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구가 얼굴 가득 수치심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며, 시후는 그에 대한 인상을 조금 바꿨다. 처음에는 그저 부귀영화를 탐하는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그래도 양심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한편, 나훈구 자신도 이렇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건 오랜만이었다. 사실 그는 시후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런 심경을 밝힌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 말들을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었고, 더 이상 참기 어려워 속 시원히 털어놓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늘 이런 이야기를 나눌 적절한 상대를 찾지 못하다가, 우연히 시후 앞에서 마음을 열게 된 것이었다.이에 시후는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정부는 언제나 시민들을 포용하는 법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해외로 나간 사람들이 많았지만, 정부는 늘 따뜻하게 받아줬어요. 그리고 정부에서도 자금 지원을 하여 인재를 해외로 내보내는 이유가 모든 사람이 반드시 돌아와서 정부를 위해 봉사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중 일부라도 돌아와서 정부를 위해 힘이 되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 중간에 잃어버린 인재들은 그냥 자연스러운 손실일 뿐입니다." 잠시 말을 멈춘 후, 시후는 다시 말했다. "이건 마치 스티로폼 박스로 얼음을 운반하는 것과 같아요. 아무리 단단히 포장하든, 운반 중에 일부는 녹아 없어지겠죠. 하지만 상관없어요. 운반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남아 있는 얼음이 있다면, 그 노력은 가치가 있는 거니까요."나훈구는 순간 놀랐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사실 나는 처음에는 미국의 화려한 모습에 현혹된 거였어. 여기가 더 큰 무대이고, 여기서라면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렇다고 정부를 잊은 건 아니거든... 오히려 속으로는 ‘성공하면 몇 배, 몇 천 배로 한국에 보답해야지’라는 마음이 있었어. 그런데 나 같은 사람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평범한 사람이 되어 버렸네..."그렇게 말하며, 나훈구
그 후, 나훈구는 또 다른 많은 선배들이 미국의 벤처캐피털에서 모은 자금을 활용하여 자금을 받아 한국으로 돌아간 뒤, 한국에서 유명한 스타 기업들에 대거 투자하는 모습들도 보았다. 그들은 단순히 기업들을 세계적으로 정상급의 회사로 성장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몸담고 있던 투자은행에도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었으며, 스스로도 명성과 부를 얻었다. 그들중 일부는 최고의 투자자로 추앙 받으며, 책을 출판하고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이 모든 것을 지켜본 나훈구는 큰 자극을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 학업을 마친 후, 단순히 한국으로 돌아가 공기관의 직원이나 공무원이 되는 삶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앞서 성공한 사람들처럼 정상에 올라, 우수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성공한 후, 당당하게 귀국하여 위대한 회사를 창립하거나, 위대한 기업들에 투자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떠한 산업이든 최고의 인재들이 설 자리는 극히 협소한 법이다. 수백만 명에 달하는 유학파 엘리트들 중, 실제로 정상에 오른 사람은 고작 몇 백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운칠기삼’이라는 말도 있듯이 최고가 되려면 적절한 때, 적절한 장소, 적절한 사람이 모두 갖춰져야 한다. 이것은 결국 한 사람의 단순한 노력만으로는 절대 정상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뜻했다.나훈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야심 찬 꿈을 품고 미국에 남았지만, 현실은 그에게 냉혹한 시련만을 안겨주었다. 유학 초기 몇 년간은 이상을 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계를 위해 분투해야 하는 날들이 늘어났고, 결국 점점 평범한 사람이 되어갔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나훈구는 시후와 점점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속마음을 털어놓을수록,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비행기는 점점 착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후는 그에게 휴지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 "형님, 멕시코는 형님한테 맞는 곳이 아닙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표를
