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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아내의 조용한 심판

유령 아내의 조용한 심판

By:  낮잠요정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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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신고를 하러 가기로 한 바로 그날, 폐쇄공포증을 앓고 있다는 강시후의 전 여자친구는 구불구불한 산길 벼랑 끝에서 내 차를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열두 번이나 거칠게 내 차를 들이받았다. 강시후가 경찰차를 뒤따라 도착했을 때, 소방대원들은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진 운전석을 뜯어내 나를 간신히 꺼내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는 긁힌 자국조차 찾기 힘든 한정판 스포츠카로 걸어가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서해원을 품에 꼭 안아주었다. “대표님, 심유나 씨 이마에서 피가 납니다. 당장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꿰매야 해요.” 강시후는 나를 실은 들 것을 향해 걸어오다 멈춰 서서, 피투성이가 된 내 이마와 멍든 팔을 힐끗 쳐다보았다. “가벼운 상처일 뿐이야. 해원이는 폐쇄공포증이 있어서 이런 산골짜기에서는 상태가 더 위급해. 해원이를 먼저 병원으로 보내야 해.” 버려진 순간,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그의 바짓단을 죽어라 움켜쥐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 “해원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발작이 온 거라고. 넌 변호사면서 불가항력이라는 말도 몰라? 유치하게 왜 이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비서에게서 합의서 한 장을 건네받더니, 힘없이 축 늘어진 내 손목을 잡아채 그 위에 강제로 지문을 찍었다. “뒤에 다른 구급차가 올 테니까, 조금만 더 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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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어릴 적부터 난 집안에서 늘 찬밥 신세였다.

다쳐도 참았고 아파도 꾹 참았다.

푹 자고 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내 육신은 이미 폐차가 된 자동차 곁에 누워 있었고 비서 허은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심스럽게 티슈를 꺼내 내 이마의 상처를 틀어막으며 흘러나오는 피를 멈추려 애쓰고 있었다.

앳된 얼굴의 그녀는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나를 애타게 불렀다.

“변호사님, 정신 차려요... 조금만 더 버텨요, 잠들지 말고.”

나는 허은채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을 뻗은 순간, 내 손가락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그대로 통과했다.

바닥에 쓰러진 채 파리하게 질려 숨이 끊어진 내 몸을 내려다보며,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 난 죽었구나.’

허은채를 바라보는 내 마음에 깊은 죄책감이 일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생으로 버텨내던 아이였다.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곱게 자랐을 텐데, 참혹한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것도 모자라 내 시체와 단둘이 남게 되었으니.

그녀는 두려움에 손끝까지 벌벌 떨고 있었다.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던 차에 무려 열두 번이나 치였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무사할 리 없었다.

그러나 강시후의 온 신경은 오직 서해원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는 내가 나중에 서해원에게 보복해 그녀가 다치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봐 두려웠던 것인지 내 몸이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억지로 내 손가락을 붙잡아 지장을 찍게 했다.

나는 진작에 깨달았어야 했다.

강시후에게 서해원은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심지어 한 사람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허은채도 그 소리를 듣고는 눈물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변호사님, 구급차가 왔어요, 구급차가 왔다고요...”

구급차의 불빛이 짙은 안개를 뚫고 다가와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고 곧 의사와 간호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둘러 달려왔다.

허은채는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채 얌전히 한쪽으로 비켜 서 있었다.

내 몸이 구급차에 실려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십자가를 그었다가 다시 합장하며 입속으로 쉴 새 없이 웅얼거렸다.

“하나님, 성모 마리아님, 부처님, 옥황상제님, 관세음보살님...”

동서고금의 신이란 신은 모조리 불러 모으는 중이었다.

“제발 우리 변호사님 좀 살려주세요. 무사히 깨어나게만 해주시면 일 년 동안 채식할게요...”

의사의 다급한 외침이 이어지는 가운데, 허은채의 눈물도 다시 뚝뚝 떨어졌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조수석에 덩그러니 놓인 내 가방에 멈췄다.

“어, 이게 뭐지...”

그 시각 구급차 안에서는 간호사가 필사적으로 응급 처치를 이어갔지만, 차갑게 식어가는 내 심장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간호사는 붉어진 눈으로 내게 애원하듯 말했다.

“조금만 더 힘내요, 병원이 코앞이에요.”

의사는 곧바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환자 상태가 위독합니다. 당장 수술해야 하니 응급실에 연락해서 서둘러 준비하라고 하세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의사의 시선이 차창 밖으로 향했다.

