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나희는 피팅룸 입구에서 연회색 원피스를 집었다가 내려놨다. 하얀 드레스를 입어보겠다고 어제 말했지만, 딸이 옆에 있으니 다시 망설여졌다.
“엄마는 이 옷 입어?”
은채가 물었다. 노란 모자를 무릎에 올려놓고 스케치북을 끌어안고 있었다. 나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보는 중이야.”
서연은 두 종류를 모두 피팅해볼 수 있다고 했다. 나희가 옷을 고르는 동안 최은채 플래너는 딸과 함께 앉아 신발 크기를 확인했다. 이름이 같다는 말에 아이가 조금 웃었다.
“그럼 언니도 은채예요?”
“응. 최은채. 헷갈리면 최 플래너라고 불러도 돼.”딸 은채가 스케치북을 무릎 위에 내려놨다. 펼쳐진 귀퉁이에 하얀 치마가 보였다. 서연이 몸을 낮췄다.
“그림 그렸어? 보여줘도 괜찮아?”
남자는 나희의 전남편 송태호였다. 안내 직원에게 딸을 만나러 왔다고 해놓고 기다려달라는 말을 듣지 않은 채 피팅층으로 내려온 참이었다.“내 딸 여기 있다면서 왜 못 들어가게 해?”서연은 그와 커튼 사이에 섰다. 뒤편에서 최은채 플래너가 아이를 안쪽 의자로 데려가는 소리가 들렸다.“방문 목적은 들었습니다. 지금 피팅 중이니 이쪽 상담실에서 말씀하시죠.”“내가 누군지 알고 이래? 태호글로벌 송태호야. 은채 아빠라고.”태호는 명함을 테이블에 던졌다. 서연은 명함을 읽고도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안내 직원이 뒤늦게 따라 내려왔다. 자신이 막지 못했다며 설명하려 하자 서연은 먼저 안쪽 대기 고객을 다른 방으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직원이 움직이는 것을 본 태호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사람 불러서 날 쫓아내겠다는 거야?”“다른 고객분들 준비를 계속하려는 겁니다. 송 대표님 말씀은 제가 듣고 있습니다.”서연은 커튼 쪽에 서 있던 아이의 작은 신발이 안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아버님이시라고 해도 예약 없이 피팅룸으로 들어가실 수는 없습니다.”“애 엄마 재혼하는데 친아비는 오지도 말라는 거야?”때마침 도착한 건우가 상담실 앞에 멈췄다. 태호를 보고 나희와 아이부터 찾았다. 서연이 안쪽에 있다고 말하자 그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태호는 건우를 알아보고 웃었다.“네가 그 학교 선생이구나. 남의 애 데리고 아빠 노릇하면 재미있어?”“아이 들을 수 있습니다. 목소리 낮추세요.”“애 아빠 앞에서 네가 뭔데?”건우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서연은 두
나희는 피팅룸 입구에서 연회색 원피스를 집었다가 내려놨다. 하얀 드레스를 입어보겠다고 어제 말했지만, 딸이 옆에 있으니 다시 망설여졌다.“엄마는 이 옷 입어?”은채가 물었다. 노란 모자를 무릎에 올려놓고 스케치북을 끌어안고 있었다. 나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아직 보는 중이야.”서연은 두 종류를 모두 피팅해볼 수 있다고 했다. 나희가 옷을 고르는 동안 최은채 플래너는 딸과 함께 앉아 신발 크기를 확인했다. 이름이 같다는 말에 아이가 조금 웃었다.“그럼 언니도 은채예요?”“응. 최은채. 헷갈리면 최 플래너라고 불러도 돼.”딸 은채가 스케치북을 무릎 위에 내려놨다. 펼쳐진 귀퉁이에 하얀 치마가 보였다. 서연이 몸을 낮췄다.“그림 그렸어? 보여줘도 괜찮아?”아이는 엄마를 한 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희가 낙서한 것뿐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은채가 직접 페이지를 넘겼다.꽃관을 쓴 엄마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옆에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엄마’라고 적혀 있었다.나희가 의자에 앉았다.“이거 언제 그렸어?”“엄마 결혼한다고 했을 때.”“엄마가 이런 옷 입으면 좋겠어?”은채는 고개를 끄덕였다.“엄마는 예쁜 옷 보다가도 자꾸 내 얼굴 봐. 내가 싫다고 안 했는데.”나희의 손이 멈췄다. 은채는 색연필로 덧칠한 치마 부분을 문질렀다.“건우 삼촌이 오면 엄마 웃잖아. 그런데 결혼식 이야기하면 또 미안하다고 해. 나한테 왜 미안해?”나희는 대답을 고르다가 아이 손