나훈구와 함께 가기로 결정한 시후는 곧바로 그 다음 해야 할 말과, 발생할 수 있는 두 가지 시나리오 및 각각의 대응 방안을 정리했다. 그는 먼저 자신도 선원이 되고 싶다는 제안을 나훈구에게 해볼 생각이었다. 만약 나훈구가 이를 거절한다면, 블랙 드래곤의 대원들이 그를 공항에서부터 몰래 미행하며 그를 연결해 줄 조직의 은신처를 찾아낼 수 있도록 할 계획이었다.반면, 나훈구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다음은 그를 연결해 주는 김미희의 조직원이 이를 받아들일지 여부가 관건이었다. 만약 접선자가 이를 허락한다면, 시후는 나훈구와 함께 조직 내부로 잠입하여 적들의 동향을 직접 파악할 수 있다. 만약 접선자가 이를 거절한다면, 그는 처음 계획대로 나훈구를 미끼로 삼아, 몰래 조직을 추적할 작정이었다.그는 마치 즉흥적인 제안을 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나훈구에게 말했다. "형님, 어차피 저도 멕시코에선 할 일이 없는데, 그냥 형님 따라가서 같이 선원이나 할까요?"나훈구는 시후가 자신과 대화가 잘 통하는 젊은이라고 느꼈기에, 크게 고민하지 않고 쾌활하게 말했다. "좋지! 근데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고, 일단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추가로 사람을 구하고 있다면, 같이 갈 수 있을 거야.""좋습니다!" 시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님, 부탁 좀 드릴게요."나훈구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에이, 뭘 부탁까지야. 근데 자네는 이름이 뭐라고 했지?""시후입니다. 형님은요?""나훈구라고 하네."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는 동안, 시후는 휴대전화의 비행기 모드를 해제하고 성도민에게 단 한 줄의 메시지를 보냈다. "계획 변경, 상황에 맞춰 대처."그 후, 비행기가 완전히 멈추자 그는 나훈구와 함께 짐을 챙기고 비행기에서 내렸다.입국 심사를 기다리며, 시후가 나훈구에게 물었다. "형님, 공항에 누가 마중 나오는 건가요? 아니면 우리가 직접 이동해야 하나요?" 나훈구가 대답
피켓을 들고 있던 젊은이는 나훈구를 보자 신중하게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한 장의 사진을 열어 위아래로 대조해보았다. 인사를 건넨 사람이 나훈구임을 확인한 후, 그는 옆에 한 명의 동양인 사내가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경계하며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죠? 당신과 같이 온 겁니까?"나훈구는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는 은시후라고 합니다. 비행기에서 알게 된 교포인데, 내 옆자리에 앉았어요. 한국에서 빚을 갚지 못해 도망쳐 나왔다고 하는데, 멕시코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선원이 되러 간다고 하니, 자기도 해보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어요. 혹시 아직 사람을 구하십니까?"그러자 옆에 있던 시후도 서둘러 말했다. "저는 고된 일도 불평 없이 잘 하는 편이라서, 어떤 힘든 일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그러자 젊은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요. 윗사람에게 전화해서 물어보죠." 그는 그렇게 말한 뒤 휴대전화를 들고 멀리 나갔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 반대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났나?""네, 데리고 왔습니다. 그자가 방금 비행기에서 내렸어요."상대는 다시 물었다. "신원 확인은 했나? 김미희가 제공한 정보와 일치하나?"젊은이는 급히 대답했다. "이미 확인했습니다. 확실히 본인 맞습니다.""좋아." 상대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곧장 데리고 와. 가는 길에 조심하고, 절대 눈치채지 못하게 해."젊은이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형님, 그런데 여기에 좀 문제가 생겼습니다.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나훈구가 비행기에서 또 한 명의 한국 젊은이를 알게 됐습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꽤 친해진 것 같아 보였습니다. 데려온 자도 마땅한 직업이 없어서 나훈구를 따라 선원이 되고 싶어 하더군요. 지금 저한테 우리 쪽에서 사람을 더 구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까요?"상대는 잠시 침묵하더니 엄숙한