눈앞의 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는 차량들을 보자 그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교통경찰한테 연락해서 앞쪽 통로 좀 터 달라고 해.”

간호사는 전화를 끊고는 분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앞에서 세강 그룹 대표님이 길을 막고 있대요. 친구한테 특별한 이벤트를 해준다고 거창하게 꽃밭을 꾸며 놓는 바람에 도로가 완전히 막혔대요.”

“경찰이 지금 그쪽과 얘기하고 있긴 한데, 치우려면... 한참 걸릴 거래요.”

“정말 어이가 없네! 여기가 얼마나 복잡한 도로인데, 어떻게 멋대로 차도를 막을 수가 있어!”

간호사의 눈시울이 더 붉어졌다.

“환자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구급차 안은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전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친 탓인지 많은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간호사와 의사의 대화를 듣고서야 비로소 잊고 있던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사실 오늘은 혼인 신고를 하기로 한 날이었는데, 강시후는 서해원을 위해나를 바람맞혔다.

그뿐만 아니라 서해원을 기쁘게 해 주겠다며 꽃밭까지 꾸며 놓았다.

나는 화가 난 나머지 파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서해원은 내게 해명하겠다는 핑계로 나를 구불구불한 산길에 가둔 뒤, 차로 치어 끔찍하게 살해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 영혼은 제멋대로 차 밖으로 둥둥 떠올라 인파를 뚫고 강시후의 곁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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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어릴 적부터 난 집안에서 늘 찬밥 신세였다.다쳐도 참았고 아파도 꾹 참았다.푹 자고 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 생각하면서.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내 육신은 이미 폐차가 된 자동차 곁에 누워 있었고 비서 허은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심스럽게 티슈를 꺼내 내 이마의 상처를 틀어막으며 흘러나오는 피를 멈추려 애쓰고 있었다.앳된 얼굴의 그녀는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나를 애타게 불렀다.“변호사님, 정신 차려요... 조금만 더 버텨요, 잠들지 말고.”나는 허은채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을 뻗은 순간, 내 손가락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그대로 통과했다.바닥에 쓰러진 채 파리하게 질려 숨이 끊어진 내 몸을 내려다보며,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아, 난 죽었구나.’허은채를 바라보는 내 마음에 깊은 죄책감이 일었다.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생으로 버텨내던 아이였다.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곱게 자랐을 텐데, 참혹한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것도 모자라 내 시체와 단둘이 남게 되었으니.그녀는 두려움에 손끝까지 벌벌 떨고 있었다.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던 차에 무려 열두 번이나 치였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무사할 리 없었다.그러나 강시후의 온 신경은 오직 서해원에게만 쏠려 있었다.그는 내가 나중에 서해원에게 보복해 그녀가 다치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봐 두려웠던 것인지 내 몸이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억지로 내 손가락을 붙잡아 지장을 찍게 했다.나는 진작에 깨달았어야 했다.강시후에게 서해원은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심지어 한 사람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허은채도 그 소리를 듣고는 눈물을 터뜨리며 기뻐했다.“변호사님, 구급차가 왔어요, 구급차가 왔다고요...”구급차의 불빛이 짙은 안개를 뚫고 다가와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고 곧 의사와 간호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둘러 달려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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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VIP 병실. 서해원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시후 씨, 유나 언니 별일 없겠지? 언니가 화난 것 같아서... 그래서 해명하려고 했던 건데, 내가 발작을 일으킬 줄은 몰랐어...”그녀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였다.강시후는 그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품에 안았다.“괜찮을 거야, 유나는 원래 목숨이 질기잖아.”그럼에도 서해원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오늘은 두 사람이 혼인신고 하는 날인데, 다 내 탓이야. 차라리 내가 언니한테 직접 설명할게. 나 때문에 두 사람 다투는 건 싫어.”그때, 강시후의 또 다른 비서가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대표님, 경찰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대표님께서 서해원 씨를 위해 준비하신 생화 장식 때문에 간선도로가 마비됐다고 합니다.”