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빈 간택에서 떨어지려고 회귀했더니 세자가 장독대로 찾아왔다

세자빈 간택에서 떨어지려고 회귀했더니 세자가 장독대로 찾아왔다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10-24
작가:  Jino최근 업데이트
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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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빈으로 7년, 남편과 나눈 말은 손에 꼽았다. 친정 장독대는 그새 남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눈을 뜨니, 장 담그는 날 아침이었다. 금혼령 방이 붙기 바로 그날. «이번 생엔 간택에서 떨어진다. 빚 40냥 갚고, 장독 87개 지킨다.» 장맛 하나로 묵은 해를 맞히는 혀와, 궁에서 산 7년의 기억. 떨어지는 건 쉬울 줄 알았다. 그런데 초간택에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간장 한 종지»라고 대답한 날, 재간택 명단에 내 이름이 올랐다. 그리고 새벽, 장독대 앞에 선비 하나가 서 있었다. “장을 사러 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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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챕터
1화. 소금물
달걀이 소금물 위로 엽전만큼 떠올랐다.“워메, 딱 좋구먼.”끝분이 함지 가장자리에 손을 얹었다. 달걀은 물에 잠긴 채 둥실 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새미는 숨을 들이켰다.방금 전까지 새미는 궁 장고에서 쓰러져 있었다. 스물다섯 살 세자빈으로 일곱 해를 살고, 장독 앞에 미끄러져 넘어진 참이었다. 할머니 장맛이 나는 간장을 입에 댄 순간, 놀라서 손을 뻗었었다.그다음은 기억나지 않았다.“새미야. 왜 그러냐?”끝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미는 눈을 깜빡였다. 소금물 함지, 장독대, 끝분의 굵은 손가락. 무명 끈으로 묶은 제 머리카락이 뺨에 붙었다. 손등에는 장독을 닦다 생긴 흉터 두 개가 있었다. 손이 작아 보였다.새미는 손바닥을 펴고 손가락을 접었다. 하나, 둘, 셋. 손가락 마디가 다시 어렸다.“할매.”“왜.”“오늘이 며칠이여?”“아침부터 별소리를 다 하네. 장 담그는 날이지.”끝분이 달걀을 건져 소금물에 다시 넣었다.“그게 며칠이냐고.”“2월 3일.”새미는 함지 가장자리를 잡았다. 손끝에 차가운 물기가 묻었다. 2월 3일. 장 담그는 날. 금혼령 방이 붙기 전날도 아니었다. 바로 그날이었다.“새미야, 얼굴이 허옇다. 어디 아프냐?”“아녀.”거짓말을 못 하는 혀가 먼저 나섰다. 새미는 말을 고쳤다.“잠깐 놀랐어.”“뭘 보고 놀랐는디?”“달걀이 떠서.”“달걀 뜨는 걸 오늘 처음 봤냐?”끝분이 눈을 흘겼다. 새미는 대답 대신 함지 안을 들여다보았다. 달걀은 소금물 위에 엽전만큼 떠 있었다. 끝분은 한 손가락으로 달걀을 눌렀다가 놓았다.그때 부엌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단밤이 메주 부스러기를 입가에 묻힌 채 장독대에 나타났다. 앞니 하나가 빠진 입으로 씩 웃었다.“누나, 메주 더 있어?”끝분이 고개를 돌렸다.“밤톨아.”단밤의 웃음이 바로 사라졌다.“그거 먹었냐?”“조금.”“조금이 어느만큼인디.”단밤이 양손을 벌렸다. 새미는 메주 광 쪽을 보았다. 메주 한 덩이가 모서리부터 뜯겨 있었다.“그건 3년 뒤에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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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메주