이때 젊은 사내는 마침내 한숨을 돌렸다. 그는 신난 듯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은 후, 몸을 돌려 시후와 나훈구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방금 자신이 윗사람과 통화하며 보고한 모든 과정이 시후의 귀에 생생하게 들렸다는 사실을.시후는 한편으로 이 조직의 경계심에 감탄하면서도,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이토록 철저한 계략과 신중한 행동도 결국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조심스럽고 영리하게 행동한다 해도, 지금부터는 어떤 수단을 써도 몰살당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젊은 사내는 자신에게 닥쳐올 위기를 꿈에도 모른 채, 나훈구를 하나 데려오면서 덤으로 한 명 더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기분 좋게 시후에게 말했다. “운이 정말 좋네요. 보통 우리 회사에서는 사람을 뽑을 때 굉장히 까다로운 절차를 거칩니다. 사전에 자료를 제출해야 할 뿐만 아니라, 철저한 건강검진까지 통과해야 겨우 기회를 얻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배가 곧 출항하는데 인원이 부족해서요. 혹시 관심 있으면 저랑 같이 가서 면접을 보면 됩니다.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바로 일할 수 있을 겁니다.”시후는 일부러 신난 듯 물었다. “그럼 선원 월급은 얼마나 되나요?”젊은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한 달에 5천~6천 달러 정도 받습니다. 물론 성과와 임무 완수 능력에 따라 조금 달라질 수도 있고요.”“좋네요.” 시후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젊은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바로 출발하죠. 여기서 엔세나다 항구까지는 대략 100km 정도 가야 합니다.”두 사람은 흔쾌히 동의했고, 젊은 사내의 안내를 따라 공항 밖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들은 한 대의 쉐보레 픽업트럭 앞에 도착했다. 운전석에는 이미 한 명의 멕시코인이 앉아 있었다. 남자는 덩치가 크고 얼굴이 험악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누가 봐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젊은 사내는 조수석 문을 열며 시후와 나훈구
젊은 사내가 시후와 나훈구에게 먼저 가족에게 전화를 걸라고 한 이유는, 바로 차 안에 신호 차단 장비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차가 도시를 벗어나면 그는 곧바로 차단 장비를 가동할 예정이었고, 기지국이 두 사람의 휴대폰 이동 경로를 기록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휴대폰 통신은 모두 지상의 기지국에 의존한다. 많은 수의 지상 기지국들은 넓은 지역이 서로 겹치기 때문에, 도시에서는 사실상 사각지대 없이 통신 범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휴대폰은 항상 신호가 가장 강한 기지국을 자동으로 찾아 연결되며, 이동할 때마다 가장 가까운 기지국으로 접속을 전환한다.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면, 특정 휴대폰이 언제 어떤 기지국에 접속했는지 기록을 통해 이동 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 만약 휴대폰을 이용해 누군가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휴대폰과 기지국의 접속시간, 그리고 구체적인 정보만 불러온다면 이동 루트를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곧 범죄 조직의 은신처의 구체적인 위치가 발각될 수 있다는 위험을 의미하는 것이다.그래서 젊은 사내는 아까 일부러 멕시코의 인프라가 좋지 않다고 말하며, 신호 차단이 발생할 것을 미리 예고한 것이다. 젊은 사내는 이렇게 하면 나중에 두 사람이 휴대폰 신호가 끊겨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픽업트럭이 공항을 출발해 남쪽으로 향했고, 약 10여 km를 달렸을 때, 젊은 사내는 조용히 조수석 아래쪽을 더듬어 숨겨진 스위치를 눌렀다. 이 스위치는 바로 신호 차단 장치의 전원 버튼이었다.버튼을 누르자, 차량 주변 5미터 범위 내에서 모든 신호가 완전히 차단되었고, 휴대폰은 물론 위성 신호조차 수신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나훈구는 시후와 이야기하며 아내와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채팅을 하던 중 갑자기 휴대폰 신호가 서비스 없음으로 바뀌었다.그는 순간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어, 벌써 신호가 끊겼네...?"젊은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아, 이건 멕시코에서는 흔
나훈구의 휴대폰 화면에 적힌 문장을 본 시후는 깜짝 놀랐다. 그는 나훈구가 이렇게 빠르게 이상한 점을 눈치챌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나훈구의 휴대폰을 건네 받으며, 한편으로는 조용히 타이핑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 "와, 형님! 그런데 아드님이 형님이랑 전혀 안 닮았네요. 훨씬 더 잘생긴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시후는 휴대폰에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 다시 나훈구에게 휴대폰을 건넸다.나훈구는 휴대폰을 받으며 웃었다. "하하... 우리 아들이 엄마를 닮았어. 사실 나야 뭐 생긴 게 별로지만, 우리 와이프는 엄청 예쁘거든. 잠깐만 있어 봐, 젊었을 때 사진 좀 찾아볼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계속 휴대폰을 조작하며 타이핑했다. "아이고, 휴대폰에 사진이 너무 많네. 2~3만 장은 되는 것 같아. 찾는 것도 일이야."잠시 후, 그는 시후에게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 "자, 봐 봐. 이게 우리 결혼식 때 사진이야. 그때는 포토샵이나 필터 같은 게 없었다고."시후가 휴대폰을 보니, 거기에는 사진이 아니라 긴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 글을 본 시후는 나훈구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나훈구가 성급하게 행동하는 걸 막아야 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웃으며 말했다. "와, 형수님 정말 미인이셨네요!" 그러면서 그는 휴대폰에 이렇게 적었다. 형님, 그 신호탑이 고장 난 건 아닐까요? 이런 지역에서는 신호탑이
