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6화

Author: 무구
단미는 오후 내내 자기 아파트에서 생활용품을 정리했다.

오정란의 전화를 받고는 막 건물 밖으로 나와 근처 칼국숫집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매일 늦게 들어오는 일 중독자인 호건이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와서 저녁을 먹을 줄 몰랐다.

통화를 마친 단미는 곧장 루아힐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자 식탁 쪽에 앉아 있는 호건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일부러 일찍 왔네.’

‘이혼 얘기를 빨리 끝내고 싶은 모양이지.’

단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오정란이 음식을 내오려 하자 먼저 말했다.

“이모님, 저희 이야기부터 할게요. 식사는 나중에 주세요.”

오정란은 단미가 좋아하는 반찬을 들고 서 있다가 당황한 얼굴로 호건을 바라봤다.

호건은 단미를 한 번 본 뒤 오정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자리를 비우라는 뜻이었다.

식탁에 둘만 남자 단미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내일 아침 가정법원에 갈까?”

호건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윤성산업에 해율만 사업을 줬는데도 부족해?”

단미가 황당한 눈으로 쳐다봤다.

“무슨 말이야?”

‘이혼 이야기를 하는데 웬 프로젝트?’

“친환경 에너지 사업은 윤성산업에 줄 수 없어. 대신 해율만 복합개발에서 손해 보지 않게 해 줄 수는 있어.”

“그게 지금 무슨 뜻인데?”

단미는 몇 초간 생각하다가 그의 오해를 알아챘다.

“설마... 내가 윤성산업을 친환경 에너지 사업에 넣어 달라고 이혼으로 협박하는 줄 알았어?”

호건은 대답하지 않은 채 단미를 바라보며 부정하지 않았다.

단미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결혼할 때 나는 분명히 말했어. 윤성산업을 특별히 챙기지 않아도 된다고. 회사 일은 회사 원칙대로 하라고.”

“윤성산업이 프로젝트를 따든 못 따든 나랑 상관없어.”

단미는 숨을 고르고 다시 분명히 말했다.

“내가 이혼하려는 이유는 더 이상 당신한테 시간도 마음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야.”

호건은 단미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검은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혼하고 나서 윤성산업이 JF그룹 도움을 하나도 못 받아도, 그래도 이혼하겠다는 거야?”

“응.”

단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단호했다.

“난 이혼할 거야.”

윤성산업이 앞으로 잘되든 무너지든 단미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단미는 친정인 윤씨 집안을 위해 호건과 결혼하지 않았다.

자신은 결혼 안에서 사랑을 찾았는데, 호건은 이 관계를 끝까지 이해관계로만 본다는 사실이 퍽 우스웠다.

한쪽은 마음을 믿었고 다른 쪽은 계산을 믿었다. 처음부터 같은 결말을 바라보기 어려운 관계였다.

호건의 눈에는 읽기 어려운 감정이 어른거렸지만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네가 그렇게 정했다면 원하는 대로 하지.”

그 말을 끝으로 호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체격이 옆을 지나갈 때 단미가 물었다.

“그럼 내일 아침 바로 가정법원 갈 거지?”

호건이 옆에서 잠깐 멈췄다.

“그래.”

호건은 뒤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식탁에 혼자 남은 단미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멀어지는 발소리만 가만히 들었다.

조금 뒤 오정란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사모님, 대표님은 식사 안 하세요?”

단미는 빠르게 표정을 정리하고 웃어 보였다.

“아마요. 워낙 바쁜 사람이잖아요.”

‘지금쯤 또 서재에 박혀 일하겠지.’

“그럼 사모님 식사부터 차려 드리고, 대표님 건 나중에 준비할까요?”

“저도 아직 배 안 고파요.”

단미는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단미도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

오정란은 뒷모습을 바라보다 걱정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두 분이 같이 저녁을 먹나 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생겨 이렇게 틀어진 걸까?’

...

주방을 정리하고 나온 오정란은 거실에 놓인 선물 상자를 발견했다.

호건이 귀가하며 가져온 물건이었다.

상자를 들고 바로 위층 서재로 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호건은 책상 앞에서 막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있었다.

재떨이 안의 담배꽁초를 본 오정란은 침울한 호건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단미가 담배 냄새를 싫어해서 호건은 집 안 다른 곳에서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서재에서 늦게까지 일하다 스트레스가 심한 날에나 한두 개비 피운 흔적을 본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그 짧은 사이에 몇 개를 피운 거야?’

