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권신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미친 권신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By:  샹차이 다다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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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삶을 살던 김민희는 뜻밖의 사고로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소설 속에 빙의한다. 그것도 이름조차 제대로 언급되지 않는 단역이자, 한미한 가문 출신의 부모 잃은 소녀로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 그녀는 칠 년 동안 자신의 재주를 철저히 숨겼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꽃처럼 얌전히 지내며, 원작 속 치열한 권력 다툼과도 최대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던가. 의탁하고 있던 사씨 가문이 몰락하자, 김민희는 어쩔 수 없이 정혼자를 따라 도성으로 향한다. 그렇게 그녀가 발을 들인 곳은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는 명문가, 종씨 가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종씨 가문의 둘째 나리, 종선이 있었다. 조정 내각의 수장이자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측근. 냉혹하고 무자비한 성정에 사람의 생사를 좌우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사내.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김민희만은 알고 있었다. 천하를 쥐락펴락하는 이 권신이 훗날 가문이 몰락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리라는 사실을. 그런 운명에 휘말리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김민희는 매사에 신중을 기하며 오로지 동생과 정혼자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기회만을 노렸다. 그러나 그녀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요하게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 종씨 가문에 친척 집안의 아씨가 찾아왔다. 가을 달처럼 희고 맑은 얼굴에 갓 피어난 연꽃처럼 청초한 자태. 그야말로 경국지색이라 불릴 만한 미인이었다. 종선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제 것으로 삼고 싶었다. 조카의 정혼자라는 사실이 무슨 상관이랴. 빼앗으면 그만이었다. 처음에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반드시 제 여자로 만들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끝내 사랑의 늪에 깊이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종선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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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도성의 칠월은 숨이 턱 막힐 만큼 무더웠다.

낮잠을 자던 김민희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녀가 시녀에게 물었다.

“밖에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스럽니?”

김민희가 머무는 곳은 외진 곳이라 평소에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런데 오늘은 웃고 떠드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종씨 가문에 무슨 경사가 생긴 모양이었다.

“종 대인께서 돌아오신대요!”

월계가 들뜬 얼굴로 대답했다.

“어느 종 대인 말이니?”

“둘째 나리요!”

월계는 밤떡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둘째 나리께서 집을 떠나신 지 반년 만에 내일 도성으로 돌아오신대요. 그래서 지금 다들 나리를 맞을 준비로 정신이 없답니다!”

김민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도 이 집에 얹혀 지낸 지 벌써 반년이 훌쩍 넘었다.

그때 월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둘째 나리께서는 신선에 비길 만큼 용모가 빼어나시대요. 수많은 규수가 남몰래 연모하는 분이라던데, 아씨도 내일 한번 구경하러 가 보시겠어요?”

그 말을 듣자 김민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나는 가지 않을 테니, 너도 갈 생각은 마.”

월계는 영문을 몰라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저 시무룩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네.”

김민희는 화장대 앞에 앉아 손끝으로 귀밑머리를 가만히 쓸어 넘겼다. 거울에는 희고 고운 얼굴이 비쳐 있었다. 전생의 자신과 어딘가 닮은 얼굴이었다.

올해로 열일곱 살. 생각해 보니 이 낯선 세상에 떨어진 지도 어느덧 칠 년이나 흘렀다.

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기가 막혔다.

근무 중 몰래 화장실에 숨어 소설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을 뿐인데, 눈을 떠 보니 별생각 없이 펼쳐 봤던 권력 암투 소설 속 세상에 들어와 있었다.

한창 꽃다운 나이에 사회생활을 하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열 살짜리 여자아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진짜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이 세상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난리가 터졌다. 나라는 쑥대밭이 되었고, 부모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곁에 남은 사람이라곤 병약한 남동생 하나와 영 미덥지 못한 시녀 하나뿐이었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나고 자란 김민희에게 죽음이란 그저 텔레비전에서나 접하던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참혹한 전란을 직접 겪게 되었으니, 살아남은 것만 해도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조정에서 군사를 보내 반란을 진압한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져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 몸의 친척들이 그녀를 어느 벼슬아치의 첩으로 팔아넘기려 했던 것이다.