“차량이 몰리면서 구급차까지 도로에 갇혔는데, 사고 환자라 상태가 위급해 즉시 현장을 정리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희도 이미 철거하고 있습니다만...”비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해원의 눈시울이 더욱 붉어졌다.“날 위해 준비한 거야? 난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서해원의 말을 듣자마자 강시후는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치우지 마.”“하지만...”“하지만은 무슨.”강시후는 코웃음을 쳤다.“병원에 헬기를 보내서 환자를 이송하면 되잖아. 비용은 내가 부담할 테니까.”그러자 비서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면 환자가 버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세강 그룹의 이미지에도 큰 타격이 될 겁니다.”강시후는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뭐가 걱정이야? 우리한텐 심유나라는 대단한 변호사님이 계시잖아? 게다가 우리 곧 결혼할 사이인데, 세강 그룹은 우리 공동 재산이나 다름없으니 유나가 알아서 뒷수습도 잘해 주겠지.”“난 지금 해원이랑 있어야 하니까, 별일 아니면 방해하지 마. 유나든 누구든 말이야. 안 그러면 너도 심유나랑 같이 쫓겨날 줄 알아.”비서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으나 결국 씁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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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한참이 지나서야 강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걸어 나갔다.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담배를 낚아채려 했다.“그만 피워, 몸에 해로워.”하지만 손가락은 그대로 허공을 통과했다.나는 순간 멍하니 굳었다가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맞다, 나 이미 죽었지.’오랜 세월 몸에 밴 습관이란 게 무서운 모양이었다.나는 이미 죽었는데도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강시후를 걱정하고 있었다.강시후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신 뒤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목소리에는 본인조차 깨닫지 못한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요즘 심유나가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일단 막아. 병원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해, 해원이 요양에 방해되면 안 되니까.”비서가 잠시 머뭇거리며 침묵했다.“그동안 심유나 씨는 연락이 없으셨습니다만...”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시후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는 마지막으로 나와 나눈 대화창을 힐끗 보더니, 손가락으로 화면을 꾹 눌러 심술이라도 부리듯 나를 차단해 버렸다.그러고는 아예 휴대폰 전원까지 꺼버렸다.예전의 나였다면 잔뜩 겁을 먹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를 찾아내 사과를 하고, 제발 차단만은 풀어달라고, 연락이 두절되게 하지 말아 달라고 매달렸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나는 그의 앞에 서서 나직하게 읊조렸다.“강시후, 나 이제 너 안 찾아가. 널 사랑하지 않으니까. 아니, 널 증오해... 내 목숨을 앗아갔으니까.”“저주할 거야...”그 순간, 하늘에서 느닷없이 번개가 번쩍였다.뒤이어 천둥이 굉음을 내며 울리자 깊이 잠들어 있던 서해원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시후 씨...”강시후는 황급히 담배꽁초를 내던지고 병실로 뛰어 들어가 온몸을 벌벌 떠는 서해원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괜찮아, 내가 있잖아.”나 또한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나 역시 번개 치는 날을 끔찍하게 무서워했다.하지만 강시후는 단 한 번도 나를 위로해 준 적이 없었다. 천둥이 치는 날이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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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순간, 가슴 한가운데가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강시후와 막 약혼했을 무렵, 그는 내게 쌀쌀맞기 그지없었다.그가 나를 미워했던 건, 내가 그의 어머니가 억지로 맺어준 약혼녀였기 때문이었다.그래서 그는 나를 무시했고 온갖 까다로운 소송 사건들을 떠맡겼으며 그를 흠모하는 이들이 나를 괴롭히는 것도 방관했다.내가 누군가에 의해 비좁은 창고에 갇힌 채 머리 위로 얼음물을 뒤집어쓰고 고열에 시달리며 병원에 누워 있을 때도, 그는 서해원을 품에 안고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감상하고 있었다.내가 늦은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노숙자에게 미행을 당해 겁에 질린 채 덜덜 떨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도 그는 서해원과 함께 프랑스에서 라벤더를 구경하고 있었다.강시후는 세상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서해원에게 안겨주었다. 반면 내게 남은 것은 갈 곳 없는 상처와 엉망이 되어버린 현실뿐이었다.그 시절의 나는 모든 오해는 언젠가 풀릴 거라고 굳게 믿었다.그는 내가 수년 전부터 동경해 온 사람이었으니까.나는 그를 사랑했다.