염대길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마루에 올랐다. 은가락지가 나무 바닥에 닿아 딱 소리를 냈다. 그는 엉덩이를 내려놓고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끝분이 장부를 덮었다.“남의 집 마루에 털썩 앉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소?”“빚 받으러 왔는데 대문 밖에 서 있을 수는 없지 않소?”“빚쟁이는 발이 안 아프고, 장 담그는 사람은 손이 안 아픈 줄 아나.”끝분은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새미는 마루 끝에 섰다. 염대길이 종이를 펴는 손을 보았다. 은가락지가 종이 모서리를 눌렀다.단두식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아부지는 장 팔러 나갔어.”새미가 말했다.“그럼 아가씨라도 들으시오. 이달 그믐까지 마흔 냥. 약속한 돈이오.”염대길은 종이를 새미 쪽으로 밀었다. 새미는 다가가 글을 읽었다. 빚진 돈과 날짜가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두식의 이름이 있었다. 글씨가 삐뚤었지만, 아버지 이름은 알아볼 수 있었다.“이자 얘기는 없네요.”“그믐까지 갚으면 그렇소.”“그믐을 넘기면요?”“그때 가서 정해야지.”“정해진 게 없는 돈을 빌려주셨다는 말씀이네요.”염대길의 눈이 가늘어졌다.“말을 야무지게 하는구려. 단 서방도 아는 내용이오.”“아부지가 아는지 제가 물어본 게 아니에요.”끝분이 새미를 돌아보았다. 새미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장독을 넘겨주기로 했던 날도 이 무렵이었다. 그때는 집에 없었다. 혼례를 앞두고 정신없이 지내다가 뒤늦게 들었다. 장독 몇 개를 빚 대신 넘겼다는 말에 새미는 마루에 앉아 종일 장부를 붙들고 있었다.그날부터 빈 독이 생겼다. 끝분은 빈 자리를 보지 않는 척했고, 두식은 술기운에 “금방 메울 수 있다”고 했다.이번에는 그 말을 듣지 않을 생각이었다.“단 서방이 오면 말하시오. 기한은 그믐이라고.”염대길이 종이를 접으려 했다. 새미가 종이 위에 손을 얹었다.“잠깐만요.”“왜 그러시오?”“기한이 그믐이라고 적혀 있는지 확인하려고요.”염대길은 손을 멈췄다. 새미는 종이를 다시 펼쳐 아래쪽을 살폈다. 약속한 날짜는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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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볶은 콩
두식은 붙잡힌 소매를 내려다봤다. 새미의 손가락이 아버지 옷자락을 구겨 놓고 있었다.“내놓는다고 한 건 아니여.”“방금 내놓으면 말이 통할 것 같다고 했잖아.”“그려. 말이 통할 것 같다는 말이었슈. 내놓는다는 말은 아니고.”끝분이 짚을 내려놓았다.“그 말장난으로 장독을 지킬 수 있겄냐?”두식은 지게끈을 고쳐 쥐었다. 지게가 어깨에서 삐걱거렸다.“어머니, 빚이 마흔 냥이잖유. 장독 열 개면 그중 얼마라도…….”“독을 세어 봤냐?”“안 세어 봤슈.”“그럼 열 개가 얼마나 큰지 알겄냐?”두식은 입을 다물었다. 새미는 아버지 소매를 놓지 않았다. 옷감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아부지, 장독은 돈이 아니야. 장을 담는 데 쓰는 거야.”“그건 나도 알지.”“알면 내놓겠다는 말 하지 마.”“말만 한 거여.”“말이 먼저 나가고 발이 따라 나가는 사람이 있잖아.”두식이 헛기침했다. 끝분은 지게를 가리켰다.“그 지게나 메고 장터에 가라. 독 이야기는 집에 두고.”“오늘은 장 팔러 가는 게 아니고 동네에 볼일이 있어유.”새미의 손이 소매에서 떨어졌다.“무슨 볼일?”“그냥 인사나 좀 하고 오려고.”두식은 지게를 들었다. 지게 위에는 빈 광주리만 얹혀 있었다. 장을 팔러 가는 차림은 아니었다.“아부지.”“다녀오께.”두식은 대문을 나섰다. 갓은 여전히 비뚤었고, 지게는 빈 채로 어깨에 걸렸다. 새미는 대문이 닫힐 때까지 서 있었다.끝분이 짚을 주워 모았다.“쫓아갈 거냐?”“아니.”“그럼 손부터 풀어라. 소매가 네 손에 잡혀 늘어났네.”새미는 손가락을 폈다. 손바닥에 옷감 자국이 남았다.“아부지는 장독을 넘길 생각 없어.”“그렇겄지.”“그런데 왜 자꾸 말이 달라져?”“돈이 급하면 사람 말이 길어져. 길어진 말 안에 겁이 섞이고.”끝분은 짚을 한 줌씩 가지런히 놓았다. 새미는 마루에 놓인 메주를 살폈다. 짚으로 묶인 큰애기는 단단했고, 고집쟁이는 모서리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울보의 매듭은 끝분이 아침에 다시 조여 놓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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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장국밥