결국 김민희는 남동생과 시녀를 데리고 강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강직한 선비 집안으로 이름난 사씨 가문에 몸을 의탁했고, 사씨 집안 큰도련님의 민며느리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야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이후 몇 해 동안은 큰 탈 없이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사회옥이 과거에 급제하자, 김민희 일행도 그를 따라 종씨 가문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곳에 머문 지도 어느덧 반년이 흘렀다.

방금 월계가 언급한 둘째 나리 종선은 바로 육 년 전 조왕의 반란을 평정한 일등 공신이었다.

당시 종선은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그토록 큰 공을 세웠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젊은 나이에 걸출한 영웅이 탄생했다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한 시대를 호령했던 이 영웅도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종씨 일가 역시 새 황제의 손에 허무할 만큼 쉽게 몰살당하고 만다.

김민희는 그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목차를 훑어보며 군데군데 읽은 것이 전부라, 전체적인 줄거리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지금 자신이 빙의한 인물은 눈여겨본 기억조차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종선은 결코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종씨 일가가 맞이할 비참한 결말을 떠올리자 김민희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이곳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다른 살길을 찾아야 했다.

해가 질 무렵, 종씨 댁 안주인 유씨의 시녀가 찾아와 김민희를 부른다는 말을 전했다.

월계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요. 큰마님께서는 평소 아씨를 부르시는 일이 거의 없으신데, 하필 이런 때에 무슨 일이실까요?”

김민희도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김민희는 월계를 데리고 한적한 상서원을 나섰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녹음이 우거진 오솔길을 지나고, 중문을 몇 개 더 통과하자 마침내 안채의 뜰이 모습을 드러냈다.

뜰에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겹겹이 들어서 있었다. 곳곳에는 독특한 모양의 바위와 울창한 나무들이 어우러져 고즈넉하면서도 정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발밑에 깔린 푸른 벽돌 하나하나에서조차 명문가의 권세가 느껴질 정도였다.

길에서 마주친 시녀들은 김민희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아씨.”

그러나 공손한 것은 말투뿐,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김민희가 지나가자 시녀들은 그녀의 뒷모습을 흘겨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재수 없게.”

“부모 잡아먹은 팔자라잖아. 동생도 늘 골골대는 게, 저 여자 때문에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를 일이지!”

“그만해요, 춘도 언니. 그래도 반쯤은 주인인 분인데…….”

분홍색 옷을 입은 시녀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주인은 무슨 주인? 도련님이 저 여자를 정식으로 아내로 맞아들인 것도 아니잖아. 아무런 명분도 없이 남의 집에 눌러앉아 사는 주제에. 저렇게 낯 두꺼운 여자는 처음 본다니까.”

물론 이런 험담이 김민희의 귀에 들어갈 리는 없었다. 설령 들었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이보다 더한 험담도 수도 없이 들어왔으니까.

김민희는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궁리했다.

이 나라의 법도상 여자는 홀로 집안의 가장이 될 수 없었다. 남동생이 있긴 했지만 아직 어려 독립해서 살림을 꾸릴 형편도 되지 못했다.

게다가 이리 같은 친척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혼자 힘으로는 그들을 감당할 수 없으니, 결국 사회옥과 혼인해 그의 보호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사회옥은 성품이 바르고 김민희를 한결같이 대해 주는 사람이었다. 남편감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괜찮은 사내였다. 이제는 과거에 급제해 관직까지 얻었으니, 그와 혼인한다고 해서 손해 볼 일도 없었다.

다만 사회옥은 아직 부친상을 치르는 중인 데다 공무로 지방에 나가 있어, 혼례는 조금 더 미뤄야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옥란원에 도착했다.