건우는 적은 문장을 가리지 않았다. 나희가 읽을 수 있도록 종이를 가운데 놓았다.“어머니가 옷을 보러 가자고 하셨어요. 아들 결혼식에 한복 입고 싶으셨나 봐요.”“왜 저한테 말씀 안 하셨어요?”“나희 씨가 부담스러워할까 봐요.”그는 펜을 굴렸다.“동료 선생님이 축가도 해주신다는데, 식을 안 한다고 말씀드리려니까 좀 아쉽더라고요. 그렇다고 나희 씨가 힘들어하는데 제 욕심까지 더할 수는 없어서요.”나희는 찻잔을 잡았다 놓았다. 건우가 서둘러 덧붙였다.“지금 꼭 바꾸자는 건 아니에요. 식사만 해도 괜찮을 수 있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안 아쉽다고 말한 건 사실이 아니었네요.”나희가 고개를 숙였다.“저는 건우 씨가 원래 결혼식에 관심 없는 줄 알았어요.”“저도 제대로 말 안 했어요.”서연은 빈 종이에 ‘하고 싶은 것’과 ‘걱정되는 것’을 나눠 적어 두 사람에게 보여줬다. 나희는 먼저 걱정되는 쪽에 딸의 이름을 썼다.건우는 그 옆에 한복과 축가를 적었다. 그러고는 잠깐 고민하다 한 가지를 더 썼다.‘같이 찍는 사진.’나희가 그 글자를 손끝으로 짚었다.“이것도 제가 빼자고 했죠.”“사진이 남으면 아이가 불편할 수 있다고 하셨으니까요.”“그런데 제가 아이한테 물어보지는 않았어요.”그녀는 펜 끝을 종이에 대고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건우 씨 어머니가 한복 입으셔도 괜찮아요. 동료 선생님들 오셔도 좋고요. 저 혼자 겁먹어서 자꾸 다 줄였네
김나희가 가져온 메모에는 식사 시간부터 적혀 있었다.하객 15명. 호텔 중식당 별실. 정장 차림. 주례와 축가 없이 30분 정도.서연은 메모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희를 봤다. 베이커리 3곳을 운영한다는 소개와 달리, 그녀는 상담이 시작된 뒤로 찻잔조차 편하게 잡지 못했다.“가족끼리 식사하는 자리를 원하시는군요.”“네. 여기까지 와서 이런 부탁을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거창한 식은 아니라서요.”나희가 메모 귀퉁이를 접었다 폈다. 준비해온 말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자꾸 건우를 봤다. 건우는 괜찮다는 듯 손을 뻗었다가, 그녀가 가방을 뒤지자 손을 거뒀다.나희는 휴대전화에서 식당 사진을 찾았다. 문이 닫히면 복도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방이었다.“여기면 다른 손님들하고 마주칠 일도 거의 없다고 해서요.”서연은 화면에서 시선을 들어 나희를 봤다. 나희는 음식이나 전망보다 문 위치부터 설명하고 있었다.“작게 하는 예식도 맡습니다. 두 분이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부터 듣고 싶어요.”나희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곁의 문건우도 따라 웃었지만, 메모의 ‘축가 생략’이라는 문구를 잠깐 더 보고 있었다.서연은 건우가 보고 있던 메모의 아래쪽을 확인했다.“나희 씨가 원해서 이렇게 잡으신 거예요? 아니면 준비하면서 줄이게 된 건가요?”나희가 재킷 소매를 만졌다.“저는 두 번째라서요. 딸도 있고.”“아이도 같이 참석하나요?”“네. 10살이에요. 이름은 은채고요.”나희는 한 번 목을 가다듬었다.“엄마가 결혼식한다고 떠들썩하게 다니
