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서연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간 찰나의 충격은, 이내 북극의 얼음보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냉소로 뒤바뀌었다.
그녀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단단한 자세로 도진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차 회장님, 이제 와서 남의 아이에게 친부 행세라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서연의 붉은 입술 끝에 매달린 서늘한 조소가 도진의 심장을 난도질하듯 베어냈다.
“시우는 오직 제 아들입니다. 당신과는 털끝만큼의 상관도 없는 아이예요.”
“거짓말하지 마! 유전자 검사 결과서가 지금 내 손에 있어. 시우는…… 5년 전 네가 홀로 품고 떠난 내 핏줄이야!”
도진의 억눌린 음성이 처절하게 갈라져 터져 나왔다.
대한민국 재계를 호령하던 오만한 재벌 총수의 가면은 온데간데없이 벗겨진 채, 무릎이라도 꿇을 듯 절망에 짓눌린 한 남자의 비명만이 로비를 울렸다.
서연은 도진의 절규 앞에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차갑게 쏘아붙였다.
“유전자 검사요? 남의 아이 손수건을 도둑처럼 훔쳐다 몰래 유전자 검사를 의뢰한 모양이군요. 참으로 태강그룹 회장님다운 비열하고 저열한 수법입니다.”
서연의 서릿발 같은 일갈에 도진의 숨이 턱 막혀왔다.
“5년 전, 조작된 서류 한 장에 눈이 멀어 임신 초기였던 아내를 길거리로 내던진 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죽든 살든 관심조차 없던 남자가, 이제 와서 친부라는 거룩한 이름을 입에 올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서연의 눈빛 속에는 분노를 아득히 넘어선 완전한 경멸과 단절만이 서려 있었다.
“당신에게서 아이를 빼앗은 게 아니에요. 당신이, 우리를 버린 겁니다.”
단 한 마디의 변명조차 허락하지 않는 서연의 서늘하고 명료한 선언.
서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호텔 로비 회전문을 밀고 당당하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
도진은 그 자리에 무너지듯 비틀거리며 붉어진 눈시울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자신이 저지른 씻을 수 없는 죄악과 후회의 해일이 전신을 난폭하게 덮쳐왔다.
바로 그때, 강 실장이 굳은 얼굴로 급히 로비로 들어왔다.
“회장님! 5년 전 이혼 당일의 긴급 병원 기록을 확보했습니다. 사모님…… 아니, 한서연 대표님께서 이혼 서류에 서명하신 직후, 극심한 스트레스성 쇼크로 하혈하여 지방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셨다는 기록입니다.”
강 실장의 보고가 도진의 심장에 마지막 사형선고를 내리듯 꽂혔다.
도진의 두 눈에서 마침내 참아왔던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내가 차가운 응급실 바닥에서 사경을 헤매며 홀로 아이를 지켜내는 동안, 자신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신우그룹과의 비즈니스 만찬에서 축배를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 뼈를 깎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본가의 차명희 사모님께서 루미에르 에이전시의 주요 VIP 고객사들에 악의적인 찌라시를 유포해 계약 파기를 유도하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도진의 눈동자에서 일순 모든 슬픔이 꺼지고, 서슬 퍼런 맹수의 살기가 어둡게 타올랐다.
자신의 어머니가 또다시 서연의 숨통을 쥐고 흔들려 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본가 측에서 신우그룹 윤세아 이사님 측에도 한 대표님에 대한 허위 사실을 제보하려 움직이고 있습니다.”
강 실장의 추가 보고에 도진의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더 이상 어머니의 악행을 방관할 수도, 가문의 체면이라는 미명 아래 타협할 수도 없었다.
도진은 피가 배어 나오도록 주먹을 쥐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본가로 차를 대. 루미에르를 겨냥한 연락은 전부 보존하고, 피해가 확인되면 정식으로 법적 책임을 묻도록 준비해.”