하인이 안에 찾아온 사실을 알리고 나서야 김민희는 방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큰마님 유씨는 자단나무로 만든 평상에 앉아 있었다. 금실로 구름무늬를 짜 넣은 짙은 자줏빛 비단 겉옷을 걸친 모습에서는 고고한 기품과 안주인다운 위엄이 느껴졌다.

탁자 위에 얼음을 놓아둔 덕분에 방 안은 서늘했다. 곁에서는 어린 시녀 둘이 쉴 새 없이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은 뒤, 유씨가 곧장 본론을 꺼냈다.

“내일 둘째 나리의 귀환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릴 것이다. 온 집안이 준비하느라 분주한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음식이지. 그런데 공교롭게도 주방에서 탕 요리를 맡은 하인이 고뿔에 걸렸구나. 그런 몸으로 윗분들께 올릴 음식을 만들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유씨는 말을 마치며 앞에 서 있는 김민희를 슬쩍 훑어보았다.

수수한 치마저고리에 장신구 하나 걸치지 않았지만, 김민희의 빼어난 미모는 감출 수 없었다. 마치 홀로 빛을 발하는 진주처럼 눈부신 모습에, 보는 이들은 그녀의 소박한 차림새마저 잊어버릴 정도였다.

“노부인께 듣자 하니 네가 탕을 아주 잘 끓인다더구나. 국물 맛이 깊고 진하다지? 둘째 나리께서는 평소 담백한 음식을 즐기시는데, 혹시 연근갈비탕도 끓일 줄 아느냐?”

김민희는 난처한 기색을 내비쳤다.

“끓일 줄은 압니다만, 솜씨가 부족하여…….”

그러나 유씨는 손을 내저으며 말을 잘랐다.

“노부인께서 그토록 칭찬하셨으니 솜씨가 부족할 리 있겠느냐. 이번 일은 네게 맡기마.”

이미 결정이 내려진 마당에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김민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희가 물러가자, 유씨의 어깨를 주무르던 시녀가 의아한 듯 물었다.

“둘째 나리의 귀환을 축하하는 잔치는 집안의 큰 행사이지 않습니까. 주방에 일손이 부족하다면 밖에서 사람을 고용해도 될 텐데, 굳이 저 아씨께 맡기시는 건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니신지요? 혹여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노부인께서 또…….”

유씨가 시녀를 매섭게 흘겨보았다.

“지금 네가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시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유씨가 말을 이었다.

“그저 저 아이에게 일거리 하나를 맡긴 것뿐이다. 내일 잔치에 나오지 말라고 대놓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그랬다가는 공연히 원망만 살 테니.”

그제야 시녀는 유씨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내일은 단순히 둘째 나리의 귀환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었다. 둘째 나리의 혼처를 알아보기 위해 신붓감들을 살펴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 중요한 날에 무슨 일이 생겨서는 절대 안 될 터였다.

유씨는 찻잔을 들어 뚜껑으로 찻물 위에 뜬 거품을 살살 걷어 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얼굴이 지나치게 곱지. 아무리 얌전하고 조신하게 군다 한들, 그 빼어난 미모가 언제 화를 불러올지 모르는 법이다. 내일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길까 염려되어 미리 손을 쓴 것이니, 그 아이가 서운해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

*

이튿날, 동이 트기도 전부터 종씨 가문의 하인들은 손님맞이 준비로 분주했다.

본채에도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점차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집안 식구들은 삼삼오오 모여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씨와 큰집의 첩실 둘은 일찌감치 나와 있었고, 단잠을 자다 불려 나온 도련님과 아씨들도 얌전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의 노부인은 가장 늦게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침 해가 완전히 떠올랐을 무렵, 집사 하나가 황급히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노부인, 둘째 나리께서 대문 앞에 도착하셨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윽고 아침 햇살을 등진 채 훤칠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종선은 이무기 무늬가 수놓인 자줏빛 관복을 입고 있었다. 뚜렷하면서도 날카로운 이목구비에 피부는 서늘할 만큼 희었고, 짙은 눈썹은 반듯하게 뻗어 있었다. 입술은 옅은 빛을 띠었으며, 냉엄한 얼굴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예를 올렸다.