‘아까 식탁에서 사모님이 무슨 말을 했길래 대표님이 저렇게 힘들어하지?’

호건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오정란이 정신을 차렸다.

“아, 대표님. 거실에 두고 가신 물건이 있어서 가져왔어요.”

호건은 그제야 오정란이 들고 있는 상자를 봤다. 눈빛이 어두워졌다.

“책상에 둬요.”

“네.”

오정란은 상자를 내려놓은 뒤 또 슬쩍 호건을 살폈다.

할 말이 있어 보이자 호건이 물었다.

“또 뭐 있어요?”

오정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은 안방으로 올라가셨어요.”

호건이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봤다.

“그래서요?”

오정란은 답답하다는 듯 조심스럽게 권했다.

“그 선물, 사모님께 드리려고 사신 거잖아요. 지금 직접 가져가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부부가 싸워도 같은 방에서 얼굴을 맞대다 보면 풀리는 법이다. 선물까지 들고 들어가 달래면 오늘 밤 안에 화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호건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지금이 좋다고?’

‘내일 이혼 신청하러 가는데 선물을 주면 무슨 의미가 되지?’

‘이혼 축하 선물이라도 되나?’

오정란은 호건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더 권하지 않았다.

“대표님, 그럼 전 나가 볼게요.”

“그래요.”

오정란이 나간 뒤 호건은 한동안 선물 상자를 바라봤다. 결국 손을 뻗어 집어 든 뒤 책상 서랍 깊숙이 넣었다.

그날 밤 호건은 서재를 나오지 않았다.

안방에 혼자 남은 단미 역시 밤새 쉽게 잠들지 못했다.

...

다음 날, 단미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옅게 화장하고 가장 좋아하는 원피스를 골라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새 삶을 맞는 날만큼은 멀쩡한 모습이 되고 싶었다.

아직 8시도 되지 않았는데 호건은 이미 1층 다이닝룸에 앉아 있었다.

발소리를 들은 호건이 돌아봤다. 단미의 차림을 본 시선이 잠시 멈췄다.

단미는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걸어오며 손에 든 서류를 꼼꼼히 확인했다.

신분증과 필요한 서류를 모두 챙긴 걸 확인한 뒤에 고개를 들었다.

“가자.”

지금 출발하면 가정법원 업무 시작 시각에 맞출 수 있었다.

호건은 단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아침부터 먹어.”

단미가 뭐라고 하려던 때 오정란이 아침상을 가져왔다.

잠깐 생각한 단미는 결국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함께 먹는 식사쯤은 괜찮겠지.’

깔끔하게 끝내고 각자 갈 길을 가면 된다.

오정란은 상을 차린 뒤 자리를 비웠다.

식탁에는 둘만 남았다.

단미는 맞은편에서 조용하고 반듯하게 식사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얼굴 하나는 정말 잘생겼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짙은 눈썹과 선명한 눈매, 고개를 숙일 때 더 또렷해지는 높은 콧대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

말수가 적고 표정 변화도 거의 없었지만, 정제된 인상과 깊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낮에 호건의 모습은 늘 흐트러짐이 없었다. 셔츠 단추는 목 끝까지 단정하게 잠겨 있었고, 절제된 모습이 오히려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언제나 차분하고 무심한 표정이었다.

조금 뒤 이혼 절차를 밟으러 가는 날에도 호건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중요한 계약 일정 하나 처리하러 가는 사람처럼 잔잔해서, 그에게는 이혼조차 별일 아닌 것처럼 보였다.

단미는 문득 궁금해졌다.

‘지호건 같은 남자는 정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지만 곧 스스로 생각을 끊었다. 쓸데없는 상상에 마음을 쓰고 싶지 않았다.

호건이 좋아하는 사람과 어떻게 지내든 이제 단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혼이 끝나면 이제 두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다.