2월 10일, 장터 어귀에는 단자를 받는 아전이 낮은 상을 펴 놓고 앉아 있었다. 새미는 지게를 내려놓지 않은 채 단자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지게 위 물안장 항아리가 움직이지 않도록 끈을 단단히 묶어 둔 참이었다.아전은 종이를 펼쳐 이름과 사주를 훑었다.“단새미.”“예.”“내용은 틀림없소?”“틀린 곳 없습니다.”새미는 또박또박 대답했다. 손가락이 저절로 접히려 해서 지게끈을 쥐었다. 아전은 단자를 접어 다른 종이들 위에 놓았다. 끝이었다. 이름 하나가 종이 위에 들어갔고, 새미는 그 이름을 당장 되찾을 방법이 없었다.“이제 돌아가도 됩니까?”“마감 전에 냈으니 돌아가도 되오.”아전은 다음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새미는 잠깐 상 위를 보았다. 제 단자가 다른 집안의 단자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종이 한 장에 간택의 문이 열리는 건 빠르기도 했다.장터에는 사람과 짐이 오갔다. 생선 광주리를 든 장사꾼이 새미 옆을 지나갔고, 바닥에 앉은 아이가 엿가락을 반으로 나누고 있었다. 새미는 지게끈을 어깨에 고쳐 걸었다. 항아리에서 장 냄새가 났다. 오늘은 팔아야 했다.“아가씨, 장 파는 데까지 그 지게로 갈 거요?”아전이 물었다.“국밥집에 먼저 가져다드릴 겁니다.”“그렇소. 길 막지 않게 조심하시오.”“예.”새미는 지게를 메고 장터 안으로 들어갔다. 어깨에 끈이 닿았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항아리 뚜껑이 낮게 울렸다. 새미는 걸음을 늦춰 물안장이 흔들리지 않게 했다.장터 한복판에 이르자 국밥집이 보였다. 문 앞에는 장작을 쌓아 둔 자리가 있었고, 안에서 국물 끓는 소리가 났다. 새미가 문턱에 닿기도 전에 주인이 고개를 내밀었다.“아이고, 새미 왔네. 어깨 안 아프냐?”“괜찮아요. 항아리부터 내려놓을게요.”“잠깐, 내가 받으마.”주인은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고 나왔다. 새미가 지게를 낮추자 주인이 항아리 아래를 받쳤다. 바닥에 닿는 순간까지 둘은 숨을 맞췄다. 항아리가 장작더미 옆에 놓였다.“이번 건 간장하고 된장이에요. 간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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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숭늉
“물안골 단가네 장입니다.”새미는 숟가락을 그릇 옆에 내려놓았다. 선비가 물었다는 말에 국밥집 주인도 고개를 돌렸다. 구석자리의 선비는 국밥 앞에 앉아 있었다. 쪽빛 도포 소매가 상 위에 닿지 않도록 팔꿈치를 안쪽으로 당겼다.“단가네라. 물안골은 도성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소?”“10리쯤 됩니다.”“걸어서 가면 오래 걸리겠구려.”“장 지게를 메고 가면 더 걸립니다.”“장독은 몇 개요?”새미는 선비의 얼굴을 살폈다. 장을 사려는 사람치고는 물안골까지의 거리와 장독 수부터 물었다. 장독을 구경하러 온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 국밥집에서 처음 만난 선비가 물을 만한 말은 아니었다.“87개입니다.”“모두 장이 들었소?”“장마다 익는 때가 달라서요. 비어 있는 독도 있습니다.”“그 독에도 이름이 있소?”새미는 눈썹을 조금 올렸다.“독에 이름 붙이는 집은 드뭅니다.”“그렇소?”“저희 할매가 붙였습니다.”“독마다 이름을 붙였겠구려.”“예. 장부에도 적혀 있습니다.”“장부까지 있소?”“장 담근 날과 옮긴 날을 적습니다. 장이 어느 독에서 났는지도요.”선비가 국밥을 내려다봤다. 김이 그릇 위에서 가늘게 올랐다. 숟가락을 들려던 손이 잠깐 멈췄다.“그 장부를 보면, 이 장이 어느 독에서 난 것인지도 알 수 있소?”“장부를 보고 맛도 보면요.”“맛을 보면 알 수 있소?”“몇 해 묵었는지, 소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어느 독인지 압니다.”“맛만 보고?”“예.”“늘 맞소?”“틀릴 때도 있습니다.”새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선비가 다시 새미를 보았다. 웃을 때 한쪽 눈썹이 먼저 올라가는 얼굴이었다. 지금은 웃지 않았다.“틀릴 때는 어떻게 하오?”“장부를 다시 봅니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모른다고 합니다.”주인은 그릇을 닦던 손을 멈췄다.“새미는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애야. 장사하는 사람한텐 별로 편한 성미가 아니지.”“모른다고 하면 손님이 장을 못 믿지 않겠습니까?”“그렇다고 아는 척하면 장이 상하잖아요.”주인은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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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엿기름
