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채린은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며칠 전에 전하께서 보내 주셨어.”“정왕부에서 직접 보내셨습니까?”“그럼.”채린은 손목을 가슴 가까이 끌어당겼다.“전하께서 특별히 마련해 주신 것이란다. 네 혼례를 앞두고 내게까지 이런 선물을 보내 주실 줄은 몰랐어.”소하의 손끝이 움찔하자 채린은 금세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어머, 내가 괜한 말을 했니? 너도 전하께 선물을 많이 받았잖니. 설마 이 팔찌 하나 때문에 또 서운한 건 아니지?”태윤이 소하를 바라보았다.“네게도 예물을 가져왔다.”그가 손짓하자 수행관이 예물함의 뚜껑을 열었다.옥비녀 한 쌍과 진주 장식, 금실로 수놓은 비단 주머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윤상필이 감탄하며 허리를 숙이는 동안 태윤은 소하를 향해 턱을 들었다.“이 정도면 되었느냐?”그 말은 선물을 받은 신부에게 건네는 다정한 질문이 아니었다. 채린의 팔찌를 부러워하지 말라는 경고에 가까웠다.소하는 예물함 안쪽에 붙은 작은 표찰을 보았다.물품의 수량과 제작처가 적혀 있었다.“감사합니다, 전하. 예물 목록도 함께 받을 수 있겠습니까?”태윤의 얼굴이 굳어졌다.“또 장부냐?”채린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호호, 소하는 오늘 장부에 푹 빠졌나 봅니다.”시녀 몇이 따라 웃었지만 태윤은 웃지 않았다.“선물을 받았으면 고맙다고 하면 될 것을, 네게는 그게 그리 어려우냐?”“분실되는 물건이 없도록 확인하려는 것입니다.”“정왕부에서 보낸 물건을 의심하는 것이냐?”“그런 뜻은 아닙니다. 다만 물품을 관리한 사람의 이름만 확인하고 싶습니다.”태윤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채린이 옆에서 소매를 살짝 잡았다.“전하, 소하가 아직 어리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태윤은 채린을 보았다가 다시 소하에게 시선을 돌렸다.“네가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적어 주도록 하라.”수행관이 이름을 적자 소하는 종이를 받아 품에 넣었다.채린의 팔찌와 직접 연결되는 증거는 아니었으나, 정왕부의 물품을 관리하는 사람을 알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어머니가 남긴 혼례복을 빼앗긴 뒤 겨우 얻은 것이 종이 한 장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쓰렸지만, 적어도 오늘 이 집안에서 벌어진 일을 누군가 마음대로 지울 수는 없게 되었다.채린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슬쩍 웃으며 태윤의 곁으로 다가갔다.“전하, 차가 식었겠어요. 제가 직접 우린 차를 드셔 보세요.”태윤이 그녀가 내민 잔을 받는 동안 소하는 조용히 대청을 빠져나왔다.***사랑채를 나서자마자 유담이 소하의 팔을 붙잡았다.“아씨, 괜찮으십니까?”소하는 대답하지 못했다.마당 끝까지 걸어가던 그녀는 돌계단 앞에서 멈춰 섰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속이 뒤틀리더니, 가슴 깊은 곳에서 차가운 것이 치밀어 올라 목구멍을 막았다.“아씨!”유담이 급히 부축했지만 소하는 담벼락을 짚은 채 몸을 숙였다. 한참을 헛구역질하고 나서야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유담은 물을 가져와 입가를 닦아 주었다.“저런 분이 어떻게 아씨의 정혼자란 말입니까. 아씨 옷을 빼앗아 입은 건 큰아씨인데, 왜 아씨께 사과하라고 하시는 겁니까?”소하는 물을 한 모금 삼켰다.태윤이 채린의 손목을 붙잡던 모습과 그녀의 옷고름을 매만지던 손,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명하던 차가운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뒤엉켰다.분노보다 먼저 치밀어 오른 것은 혐오였다.기루에서 금옥이 매각 문서를 펼쳤을 때, 소하는 끝까지 남편이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 때문에 마지막까지 도망칠 기회를 놓쳤으나, 이제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유담아.”“예, 아씨.”“오늘 언니가 입은 예복을 반드시 돌려받아야 해.”“제가 가져오겠습니다.”“아니. 네가 혼자 가면 또 다칠 거야.”소하는 유담의 손등에 남은 붉은 자국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돌려받자.”유담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정오 무렵, 윤상필은 정왕부에서 가져온 예물함을 확인해야 한다며 소하를 다시 사랑채로 불렀다.대청에는 붉은 보자기로 감싼 함 세 개가 놓여 있었고, 태윤은
