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누가 봐도 오래 함께할 수 없는 사이였는데, 나만 그 달콤한 말에 눈이 멀어 있었다.다음 날 저택을 나서 출근하는데, 길가에서 최수빈이 불쑥 튀어나왔다.얼굴은 붉게 부었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한정판 원피스에는 먼지가 잔뜩 묻어, 길거리의 거지와 다를 게 없었다.최수빈이 나를 사납게 노려봤다."서준이네가 파혼하니까 우리 아빠가 난 쓸모도 없대. 아예 인연을 끊겠대.""이제 나한테 아무것도 안 남았어. 속 시원해?"어이가 없었다.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우리 세 사람 사이에서 가장 잘못한 사람은 정서준이라는 걸.나는 비웃듯 말했다."내가 파혼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잖아. 나 찾아와 봐야 소용없어. 가서 그 사람한테 따져."최수빈은 잠시 멍해지더니, 눈빛이 돌연 사납게 변했다. 그러고는 나를 밀치고 비틀거리며 달려갔다.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그때 모르는 사람이 친구 신청을 해 왔다. 정서준이라는 걸 알면서도 수락했다.생각해 보니 우리는 제대로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온 마음을 쏟았던 관계인 만큼, 끝은 제대로 맺고 싶었다.한참이나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떴다. 하지만 도착한 건 한 문장뿐이었다.[처음부터 끝까지 돈 때문에 나랑 있었던 거야?]내가 이토록 단호하게 떠날 수 있다는 걸 아직도 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처음에는 우리 집 빚을 갚으려고 그에게 부양받는 여자가 되겠다고 했던 게 맞았다.하지만 사람 마음을 흔드는 데 능한 정서준은 늘 다정하고 깊이 사랑하는 척했다. 세상 물정 모르던 나는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사랑하지 않았다면, 그저 장난감이라고 비웃고 번번이 차단할 때마다 이렇게 가슴이 아팠을 리 없었다.나는 눈을 내리깔고 진심을 담아 답했다.[사랑했어요.]내 사랑을 남김없이 소모시킨 건 정서준 자신이었다.또 한참이나 '입력 중' 표시가 떴다. 마지막에 채팅창에 나타난 건 짧은 답 하나였다.[그래.]하지만 나는 곧바로 수락했다."알았어요."나는 홀가분하게 웃고 정서준을 차
집에 들어서자 신예림이 소파에 누워 들뜬 얼굴로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얼른 옆에 앉으라고 손짓했다."파파라치가 정서준이랑 약혼녀 싸우는 영상 올렸어. 둘 다 드디어 이미지 무너졌네. 하하하...""그동안 인터넷에 둘을 커플로 엮으며 응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 헛소리들, 보기만 해도 역겨웠어!"나는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이미 실시간 인기 검색어 1위까지 오른 영상을 눌렀다.영상에는 내가 떠난 뒤의 모습만 나왔다.정서준이 일부러 내 사생활은 드러나지 않게 한 모양이었다.화면 속 정서준이 매달린 최수빈을 떼어 내더니 뺨을 세게 후려쳤다. 그러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귀국하기 전부터 경고했잖아. 네 체면은 세워 주겠지만 유나한테 너무 심하게 굴지는 말라고.""우리 집안끼리 결혼시키려던 건 없던 일이야. 내일 직접 네 집에 가서 파혼할 거야!"여자에게 손을 대다니. 어려서부터 지켜 온 체면과 품위도 내던진 셈이었다.정서준이 저토록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 봤다.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났는지도 몰랐다.최수빈은 무너져 내리듯 고개를 저었다.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기어가 정서준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며 통곡했다."유나한테 질렸다고 한 건 너잖아. 내가 괴롭히면 잠깐 네 곁을 떠날 거라고 했잖아.""나도 아예 마음 접을 줄은 몰랐어. 이건 내 탓 아니야, 서준아!"하지만 정서준은 혐오에 찬 얼굴로 최수빈을 발로 걷어차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떠났다.영상이 끝나자 신예림이 분을 참지 못하고 물컵을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정서준이 수빈이한테 널 괴롭히라고 시킨 거였어? 그냥 바람둥이인 줄 알았더니, 완전히 쓰레기네!"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가사 도우미에게 파편을 치워 달라고 했다.바람둥이든 쓰레기든, 이제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신예림을 달래 재우고 나도 내 방으로 돌아왔다.한지호에게 200만 원을 보내면서 말을 덧붙였다.[오늘 저녁 일은 미안해요. 치료비로 써요.]나와 정서준의 일에 아무 잘못도 없