단미가 그린 미래에는 호건과 다시 만날 일도, 서로의 삶이 얽힐 일도 거의 없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이 결혼의 마지막이어야 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제100화

    이영숙은 직접 집게를 들어 버터간장 새우 한 점을 집어서 단미의 그릇에 올려 줬다.단미는 바로 두 손으로 그릇을 받쳤다.“감사합니다, 할머니.”요즘 단미는 기름진 음식이 전혀 당기지 않았다.하지만 어른이 직접 덜어준 음식을 손도 대지 않는 건 예의에 맞지 않았다.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단미는 새우를 집어 한입 베어 물었다.진한 간장 양념에 버터와 기름 향까지 입안 가득 퍼졌다.윤희가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어때요, 새언니? 괜찮죠? 저 요즘 이거 제일 좋아해요.”좋은 걸 소개했다는 듯 눈이 반짝였다.단미는 억지로 삼켰다.곧바로 속이 뒤집힐 듯 울렁거렸다.하지만 여러 사람이 보고 있어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참고 윤희에게 웃었다.“네, 맛있어요.”호건은 단미의 그릇에 담백한 연근 초무침을 조금 덜어줬다.그러면서 남아 있던 새우는 자연스럽게 자기 그릇으로 가져갔다.윤희가 바로 물었다.“오빠, 왜 그래?”호건은 태연했다.“나도 먹으면 안 돼?”윤희가 어이없다는 듯 테이블을 가리켰다.“저기 접시에 많이 있잖아. 왜 꼭 새언니 그릇에서 가져가?”이영숙이 윤희를 나무라는 척 웃었다.“얘는 그런 것도 모르니.”“네 오빠랑 새언니가 서로 살갑게 챙기는 거잖아.”단미는 속이 더 심하게 울렁거리기 시작했다.입술을 꽉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입을 열었다가는 그대로 토할 것 같았다.호건은 단미가 불편해하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젓가락을 내려놓고 몸을 받쳐 주며 낮게 물었다.“아직 배 안 고프면 조금 있다 먹을까?”그 말을 들은 이영숙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미간을 찌푸린 채 견디는 단미까지 확인하자 표정이 달라졌다.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눈이 밝아졌다.이영숙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김혜정이 불만스럽게 말했다.“밥상에 앉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안 먹겠다는 거니? 어른 앞에서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지.”김혜정은 조금 전 채림 일 때문에 단미가 일부러 까다롭게 구는 거라고 생각했다.“욱...”

  •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제99화

    호건이 할머니를 바라봤다.“어떤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회사 일은 네가 알아서 잘하니 내가 걱정할 게 없지.”이영숙은 눈을 가늘게 떴다.“내가 묻는 건 당연히 네 부부 일이다.”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할머니의 눈을 마주하자 호건은 조금 불편한 듯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이영숙이 물었다.“말하기 싫어?”“할머니, 제 일은 제가 잘 처리할 수 있습니다.”“확실해?”“네.”이영숙은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그래. 네 엄마한테는 충분히 말했으니 앞으로 채림이를 끌어들여 귀찮게 하는 짓은 못 하겠지.”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다가 호건 곁을 지나며 오늘 옷차림을 한번 살폈다.입가에 재미있는 웃음이 번졌다.“괜찮네. 이제는 정면으로만 밀어붙이지 않고 방법을 바꿀 줄도 알고.”이영숙은 손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얼굴 잘생긴 것도 쓸 때는 써야지. 그렇게 꾸미고 다니면 네 아내한테 좀 먹힐지도 모르겠구나.”호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거실.단미는 창가에서 돌아온 뒤 소파에 앉아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윤희가 옆으로 가까이 와 달랬다.“새언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할머니가 새언니 편인데 우리 집에서 새언니 자리 누가 건드리겠어요.”“오빠도 아까 말했잖아요. 새언니는 계속 자기 아내라고.”윤희가 자신 있게 말했다.“그러니까 채림 씨가 이 집 며느리 될 일은 절대 없어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윤희가 보기에도 오늘 호건의 태도는 채림을 좋아하는 남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정말 마음이 있었다면 채림이 그렇게 창피한 얼굴로 집을 나가게 두었을 리 없다.채림이 앞으로 이 집에 들어올 수 있는지는 단미가 알 바 아니었다.단미가 확실히 아는 건 하나뿐이었다. 자신은 이미 이 집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러니 이 집안 일이 어떻게 되든 이제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다.그래도 자신을 위로하는 윤희에게는 웃어 보였다.“네. 알아요.”단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화장실 문

