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다음 날 아침,
엘로이즈는 제3지점으로 향하는 마차에 먼저 올라 있었다.
잠시 뒤 카시안이 탔다.
그가 맞은편을 보다가 멈췄다.
엘로이즈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여기 앉으세요.”
카시안이 그녀를 봤다.
“그래.”
이번에는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마차가 출발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어젯밤의 입맞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없었던 일처럼 피하지도 않았다.
카시안의 손등이 흔들리는 마차 때문에 한 번 그녀의 손에 닿았다.
둘 다 바로 치우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제3지점은 제9지점과 달랐다.
연결관도.
과부하 차단판도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기술 사제가 벽면을 확인하다가 말했다.
&ldquo
라비엔 성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다음 날 오후였다.낮은 구릉 너머로 회색 지붕들이 이어졌고,그 뒤로 에버하르트 성의 서쪽 탑이 나타났다.엘로이즈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카시안이 맞은편에서 물었다.“추워.”“괜찮습니다.”그녀는 창밖을 봤다.수도에서는 늘 돌아갈 곳이라고 생각했다.막상 가까워지자 조금 달랐다.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다시 자기 자리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성문 앞에는 에버하르트 공작과 영지 관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마차가 멈추자 엘로이즈가 먼저 내렸다.“아버지.”공작이 딸의 얼굴부터 살폈다.“고생했다.”그 뒤에 내리는 카시안을 보고서야 고개를 숙였다.“전하를 뵙습니다.”카시안이 말했다.“휴가 중입니다, 공작.”그가 잠시 엘로이즈를 봤다.“이번에는 영애의 손님으로 왔습니다.”공작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딸에게 향했다.“그렇다더구나.”그리고 더 묻지 않았다.영지 관리가 앞으로 나왔다.“아가씨, 도착하시는 대로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카시안이 아니라 엘로이즈에게 말했다.“말하세요.”“북쪽 제방 보강은 끝났습니다. 다만 겨울 곡물창고 세 곳 중 하나에서 지붕 누수가 발견됐습니다.”“피해는요?”“저장량의 이 퍼
닷새 뒤 아침,에버하르트 저택 앞에는 마차 두 대가 준비돼 있었다.짐마차 하나.엘로이즈가 탈 마차 하나.호위는 에버하르트 기사들뿐이었다.황실 문장이 찍힌 마차도,황실 기사도 없었다.엘로이즈는 마지막 짐 목록을 확인한 뒤 마차에 오르려 했다.“영애.”기사 하나가 서쪽을 가리켰다.말 한 필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카시안이었다.군복이 아니었다.검은 외투 아래에는 간단한 여행복을 입고 있었다.뒤따르는 사람도 수행원 한 명뿐이었다.엘로이즈가 물었다.“왜 말을 타고 오셨습니까?”“휴가 중이니까.”카시안이 말에서 내렸다.“공식 이동이 아니야.”그가 내민 것은 황실 이동 명령서가 아니었다.〈변경 방위군 지휘관 휴가 확인서.〉이레.군 지휘권은 부지휘관에게 인계.휴가 중 긴급 명령권 행사 불가.엘로이즈가 마지막 줄까지 읽었다.“이걸 왜 보여주십니까?”“라비엔에 들어갈 때 내가 어떤 자격인지 분명한 편이 좋을 것 같아서.”카시안이 말했다.“군 지휘관도 아니고.”잠시 뒤.“황실을 대표해서 가는 것도 아니야.”엘로이즈는 문서를 돌려줬다.“그럼 무엇으로 오십니까?”카시안이 그녀를 봤다.“네가 허락한다면.”그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손님으
라비엔으로 돌아갈 날짜를 정한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엘로이즈는 아버지에게 보낼 서신 아래에 출발일을 적었다.닷새 뒤.첫눈이 오기 전에는 충분했다.문제는 수도 서쪽 도로였다.최근 사흘 동안 대신전 지지자들의 소규모 시위가 두 번 있었다.폭력 사태는 없었지만,황실 법무국은 귀족들의 장거리 이동을 당분간 미루라고 권고했다.카시안은 엘로이즈가 내민 일정표를 한참 봤다.“나는 미루는 게 좋다고 생각해.”엘로이즈의 손이 멈췄다.아주 짧은 순간이었다.그런데 몸이 먼저 기억했다.안 된다.위험하다.내가 결정한다.전생에는 그 다음 말까지 정해져 있었다.엘로이즈는 천천히 손가락을 폈다.“이유를 말씀해 주세요.”카시안은 지도 한 장을 펼쳤다.“시위 때문만은 아니야.”서쪽 도로의 세 지점을 짚었다.“여기까지는 황실 경비대 관할이고, 그 뒤부터는 지방 경비대로 넘어가. 지금 인수인계가 좋지 않아.”“습격 가능성이 있습니까?”“확인된 계획은 없어.”그가 바로 선을 그었다.“위험도가 평소보다 높다는 뜻이야.”엘로이즈가 물었다.“그래서 출발하지 말라는 겁니까?”카시안이 그녀를 봤다.“아니.”잠시 뒤.“나는 미루는 쪽을 권하는 거야.”엘로이즈는 일정표를 내려다봤다.“저는 가겠습니다.&rd