이러한 상황에서 도망치려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싸운다 해도, 싸움의 결과는 죽음의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상대는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고, 총까지 지니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하면 저들은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길 것이고, 그러면 자신과 시후는 이 황량한 들판에 시체로 버려질 게 뻔했다.나훈구는 미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멕시코의 상황을 상대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이 나라에는 무장 범죄 조직이 도처에 차 있었고, 그들의 인원 수는 경찰과 군대를 합친 것보다도 많을 정도였다. 그러니 이곳에서 범죄 조직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길거리에서 자전거를 훔치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었다. 일반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멕시코의 부호나 정치인, 고위 관료들조차도 수시로 납치당하거나 암살당하는 일 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런 곳에서 외국인 관광객 두 명이 죽는다는 건, 멕시코 경찰 입장에서 보면 그냥 한 PC방 앞에서 자전거 두 대가 사라진 것보다도 하찮은 일이 될 것이었다.이런 현실을 떠올리니, 나훈구는 긴장되고 불안했지만, 함부로 움직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시후가 한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지금 당장 먹고 살기도 빠듯한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가 굳이 자신의 목숨을 노릴 이유가 없었다. 혹시라도 납치해서 가족에게 몸값을 요구하려고 해도, 애초에 자신의 집안은 완전한 마이너스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빚더미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아내가 가진 돈을 전부 긁어 모은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공항까지 자신을 태우러 온 기름값조차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후의 분석대로, 이놈들은 자신을 단순히 노예처럼 부려먹으려고 데려가는 것일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지옥 같은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최소한 목숨은 부지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옛말에도 차라리 살아서 고생하는 게 낫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산이 남아 있으면 땔감이 마를 일은
안산의 갑작스러운 분노 섞인 외침에 Samson 그룹 삼형제는 일제히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비록 모두가 이미 같은 결론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아버지인 안산이 직접 그렇게 말하자, 그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안태풍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저 자들이 우리와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기에, 20년 동안이나 집요하게 우리를 노린 거죠?”안재남도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 집안이 자산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큰 잘못을 저지른 일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요...! 그동안 우리 집안의 자산 대부분은 당시 엔젤투자에서 비롯됐고, 게다가 누나는 실리콘밸리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던 인물이었어요. 그런데 누가 우리와 그렇게 원한 관계에 있다는 거죠?”안충주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뭔가를 얻어내고자 하는 걸 수도 있지.”안재남이 물었다. “형 말은... 돈을 노린 다는 거야?”“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안충주가 말했다. “하지만 저들이 이토록 정교하고 집요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단순한 증오심이나 원한 때문은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그러자 안산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만약 돈이 목적이라면, 굳이 우리 전부를 죽일 필요는 없지 않겠니? 