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세자빈으로 7년, 남편과 나눈 말은 손에 꼽았다. 친정 장독대는 그새 남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눈을 뜨니, 장 담그는 날 아침이었다. 금혼령 방이 붙기 바로 그날. «이번 생엔 간택에서 떨어진다. 빚 40냥 갚고, 장독 87개 지킨다.» 장맛 하나로 묵은 해를 맞히는 혀와, 궁에서 산 7년의 기억. 떨어지는 건 쉬울 줄 알았다. 그런데 초간택에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간장 한 종지»라고 대답한 날, 재간택 명단에 내 이름이 올랐다. 그리고 새벽, 장독대 앞에 선비 하나가 서 있었다. “장을 사러 왔소.
더 보기새미는 뚜껑에서 손을 뗐다. 끝분이 마른 천으로 손잡이를 한 번 더 닦았다.“이제 가야제. 궁에서 기다리겄다.”“할매가 먼저 가면 안 돼요. 오늘은 제가 가는 날이에요.”“독도 같이 가는디 내가 먼저 가면 어떻고 네가 먼저 가면 어떠냐.”끝분은 씨간장 독 앞에 섰다. 독의 입구를 둘러싼 흙은 단단했다. 독 옆면에는 오래된 손자국이 몇 겹으로 남아 있었다. 새미는 손바닥을 독에 댔다. 차가운 옹기가 손끝에 닿았다.새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독은 물안골 장독대에 있었다. 끝분의 시어머니가 그 시어머니에게서 받아 지킨 씨간장이었다. 지난 생에는 궁 장고에서 이 맛을 다시 만났다. 그때 새미는 독 앞에서 미끄러졌다. 이번에는 그 독을 제 손으로 궁에 들여놓으려 했다.마당에 첫눈이 내렸다. 한 점씩 떨어진 눈이 독 뚜껑과 새미의 무명 끈 위에 붙었다.“눈 온다.”밤톨이가 문밖에서 소리쳤다.“누나, 눈이 독에 들어가면 안 되지?”“뚜껑 닫았으니까 괜찮아. 너는 옷부터 챙겨 입어.”밤톨이는 이미 겉옷을 입고 있었다. 앞니 빠진 입을 벌리고 웃으며 빈손을 내밀었다.“내 옷은 다 입었어. 독을 받치면 돼.”“손부터 씻어. 옹기 잡을 거잖아.”밤톨이는 손을 내렸다. 뒤뜰에서 두식이 지게 끈을 조였다. 갓은 평소보다 반듯하게 썼지만, 새미가 보기엔 여전히 한쪽이 기울어 있었다.“아부지, 갓이 또 삐뚤어졌어요.”“그려? 오늘은 마음이 바빠서 그런가 보네.”“갓은 마음으로 쓰는 게 아니에요.”“그럼 손으로 고치면 되지.”두식은 갓을 바로잡고 지게를 내려놓았다. 지게 위에는 씨간장 독을 받칠 짚과 두꺼운 천이 놓여 있었다. 끝분이 천을 만져 보고는 두식의 손등을 탁 쳤다.“이거 너무 얇다.”“어머니, 독이 그리 무겁진 않잖유.”“네가 들어 봤냐?”“아직은 안 들어 봤슈.”“안 들어 봤으면 입부터 다물어라.”“예.”두식은 대꾸를 삼켰다. 밤톨이는 손을 씻고 돌아와 지게 옆에 섰다. 새미는 독의 아래쪽을 살폈다. 금이 간 곳은 없었다. 지게
새미는 기다림이 독 앞에 쪽지를 내려놓았다. 종이 끝이 바람에 들리지 않도록 장부로 눌렀다.“오늘 여는 날이오.”세자가 독 앞에 섰다. 쪽빛 도포의 소매를 걷은 손에 흙이 조금 묻어 있었다. 새미는 독 뚜껑을 살폈다. 가장자리에 마른 흙이 끼어 있었고, 손잡이에는 지난번 닦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오늘 여는 날이라고 하셨으면서, 벌써 열어 보셨습니까?”“아직 열지 않았소.”“그럼 이 흙은요?”“독을 옮길 때 묻었소. 뚜껑은 건드리지 않았소.”새미는 세자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 끝에도 흙이 묻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독을 옮기고 나서 손을 씻지 않은 모양이었다.“장독대에 들어오시기 전에 손부터 씻으셨어야죠.”“맞는 말이오.”세자는 그 자리에서 손을 털지 않았다. 새미가 바가지와 물그릇을 가져오자 두 손을 내밀었다. 새미는 물을 부었다. 손끝에 묻은 흙이 물그릇 밑으로 가라앉았다.“이제 됐소?”“손톱 밑도요.”세자는 손을 돌려 손톱 밑을 보여 주었다. 새미는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장독대에는 찬 공기가 남아 있었다. 볕이 닿은 독의 어깨는 조금 따뜻했고, 그늘에 놓인 독은 차가웠다. 기다림이 독은 가운데 줄 맨 끝에 있었다. 8개월 동안 뚜껑을 열지 않았다. 새미는 담근 날부터 장부에 날짜와 재료를 적었다. 그 뒤로는 독을 지나칠 때마다 뚜껑을 두드리지 않고 옆면만 살폈다.“3년 뒤에 같이 열자고 하셨잖아요.”“그랬소.”“그런데 오늘은 8개월 된 장을 열어도 된다고 하시는군요.”“3년을 기다리기로 한 건 장이었소. 오늘 맛을 보는 것까지 금한 건 아니오.”“말은 맞는데, 듣고 있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네요.”“그럼 내가 먼저 맛보겠소.”“제가 장을 담갔으니 제가 먼저 봐야죠.”“그대가 먼저 봐도 좋소.”세자는 대꾸를 더 잇지 않았다. 새미는 그 침묵을 받아 독 앞에 쪼그려 앉았다. 독을 열기 전에 주변부터 살폈다. 뚜껑이 비뚤어지지 않았고, 독의 입구도 깨끗했다. 새미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마른 천으로 뚜껑 가장자리를