“어머니, 형수님.”

낮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노부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의 모습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유씨 역시 감회가 새로웠다.

노부인은 손을 뻗어 둘째 아들을 일으켜 세우며 다정하게 말했다.

“돌아왔으니 됐다. 무사히 돌아왔으면 그걸로 된 게야. 맡은 일은 잘 마무리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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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도성의 칠월은 숨이 턱 막힐 만큼 무더웠다.낮잠을 자던 김민희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녀가 시녀에게 물었다.“밖에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스럽니?”김민희가 머무는 곳은 외진 곳이라 평소에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런데 오늘은 웃고 떠드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종씨 가문에 무슨 경사가 생긴 모양이었다.“종 대인께서 돌아오신대요!”월계가 들뜬 얼굴로 대답했다.“어느 종 대인 말이니?”“둘째 나리요!”월계는 밤떡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둘째 나리께서 집을 떠나신 지 반년 만에 내일 도성으로 돌아오신대요. 그래서 지금 다들 나리를 맞을 준비로 정신이 없답니다!”김민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도 이 집에 얹혀 지낸 지 벌써 반년이 훌쩍 넘었다.그때 월계가 다시 입을 열었다.“듣자 하니 둘째 나리께서는 신선에 비길 만큼 용모가 빼어나시대요. 수많은 규수가 남몰래 연모하는 분이라던데, 아씨도 내일 한번 구경하러 가 보시겠어요?”그 말을 듣자 김민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나는 가지 않을 테니, 너도 갈 생각은 마.”월계는 영문을 몰라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저 시무룩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네.”김민희는 화장대 앞에 앉아 손끝으로 귀밑머리를 가만히 쓸어 넘겼다. 거울에는 희고 고운 얼굴이 비쳐 있었다. 전생의 자신과 어딘가 닮은 얼굴이었다.올해로 열일곱 살. 생각해 보니 이 낯선 세상에 떨어진 지도 어느덧 칠 년이나 흘렀다.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기가 막혔다.근무 중 몰래 화장실에 숨어 소설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을 뿐인데, 눈을 떠 보니 별생각 없이 펼쳐 봤던 권력 암투 소설 속 세상에 들어와 있었다.한창 꽃다운 나이에 사회생활을 하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열 살짜리 여자아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하지만 진짜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이 세상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난리가 터졌다. 나라는 쑥대밭이 되었고, 부모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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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반년 전, 종선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강남에서 벌어진 소금세 비리 사건을 조사하러 떠났다.사건에 연루된 자가 워낙 많은 데다 나라의 재정과도 직결된 중대한 사안이었다. 황제가 이토록 중요한 일을 종선에게 전적으로 맡겼으니, 그를 얼마나 총애하고 신임하는지 알 수 있었다.이번에 도성으로 돌아온 것도 조사 결과를 황제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조정에서 종선의 권세는 더욱 막강해질 터였다.그러나 정작 종선은 기뻐하거나 우쭐하는 기색 하나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모든 일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었습니다.”노부인은 한층 더 의젓해진 아들을 바라보며 대견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잘됐구나. 참으로 잘됐어.”그때 유씨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어머님, 둘째 나리께서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우선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쉬시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못다 한 이야기는 점심을 드신 뒤에 나누셔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그제야 노부인은 정신이 든 듯 멋쩍게 웃었다.“내 정신 좀 보게. 오랜만에 둘째를 보니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묻기만 했구나.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그 생각을 못 했어. 어서 들어가 쉬거라.”종선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몸을 돌려 동원으로 향했다. 그를 수행하던 이들도 곧장 뒤를 따랐다.종선이 떠나자 노부인은 잠시 숨을 돌린 뒤 유씨를 돌아보며 물었다.“며칠 전 심씨 가문에 서찰을 보내라고 한 일은 어찌 되었느냐?”도성의 심씨 가문은 선황제 시절 충용후 작위를 하사받은 명문가였다. 선대 충용후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권세가 대단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대를 거듭할수록 가세가 기울어 갔다.그렇다고 해도 오랫동안 작위를 이어 온 명문가인 데다, 궁중에는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심비까지 있었다. 