  •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제98화

    이영숙은 한때 강울시 재계를 주름잡던 여장부였으니, 역시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이영숙이 내뿜는 압박감은 단미에게 어딘가 익숙했다.조금 생각해 보니 이유가 떠올랐다.호건에게도 이영숙과 비슷한 기질이 있었다.“정말 답답하구나.”이영숙은 김혜정을 바라봤다. 눈에는 딸 같은 며느리가 왜 이렇게 생각이 짧냐는 답답함이 묻어났다.김혜정이 꾸민 일 정도는 이영숙에게 너무 뻔히 보였다. 굳이 캐묻지 않아도 채림이 이 집에 찾아오게 된 경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예전에 채림이네 집안과 우리 집이 혼담을 논의한 적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왜 다시 그 집 딸을 끌어들여?”“네 며느리 면전에서 망신당하고 싶은 거야?”“누가 네 가족이고 누가 남인지 구분도 못 해?”창밖에서 듣던 단미의 마음이 울렸다.눈가까지 조금 뜨거워졌다.이영숙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감싸 줄 줄 몰랐다.윤정해와 살던 집에서 괴롭힘을 당했을 때는 누구도 단미 편에 서서 이렇게 지켜 준 적이 없었다.김혜정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단미 앞에서 보이던 거만한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어머님, 전 그런 뜻이 아니라...”김혜정이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호건이 정도 조건이면 더 좋은 집안의 배우자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채림이네도 전에 우리가 혼담 상대로 생각했던 집안이었잖아요.”이영숙이 바로 물었다.“네 아들이 지금 미혼이니?”목소리가 낮아졌다.“법적으로 아내가 있는 사람한테 다른 여자랑 또 결혼하라고 할 셈이야? 아니면 멀쩡한 아내 버리고 새 여자 데려오라고?”“우리 집안에 아내를 내쫓고 새 사람을 들이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 전례는 없어.”이영숙은 단호했다.“단미가 없었다고 해도 채림이 다시 우리 집안 며느리가 될 가능성은 없었어.”김혜정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고개를 들어 물었다.“하지만 어머님, 예전에 채림이네를 혼담 상대로 직접 고르신 분도 어머님이잖아요.”“여러 집안 중 그쪽에도 기회를 줬던 건 맞아.”이영숙의 눈이

  •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제97화

    손님을 대하는 이영숙의 태도에는 빈틈 하나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자기 말도 정확히 지키는 사람이었다.차 한잔만 하고 가라고 하고 딱 그 한 잔의 시간만 허락했다.채림이 찻잔을 다 비우자 이영숙이 말했다.“인사하러 와 준 마음을 충분히 받았네.”말을 마친 뒤 아주 자연스럽게 선을 그었다.“이제 점심시간이 다 됐네. 오늘은 손주며느리가 일부러 나랑 밥 먹으러 왔거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단순한 배웅이 아니었다.단미가 이 집의 손주며느리라는 사실을 채림 앞에서 대놓고 못 박는 말이었다.단미도 이영숙의 의도를 알아들었다.채림도 모를 수 없었다.채림은 바로 김혜정을 향해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지금 김혜정이 이영숙의 뜻을 거스를 수 있을 리 없었다.빨리 돌아가라는 듯 조용히 눈짓했다.채림은 마지막으로 호건을 한번 봤다. 그의 표정은 이영숙보다 더 냉담했다.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네. 그럼 다음에 다시 찾아뵐게요.”말을 끝내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갔다.거실이 조용해졌다.이영숙이 갑자기 불렀다.“장 집사.”집사 장수한이 바로 앞으로 나왔다.“네, 회장님.”“저 선물들 들고 나가서 돌려보내게. 우리 집은 그 선물 받을 필요 없어.”“알겠습니다.”장수한은 채림이 테이블 위에 두고 간 선물 상자들을 들고 바로 뒤를 따라 나갔다.집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이영숙은 단미에게 다정하게 웃었다.“단미야.”“너는 윤희랑 여기서 조금 놀고 있을래?”단미는 이영숙이 뭘 하려는지는 몰랐지만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할머니.”이영숙은 김혜정과 호건을 돌아봤다.“너희 둘은 나 따라와.”말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서재로 향했다.호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이 집안을 지탱한 사람은 이영숙이었다.지금은 공식적으로 집안의 실무와 사업 경영 일선에서 한발 물러났지만 가장 큰 어른으로서의 무게는 그대로였다.이영숙의 한마디는 이 집안에서 늘 가장 크게 작용했다.김혜정의 표정에 긴장이 스쳤다.호건