2주에 걸친 긴급 예식 4건이 끝난 일요일 밤, 서연은 마지막 납품 확인서를 받았다. 파일 표지마다 적힌 날짜와 장소가 달랐다. 첫 주말에 치른 2건은 지급 내역까지 정리됐고, 오늘 끝난 2건은 업체 회신을 기다리고 있었다.지수와 은채는 먼저 퇴근했다. 서연은 각 담당자가 내일 확인할 항목만 남기고 서류를 정리했다. 오늘 쓰지 않은 꽃 비용 하나를 다시 물어보느라 생각보다 늦어졌다.밤 11시, 팩스 수신음이 울렸다.서연은 쌓여 나오는 종이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신 번호는 비어 있었다. 사진을 인쇄한 듯 한쪽 모서리가 어두웠다.[한서연 대표님. 공개된 40억 원만 보시면 안 됩니다.]뒤에는 예식 시간과 거래처 이름, 금액이 적힌 표가 붙어 있었다. 베일원의 로고는 없었다. 원래 장부의 일부를 찍어 보낸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서연은 손에 든 펜을 내려놨다. 먼저 수신 시각과 장수를 확인했다. 원본에는 표시하지 않고 별도로 복사했다.표에는 낯익은 호텔 이름들이 있었다. 취소된 예식 시간을 미리 공급받았다는 기재와 함께 담당자 이름도 보였다.[이진혁 / 태강호텔 웨딩사업부 전 총괄팀장 / 우선 배정 관련 5억 원][최동호 / 신우레저 서울클럽 / 취소 시간 공급 관련 3억 원]서연은 이름을 소리 내 읽지 않았다. 종이에 적혀 있다고 실제 지급이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연주 예식의 취소 정산에서 봤던 날짜와 비슷한 항목이 있어 그냥 버릴 수도 없었다.마지막 장 하단에 짧은 문장이 있었다.[추가 자료는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제 신원을 먼저 밝히지는 말아주세요. T.O.]서연은 이니셜 옆을 오래 봤다. 연락처는 없었다. 답장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서연은 팩스 맨 아래의 잘린 행을 다시 봤다. 다른 날짜가 반쯤 남아 있었다. 연주와 나눈
목요일 오전, 접수된 계약서를 분류하던 지수가 4개의 파일을 따로 놓았다.“이분들은 예식이 바로 닥쳤어요. 이번 주 토요일 2쌍, 다음 주 일요일 2쌍이요.”서연은 계약서보다 날짜표를 먼저 봤다. 청첩장 발송과 하객 이동까지 끝난 상태였다. 새 장소를 구한다고 같은 시간에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우리가 비울 수 있는 자리는?”“하우스홀 토요일 저녁 6시, 일요일 오전 10시요. 다음 주 일요일은 제휴 하우스홀 한 곳과 모연온실 쪽을 확인했습니다.”“모연온실은 인원부터 봐야 해. 큰 하객 수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야.”지수가 소규모 가족식으로 예약했던 커플의 파일을 앞으로 옮겼다. 다른 세 팀에는 그 장소를 권하지 않았다.서연은 4쌍을 한꺼번에 설득하지 않고 각각 가능한 시간을 설명했다. 이번 주 토요일 낮에 식을 하려던 한 커플은 일요일 오전으로 바꿀 수 있는지 가족들에게 직접 연락했다. 고속버스를 이미 예약한 친척이 있어 통화가 길어졌다.“날짜를 못 바꾸면 다른 곳도 같이 알아봐야 해요. 여기서 꼭 하셔야 하는 건 아닙니다.”신부는 수첩에 연락할 사람을 적었다.“아버지는 일요일 오전이면 더 좋대요. 그런데 작은아버지 차는 토요일에 올라오기로 했대서요.”신랑이 복도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 서연은 잠깐 기다리겠다고 하고 가능한 시간을 종이에 적어줬다. 전화로 급히 설명하다 예식 날짜를 잘못 전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돌아온 신랑은 일요일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대신 청첩장에 적힌 주소를 보고 옛 식장으로 가는 손님이 없도록 한 집씩 연락하기로 했다. 신부는 수첩의 이름 옆에 둘이 나눠 맡을 표시를 했다. 서연은 날짜 변경을 확인하고 남은 3건의 드레스와