그래서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차가운 얼음을 기꺼이 녹여주고 싶었다.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한 우리는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그는 짜증을 내면서도 내게 책임을 졌고 우리의 관계는 점점 좋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모든 것이 뚝 끊어졌다.나는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툭하면 나에게서 멀어지는 그의 태도와 서해원의 이간질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정말이지 우스운 일이었다.살았을 때는 그토록 듣고 싶었던 다정한 인정의 말들을 정작 지금 이 순간에 듣게 되니 씁쓸함만 밀려오니 말이다.강시후는 더 이상 두 간호사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병원을 나와 회사로 향했다.비서는 그를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다가갔지만, 곧이어 들려온 강시후의 지시에 멈칫했다.“심유나를 불러와.”비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심 변호사는...”비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시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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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강시후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서해원의 여린 몸은 옥상 난간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강시후의 동공이 순간 작게 수축했다.그는 극도로 긴장한 목소리로 외쳤다.“해원아, 제발 이러지 마, 네가 죽으면... 나는 어떡하라고!”서해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울부짖었다.“네티즌들이 전부 나를 욕해, 상간녀라고 욕하고 걸레라고 욕해. 시후 씨, 나 정말 더는 못 버티겠어. 유나 언니도 나를 저주했어. 내가 상간녀고 여우 같은 년이라고 ...”“하지만 언니를 원망하진 않아. 어차피 지금 시후 씨 진짜 약혼자는 언니고, 내 존재 자체가 죄악이니까.”나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눈으로 서해원을 바라보았다.나는 이미 죽었는데 내가 언제 이런 말을 했다는 거지.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억울한 누명까지 뒤집어써야 한다니.강시후는 굳은 표정으로 서해원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서해원이 보여준, 내가 그녀를 욕했다는 소위 그 ‘채팅 기록’을 바라보았다.허술하기 짝이 없는 이 ‘증거’들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수법이 너무 엉망이라 강시후가 믿을 리 없었다.하지만 나는 깜빡 잊고 있었다...강시후의 세계에서 나는 애초에 아무런 무게감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걸.강시후는 서해원을 품에 안고 그녀의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준 뒤, 이마에 가볍지만 진중한 입맞춤을 남겼다.“해원아, 넌 상간녀가 아니야. 사랑에도 선착순이 있다면, 네가 훨씬 먼저 왔어. 나랑 심유나는 그저 걔가 내 어머니를 살려준 은혜를 빌미로 억지로 얻어낸 결혼일 뿐이야.”“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여자는 너 하나뿐이야. 내가 다 책임질 거고 성대하게 결혼식도 올려줄게.”서해원의 눈에 기쁨의 미소가 언뜻 스쳐 지나가더니 이내 불안한 척 연기하며 말했다.“이렇게 하면 유나 언니한테 너무 불공평하지 않을까? 언니가 날 더 싫어할 텐데. 유나 언니는 대단한 변호사잖아. 만약 언니가 마음먹고 나를 공격하면 난 어쩌지?”그 말에 강시후는 코웃음을 쳤다.“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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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나는 임신 중이었다.나는 평평한 아랫배를 쓸어내렸다. 그곳에는 하나의 생명이 싹트고 있었고 그 아이는 내가 강시후에게 안겨주고 싶었던 깜짝 선물이었다.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 소리도 없이 바닥에 부딪혔다.한편 강시후는 떨리는 손으로 그 임신 진단서를 집어 들었다.그는 입술을 바짝 깨물었고 눈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이를 갈며 내뱉는 강시후의 목소리를 들었다.“심유나 비서니까 당연히 그년을 감싸겠지. 지금 죽은 척하는 거잖아? 그 난리를 쳐 가며 대단한 쇼를 벌인 게, 기껏 나랑 결혼하려고 한 짓 아니었어?”“허은채, 심유나랑 한통속으로 놀아나는 넌 한경대 다닐 자격도 없어. 내가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당장 심유나 기어 나와서 해원이한테 사과하라고 해. 안 그러면 퇴학당할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네 가족들이 널 애타게 찾는다던데, 눈물겨운 가족 상봉을 내가 도와줄 수도 있고.” 나는 멍한 상태로 그 말을 곱씹었다.강시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를 잘 아는 나로서는, 그가 정말로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그는 허은채에게 퇴학이 얼마나 큰 타격인지 모르는 걸까?허은채의 원래 이름이 허희남이었다는 걸, 그 등골을 빼먹는 가족들이 그녀의 발목만 잡을 뿐이며, 그녀를 찾는 이유도 오직 돈을 받고 팔아넘겨 남동생 뒷바라지할 밑천을 챙기려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걸까?게다가...허은채는 예전에 강시후에게 신장 하나를 기증한 적이 있었다.단지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강시후가 아팠을 때 두 사람의 조직이 일치하자 허은채는 망설임 없이 수술대에 올랐던 것이다.