가문의 명성이나 내력을 따져 보아도 종씨 가문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유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후작 부인께서는 따님을 둘째 나리와 혼인시키고 싶은 마음이 무척 크신 듯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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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은은한 무늬가 새겨진 검푸른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종선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곧장 김민희 앞으로 다가와 걸음을 멈췄다.그의 시선이 김민희의 두 발을 슬쩍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김민희는 사내에게서 풍기는 압도적인 기세에 짓눌려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 한참을 멍하니 있던 그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났다.“대, 대인…….”종씨 가문에 머문 반년 동안 종선과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사실 김민희는 육 년 전에도 그를 본 적이 있었다.다만 그때의 종선은 높은 지위에 오른 군대의 총지휘관이었다. 길을 가득 메운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말을 타고 지나가던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멀어져 버렸다.반면 당시 김민희는 전란을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던,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고아에 불과했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가장 뒤쪽에 겨우 자리를 잡고 서 있었을 뿐이었다.그의 신발 밑창에 묻은 먼지 한 톨보다도 하찮은 존재였던 것이다.그 후로도 김민희는 종선에 관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듣던 대로 대단한 인물이었고, 소설 속에서 묘사된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사실 김민희는 종선을 어느 정도 존경하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진작 반란군의 칼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그래서인지 막상 그와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감히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뒤에 서 있던 월계는 아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김민희가 자신을 대인이라 부르는 것을 듣고, 종선은 그녀가 심씨 가문의 아씨라고 생각했다.김민희가 눈을 내리깐 채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자, 종선은 불쑥 손을 뻗어 그녀의 작은 턱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얼굴을 들어 올려 찬찬히 살펴보았다.그의 손끝은 거칠고 차가웠다. 갑작스럽고도 무례한 손길에 김민희는 깜짝 놀라 그대로 얼어붙었다.그녀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종선이 이미 손을 거둔 뒤였다. 종선은 이번에는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자리에 앉으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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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튿날 아침 일찍, 노부인은 유씨를 불러 종선의 뜻을 전했다.유씨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심 부인은 어떻게든 자신의 적녀를 종씨 가문의 정실부인으로 들여보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심명주를 첩으로 달라고 한다면, 자존심 강한 심 부인이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었다.노부인이 굳이 자신을 부른 이유도 뻔했다. 남의 원망을 살 만한 궂은일을 자신에게 떠넘기려는 것이었다.하지만 대체 무슨 낯으로 심 부인에게 그런 말을 꺼낸단 말인가. 누군가 제 딸을 첩으로 달라고 했다면 유씨 역시 분을 참지 못하고 펄쩍 뛰었을 것이다.유씨가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심명주는 엄연히 정실부인의 딸이지 않습니까. 그런 아씨를 첩으로 들이겠다는 건 모욕이나 다름없으니, 심 부인께서 허락하실 리 없을 듯합니다.”노부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심명주는 그 집 부인의 친딸도 아니고 의붓딸이지 않느냐. 의붓딸 하나를 내주고 온 집안의 앞날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어느 쪽이 더 이득인지는 그쪽에서도 알아서 판단하겠지.”“게다가 둘째의 첩으로 들어간다 해도 그 집 딸이 홀대받을 일은 없을 게다. 우선 네가 가서 뜻을 전해 보거라. 저쪽에서 거절하면 그만 아니겠느냐.”노부인의 처소를 나서는 유씨는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어머님이 자신을 부르실 때부터 좋은 일은 아닐 거라 짐작했지만, 설마 이런 일을 시키실 줄이야.유씨는 한숨을 내쉬며 하인에게 일렀다.“내 명첩을 가지고 심씨 가문에 다녀오너라. 어머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 어찌 되었든 한번은 찾아가 봐야겠지.”*종선이 돌아온 뒤로 종씨 가문에는 방문을 청하는 명첩이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대부분 조정의 관리들이 보낸 것이었다.이번 소금세 비리 사건에는 워낙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있었다. 종선이 도성에 돌아온 지 불과 며칠 만에 벌써 세 집안의 재산이 몰수되고 일가가 옥에 갇혔다. 