2월 15일, 두식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있었다. 멍석은 아직 반쯤 말려 있었고, 두식은 마른 쪽을 위로 돌려 놓으려다 발에 걸려 한쪽 무릎을 꿇었다.“아부지, 뭐 하세요?”새미가 광에서 빈 바가지를 들고 나오다 물었다.“손님 맞을 준비를 허는 중이여.”“누구요?”“동네 사람들.”“무슨 일로요?”두식은 갓을 고쳐 썼다. 삐뚤어진 갓이 반대쪽으로 기울었다.“우리 딸이 세자빈 후보가 났다는디, 집안에서 가만있을 수야 있나.”새미는 바가지를 내려다봤다. 광에서 꺼낸 건 물을 뜨려고 가져온 바가지였다. 손에 든 채로는 아버지의 말을 막을 수 없었다.“후보가 난 게 아니에요. 단자를 낸 거예요.”“그게 그거지.”“아니에요.”“이름을 적어 냈으니 후보 아니냐?”“그럼 이름 적힌 사람은 다 세자빈 후보예요?”“다들 후보는 후보지.”“그렇게 말하면 동네 사람들한테 오해를 줘요.”두식은 멍석을 펴다 말고 새미를 보았다.“오해라니.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이여?”새미는 대답을 고르느라 바가지 손잡이를 만졌다. 아버지가 동네에서 허풍을 부리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단자를 냈다는 사실만으로 친척들이나 이웃을 불러 잔치를 할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오면 축하를 건넬 테고, 새미는 웃으며 아니라고 해야 했다. 그러면 새미가 간택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말도 집안의 웃음거리가 될 수 있었다.“아직 뽑힌 게 아니라고 말해야 해요.”“그 말만 하면 잔치 못 허냐?”“잔치할 일이 없어요.”“우리 집에 사람이 모여 밥을 먹는디 무슨 큰일이 있어야 하냐?”“아부지가 세자빈 후보가 났다고 부르셨잖아요.”“그건 사람을 모으려고 한 말이여.”“그게 오해라고요.”두식은 입을 다물었다. 멍석 가장자리가 마당 흙에 닿아 있었다. 새미는 바가지를 놓고 멍석을 잡았다.“아부지, 장독 87개 아직 다 살아 있어요. 빚도 40냥 남았고요. 잔치할 돈 있으면 장값부터 모아야 해요.”“잔치라고 해 봤자 밥 한 솥이면 되지.”“밥 한 솥도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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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약과
새미는 무명 치마 끝을 한 번 더 눌러 펴고, 궁 안으로 들어섰다.치마는 깨끗했지만 새 옷은 아니었다. 일부러 고른 옷이었다. 비단을 입고 오면 집안에서 마련한 옷이 궁에 들 만하다고 여길 테고, 그러면 괜히 눈에 띌 수 있었다. 새미는 눈에 띄지 않아 떨어지고 싶었다. 다만 옷에 묻은 얼룩 하나까지 살펴보는 상궁 앞에서 지저분해 보이는 건 싫었다.문 앞에는 초간택을 보러 온 후보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모두 30명. 곱게 다린 치마와 반듯한 옷깃이 이어졌다. 그 사이 새미의 무명 치마는 한눈에도 수수했다.“성함을 말씀하십시오.”상궁이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물안골 단가의 단새미입니다.”“집안 어른은 함께 오셨습니까?”“할머니께서는 집을 지키셔야 해서 오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도성까지 저를 데려다주신 뒤 돌아가셨습니다.”사실 두식은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돌아갔다. 옷매무새를 봐 주겠다며 새미의 소매를 잡고, “우리 딸이 뽑히면 내가 궁에 드나들 수 있겠지유?” 하고 물었다. 새미가 “아직 뽑힌 게 아니에요”라고 답하자, 두식은 “그럼 뽑히면 다시 물어볼게”라며 발길을 돌렸다.상궁은 새미의 대답을 문서에 적었다. 붓끝이 종이를 긁었다.“이쪽에 앉으십시오. 이름을 부르면 일어나시면 됩니다.”“알겠습니다.”새미는 안내받은 자리로 갔다. 바닥에 놓인 방석은 촘촘히 놓여 있었고, 후보들은 서로의 옷과 얼굴을 살피느라 말을 아꼈다. 새미는 가장자리 자리에 앉았다. 옆에 앉은 아씨가 치맛자락을 조금 끌어당겼다. 새미의 무명 옷이 닿을까 걱정한 모양이었다.새미는 방석 위에서 손을 모았다. 