  •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제96화

    윤희는 호건을 향해 입을 삐죽였다.김혜정은 호건이 단미 편을 드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호건아, 너 지금...”“됐다.”이영숙이 김혜정을 바라봤다.“너 이 집에 시집온 지 몇 년인데 나한테 명절 선물을 따로 챙겨 준 적이 몇 번이나 있니?”“네 며느리가 이번에 딱 한 번 못 챙겼다고 그게 그렇게 불만이냐?”괜히 단미를 지적했다가 자기 흠만 들추게 된 김혜정은 민망해졌다.목소리도 바로 작아졌다.“어머님, 저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이영숙은 더 상대하지 않았다.대신 주머니에서 붉은 종이로 된 작은 부적 하나를 꺼내 단미 손에 올려 줬다.“이거 받아. 할머니가 절에서 너 주려고 받아 온 거야.”단미는 두 손으로 받았다.“감사합니다, 할머니.”윤희가 옆에서 몸을 기울여 구경했다.“어? 할머니, 제가 받은 거랑 새언니 거랑 다르네요?”“네 건 평안 부적이고, 단미 건 부부화합 부적이니까 다르지.”이영숙은 말하면서 단미 것과 똑같은 부적을 하나 더 꺼내 호건에게 건넸다.“이건 네 거다.”윤희가 궁금한 듯 물었다.“부부화합 부적이 뭐예요?”“부부가 서로 마음 맞춰 잘 지내라고 기원하는 부적이지.”그 말을 듣자 단미는 손에 든 종이가 갑자기 뜨거워진 것처럼 느껴졌다.반대로 호건은 거리낌없이 부적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감사합니다, 할머니.”단미가 부적을 들고 아무 반응도 못 하자 이영숙이 웃으며 덧붙였다.“스님이 기도까지 정성껏 올려 준 거라 영험할 거야.”단미는 더 난감해졌다.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큰 손이 부적을 가져갔다.호건이었다.“내가 가방에 넣어 줄게.”단미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안쪽 포켓에 넣었다.그때 집안 직원 한 명이 거실로 들어왔다.“회장님, 찾아오신 손님이 있습니다.”이영숙이 의아해했다.“내가 돌아왔다는 건 아직 밖에 알리지도 않았는데 누가 왔니?”“주채림 씨입니다.”단미의 표정이 굳었다.반사적으로 호건을 한번 바라봤다.‘그래서 오늘 저렇게 차려입은

  •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제95화

    본가로 향하는 차 안.단미는 다시 옆의 호건에게 시선을 줬다.아무리 봐도 오늘 옷차림은 일부러 신경 써서 꾸민 것 같았다.단미가 갑자기 물었다.“오늘 본가에 다른 손님도 와?”“아니.”호건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왜?”“그냥.”예전에는 본가에 갈 때 굳이 이렇게까지 옷과 머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오늘은 왜 저러나 싶었다.그러다 호건이 오늘 하루 쉰다는 말을 떠올리자 단미의 눈꺼풀이 가볍게 움직였다.“설마 오늘 본가에 하루 종일 있는 거야?”“응.”호건은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할머니한테 오늘 쉰다고 말씀드렸어. 하루 종일 같이 있어 드릴 수 있다고.”단미의 표정이 바로 달라졌다.‘본가에 하루 종일 있다니.’‘우리 이미 이혼했다는 걸 누군가 눈치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당신 왜...”호건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할머니가 너 많이 보고 싶어 하셨어. 네가 하루 같이 있어 드릴 거라고 하니까 정말 좋아하시더라.”단미가 하려던 말이 그대로 막혔다....차가 본가 저택에 도착했다.두 사람은 함께 내렸다.호건은 단미 곁으로 가 손을 잡으려 했다.단미가 피하자 단미의 귀 가까이로 몸을 숙여 낮게 말했다.“할머니 눈치 빠르신 거 알잖아. 평소보다 조금 친하게 보여야 안 들켜.”이영숙은 오랫동안 사업을 이끌어 온 사람답게 사람의 작은 변화도 잘 읽었다.쉽게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단미가 잠깐 망설이는 사이 호건은 손을 잡았다.가느다란 손가락을 가볍게 눌러 쥐며 말했다.“가자, 여보.”단미는 입술만 꾹 다물었다.‘진짜 바로 몰입하네.’호건에게 손을 잡힌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거실에는 김혜정이 일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긴 소파에는 이영숙이 앉아 있었고 윤희가 바로 옆에 친근하게 붙어 있었다.윤희는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보여 주고 있었고 두 사람은 함께 웃고 있었다.윤희가 말했다.“할머니, 이거 진짜 웃기죠? 우리 과 친구가 찍은 영상이에요.”이영숙이 웃었다.“친구가 재주가 있구나.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