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평범한 삶을 살던 김민희는 뜻밖의 사고로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소설 속에 빙의한다. 그것도 이름조차 제대로 언급되지 않는 단역이자, 한미한 가문 출신의 부모 잃은 소녀로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 그녀는 칠 년 동안 자신의 재주를 철저히 숨겼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꽃처럼 얌전히 지내며, 원작 속 치열한 권력 다툼과도 최대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던가. 의탁하고 있던 사씨 가문이 몰락하자, 김민희는 어쩔 수 없이 정혼자를 따라 도성으로 향한다. 그렇게 그녀가 발을 들인 곳은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는 명문가, 종씨 가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종씨 가문의 둘째 나리, 종선이 있었다. 조정 내각의 수장이자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측근. 냉혹하고 무자비한 성정에 사람의 생사를 좌우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사내.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김민희만은 알고 있었다. 천하를 쥐락펴락하는 이 권신이 훗날 가문이 몰락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리라는 사실을. 그런 운명에 휘말리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김민희는 매사에 신중을 기하며 오로지 동생과 정혼자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기회만을 노렸다. 그러나 그녀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요하게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 종씨 가문에 친척 집안의 아씨가 찾아왔다. 가을 달처럼 희고 맑은 얼굴에 갓 피어난 연꽃처럼 청초한 자태. 그야말로 경국지색이라 불릴 만한 미인이었다. 종선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제 것으로 삼고 싶었다. 조카의 정혼자라는 사실이 무슨 상관이랴. 빼앗으면 그만이었다. 처음에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반드시 제 여자로 만들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끝내 사랑의 늪에 깊이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종선 자신이었다.
View More노부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사람을 잘못 보았단 말이냐!”그제야 노부인과 춘도는 동시에 모든 사정을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노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어쩐지 심씨 가문과의 혼담이 깨졌다는 말을 듣고도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더라니.애초에 아들이 마음에 품은 여인은 심명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심씨 가문과의 혼사가 성사되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리라.조금 전 그토록 언짢은 얼굴로 앉아 있던 것도 모두 김민희 때문이었다.한편 춘도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럼 김 아씨가 일부러 둘째 나리를 유혹한 게 아니었구나. 둘째 나리께서 사람을 착각하셨다가 김 아씨의 미모에 홀딱 반하신 거였어!노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럼 진짜 심명주는 만나 보았느냐?”종선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예, 만나 보았습니다.”짧은 대답이었지만, 심명주에게는 털끝만큼도 마음이 없다는 뜻이 분명히 담겨 있었다.노부인이 넌지시 말했다.“하지만 그 아이는 결국 청주로 떠날 게다. 너도 방금 보지 않았느냐. 기어이 떠나겠다는 뜻이 얼마나 확고하더냐.”종선은 돌려 말하지 않고 곧장 청했다.“어머니께서 그 아이를 붙잡아 주십시오.”워낙 뛰어난 아들이라 지금껏 어미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종선이 물러간 뒤, 노부인은 탁자 위에 반 넘게 남아 있는 약선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최 어멈을 돌아보며 일렀다.“가서 큰며느리를 불러오너라.”*상서원으로 돌아온 김민희와 월계는 곧바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아씨, 벌써부터 짐을 싸는 건 좀 이르지 않을까요?”물건을 정리하던 월계가 의아한 듯 물었다.김민희는 방 안을 둘러보며 나직이 대답했다.“여기서 오래 지내다 보니 자잘한 물건이 꽤 쌓였잖아. 우리 물건만 있는 것도 아니고, 민철이 책도 있고. 오라버니가 돌아온 뒤에야 짐을 싸기 시작하면 떠나는 날만 늦어질 거야.”월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것도 그렇네요. 시간 있을 때 미리 조금씩 챙
김민희가 끝내 떠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자, 노부인은 그제야 그녀가 일부러 튕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사실 노부인이 김민희를 붙잡으려는 데에는 나름의 속셈이 있었다.첫째는 김민희가 지어 주는 약선에 상당히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민희는 종씨 가문에 들어온 뒤로 하루도 빠짐없이 노부인의 몸을 살뜰히 보살펴 왔다. 똑같은 처방이라도 다른 사람이 만들면 어딘지 모르게 효과가 덜했다.둘째는 김민희를 떠나보내기가 아쉬웠기 때문이다.김민희는 노부인의 막내딸 종영과 동갑이었다. 종영이 시집간 뒤로는 친정에 자주 들르지 못해 집 안이 적적하던 참이었다. 김민희가 곁에 있어 준다면 그 허전함도 조금은 달랠 수 있을 듯했다.노부인은 자신이 붙잡기만 하면 김민희도 기뻐하며 남겠다고 할 줄 알았다.그런데 눈앞의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마다하고, 기어이 정혼자를 따라 외진 시골까지 가서 고생하겠다니.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정이 지나치게 깊다고 해야 할지 모를 노릇이었다.노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내 눈에는 도성만큼 살기 좋은 곳도 없어 보이는데, 너는 어찌 그리 밖으로만 나가려 하는지 모르겠구나. 