허리춤에 찬 나무 맛숟가락이 손끝에 닿았다. 궁에 들어오며 빼야 하나 망설였지만, 작은 숟가락을 빼면 허전할 것 같아 그대로 두었다. 간택장에서 장을 맛볼 일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손에 익은 물건은 두고 싶지 않았다.한 상궁이 후보들의 줄을 확인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후보들은 차례로 일어나 예를 올렸다. 새미도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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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간장 한 종지
새미는 손을 무릎 위에 포갰다. 엄지로 검지를 눌렀다. 중전의 질문이 방 안에 남아 있었다.“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냐.”먼저 불린 후보가 허리를 곧게 세웠다.“부모님의 은혜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갚으려 해도 다 갚지 못할 것이니, 세상에서 가장 귀합니다.”중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보는 예를 갖추고 물러났다. 다음 후보는 숨을 한번 고른 뒤 입을 열었다.“나라를 지키는 충심입니다. 백성이 편히 살 수 있는 것도 나라가 바로 서야 가능한 일입니다.”뒤에 앉은 후보 하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미는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눌렀다. 부모의 은혜도, 나라를 지키는 마음도 귀한 것이 맞았다. 그 대답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셋째 후보는 백성을 말했다. 넷째 후보는 임금의 덕을 말했다. 말들은 모두 단정했고, 말끝마다 예법에 맞는 고개 숙임이 붙었다.새미는 자신이 준비한 답을 떠올렸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떨어지려면 어렵게 꾸밀 필요가 없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하기로 했다. 지금은 아는 것을 말하면 됐다.상궁이 이름을 불렀다.“물안골 단가의 단새미.”새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명 치마 끝이 무릎 아래에서 한 번 접혔다. 새미는 손으로 펴고 앞으로 나갔다. 바닥을 밟는 소리가 방 안에 짧게 났다.중전이 새미를 바라봤다.“단새미는 무엇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느냐?”새미는 중전의 눈을 보았다. 질문을 다시 듣는 동안 손가락이 움직이려 했다. 새미는 엄지로 검지를 눌렀다.“간장 한 종지입니다.”말이 끝나자 방 안에 숨죽인 소리가 퍼졌다. 누군가 기침을 삼켰다. 다른 쪽에서 작은 웃음이 났고, 곧 몇 사람의 웃음이 더해졌다.새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방금 한 대답을 거두고 싶지 않았다. 중전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비치지 않았다. 다만 눈이 새미의 손과 얼굴을 차례로 살폈다.“왜 간장 한 종지냐?”새미는 목을 가다듬었다.“간장은 담근 뒤 3년을 기다려야 제맛이 납니다. 기다린다고 다 좋은 장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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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식은 떡
내관이 외친 뒤에도 새미는 한동안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물안골 단가 여식 단새미, 초간택.”“제가요?”내관은 문서를 내려다봤다.“그렇다고 적혀 있습니다.”새미는 한 걸음 다가갔다. 이름을 잘못 들었을 리 없었다. 물안골 단가의 단새미. 자기 이름이 맞았다. 그래도 문서에 적힌 글자를 직접 봐야 했다.“확인해도 되겠습니까?”“이름을 확인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예.”내관이 잠깐 망설이다 문서를 몸쪽으로 돌렸다. 후보들의 이름이 줄을 맞춰 적혀 있었다. 새미는 손가락을 꼽았다. 첫 번째로 자기 이름을 찾았다. 물안골 단가의 단새미.