요즘은 대부분 자산을 디지털 형식으로 가지고 있기에 은행 계좌나 증권 계좌, 신탁 계좌에 숫자로만 남아 있다. 그러니 우리를 죽인다고 해도 그 자산이 그들 손에 들어가는 건 아닐 것 아니냐!”안충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바로 저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네 사람은 곧 깊은 침묵에 빠졌다.그때, 막내딸 안유진이 문을 두드리며 밖에서 말했다. “아버지, 배유현 회장이 조금 뒤에 찾아 뵙고 싶다고 전화가 왔는데요.”“배유현...?” 안산은 인상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배유현 회장이 누구냐?”안충주가 얼른 말했다. “아버지, 또 잊으신 거 아니죠? 아침에 말씀드렸잖아요. 우리가 사건을
그 순간, 안태풍, 안충주, 그리고 안산 모두의 얼굴이 일제히 굳어졌다.안태풍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큰 누나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 너는 권아현을 만났고... 권아현은 이번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네 곁에서 무려 19년 동안 숨어 지냈어... 우리를 죽이려 한 자들과 누나가 그 해에 죽었던 일은 분명 관련이 있는 거야!”안산은 경악하며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놈들은 예선이와 은 서방을 죽이고도 모자라, 재남이 곁에 무려 19년이나 묵혀 놓은 시한폭탄을 이번에 터뜨린 셈이군... 대체 이 놈들은 뭘 노리고 있는 거지?! 만약 우리 집안을 없애는 게 목적이라면, 왜 지금까지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린 거냐고?”“그러게 말입니다...” 장남 안충주 역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라면, 뭔가 깊은 원한을 품고 있을 때 진작에 손을 썼겠죠. 굳이 지금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을 텐데...”안산이 말했다.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이 자들이 우리에게 대체 얼마나 큰 복수심을 품고 있길래, 이렇게까지 큰 판을 벌이는 건지 말이야...”안재남은 참다 못해 말했다. “아버지, 형님들... 꼭 제 아내를 19년 전에 그 조직에서 일부러 저에게 심어놓은 인물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잖아요? 중간에 회유되었거나, 협박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그럴 리 없어.” 안충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만약 네 아내가 중간에 회유된 것이라면, 그 집안 가족들 역시 그때 함께 배신했겠지. 그런데 그 집안의 일련의 행동들은 그런 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잖아. 그러니 나는 오히려 권아현과 그 일가 전체가 애초부터 철저하게 설계된 함정이라고 판단한다.”안태풍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이어서 안재남을 바라보며 물었다. “재남아, 너와 권아현이 처음 만났을 때 구체적인 상황을 떠올릴 수 있겠어?”안재남은 말했다. “그 당시 내가 석사 2학년이 막 시작되었을 때였는데, 아내는 막 석사에 입학했었지. 신입
유럽과 미국에서는 가족 신탁 상품이 매우 신뢰할 수 있는 자산 보호 방식으로 여겨진다.한국에는 ‘부자는 삼대를 넘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부모 세대가 어렵게 일군 부를 자손 세대가 사치스러워 함부로 낭비하고, 눈은 높지만 능력은 부족하여 유산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상황은 쉽게 가족의 파산으로 이어지고, 하룻밤에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이것은 자손 세대의 능력과 인품이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일단 능력이나 인격 중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가문의 몰락은 피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인재 외에도 천재지변 같은 변수도 존재한다.그러나 가족 신탁은 이러한 인재와 천재지변의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먼저 자신의 자산을 신탁에 넣는 순간, 겉으로 보기에는 본인조차 해당 자산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자산은 특정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만 자녀나 지정된 상속인이 받을 수 있다. 따라서 훗날 중대한 문제가 생겨 가문이 빚더미에 앉게 되거나 파산을 하게 되더라도, 이 가족 신탁은 정부나 채권자에 의해 임의로 처분될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유럽과 미국에 있는 유서 깊은 가문들이 여러 세대, 심지어는 수십 세대에 걸쳐 부를 유지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할 것이다.비록 권아현 집안 식구들은 현재 모두 자취를 감췄지만, 그들의 자산은 이미 모두 가족 신탁으로 옮겨졌다. 