그것도 모두 조정에서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관리들의 집안이었다.그러니 조정의 대신들이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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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복귀가 다급히 변명했다.“큰마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이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닙니다. 그때는 둘째 나리께서 심씨 가문의 아씨를 만나러 가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저 우연히 김 아씨와 마주치신 줄로만 알았지요. 두 분이 원래부터 아는 사이인 줄 알았습니다.”“소인이 어리석어 미처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이틀 전, 둘째 나리와 심씨 가문의 아씨가 연못가에서 서로 마음을 확인했다는 소문을 듣고서야 그날 일이 떠올랐습니다.”“두 분은 얼굴조차 마주친 적이 없는데 그런 소문이 돌 리가 없지 않습니까. 소인이 이틀 밤낮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서야 깨달았습니다. 둘째 나리께서 김 아씨를 심씨 가문의 아씨로 착각하신 게 틀림없습니다!”청화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착각이 다 있다니!유씨가 복귀에게 물었다.“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도 말한 적이 있느냐?”복귀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소인도 함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쯤은 압니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그제야 유씨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복귀에게 상으로 은화 한 덩이를 내리고, 앞으로도 절대 입을 놀리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한 뒤 물러가게 했다.이튿날, 유씨는 하인을 보내 김민희를 자신의 처소로 불렀다.우선 김민희의 속마음부터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녀가 둘째 나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보고, 혹시라도 마음이 있다면 일을 풀어 가기가 한결 수월할 터였다.유씨는 김민희와 한동안 이런저런 집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슬며시 이마를 문지르며 머리가 아픈 척을 했다.그 모습을 본 김민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큰마님, 어디 편찮으십니까?”“크게 아픈 건 아니다.”유씨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요즘 집안에 골치 아픈 일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리는구나.”곁에서 유씨의 관자놀이를 살살 주무르던 청화가 슬쩍 말을 거들었다.“둘째 나리의 혼사는 노부인께서 알아서 챙기실 텐데,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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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그 순간, 종씨 가문 위로 느닷없이 천둥이 내리쳤다.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요란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종선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우리 집안에 언제부터 김 아씨가 머물고 있었느냐?”청화는 황급히 김민희가 종씨 가문에 머물게 된 사정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당시 아씨가 이곳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신 분도 둘째 나리셨습니다. 워낙 바쁘신 터라 미처 기억하지 못하신 듯합니다.”종선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돌려 김민희가 있는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청화는 속으로 잔뜩 마음을 졸였다.잠시 후, 종선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온해졌다. 그는 청화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알았다. 이만 가 보거라.”그제야 청화는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황급히 대답한 뒤, 비녀를 들고 김민희에게로 향했다.한편, 상옥은 이미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얼른 웃는 얼굴로 말을 고쳤다.“소인이 그만 말실수를 했습니다. 김 아씨셨지요.”무예를 익힌 상옥은 남들보다 귀가 밝았다. 조금 전 청화가 김민희를 김 아씨라고 부르는 소리도 똑똑히 들었다.눈치 빠른 그는 순식간에 사태를 파악했다.아랫사람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의 체면을 지켜 드려야 하는 법이었다.그사이 김민희에게 다가간 청화가 비녀를 내밀었다.“아씨, 비녀를 두고 가셨어요.”김민희는 무심코 손을 들어 머리를 더듬었다. 하지만 자신의 비녀는 여전히 제자리에 꽂혀 있었다.그녀는 청화가 내민 비녀를 다시 한번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무언가 착각한 모양이구나. 이건 내 것이 아니야. 내 비녀는 이렇게 멀쩡히 꽂혀 있는걸.”청화는 제 이마를 탁 치더니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아침에 문씨 마님께서 다녀가셨으니, 아마 그분께서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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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연분홍빛 치마를 입은 여인이 사뿐히 걸어 나왔다. 