2주에 걸친 긴급 예식 4건이 끝난 일요일 밤, 서연은 마지막 납품 확인서를 받았다. 파일 표지마다 적힌 날짜와 장소가 달랐다. 첫 주말에 치른 2건은 지급 내역까지 정리됐고, 오늘 끝난 2건은 업체 회신을 기다리고 있었다.지수와 은채는 먼저 퇴근했다. 서연은 각 담당자가 내일 확인할 항목만 남기고 서류를 정리했다. 오늘 쓰지 않은 꽃 비용 하나를 다시 물어보느라 생각보다 늦어졌다.밤 11시, 팩스 수신음이 울렸다.서연은 쌓여 나오는 종이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신 번호는 비어 있었다. 사진을 인쇄한 듯 한쪽 모서리가 어두웠다.[한서연 대표님. 공개된 40억 원만 보시면 안 됩니다.]뒤에는 예식 시간과 거래처 이름, 금액이 적힌 표가 붙어 있었다. 베일원의 로고는 없었다. 원래 장부의 일부를 찍어 보낸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서연은 손에 든 펜을 내려놨다. 먼저 수신 시각과 장수를 확인했다. 원본에는 표시하지 않고 별도로 복사했다.표에는 낯익은 호텔 이름들이 있었다. 취소된 예식 시간을 미리 공급받았다는 기재와 함께 담당자 이름도 보였다.[이진혁 / 태강호텔 웨딩사업부 전 총괄팀장 / 우선 배정 관련 5억 원][최동호 / 신우레저 서울클럽 / 취소 시간 공급 관련 3억 원]서연은 이름을 소리 내 읽지 않았다. 종이에 적혀 있다고 실제 지급이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연주 예식의 취소 정산에서 봤던 날짜와 비슷한 항목이 있어 그냥 버릴 수도 없었다.마지막 장 하단에 짧은 문장이 있었다.[추가 자료는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제 신원을 먼저 밝히지는 말아주세요. T.O.]서연은 이니셜 옆을 오래 봤다. 연락처는 없었다. 답장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서연은 팩스 맨 아래의 잘린 행을 다시 봤다. 다른 날짜가 반쯤 남아 있었다. 연주와 나눈
목요일 오전, 접수된 계약서를 분류하던 지수가 4개의 파일을 따로 놓았다.“이분들은 예식이 바로 닥쳤어요. 이번 주 토요일 2쌍, 다음 주 일요일 2쌍이요.”서연은 계약서보다 날짜표를 먼저 봤다. 청첩장 발송과 하객 이동까지 끝난 상태였다. 새 장소를 구한다고 같은 시간에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우리가 비울 수 있는 자리는?”“하우스홀 토요일 저녁 6시, 일요일 오전 10시요. 다음 주 일요일은 제휴 하우스홀 한 곳과 모연온실 쪽을 확인했습니다.”“모연온실은 인원부터 봐야 해. 큰 하객 수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야.”지수가 소규모 가족식으로 예약했던 커플의 파일을 앞으로 옮겼다. 다른 세 팀에는 그 장소를 권하지 않았다.서연은 4쌍을 한꺼번에 설득하지 않고 각각 가능한 시간을 설명했다. 이번 주 토요일 낮에 식을 하려던 한 커플은 일요일 오전으로 바꿀 수 있는지 가족들에게 직접 연락했다. 고속버스를 이미 예약한 친척이 있어 통화가 길어졌다.“날짜를 못 바꾸면 다른 곳도 같이 알아봐야 해요. 여기서 꼭 하셔야 하는 건 아닙니다.”신부는 수첩에 연락할 사람을 적었다.“아버지는 일요일 오전이면 더 좋대요. 그런데 작은아버지 차는 토요일에 올라오기로 했대서요.”신랑이 복도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 서연은 잠깐 기다리겠다고 하고 가능한 시간을 종이에 적어줬다. 전화로 급히 설명하다 예식 날짜를 잘못 전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돌아온 신랑은 일요일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대신 청첩장에 적힌 주소를 보고 옛 식장으로 가는 손님이 없도록 한 집씩 연락하기로 했다. 신부는 수첩의 이름 옆에 둘이 나눠 맡을 표시를 했다. 서연은 날짜 변경을 확인하고 남은 3건의 드레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