이는 더없이 안전한 보관 방식으로, 권아현의 집안 식구들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기업 운영에는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으며, 자산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예기치 않은 상황이 생길 걱정도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돈은 신탁에 들어가 있는 이상 줄어들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불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방 정부조차 이 자산에는 손을 대지 못할 것이다.이런 행동은 곧 권아현 집안 식구들, 혹은 그들 뒤에 있는 그 미스터리한 조직의 입장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그들의 입장은 바로 잠적하는 것은 단지 일시적인 전략적 후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날 밤 외가 식구들은 나를 만났고, 내가 부른 사람들이 당신을 데려갔다는 건 알고 있을 겁니다. 다만 당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죠. 그러니 당신과 외가 식구들이 다시 만났을 때, 어떤 정체불명의 인물이 알약 하나를 먹인 뒤 당신을 구했다고만 알려주고, 이후 배유현 양에게 당신을 그들에게 데려다 주라고 했다고 말하세요. 그리고 정체불명의 인물이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하시고요. 그러면 그들은 당신을 살린 사람과 자신들을 살린 사람을 연결 지으려 할 거고, 그 뒤는 외가 식구들이 스스로 추측하게 내버려 두면 됩니다.”“알겠습니다, 도련님!” 제이크 한은 진지하게 말했다. “기억해 두겠습니다.”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고 배유현을 불러들였다. “배유현 씨, 헬기를 좀 준비해주시고, 제이크 한 경감을 맨해튼의 AB 빌딩까지 모셔다 드리세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먼저 내 외삼촌께 연락을 드려 방문 의사를 전해주시고요. 그 날 그들을 구한 후 현장을 수습한 사람은 배유현 씨이기 때문에, 그들은 당신에 대해서는 크게 경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배유현은 공손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은 선생님. 바로 Samson 그룹 측에 연락하겠습니다.”......같은 시각, 맨해튼 AB 빌딩.Samson 그룹은 함께 모여 회의를 열고는 최근 각종 정세를 종합하여 토론하고 있었다. 안산은 최근 알츠하이머 증상이 계속 악화되고 있었기에, 아침에 눈을 뜨면 아내와 자식들은 그에게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오랫동안 설명해주곤 했다. 다행히도 안산은 수많은 풍파를 겪어온 인물이라, 그날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직접적으로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식들의 설명을 들으면 곧바로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 날 암살 사건이 발생한 이후, Samson 그룹 사람들은 줄곧 뉴욕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가족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다시 손을 대기 시작했지만,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안산은 당분간 가족
이야기를 들은 제이크 한은 매우 놀라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이전의 경력 때문에 블랙 드래곤에 대해서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블랙 드래곤이 시리아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영구 거점을 건설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용병 조직에게 있어 영구 거점을 보유한다는 것은, 단번에 다른 용병 조직들에 비해 훨씬 앞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병이라는 존재는, 이화룡이 거느리는 조폭들에 비해 각국 사법기관이 훨씬 더 경계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용병 조직은 세계 각국에서 길거리의 쥐와 같은 존재로 비밀리에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오직 정부와 깊이 협력하는 조직이 아니라면 절대로 대놓고 간판을 걸고 활동하지 못한다.물론 미국에도 용병 조직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백악관과 협력하며 그들의 총알받이 노릇을 하는 일부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대부분 은밀히 활동할 수밖에 없다. 용병 조직의 대다수는 미국 퇴역 군인 출신으로, 본국 경찰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개개인으로 위장 생활을 하다가 해외에서 임무를 수행하곤 한다. 예를 들어, 한 용병 조직은 100명 남짓한 구성원들에 불과한데 그들은 평소 각자 합법적인 직업과 신분으로 위장하여 일반 시민처럼 지내다가 임무가 떨어지면 관광객을 가장해 출국을 한다. 비록 이들이 본국에서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무장 전투 요원이기 때문에 정부의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조용히 움직여야 한다는 제약이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대부분의 용병 조직의 성장이 제한되는 것이다.하지만 용병 조직이 대놓고 합법적인 영구 거점을 보유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블랙 드래곤이 시리아와 협력했을 당시 미국 CIA는 그 이유를 조사했는데, 조직이 시리아에서 너무 빨리 성장하는 걸 우려해 개입까지 시도했었다. 하지만 시리아는 블랙 드래곤과의 협력을 고수했고, 그 뒤에는 시리아 내 영향력 있는 반정부 인사 하미드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