나는 반사적으로 정서준을 밀어냈다."정서준 씨, 아직도 안 갔어요?""내가 가면 웬 놈이랑 놀아나려고?"정서준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했다. 핏발 선 눈으로 한지호를 사납게 노려보더니,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너무 빨라 피할 틈도 없었다. 한지호의 코에서 바로 피가 흘렀다.나는 급히 한지호를 부축했다. 크게 다치지는 않은 걸 확인하고는 참지 못하고 정서준에게 소리쳤다."말 가려서 해요! 한지호 씨는 그냥 동료예요. 오늘 처음 만났다고요. 못 믿겠으면 알아보세요!""정말 그래야 할 거야."정서준이 비웃었다. 눈에 잔인한 경멸이 스쳤다."하긴, 어려 보이던데. 30 살이 다 돼서 늙은 너 같은 여자를 좋아하겠어? 너 싫다고 안 하는 건 나밖에 없지."그때 최수빈이 망고 주스 한 잔을 들고 식당으로 들어왔다. 얼굴에는 억지웃음을 띠고 있었다."유나 씨, 직접 짠 주스예요. 마시고 지난 일은 이제 화 풀어요."나는 굳은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서준은 알아차리지 못했다.정서준이 내 어깨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말투에는 애원하는 기색마저 비쳤다."유나야, 주스 마시고 같이 돌아가자. 수빈이랑 사이좋게 지내면 되잖아."더는 참을 수 없었다.그 손을 세차게 쳐 내고, 비싼 맞춤 정장 위로 망고 주스를 끼얹었다.최수빈이 비명을 지르며 나를 말리려고 달려들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도 사정없이 손을 날렸다. 짝, 뺨 맞는 소리가 울렸다."정서준 씨, 정말 제가 그쪽 없으면 못 살 줄 알아요? 그래서 일부러 망고 주스까지 들이밀면서 사람 속을 뒤집어요?"나는 혐오 어린 눈으로 정서준을 바라봤다.정장에 묻은 액체를 내려다보던 정서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최수빈에게 고개를 돌렸다."내가 오렌지 주스 짜 오라고 하지 않았어?"붉게 부은 최수빈의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렀다."미안해, 서준아. 망고가 더 비싸니까 유나 씨한테 좋은 거 주고 싶어서..."저 두 인간과 더 얽히고 싶지 않았다. 다친 한지호를 부축해 나가려는데
[그런데 최수빈 씨가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고 해서, 돌보시느라 못 가셨어요.]안도하며 답장을 썼다.[앞으로 대표님 이야기는 전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이어서 컴퓨터를 켜고 이력서를 보내기 시작했다.대학에서 전공한 디자인은 요즘 인기가 많은 분야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 게임 스튜디오에서 캐릭터 의상 디자인을 맡아 달라는 제안이 왔다. 나는 수락했다.일을 마치고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최수빈에게서 전화가 왔다.[내가 널 너무 우습게 봤어! 밀고 당기는 솜씨가 대단하네. 서준이가 나랑 파혼하겠다고 난리잖아!][정서준이 어떤 집안 사람인지 몰라? 나랑 결혼 안 해도 다른 여자랑 하겠지. 네가 그 아내 자리를 차지할 일은 절대 없어!]분을 이기지 못한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순진한 척하던 가면은 완전히 벗어 던진 뒤였다.길게 상대하고 싶지 않아 휴대전화를 꺼 버렸다.한밤중,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비몽사몽 겉옷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가, 서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잠이 달아났다. 정서준이었다.떠나온 곳은 늦봄이었지만, 이곳 노르웨이의 기온은 영하로 떨어져 있었다.그런데 정서준은 흰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나를 찾아오느라 옷 갈아입을 생각도 못 한 모양이었다.추위에 코가 새빨개졌고, 속눈썹에는 작은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표정이 굳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재빨리 문을 닫으려 했다.그러자 정서준이 문틀에 손을 내밀어 막았다. 손이 끼일 수도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았다."독하기도 하지. 유나야, 들어가서 몸 좀 녹이라는 말도 안 해 줘?"어쩔 수 없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래도 문 앞을 막아선 채였다.신예림은 원래부터 정서준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내가 당한 일들을 알고는 더 질색했다.정서준이 안에 들어왔다는 걸 알면, 불쾌해서 가사 도우미에게 소독제로 바닥을 세 번 닦으라고 할지도 몰랐다.나는 차갑게 말했다."여기서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정서준 씨?"정서준은 잠시 나를 빤히 봤다. 내가 끝내 꿈쩍도 하지 않자 표정