되었다. 그리도 가고 싶다면 가거라.”“감사합니다, 노부인!”김민희는 그제야 크게 한시름 놓았다. 이번만큼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이 절로 피어났다.“청주가 도성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앞으로도 자주 찾아뵙겠습니다.”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노부인은 손을 내저었다.“오늘 고생 많았다. 이제 별일 없으니 그만 돌아가 보거라.”김민희는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럼 노부인, 편히 쉬시고 몸조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노부인은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김민희가 물러간 뒤에도 종선은 노부인의 방에 남아 있었다.어쩐 일인지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아까보다 한층 더 싸늘해져 있었다. 얼굴에도 짙은 그늘이 드리웠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노
하기야 종선은 마침 휴가를 받아 집에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노부인의 처소에서 그를 마주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종선은 팔걸이가 달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은백색 평상복을 입은 모습이 옥처럼 희고 고운 얼굴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편안한 차림 때문인지 평소의 냉랭한 기운도 한결 누그러져 보였다.김민희는 그에게 공손히 예를 올리면서도 슬쩍 눈을 들어 재빨리 그를 살폈다.종선은 두 다리를 시원스레 벌리고 앉아 있었고, 안색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혈색이 좋고 기운도 넘쳐 보이는 것이, 아무리 봐도 크게 다친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역시 꾀병이었구나.그런데 어의의 눈은 대체 어떻게 속인 걸까?아니면 황제도 사정을 다 알면서 모른 척 장단을 맞춰 주는 걸까?“민희가 왔구나. 이리 와서 앉거라.”노부인의 안색은 정말 좋지 않았다. 병색이 짙은 얼굴로 평상에 몸을 기대고 있었고, 이마에는 옥 장식이 달린 짙은 쪽빛 이마띠를 두르고 있었다.김민희는 잡생각을 떨쳐 내고 다소곳이 눈을 내리깐 채 약선을 들고 다가갔다.방 안은 창문을 꼭꼭 닫아 놓은 탓에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김민희는 숟가락으로 약선을 조금씩 떠서 노부인의 입에 넣어 드렸다.약선을 다 드시자 몸속으로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나가는 듯했다. 노부인은 한결 편안해진 기색이었고, 창백했던 얼굴에도 제법 혈색이 돌았다.“이제야 좀 살 것 같구나. 역시 네가 지어 주는 약선이 가장 잘 듣는구나. 고생 많았다.”노부인은 김민희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자애롭게 말했다.김민희는 생긋 웃으며 살갑게 대답했다.“노부인께서 편안해지실 수만 있다면 이 정도 수고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노부인이 김민희를 바라보는 눈빛이 한층 더 다정해졌다.“참으로 착한 아이로구나. 우리 집안에서도 너를 서운하게 대하는 일은 없을 게다.”서운하게 대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곧 떠날 몸이었으니까.그렇게 생각하던 김민희는 이어지는 노부인의 말에 안색이 확 변했다.“듣자 하니 회옥이가 예현에
방으로 돌아온 김민철은 곧장 문을 닫았다.누나가 기워 준 옷을 품에 안고 안쪽 방으로 들어서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 난 당신들이랑 안 가!”대들보 위 어둑한 구석에서 검은 그림자가 희미하게 어른거렸다.김민철은 그곳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사람을 잘못 봤어. 난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 아니야. 내 성은 김씨지, 탕씨가 아니라고!”상대가 꿈쩍도 하지 않자, 김민철은 베개 밑에서 가위를 꺼내 망설임 없이 제 손목에 들이댔다.그의 왼쪽 손목에는 가장자리가 희미한 검은 반점이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모양이 꼭 달을 닮아 있었다.아직 앳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섬뜩할 만큼 단호한 결기가 서려 있었다.“당신들이 알아보는 건 이 반점뿐이잖아? 당장 떠나지 않으면 이 부분의 살을 도려내 버릴 거야!”어둠 속에 숨어 있던 자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설마 제 몸에 상처를 낼 리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김민철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대로 날카로운 가윗날을 움직여 제 손목의 살갗을 그었다.“안 됩니다! 가겠습니다! 가면 될 것 아닙니까! 제발…… 진정하십시오. 부디 몸을 상하게 하지 마십시오.”낮고 쉰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그제야 김민철은 손을 멈췄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는 낮지만 매서운 목소리로 외쳤다.“그럼 당장 꺼져!”사르륵.희미한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자들이 일제히 자취를 감추었다.김민철은 온몸에 힘이 풀려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소매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쳤다.그는 가윗날에 묻은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 낸 뒤, 가위를 다시 베개 깊숙이 밀어 넣고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손목에 가늘게 난 상처를 내려다보던 김민철은 미간을 찌푸리며 소매를 끌어내려 상처를 가렸다.낯선 자들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누나가 알아서는 안 됐다.절대로…….김민철은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그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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