시후가 말했다. “예전에 아버지 측근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것이 바로 이런 암살자들의 습격 때문이었다고요. 그들은 임무를 마치자마자 입 안의 독약을 깨물고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들었는데... 이번 사건에서 만난 자들과 방식이 동일했습니다. 비록 두 사건 모두 20년 전 일이긴 하지만, 상대가 수백 년 동안 존재했던 조직이라면, 같은 무리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제이크 한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습니다. “시후 도련님, 그렇다면 조직이 이미 수백 년이나 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시후는 대답했다. “내가 한 명을 생포한 한 명에게서 죽음의 전사들이라는 암살자에 대한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리곤 당시 ‘547’이라는 자로부터 들었던 내용을 모두 제이크 한에게 이야기해 주었다.그 이야기를 들은 제이크 한은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하다가, “지난 수백 년 동안 세상에 많은 나라들이 사라졌고, 수많은 전쟁과 재난을 겪었습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스페인 독감은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고, 유럽은 수많은 전쟁을 치렀으며, 아시아 역시 아편 전쟁, 러일 전쟁 등을 겪었고, 미국은 남북전쟁까지 겪었죠. 지난 2~300년 동안 이 세계는 혼돈 그 자체였는데, 그런 와중에도 비밀 조직이 존재해 왔다니, 대체 어떻게 그들이 유지될 수 있었을까요...”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그게 가장 궁금한 부분입니다. 그 조직은 단지 살아남은 게 아니라 수세기 동안 세력을 키워온 것 같더군요. 말씀하신 그 모든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화와는 무관하게요. 난 그게 오히려 더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러곤 시후는 제이크 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당신의 상황은 조금 특별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 조직에서 당신을 본 사람은 내가 일부러 생포했던 그 한 명 외에는 모두 죽었고, 당신이 그날 현장에 나타난 것도 계획된 게 아니라 우연이었으니, 그 조직은 당신을 주목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오랜
제이크 한도 자신이 이렇게 물이 빠진 수조에 그냥 앉아 있는 모습이 아무래도 뭔가 창피한 일이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그는 난처한 듯 물었다. "그... 갈아입을 옷이 좀 있을까요...?"시후는 옆에 있는 배유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배유현 씨, 제이크 한 경감의 옷 좀 챙겨 주시겠어요?"배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말했다. "이곳에는 연구원들의 작업복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 가져다 드릴게요!"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고맙습니다."배유현은 곧장 돌아가 작업복 한 벌을 들고 돌아왔고, 제이크 한은 옷을 걸친 후 시후와 함께 옆쪽에 마련된 휴게실로 이동했다.시후가 제이크 한에게 물 한 병을 건네자, 그는 받자마자 단숨에 물을 다 마시고는 입가를 닦으며 결심한 듯 말했다. "시... 시후 도련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이런 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기는 한지만, 제 목숨을 살려주신 이상 앞으로 시후 도련님께서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무슨 일이든 목숨 걸고 따르겠습니다!"그러자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를 갖춰 답했다. "마침 잘 됐네요. 내가 부탁할 일이 몇 가지 있어서..."제이크 한은 공손히 손을 모으며 말했다. "말씀만 하십시오!"시후는 손가락 두 개를 펴며 담담히 말했다. "그럼 내가 요청하고 싶은 건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당신이 여기서 나간 이후엔, 나를 봤다는 이야기를 그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 특히 Samson 그룹 사람들이 묻는다면, 당신은 이 상황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냥 페이셔스 그룹의 냉동센터에서 깨어난 뒤 나왔다고만 하세요."제이크 한은 놀라며 물었다. "시후 도련님, Samson 그룹 식구들을 구해 주셨는데 왜 아직 서로 만나려고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그러자 시후는 담담히 말했다. "그건 내가 곧 말하려는 두 번째 이유와 관련 있어서... 조금만 기다리세요."제이크 한은 고개를 끄덕였고, 곧 이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만약 Sams