새미는 강정 접시를 마루 가운데로 옮겼다. 접시 밑에 깐 종이가 한쪽으로 밀려 있었다. 손끝으로 종이를 당기자 바삭한 부스러기가 손바닥에 묻었다.“이렇게 많이 준비할 필요는 없었는데.”“손님이 오신다면서요.”옆에서 찻물을 올리던 나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새미는 접시를 살폈다. 강정은 가지런히 놓였지만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쌀알이 큼직하게 붙은 것도 있고, 끝이 조금 부서진 것도 있었다.“모양이 달라도 맛은 같아요.”“그래도 마마께서 손수 놓으셨는데요.”“손님들이 모양을 세어 보러 오시는 건 아니잖아요.”나인은 웃음을 삼키며 주전자를 들었다. 뜨거운 물이 찻잔에 부어졌다. 새미는 찻잔을 받쳐 들고 김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강정에 묻은 조청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별궁 마당에서는 빗자루가 마른 잎을 쓸고 있었다. 매실나무 아래에는 잎 몇 장이 남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이 떨어졌고, 나인은 쓸고 새미는 잠시 뒤 다시 밟았다. 오늘은 그 정도 실수쯤은 그냥 두기로 했다.“오시는 분들이 곧 도착하실 겁니다.”“가희가 먼저 오면 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도강도 같이 왔으면 둘 다요.”“예, 마마.”새미가 강정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에 넣으려는 순간, 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나인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손님이 오셨습니다.”새미는 강정을 접시에 내려놓았다. 손끝을 옷에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희는 마루에 오르자마자 새미를 보고 두 손을 들었다.“새미야!”새미도 웃으며 앞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으려다 멈췄다. 가희의 손에 보자기가 들려 있었고, 새미의 손에는 찻잔이 있었다.“손부터 비워야겠네.”“그럼 이걸 받아.”가희가 보자기를 새미에게 건넸다. 새미는 찻잔을 나인에게 맡기고 보자기를 받았다. 도강이 뒤에서 가희의 겉옷을 받아 들었다. 도강은 새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마마,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두 사람 다 편히 들어오세요. 여기서는 그렇게까지 예를 차리지 않으셔도 돼요.”“그렇다고 마루에
“할매, 씨간장 독은 지게로 못 져.”끝분의 손이 독 뚜껑에 놓인 채 멈췄다. 두식은 막걸리 사발을 내려놓고 장독대 앞에 바짝 다가섰다. 새미는 아버지의 갓을 보았다. 갓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두식은 그걸 모르는 눈치였다.“못 지면 수레에 싣지.”“궁 문턱을 수레가 넘어가겄냐.”“그러면 내가 들면 되지.”“독을?”“씨간장 독은 안 되더라도, 작은 독은 들 수 있어유.”끝분은 두식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에 굳은살은 있었지만, 장독을 들어 본 손 같지는 않았다.“네가 장독을 들어 봤냐?”“장 지게를 졌잖유.”“그건 장 항아리 몇 개 실은 지게였고.”“그려도 등에 멨슈.”“항아리도 깨 먹었지.”두식은 입을 다물었다. 새미는 접시를 든 채 아버지를 살폈다. 지난번 같았으면 두식은 “금방 오께”라는 말만 남기고 마당을 빠져나갔을지 모른다. 오늘은 막걸리 사발도 내려놓았고 장독대에서 물러나지도 않았다.“그럼 내가 지게 대신 장독대를 지킬게유.”끝분이 고개를 돌렸다.“뭐라고?”“새미가 궁에 가면 물안장 독을 누가 살펴야 하잖유. 어머니 혼자 다 보기엔 힘에 부칠 테고. 내가 배우면 되지.”“장 담그는 것도 모르면서 뭘 지켜.”“그러니까 가르쳐 주시면 되잖유.”끝분은 한동안 두식을 바라봤다. 두식의 갓은 여전히 삐뚤어져 있었다. 새미는 웃음이 나오려는 입술을 다물었다.“내가 새미한테 장 담그는 법을 가르친 건 한두 마디가 아니여.”“나도 처음부터 배우면 되지.”“처음부터라면 메주부터다.”“그러면 메주부터 하겄슈.”“소금도 골라야 한다.”“고르면 되지.”“독도 씻고 말려야 혀.”“씻으면 되잖유.”“입은 잘 씻네.”“손도 씻을게유.”끝분이 독 뚜껑에서 손을 떼었다. 두식은 그 손짓을 허락으로 알아들었는지 소매를 걷었다.“지금부터 할까유?”“지금은 손님들 밥을 먹여야제.”“그럼 밥 먹이고 나서 배우면 되겠구먼.”“네가 밥을 먹이고?”“내가 상도 옮겼잖유.”“접시 하나 들고 전을 흘릴 뻔했지.”“안 흘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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