가녀린 몸매에 빼어난 미모까지 더해져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김민희는 노부인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노부인, 큰마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그러고는 종선에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눈을 내리깔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했다.“대인께서도 평안하셨습니까?”종선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때 곁에 있던 유씨가 웃으며 말했다.“한집안 식구끼리 대인이라니,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느냐. 너보다 한 항렬 위이신 분이니 숙부님이라 부르거라!”김민희는 곧바로 호칭을 고쳐 다시 인사를 올렸다.“숙부님.”하지만 종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곁에 있던 종영이 가만있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김민희에게 장난스럽게 투정을 부렸다.“다른 사람들한테는 일일이 평안하셨냐고 물으면서, 어째서 나만 쏙 빼놓는 거야? 나는 잘 지내는지 궁금하지도 않다는 거야?”말투는 잔뜩 토라진 듯했지만, 두 눈은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 있었다. 생기 넘치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김민희도 웃으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그럼 이제 너를 종영 아씨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왕 부인이라고 불러야 할까?”종영은 턱을 살짝 치켜들며 당당하게 대답했다.“누가 남편 성을 따라 부르래? 난 싫어!”*대청에 웃음꽃이 피었다. 종영이 돌아온 덕분에 늘 고요하고 엄숙하던 종씨 가문에도 모처럼 활기가 넘쳤다.유씨는 종선과 김민희를 번갈아 슬쩍 살폈다. 김민희는 줄곧 종영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종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렇다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종선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알아내기도 어려웠다.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씨가 김민희에게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늘에서야 둘째 나리께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는구나. 어른께 차 한 잔 올리는 것이 도리겠지.”김민희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별다른 의심 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처음 종씨 가문에 들어왔을 때도 노부인께 차를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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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이제 김민희로서는 종선이 손수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제때 돌려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왜 더 먹지 않느냐?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게냐?”김민희가 한참 동안 수저를 들지 않자 유씨가 걱정스레 물었다.노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여씨도 김민희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경멸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어디서 굴러들어 온 근본 없는 천것을 보는 듯했다.김민희는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 배가 부르다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유씨는 시녀에게 일러 입가심으로 먹기 좋은 산뜻한 다과를 내오게 했다.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유씨는 김민희가 여러 가지 다과를 즐겨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도 종영은 한참이나 더 머물렀다. 그러다 뒤늦게 남편과 함께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평소 같았으면 김민희도 진작 처소로 돌아갔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회랑 아래에 서서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결국 김민희는 지나가던 시녀 하나를 불러 세우고, 종선이 언제 돌아오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하지만 시녀가 그런 사정까지 알 리 없었다. 시녀가 고개를 젓자 김민희는 그만 가 보라고 했다.김민희는 자신이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그 사람은 바로 노부인을 모시는 상급 시녀 화연이었다. 화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참 동안 김민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아무리 기다려도 종선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수행하는 사람이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김민희는 혹시 종선이 손수건을 이 근처 어딘가에 떨어뜨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손수건을 찾지 못한다면 오늘 밤은 도무지 마음 편히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아씨, 뭘 찾으세요?”월계가 의아한 듯 물었다.“내 손수건.”