슨 굶은 사람처럼 끝도 없이 달려들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됐겠어?”호건은 검사지를 받아 들고 단미를 바라봤다. “너는 책임 없어?”“내가 무슨 책임이 있는데?”호건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날 새벽에는 네가 나 붙잡고 더 하자고 했잖아.”단미의 눈이 동그래졌다.그날 일을 떠올리자 화가 치밀었다. “나는 이혼하자고 말하려던 거였어. 누가 그걸 더 하자는 뜻으로 알아들으래? 당신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만 가득했던 거지.”호건의 표정에 드물게 민망함이 스쳤다. 헛기침을 한번 했다.“네가 말을 끝까지 안 했잖아.”“당신이 말할

  •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제27화

    법적으로 이혼이 성립되기 전 마지막 며칠은 일정이 빼곡했다.멀리 떠날 필요가 없게 되자 갑자기 할 일이 사라졌다.고대하던 목표가 사라져서인지 의욕도 없고 몸과 마음이 축 늘어졌다. 단미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밖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이어진 이틀 동안 단미는 집 밖으로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졸리면 자고, 배가 고프면 배달 음식을 주문했다. 소파와 침대를 오가며 이혼 전 남은 며칠을 그냥 흘려보낼 생각이었다.그런데 숙려기간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밤, 샤워하다가 갑자기 명치 아래쪽이 아파 왔다.통증이 심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단미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챙겨 입고 욕실에서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밖으로 나오자 통증이 다시 사라졌다.사실 이틀 전부터도 배 윗부분이 은근히 아픈 적이 있었다. 오늘처럼 뚜렷하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갑자기 왜 이러지?’예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다.‘위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침대에 누운 뒤에도 신경이 쓰였다.결국 몸을 일으켜 핸드폰으로 증상을 검색했다.[몸에 힘이 없고, 명치 주변이 가끔 아프며 메스꺼움도 있는데 무슨 문제일까요?]검색 버튼을 누르자 여러 결과가 쏟아졌다.아래로 갈수록 무서운 병명이 보였다.만성 위염.위궤양.역류성 식도염.심지어 위암과 관련된 글까지 있었다.단미는 하나씩 눌러 증상을 비교했다.어떤 글을 봐도 자기 상태와 한두 가지씩은 맞는 것 같았다.읽을수록 겁이 났다.‘설마 나... 큰 병이라도 생긴 거 아니야?’긴장하자 조금 전 아팠던 부위가 다시 은근히 뻐근한 듯했다.단미는 배를 누르며 참았다.‘안 돼!’병이 있든 없든 내일 병원에 가서 확실히 검사받아야 했다. 검색 결과만 보고 혼자 겁먹을 수는 없었다.밤새 깊이 자지 못한 단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갔다.소화기내과 전문의 진료를 예약해 증상을 설명했다.의사는 몇 가지를 묻고 검사 처방을 내렸다.결과가 나온 뒤 단미는 불안한 얼굴

  •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제26화

    한 달 넘게 계획해 온 일이 이렇게 갑자기 중단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단미는 소파에 앉은 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이번에는 여린의 영상통화였다.단미가 받자마자 화면 가득 여린의 얼굴이 들어왔다.[단미야, 내일 송별회 때 뭐 먹을래? 고기? 파스타? 아니면 호텔 코스 요리?][난 그냥 강울시에서 유명한 향토 음식 먹으러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경운시 복원현장 들어가면 한동안 못 먹을 거잖아.]단미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해도 돼.”[안 해도 된다고?]여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안 되지. 준호가 사기로 했잖아. 괜히 걔 지갑 걱정해서 그러는 거 아니지?]말이 끝나자 화면 한쪽에서 남자 얼굴이 비집고 들어왔다.[맞아. 네가 이렇게 오래 일하러 멀리 가는 건 처음인데 송별회도 없이 보내면 친구도 아니지!]최준호였다.단미와 여린, 준호는 중학교 때부터 함께 지낸 친구였다. 셋이 오래오래 친구로 지내자고 해 놓고 결국 여린과 준호 둘이 연인이 됐다.단미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말했다. “돈 아껴 주려는 게 아니야. 나 진짜 못 가게 됐어.”[못 가?]두 사람은 동시에 놀라 외쳤다가 서로 얼굴을 바라봤다.여린이 먼저 물었다. [왜? 무슨 일 생겼어?]단미는 한숨을 쉬며 조금 전 들은 내용을 설명했다.여린이 믿기 어렵다는 듯 말했다. [잘 돌아가던 복원 사업을 갑자기 멈춘다고?]단미가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게. 나도 모르겠어.”여린은 안타까운 얼굴이 됐다. [우리 단미 진짜 속상하겠다.][괜찮아. 못 가면 못 가는 거지. 강울시에도 네 전공 살릴 수 있는 일은 많잖아.]준호도 맞장구쳤다. [맞아. 네 실력이면 어디서든 충분히 인정받아.]여린이 말했다. [정 안 되면 우리끼리 복원 스튜디오 차려도 되고.]두 사람이 번갈아 위로하는 걸 보며 단미는 결국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나도 거기에 못 간다고 울 정도로 약하지는 않아.”[역시 우리

  •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제25화

    전화를 끊은 단미는 조금 민망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언제 도착했어? 왜 안 깨웠어?”“방금.”차 안이 좁아서인지 조명이 어두워서인지, 단미는 호건이 자기를 바라보는 눈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저기... 기사님은 왔어?”“왔어.”“아.” 단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신도 빨리 들어가. 이틀 동안 내가 당신한테 여러모로 신세 졌네.”말을 끝내자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렸다.호건도 말없이 따라 내렸다.근처에서 한참 기다리던 기사는 두 사람이 나오자 곧장 다가왔다.단미는 기사에게 말했다. “지 대표의 캐리어는 트렁크에 있어요. 부탁드릴게요.”“네.”기사가 짐을 꺼내러 뒤로 갔다.단미는 그제야 호건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차 키를 달라는 뜻이었다.호건은 말없이 열쇠를 단미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이제 나흘 뒤면 숙려기간도 끝나.”단미는 열쇠를 쥔 채 물었다. “끝나는 다음 날 오전 8시 30분, 가정법원 확인기일에 맞춰서 올 수 있어? 확인받고 바로 이혼신고까지 끝내고 싶어.”밤빛 아래 호건의 짙은 눈이 단미를 오래 바라봤다. 문득 옅게 웃었다. “그렇게 급해?”“응. 꽤 급해.”단미는 숨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정세연과 약속을 마쳤다. 이혼 절차를 끝낸 바로 다음 날 연경남과 함께 경운시 하창동 유적 복원기지로 출발할 예정이었다.호건의 입가에 있던 희미한 웃음이 사라졌다.기사가 호건의 것과 함께 단미의 캐리어도 꺼내 옆에 세워 뒀다.“그럼 5일 뒤에 봐.”단미는 예의를 갖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차 잠금 버튼을 누른 뒤 기사에게 캐리어를 받아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끝까지 호건을 다시 보지는 않았다.호건은 그 자리에 서서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생각에 잠긴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다음 날.단미는 스승 강성훈과 선배 세연에게 가져갈 선물을 모두 정리해 사진을 찍어 정세연에게 보냈다.[스승님이랑 선배 줄 건 이렇게 준비했어. 더 먹고 싶은 거나 필요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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