새미는 문서에서 눈을 떼고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두 번째였다. 이름은 그대로였다.“제가 잘못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글자를 모르십니까?”“아닙니다. 혹시 이름이 비슷한 사람이 있을까 해서요.”“그런 이름은 없습니다.”새미는 마지막으로 다시 읽었다. 3번째였다. 단새미. 초간택.내관은 문서를 접었다.“이제 되셨습니까?”“예. 아닙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무엇을 모르시겠습니까?”“제가 왜 붙었는지 모르겠습니다.”내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새미는 입을 다물었다. 궁에서 이유를 모르는 일은 흔했다. 지난 생에도 그랬다. 사라진 물건이 돌아왔고, 사람이 자리를 옮겼고, 어느 날 누군가의 말이 딱 끊겼다. 누구에게 묻든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분부가 그러하셨습니다.”새미는 손가락을 무릎 위에서 폈다 오므렸다.“연가희 아씨도 붙었습니까?”내관이 문서를 다시 확인했다.“연가희 아씨도 초간택에 들었습니다.”“그렇군요.”가희가 복도 끝에서 걸어왔다. 화려한 비단 치마를 입은 가희는 새미보다 먼저 문서를 보았다.“제 이름도 있네.”“축하드립니다.”“축하할 일인지 모르겠어.”가희는 문서에 적힌 이름을 읽고 입술을 깨물었다. 손이 고름으로 올라갔다가 멈췄다. 새미가 묶어 준 매듭은 그대로였다.“너도 3번 읽었어?”“3번 읽었어요.”“나도 그래야겠네.”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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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된장 한 단지
바가지가 허공에서 멈췄다.장독대 끝에 선 사람은 두 손을 들고 있었다. 쪽빛 도포에 갓을 썼고, 갓끈은 턱 아래 단정히 묶여 있었다. 새미는 바가지를 내리지 않은 채 그 사람의 손을 살폈다. 손가락에 장이 묻지는 않았다. 조금 전 열린 뚜껑은 독 위에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누구여?”“장을 사러 왔소.”새미는 바가지를 조금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장독 뚜껑을 열고 장을 사러 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장 맛을 보려면 열어야 하지 않소.”“먼저 주인을 불러야지요.”“주인이 나왔으니 됐소.”“제가 주인인지는 어떻게 아십니까?”선비는 대답 대신 장독대와 새미를 번갈아 보았다. 새미의 무명 끈에 묶인 머리며, 장이 묻은 앞치마며, 손등의 얕은 흉터가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새미는 바가지 손잡이를 더 꽉 쥐었다.“그 독은 열지 마세요. 뚜껑을 제자리에 놓으시고요.”“그러겠소.”선비는 독을 건드리지 않고 손을 거뒀다. 새미는 그제야 그가 방금 열어 본 독의 뚜껑을 제대로 올려놓는 걸 확인했다. 손끝이 뚜껑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힘을 주어 밀지 않고, 틈을 살피며 얹었다.‘도둑이면 저렇게 놓진 않겠지.’그렇다고 장을 사러 온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새미는 바가지를 허리 높이까지 내렸다. 손은 여전히 손잡이에 남겨 두었다.“무슨 장을 찾으시는데요?”“된장이오.”“된장은 많아요.”“그중에 먹을 만한 장을 찾으러 왔소.”“장집에 와서 먹을 만한 장을 찾으신다니, 말씀은 참 쉽네요.”선비의 왼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새미는 그 표정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하려다 그만두었다. 지금은 얼굴보다 손님이 먼저였다.“얼마나 필요하세요?”“한 단지면 되오.”“집에서 드실 건가요?”“그렇소.”“집에서 드실 장을 사면서 새벽부터 담장을 넘으셨습니까?”선비는 입을 다물었다. 새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담장을 넘었다는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정한 것도 아니었다.“그럼 제가 도둑으로 봐도 할 말 없으시겠네요.”“그럴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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