김민희는 바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직이 대답했다.“숙부님께서 실수로 내 손수건을 가져가셨는데, 혹시 이 근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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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월계의 말을 듣고 나니, 김민희는 생각할수록 등골이 서늘해졌다. 게다가 그날 밤, 그녀는 정말로 악몽까지 꾸고 말았다.꿈속에서 김민희는 어떤 방 안에 갇혀 있었다. 방은 눈부시게 화려했고, 바닥에는 금은보화가 가득 널려 있었다. 그런데도 어딘지 소름 끼치는 기운이 감돌았다. 사방에 거울이 여러 개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거울마다 겁에 질린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등골이 오싹해진 김민희는 본능적으로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리저리 헤매도 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어쩔 줄 몰라 절망하던 그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사내는 거칠고 억센 손으로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렇다고 숨통을 조르지는 않았다. 마치 고양이나 강아지를 다루듯, 느슨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게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허리를 숙여 김민희의 뺨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그리고 마치 연인에게 속삭이듯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로 도망치려 하오? 그대를 위해 마련한 이 황금집이 마음에 들지 않소?”그 목소리는 분명...... 종선의 것이었다!김민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그녀는 침상 위에 벌떡 일어나 앉은 채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니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다.바깥방에서 자고 있는 월계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코까지 골며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김민희는 천천히 몸을 뉘어 다시 이불을 덮었다. 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날이 밝을 때까지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그날 이후, 김민희는 은근슬쩍 종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집 안에서 마주치더라도 깍듯이 예를 올릴 뿐, 그 이상 가까워지지 않도록 거리를 두었다.손수건에 관한 이야기도 더는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차라리 잃어버린 셈 치기로 했다.반면 종선은 여전히 평소와 다름없이 그녀를 대했다. 이따금 집에서 지내는 데 불편한 점은 없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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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최 어멈은 더는 화연을 그대로 둘 수 없어 곧장 밖으로 내보냈다. 괜히 주인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게 둘 수는 없었다.최 어멈의 못마땅한 시선과 마주치고서야 화연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했다. 그녀는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고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물러났다.하지만 노부인은 그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종선과 조정의 일을 이야기하던 참이었지만, 김민희가 들어온 이상 더는 말을 이어 가기 어려웠다.노부인은 그저 아들에게 신신당부했다.“네가 이제 이품 관직에 올라 황제 폐하의 두터운 총애를 받고 있다지만, 나무가 크면 바람도 거센 법이다. 너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도 적지 않을 게야. 눈앞에 드러난 칼은 피할 수 있어도,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막기 어려운 법이지. 그러니 밖에서는 언제나 몸가짐을 조심하고 경계를 늦추지 말거라.”종선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김민희는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며칠 전, 종선이 군사를 이끌고 조씨 가문을 들이쳤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이번에 가산을 몰수당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호부상서였다. 반년 전 종선이 도성을 떠나 조사했던 소금세 비리 사건에 깊이 연루된 인물이었다.그 일로 도성은 한바탕 발칵 뒤집혔다. 종선이 군사를 이끌고 조씨 저택에 들이닥친 것은 한낮이었다. 게다가 저택 바로 옆에는 사람들로 붐비는 저잣거리가 있었다. 누구도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황제는 호부상서를 즉시 참수하라는 명을 내렸다. 형이 집행된 곳은 다름 아닌 조씨 저택의 대문 앞이었고, 직접 그의 목을 벤 사람은 종선이었다.소문에 따르면 조씨 저택 대문 앞 계단에는 그날 조 대인의 목에서 쏟아진 피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했다.그 일이 있은 뒤, 종선은 곧장 육부상서의 자리에 올랐다. 부재상과 동등한 지위로, 이제는 백관의 우두머리인 위소의 자리마저 넘볼 만큼 권세가 높아진 셈이었다.당시 대옹의 조정은 관직 체계가 어지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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