그런 그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이건 허은채의 인생을 박살 내겠다는 소리였다.나는 너무 분통이 터져 눈이 빨개진 채 강시후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으려 했지만, 내 손은 번번이 강시후의 몸을 통과해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허은채는 두려움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여전히 원망 가득한 눈으로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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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강시후는 경호원들에게 허은채를 내려놓으라고 손짓하며 미간을 찌푸렸다.“재수 없게 진짜. 연기도 이 정도면 진상이야, 연기 대상이라도 줘야겠네.”허은채는 차가운 바닥에 웅크린 채 강시후의 추궁에 쓴웃음을 지었다.“강시후 씨, 변호사님 진짜 죽었어요. 서랍에 화장 동의서에 서명한 것도 있어요. 장례식장에서 전화했는데 그쪽이 서해원이랑 놀아나느라 전화를 안 받아서... 결국 회장 사모님께서 직접 나서서 서명했어요. 안 믿기면 전화해서 물어보세요!”강시후의 안색이 험악해졌다.서해원은 교태를 부리며 코를 감싸 쥐었다.“어머, 어머님도 참. 어떻게 유나 언니랑 짜고 이런 짓을…. 어떻게든 시후 씨 마음 흔들려고….”“입 닥쳐!”강시후가 매섭게 서해원의 말을 잘랐다.처음으로 서해원의 붉어진 눈시울을 외면한 채, 그는 몇 년 만에 자발적으로 어머니 한미애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자마자 그는 쏘아붙였다.“이렇게 판을 크게 벌인 이유가 결국 내 고집을 꺾고 심유나랑 결혼하게 만들려는 거잖아요. 그럼 심유나는 어디 있는데요?”강시후의 귀에 한미애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네 눈앞에 있잖아, 못 봤니?”강시후의 동공이 극도로 수축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유골함을 바라보았다.“거짓말 마세요...”한미애는 뭔가 웃기는 소리라도 들은 듯 비꼬는 투로 말했다.“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해? 그럴 필요도 없지.”“생각해 보면 나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았어. 멀쩡한 집안의 귀한 딸이 너한테 시달리다 결국 목숨까지 잃었으니 말이야.”강시후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그만 좀 해요! 엄마는 맨날 심유나가 엄마 목숨 살려줬다고 유세지만, 해원이도 나 살려줬다고요! 옛날에 엄마가 외국 나가 있을 때 내가 한경에서 사람들에게 괴롭힘당하고 작은 방에 갇혀서 반쯤 죽을 뻔했을 때, 해원이가 내 앞에 나서서 나를 구해줬다고요!”“엄마가 우리 헤어지라고 닦달만 안 했어도 해원이가 납치당할 일도 없었고 폐쇄공포증 같은 거 생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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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삶은 예전으로 돌아간 듯했다.그저 내 영혼이라는 유령 하나가 더 늘었을 뿐.한미애가 출국한 이후, 서해원은 강시후와 동거하기 시작했다. 다만 무슨 속셈인지 강시후는 그 신혼집을 처분하지도 않았다.나도 차라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하지만 어째서인지 내 영혼은 강시후의 곁을 벗어날 수 없었다.그나마 다행인 건 강시후가 서해원과 이렇다 할 스킨십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강시후에게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야근을 밥 먹듯이 하더니 서해원이 몸을 밀착해 오는 것조차 끔찍이 꺼렸다.서해원이 야한 옷을 걸치고 유혹할 때마다 그는 업무를 핑계로 자리를 피하기 바빴다.그럴 때마다 서해원은 분통이 터져 발을 동동 굴렀다.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더 이상 허은채를 괴롭히지 않았다.강씨 가문의 막강한 세력을 생각하면 그가 마음만 먹었어도 허은채는 한경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아마 한경 밖으로 도망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나는 계속 강시후의 곁에 머물렀다.그는 업무를 처리한 뒤 피곤에 지친 몸으로 소파에 기대어 창밖의 휘황찬란한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하지만 액정 화면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결국 다시 집어넣었다.차에서 내린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며 나는 그가 도우미에게 묻는 목소리를 들었다.“해원이 어디 있어요?”도우미는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대답했다.“해원 씨는 홈시어터룸에서 영화 보고 계세요.”강시후의 안색이 확 굳어졌다.“아니, 해원이를 어떻게 거기에 들여보내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곧바로 홈시어터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새로 들어온 도우미는 서해원에게 폐쇄공포증이 있다는 걸 알 리가 없었다.강시후의 저택 지하에는 주차장뿐만 아니라 헬스장과 홈시어터룸도 있었다.비록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지만, 사방이 꽉 막힌 밀폐된 공간이었다.그는 서해원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덜컥 겁이 났다.