“아빠, 두부 너무 크다고 했잖아.”“찌개에 넣으면 괜찮아.”“내 입에는 안 괜찮아.”도진은 도마 위 두부를 내려다봤다. 시우가 손가락으로 크기를 표시하자 결국 칼을 다시 들었다.“이 정도?”“조금만 더.”“두부가 없어지겠다.”시우가 웃으며 식탁 의자에 올라앉았다. 도진은 아이가 몸을 기울이지 못하게 의자를 조금 안쪽으로 당겨주고 불을 줄였다.서연이 들어왔을 때 주방에는 찌개 냄새가 퍼져 있었다. 시우는 현관으로 달려와 엄마의 가방을 들어보려다 금방 내려놨다.“엄마 가방은 왜 맨날 무거워?”“넣고 다니는 게 많아서.”“아빠 것처럼 작게 해.”도진이 나와 가방을 받아 들었다.“아빠 것도 무거워.”“그럼 둘 다 작게 해.”서연은 웃으며 손을 씻으러 갔다. 돌아왔을 때는 세 사람 몫의 밥이 놓여 있었다. 작은 두부가 잔뜩 들어간 시우의 그릇을 보니 도진이 누구의 요구를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오늘 두부는 먹기 좋겠다.”“내가 시켰어.”시우가 자랑하자 도진은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가 뜨거운 국물을 급히 먹지 않도록 숟가락을 잠깐 내려놓게 했다.식사를 마친 뒤 도진은 그릇을 옮기고 서연은 식탁을 닦았다. 시우는 두 사람 사이에서 자기 숟가락만 싱크대에 넣었다. 공룡책을 가져오겠다며 방으로 뛰어갔다.서연이 행주를 헹구다가 말했다.“오늘 회의는 잘 끝났어요?”“응. 제안은 안
태강 회의실에 올라온 베일원 제안서는 첫 장부터 금액이 컸다. 호텔의 잔여 예식 시간을 독점 공급하면 연간 100억 원의 수수료를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박 상무가 자료를 들어 보였다.“비수기 빈 시간을 매출로 바꿀 기회입니다. 지금 놓치면 다른 호텔이 가져갑니다.”도진은 제안서에 붙은 재무 자료를 펼쳤다.“보장한다는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확인하셨습니까?”“투자 유치와 회원 모집으로 마련한다고 합니다.”“투자금이 들어왔다는 증빙은요?”박 상무는 다음 장을 넘겼다. 확약이 아니라 유치 계획이었다. 도진은 서류를 빼앗지 않고 기다렸다.“신규 계약을 받으면 현금이 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업은 원래 선투자가 필요하죠.”“고객 계약금은 그 고객의 예식에도 써야 합니다. 이미 밀린 지급을 먼저 메우고 나면 새 계약은 무엇으로 이행합니까?”회의실에서 누군가 펜을 멈췄다. 재무 담당자가 검토 내용을 설명했다. 제출 자료에는 누락된 항목이 있었고, 자본잠식률을 180%로 계산한 대목도 재확인이 필요했다. 납품업체들이 지급 지연을 주장한 어음만 12억 원 규모였다.도진은 상대 회사에 보낸 자료 요청 목록을 가리켰다.“이 항목들이 아직 비어 있습니다. 정상 지급을 전제로 계약서를 쓰려면 최소한 답변은 받아야죠.”한 이사가 몸을 기울였다.“아내 회사와 경쟁하는 업체라 더 까다롭게 보시는 건 아닙니까?”도진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그 이해관계는 회의록에 남기십시오. 외부 검토 의견도 받으시고요. 대신 제가 물은 질문에는 답해주셔야 합니다.”“어떤 질문