저녁 식사는 조용했다.엘로이즈가 먼저 약속했고,카시안은 약속한 시각에 왔다.평소와 다를 것은 없었다.그런데 식사가 절반쯤 지나자 엘로이즈가 포크를 내려놓았다.“전하.”“응.”“어제부터 생각한 게 있습니다.”카시안도 손을 멈췄다.“말해.”“제게 용서받기 위해 뭔가 하실 생각입니까?”그는 쉽게 답하지 않았다.“하고 싶은 건 많아.”“예를 들면요?”“네가 잃었던 걸 돌려주고 싶고.”카시안이 말했다.“다시는 같은 일이 생기지 않게 만들고 싶고.”엘로이즈가 물었다.“그걸 다 하면 제가 용서해야 합니까?”“아니.”대답은 즉시 나왔다.“그럼 그 일들과 제 용서를 연결하지 마세요.”카시안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엘로이즈가 말했다.“전하가 황위 계승권을 내려놓은 것도.”“응.”“제게 가졌던 혼인 관련 권리를 포기한 것도.”“응.”“사람을 강제로 제물로 쓰지 못하게 제도를 바꾸는 것도.”그녀는 하나씩 끊어서 말했다.“그건 해야 한다고 판단해서 한 일이죠.”“그래.”“그러면 그대로 두세요.”
다음 날 아침,엘로이즈는 평소와 같은 시각에 일어났다.밤새 잠을 설칠 줄 알았다.그러지 않았다.카시안에게 해야 했던 말을 전부 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좋아한다는 말.용서하지 않았다는 말.둘 다 사실이었다.둘 중 하나를 취소할 필요도 없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뒤 시종이 편지 하나를 가져왔다.카시안의 글씨였다.짧았다.〈오늘 예정된 아스트라 운영회의에는 참석하지 않겠습니다.〉〈필요한 보고는 군무국을 통해 전달하겠습니다.〉엘로이즈는 마지막 줄을 읽었다.〈어제 이야기가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그녀의 손이 멈췄다.기다리겠다는 말.예전 같았다면 좋았을 것이다.그녀가 정할 때까지 밀어붙이지 않겠다는 뜻이니까.그런데 지금은 조금 달랐다.엘로이즈는 종이를 접지 않았다.곧바로 답장을 썼다.〈회의에는 예정대로 참석하십시오.〉한 줄을 더 적었다.〈어제의 대화가 전하의 업무 배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잠시 생각한 뒤,마지막 문장을 붙였다.〈그리고 제가 전하를 피하겠다는 뜻도 아닙니다.〉오후 회의실에서 카시안은 원래 자리에 앉아 있었다.엘로이즈가 들어오자 그가 일어났다.“편지 받았어.”“그러라고 보냈습니다.”회의는 평소처럼 진행됐다.장기 운용을 위한 교대 인력.외부권역과의 기록 공유.각 지점의 철수권을 침해하지 않는 비상 연락 절차.카시안은 필요한 말만 했다.엘로이즈도 그에게 필요한 질문만 했다.
엘로이즈가 고른 곳은 에버하르트 저택의 작은 응접실이었다.황궁도.대신전도 아니었다.문은 열어 두었다.시종은 복도 끝에 세웠다.카시안은 약속한 시각에 혼자 왔다.엘로이즈가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앉으세요.”그가 앉았다.탁자 위에는 아무 문서도 없었다.오늘 확인할 일은 기록 속에 있지 않았다.둘 다 기억하고 있었다.엘로이즈가 먼저 말했다.“전생에서 제 사형 명령에 직접 서명하셨죠.”“그래.”“대리 서명도 아니었고요.”“내가 했어.”“대신들이 강제로 손을 잡아 찍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아니.”카시안은 한 번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엘로이즈가 물었다.“왜 하셨습니까?”그가 입을 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네가 세라피나를 죽였다고 믿었으니까.”“왜 믿으셨죠?”“증거가 있었으니까.”엘로이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증거가 있었던 것과 유죄가 확정된 것은 다릅니다.”“알아.”“그때는 모르셨습니까?”카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알고 있었어.”그 대답에 엘로이즈의 손가락이 한 번 굽혀졌다.“그럼 다시 묻겠습니다.”그녀가 말했다.&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