10 시간 뒤, 비행기가 착륙했다.마중 나온 사람은 절친한 친구 신예림이었다.신예림은 나를 보자마자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유나야... 너 어쩌다 이렇게 말랐어.""내가 진작 말했잖아. 정서준 같은 부잣집 바람둥이는 언젠가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린다고."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그 얘기는 그만하자. 나 이제 즐겁게 살려고 온 거야."신예림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다리 나으면 내가 술집 데려가서 신나게 놀게 해 줄게. 그 쓰레기는 잊어버리자!"우리는 웃고 떠들며 집으로 돌아갔다.나를 갉아먹던 관계를 벗어나자,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새로웠다.저택에 도착하자 신예림은 갓 구운 서양식 디저트를 빨리 맛보라며 내게 권했다.느닷없이 날카로운 전화벨이 울려 포근하던 분위기를 깨뜨렸다.신예림이 의아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꺼냈다."저장 안 된 번호인데. 국내 번호네..."눈꺼풀이 움찔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화면에 뜬 번호를 보니, 정말 정서준이었다.말릴 틈도 없이 신예림이 먼저 전화를 받았다.가슴이 철렁했다. 휠체어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내가 어디에 머무는지 이렇게 빨리 알아내다니, 대단한 사람이었다.'그런 사람이 수빈이가 날 어떻게 자극하는지는 정말 몰랐을까?'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복잡한 생각을 끊었다.[서유나 바꿔.]"이 쓰레기야, 무슨 낯으로 전화까지 해?"신예림은 거침없는 성격인 데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했다. 정서준이 재벌가 후계자라는 신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욕을 퍼부었다.[신예림, 네 집안이 조금이라도 소중하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목소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5 년을 곁에 있었던 나는, 지금 화가 났다는 걸 알았다.신예림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친구뿐 아니라 그 집안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그래서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예의를 갖추되 거리를 두는 목소리로 말했다."정서준 씨."[우리 유나, 이제 제멋대로 하겠다 이거야? 그 호화로운 새장으로
그런데 정서준은 별 흥미도 없이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날 밤 내 곁에 머물지도 않았다.이유를 알지 못하다가 우연히 친구와 통화하는 소리를 듣게 됐다."서유나를 예뻐하는 건 예쁘고 말 잘 들어서야. 고양이처럼 데리고 놀기 좋잖아.""그런데 오늘은 손에 물집이 잔뜩 잡혔더라고. 보기만 해도 비위가 상해서!"그때 정서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명령조였다.[수빈이가 다음 달에 처음으로 나랑 외국에 가는데 아는 게 없어. 네가 서류 좀 준비해 줘.]곧이어 전화 너머로 최수빈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난 아무것도 몰라도 서준이가 다 예뻐해 주잖아.][유나 씨, 내가 좀 성격이 급해요. 오늘 밤 안으로 부탁할게요.]정서준이 말렸다.[유나는 밤에도 몸이 안 좋다니까. 너무 재촉하지 마...]하지만 나는 곧바로 수락했다."알았어요."5 년 전, 먹고살 길이 막막해 클럽 테라에서 종업원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정서준이 거금을 쓰지 않았다면, 그 느끼한 사장들 사이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이번 서류까지 정리해 주면 더는 빚진 게 없을 것이다.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몸의 불편함을 참으며 컴퓨터를 켜고 일을 시작했다.꼬박 밤을 새우고서야 시킨 일을 마쳤다.아침이 되자 서류를 들고 지성그룹으로 갔다.안내 데스크 직원은 나와 정서준의 관계를 알고 있어, 늘 반갑게 맞아 주곤 했다.그런데 이번에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앞을 가로막았다."서유나 씨, 대표님은 안 계세요. 일단 휴게실로 안내해 드릴게요."걸어가는 내내 직원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대표님이 최수빈 씨 하이힐 신어서 힘들까 봐 차에서 사무실까지 안고 가셨대. 둘이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안내 직원은 난처한 얼굴로 해명하려다가, 내 표정이 달라지지 않자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뒤 정서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류를 사무실로 가져오라는 말이었다.문을 열자 최수빈이 정서준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끈적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최수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