“옷 한 벌 때문에 네 언니를 이토록 난처하게 만들다니. 정왕비가 될 사람이 벌써부터 이리 옹졸해서야 되겠느냐?”소하는 입술을 다물었다.태윤은 그 침묵마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턱을 굳혔다.“내가 묻고 있지 않느냐.”소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전하께서 제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무엇?”“제 옷을 빼앗긴 일을 모른 척하라는 말씀이십니까?”윤상필이 숨을 들이켰다.“소하야!”그러나 소하는 태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태윤의 얼굴이 굳어졌다.“말을 조심해라. 내가 네게 도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네가 오히려 내게 따지려 드는구나.”그는 채린의 손목을 놓고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고개를 숙여라.”대청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소하를 바라보았다.유담이 소하의 뒤에서 손을 꼭 쥐었다. 시녀들 가운데 몇은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입가에 어른거리는 웃음까지 감추지는 못했다.소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태윤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네 언니에게 사과하여라.”순간 귓속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자신의 혼례복을 빼앗긴 사람이 사과해야 했다.그 옷을 입고 정혼자와 웃고 있던 여자에게.전생에는 이보다 더한 일도 겪었지만, 열일곱의 몸은 아직 그런 굴욕에 익숙하지 않았다. 목구멍이 조여 들고 손끝이 저릿해지는 가운데, 소하는 가까스로 숨을 고른 뒤 채린을 바라보았다.채린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누르고 있었다.그러나 손수건 아래로 드러난 입술 끝이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다.“언니.”채린이 고개를 들었다.“예복을 빌려 입으신 일로 제가 전하 앞에서 말씀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채린의 눈빛이 반짝였다.그러나 소하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다만 그 옷이 제 혼례복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채린의 미소가 굳어졌다.소하는 태윤에게 다시 예를 올렸다.“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오늘 입으신 사람과 돌려받을 날짜를 혼수 목록에 남기겠습니다.”태윤은 한동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끝까지 장부를 들먹이는구나.”“제
그때 대청 입구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채린의 웃음이 잠깐 멎었다.소하가 서 있었다.***소하는 태윤의 손이 채린의 옷고름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그 손은 전생에 자신의 목에 걸린 장신구를 풀어 주기도 했다. 혼례 초에는 남편이 자신을 아낀다고 믿게 했던 손이었으나, 마지막에는 그 손으로 매각 문서에 인장을 찍었다.순간 숨이 얕아졌다.눈앞의 태윤은 스물다섯이었다. 아직 소하를 기루에 팔지 않았고, 그녀의 목숨을 빼앗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채린의 손목을 붙잡는 순간, 소하의 몸은 이미 겪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차가운 마룻바닥과 닫히는 문, 은자 오백 냥이라는 숫자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소하는 혀끝을 깨물었다.비릿한 맛이 입안에 번지면서야 자신이 서 있는 장소가 또렷해졌다. 이곳은 정왕의 방문을 앞둔 윤씨 가문의 사랑채였고, 아직 혼례는 치러지지 않았다.“소하야?”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머, 네가 벌써 나왔구나. 몸이 좋지 않다더니 괜찮니?”그녀는 태윤의 소매를 놓지 않은 채 다정하게 웃었다.“전하, 제 동생입니다. 오늘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아서 제가 대신 손님을 맞고 있었지요.”태윤의 시선이 소하에게 옮겨 왔다.소하는 평소 입던 옅은 남색 저고리에 흰 치마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은비녀 하나만 꽂았으며, 얼굴에는 분조차 바르지 않은 상태였다.태윤의 눈매가 좁아졌다.“윤소하.”소하는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정왕 전하를 뵙습니다.”“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었느냐?”“잊지 않았습니다.”“그런데 그 차림은 무엇이냐? 정왕부에서 사람이 오는데 정혼자가 저리 수수하게 나와서야 되겠느냐?”윤상필이 황급히 나섰다.“전하, 소녀가 어제부터 몸이 좋지 않아…….”“아버지.”소하가 조용히 부르자 윤상필의 말이 멈췄다.그녀는 채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제 예복을 언니께서 입고 계십니다.”채린은 눈을 깜빡이더니 자신의 치맛자락을 내려다보았다.“어머,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니?”입가에