시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호, 당신도 회춘단 얘기를 들은 적 있군? 내 큰 외삼촌에게 들은 거지?”“큰 외삼촌...” 제이크 한은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곧 시후가 자신이 막 깨어났을 때 그가 안충주의 조카라고 소개했던 걸 떠올리며, 갑자기 깨달은 듯 말했다. “그래, 충주가 분명 내게 얘기했었지...”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외삼촌이 회춘단 얘기까지 꺼냈다면, 경매장에서 쫓겨난 얘기도 같이 했을 텐데?”제이크 한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깜짝 놀라 말했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시후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회춘단도, 지금 얘기한 중소단도 다 내가 소유자니까. 그 경매도 내가 주최한 것이고, 당시 그 자리에서 내가 직접 외삼촌을 쫓아내기도 했거든.”제이크 한은 경악하며 물었다. “그 사람이 네 외삼촌인 걸 알면서도 쫓아낸 거라고?!”시후는 담담하게 말했다. “쫓아낼 땐, 외삼촌의 정체를 내가 몰랐어. 그땐 외삼촌이 가명을 쓰셨으니까.” 그러고는 다시 말했다. “하지만, 설령 내가 외삼촌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해도, 역시 쫓아냈을 거야. 왜냐하면 외삼촌은 내가 정한 규칙을 어기려 했기 때문이야. 경매 시작 전에 분명히 말했지. 회춘단은 누구든 낙찰 받으면 현장에서 즉시 복용해야 하며, 절대 외부 반출이 안 된다고. 그런데 외삼촌은 돈으로 그 규칙을 깨려고 했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를 내쫓은 거지.”제이크 한은 조용히 탄식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난 정말 안 죽은 거란 말인가...?” 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다. 네가 정말 안예선의 아들이라면, 자신의 출신을 알고 있으면서, 왜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외가 쪽 가족들과 만나지 않은 거야?”시후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당신은 지금도 내 정체를 의심하는 건가?”제이크 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의심이라기보다... 난 그냥 이 모든 게 너무 이상해 보이
시후의 말은 제이크 한을 한순간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두 가지 가설이, 지금 이 순간 서로 모순된다는 걸 깨달았다. 우선, 만약 지금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면, 총에 맞아 벌집이 됐던 자신의 몸이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지 도무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약 지금 이 모든 게 단지 의식 속에 있던 환상이라면, 또 하나의 의문이 남게 된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뇌가 어떻게 뇌사 판정을 받지 않고 살아남았는가...?인간의 몸은 일정 시간 동안 혈액 공급을 받지 않았을 때, 대뇌는 최대 5분 밖에 버티지 못하는데, 그 당시 상황으로 판단하기에 자신이 의식을 보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은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시후는 제이크 한이 계속 고민에 빠진 모습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말해주지, 당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는 이렇게 말한 뒤 잠시 멈추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날 당신이 총을 맞았을 때, 나는 내 방식으로 당신이 뇌사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 두었어. 그래서 이곳까지 무사히 옮겨 냉동할 수 있었지.”제이크 한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 방식? 무슨 방식을 쓴 거야?”시후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건 당신이 굳이 알 필요는 없고.”제이크 한은 다시 물었다. “그럼 내가 입은 부상들은? 설령 네가 내 뇌를 살렸다고 쳐도, 내 몸은 어떻게 된 거야?”시후는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건 중소단 덕분이지. 이 약의 약효는 매우 간단해. 당신의 신체가 어떠한 손상을 입었든 간에, 완전히 재구성, 즉 회복하게 해준다는 거야.” 그리고 덧붙였다. “당신이 직접 확인해 봐. 몸에 상처 자국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지.”제이크 한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저온 보호복을 찢고, 고개를 숙여 가슴을 들여다봤다. 그런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가슴에는 상처는커녕 흉터 하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