하지만 홈시어터룸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안에서 들려오는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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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서해원은 꽁꽁 묶인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그녀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강시후를 올려다보자 강시후는 그녀의 앞에 서서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날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네가 나를 돌보고 있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네가 나를 구해준 거라고 착각했었지. 하지만 몰랐어, 그게 내 목걸이를 훔치려다 내가 깨어나자 간호하는 척 시늉을 한 것뿐이었다는 걸. 내가 바보였어….”그때 흉측하게 침을 흘리는 노숙자 몇 명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사내들의 탐욕스러운 눈빛은 당장이라도 서해원의 옷가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였다.서해원은 공포에 사로잡혀 온몸을 파르르 떨며 악을 썼다.“강시후! 나한테 이럴 순 없어! 평생 사랑해 주겠다던 그 말 잊었어? 세상에서 제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주겠다고 했잖아!”그녀는 발버둥 치려 애썼지만, 의자에 묶인 손목에는 깊은 붉은 자국만 파고들 뿐이었다.강시후는 텅 빈 눈빛으로 그녀의 악쓰는 소리를 무시한 채, 냉랭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너를 사랑해? 성대한 결혼식?”그는 낮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는 끝없는 비참함과 후회가 가득 담겨 있었다.“심유나…. 그 여자야말로 내가 평생을 바쳐 사랑해야 할 사람이었어. 네가, 바로 네가 이 모든 걸 박살 낸 거야!”그는 공포로 일그러진 서해원의 얼굴을 훑어보며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내뱉었다.“너 폐소공포증 있다고 했지? 피해자 시늉하는 거 좋아하잖아? 오늘, 진정한 절망이라는 게 뭔지 제대로 겪게 해줄게.”그는 몸을 돌려 이제는 서해원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노숙자들을 향해 말했다.“저 여자는 너희들 마음대로 해. 단, 명심해. 절대 곱게 죽게 두지는 마.”노숙자들이 천박하게 낄낄거리면서 해원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서해원은 찢어질 듯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으나 그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나는 곁에 둥둥 떠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지만 통쾌하기는커녕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서늘할 뿐이었다.강시후가 가장 극단적이고 잔인한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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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얼마 지나지 않아 서해원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그녀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강시후가 손을 써둔 덕분에 서해원은 평생 차가운 감옥 안에서 온갖 고통을 겪으며 썩어 살게 될 터였다.하지만 그는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다.서해원의 최후가 여전히 너무 가벼운 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는 허은채를 찾아갔다.그녀가 세강 그룹에 입사해 일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허은채는 그를 한참 동안 묵묵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5년 뒤, 조현우는 회사를 그만두고 작은 가게를 차렸고 허은채는 그 개업식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었다.나는 강시후의 곁에서 10년을 함께했고 허은채 역시 세강 그룹에서 10년 동안 일했다.그 긴 세월 동안 강시후는 미친 듯이 일에만 파묻혀 살았고 그와 한미애는 내 이름을 내건 자선기금을 각각 설립하기도 했다.그 10년 동안 그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텅 빈 신혼집을 지키며 나와 똑같이 유령처럼 살아갔다.내가 그를 향한 원망을 거두고 모든 걸 내려놓으며 마침내 무감해지기까지 걸린 시간도 딱 10년이었다.하지만 여전히 나는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그 사이 허은채는 눈부시게 성장해 업계에서 알아주는 유능한 변호사가 되었고 세강 그룹의 법무팀 총괄 이사 자리에 올랐다.나는 예전에 작고 소심하기만 했던 그 어린 소녀가 이제는 누구를 상대하든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주눅 들지 않으면서도 진심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다만 그녀는 강시후에게만큼은 늘 쌀쌀맞게 대했다.한때 허은채가 강시후의 약혼녀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그 소문은 이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강시후는 자신의 약혼녀는 오직 한 사람, 바로 심유나뿐이라고 말했고 허은채는 눈을 흘기며 그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일축했다.나중에 인터넷에서 이런 문구를 본 적이 있다.[만약 그녀가 당신에게 남긴 유물이 살아 숨 쉬는 사람이라면 어쩌지?]10년 동안, 허은채는 강시후가 내 무덤을 찾아오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매년 내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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