채린은 손목을 내밀어 팔찌를 채우게 한 뒤 햇빛이 드는 창가로 다가갔다.“전하께서 직접 골라 보내셨단 말이지.”푸른 보석이 빛을 받자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소하가 이걸 보면 어떤 얼굴을 할까?”“많이 부러워하시겠지요.”시녀의 대답에 채린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며 작게 웃었다.“어제 쓰러졌다더니 오늘은 제법 기운을 차린 모양이야. 아침부터 옷을 찾는다고 난리를 쳤다지?”“예. 유담이 옷함을 붙잡고 울며 매달렸다고 합니다.”“쯧, 계집종 하나를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채린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매를 살피며 일부러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았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그냥 두어. 소하가 직접 와서 따지면 더 재미있겠지.”그녀는 붉은 치맛자락을 손끝으로 매만졌다.옷 자체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이 옷을 입은 자신을 이태윤이 보게 된다는 사실이 즐거웠다.***“정왕 전하께서 오신다!”대문 밖에서 하인의 외침이 울리자 윤상필은 급히 사랑채 계단을 내려갔다. 송미령 역시 딸의 옷고름을 마지막으로 매만지며 몇 가지 주의를 주었으나, 얼굴에는 기대가 가득했다.“채린아, 오늘은 너무 앞서 나서지 말거라. 소하가 또 무슨 말을 하거든 네가 먼저 맞서지 말고.”“걱정 마세요, 어머니.”채린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사랑스럽게 웃었다.“전하께서 알아서 해 주실 텐데 제가 왜 나서겠어요?”그녀가 붉은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사랑채로 향하는 동안, 송미령은 흐뭇한 얼굴로 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이태윤은 말에서 내리자마자 윤상필의 인사를 받았다.푸른빛 비단 관복의 소매 끝에는 은실로 구름무늬가 놓여 있었고, 허리에는 왕족의 신분을 드러내는 옥패가 달려 있었다. 태윤은 익숙한 태도로 윤상필의 인사를 받은 뒤 혼례 준비에 차질이 없는지 물었다.“전하의 은혜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윤상필이 허리를 굽히자 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그때 붉은 치맛자락이 시야에 들어왔다.“전하아.”익숙한 목소리가 길게 울렸다.사
“아씨! 안 됩니다! 그 옷만은 가져가시면 안 됩니다!”유담의 비명이 새벽의 적막을 깨뜨렸다.소하가 방문을 열었을 때, 마당에서는 이미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송미령이 보낸 시녀 둘이 자개 옷함을 들고 있었고, 유담은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함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이년이 어디서 주인마님의 명을 거역해?”시녀 하나가 유담의 손등을 발끝으로 짓눌렀다. 어린 계집종이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손을 놓지 않자, 시녀는 더욱 거칠게 발을 비틀었다.“다른 건 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이건 돌아가신 안주인마님께서 남기신 비단으로 지은 옷입니다. 제발 이것만은……!”“그 손 못 떼겠어?”시녀가 손을 치켜든 순간이었다.“그만.”낮고 차가운 목소리에 시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밤새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소하는 겉옷도 제대로 여미지 못한 차림이었으나, 마당으로 내려서는 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누가 내 옷함을 가져가라고 했느냐?”시녀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마지못해 허리를 숙였다.“마님께서 혼수 물품을 안채로 옮기라고 명하셨습니다.”“혼수함을 옮기라는 명이었느냐, 아니면 내 혼례복을 가져오라는 명이었느냐?”대답이 없자 소하는 옷함으로 다가갔다. 어젯밤 유담과 함께 잠가 두었던 쇠장식이 풀려 있었고, 자개가 박힌 뚜껑 한쪽에는 억지로 열다가 생긴 듯한 흠집까지 남아 있었다.“함을 내려놓아라.”시녀 하나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하지만 큰아씨께서…….”“정왕 전하께서 오시는 날 아침부터 내 마당에서 계집종을 때리고 혼수함을 빼앗았다는 소문이 나도 괜찮겠느냐?”그제야 시녀들이 옷함을 내려놓았다.유담은 손잡이에서 손을 떼면서도 혹시 다시 빼앗길까 봐 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하는 그녀의 손등에 남은 붉은 자국을 잠시 살핀 뒤 직접 뚜껑을 열었다.붉은 혼례복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금실로 매화 가지를 수놓은 겉옷도, 진주가 달린 허리띠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한유정이 남긴 재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