호텔에서 온 회신에는 ‘시공 보류’라고 적혀 있었다. 베일원이 광고한 구조물을 예정대로 설치하려면, 먼저 제작과 안전 검토 자료를 갖춰야 한다는 내용이었다.은채가 메일을 읽다가 물었다.“그럼 이제 저 광고도 내려가겠죠?”“그건 따로 요구해야 해. 시공 보류와 이미지 사용 문제는 다르니까.”서연은 호텔별 회신을 지수에게 넘겼다. 5곳이 모두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자재 반입을 미룬 곳도 있었고, 이미 예정된 예식의 연출을 바꾸도록 요구한 곳도 있었다. 고객들에게는 각 계약의 담당자가 변경 내용을 설명해야 했다.“우리 고객 문의에는 검토가 어디까지 됐는지 답해줘. 호텔별 진행 상황이 다르니까 혼동하지 않게.”“네. 담당자 회신하고 맞춰서 보낼게요.”은채는 루미에르의 원본 시안과 시험 제작 과정 사진,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모았다.시안이 완성될 때까지 고친 기록은 여러 폴더에 흩어져 있었다. 은채가 날짜를 맞추자 초안에서 완성본으로 바뀌는 과정이 보였다.“이 사진에는 시험 설치라고 적어야겠어요. 하객을 맞은 예식으로 보이겠어요.”은채가 사진 밑에 촬영 날짜와 작업 단계를 적었다. 서연은 그 설명을 듣고 폴더 이름을 확인했다. 완성 사진 앞에 놓인 시험 설치 사진에는 은채가 새로 붙인 날짜가 보였다.지수가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고객들이 왜 기획 시간이 필요한지 이걸 보면 알겠네요.”“처음부터 말로 잘 설명했으면 좋았을 텐데요.”“지금부터 하면 돼.”서연은 준비한 자료를 법률 검토용과 고객 설명용으로 나눴다. 고객 이름과 개인 정보는 밖으로 나가지 않게 했다.
설치업체에서 돌아온 첫 답변은 단순했다. 베일원이 공개한 자료만으로는 안전성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은채는 프로그램 화면을 켜려다 멈췄다.“수치를 넣어서 보여주면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요?”“모르는 값을 임의로 넣으면 안 돼.”서연이 자료에서 빈칸을 짚었다. 꽃 장식과 긴 원단을 건 모습은 광고에 나와 있었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부분의 도면은 없었다. 같은 장식을 쓴다고 같은 구조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담당자가 통화로 덧붙였다.“기존 시안에 40kg 장식을 올리는 조건이 있었다고 해도, 다른 구조물의 결과를 여기서 계산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현장과 제작 자료가 필요합니다.”지수는 회신에 필요한 자료가 무엇인지 업체에 다시 물었다. 제작 도면과 접합부 정보, 실제 설치 위치가 요청서에 추가됐다.서연은 그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호텔이 실제로 확인할 수 있게 보내자. 저작권 대응 자료와는 따로 묶고.”5개 호텔로 같은 요청이 발송됐다. 몇 곳은 이미 베일원에 시공 계획서를 요구해놓았다고 답했다. 한 곳은 홍보 이미지만 받았고 자재 반입 계획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했다.지수는 받은 답변을 호텔별로 나란히 놓았다. 완성된 패키지라고 판매한 현장인데도, 설치 계획서가 접수됐다는 답은 없었다. 내일 자재를 받기로 한 호텔도 같았다.“이 호텔은 내일 자재 반입인데요.”은채가 일정을 보여줬다. 서연은 해당 호텔 시설 담당자와 직접 통화했다.“반입 전에 검토 자료가 제출됐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대신 설치를 판단할 권한은 없습니다. 다만 기존 작업과 유사한 이미지가 사용돼 우려 사항을 전달드리는 겁니다.”통화를 마친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