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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화. 머물게 해줘

Penulis: 혜진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9-02 07:13:28

015화. 머물게 해줘

“생각보다 빨랐네.”

벨리사가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젖은 금갈색 머리가 뺨에 붙어 있고, 화장은 거의 지워졌다.

흙 묻은 검은 드레스.

빈손.

이틀 만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알았다.

연기가 빠져나간 얼굴이라는 걸.

평생 모든 표정을 계산해서 지어 온 여자가, 지금은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있었다.

만들 수 없었다.

빗물이 다 지워 버렸다.

“왜 왔어.”

벨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돌아왔어.

갈 데가 없었어.

잠깐만 있게 해줘.

그 말들이 목구멍에서 모양을 바꾸고 있는 게 보였다.

예전 같으면 벌써 웃고 있었다.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골라서.

오늘은 웃지 않았다.

“밖이 별로였어?”

“별로였다고 하면 좋아?”

“내가 왜.”

“쫓아낸 사람이니까.”

“문 열어 준 사람이지.”

“결국 나가게 만들었잖아.”

“마차 탄 건 너였고.”

벨리사가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라 더 짜증 나는 얼굴이었다.

나는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냥 기다렸다.

내가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여자는 평생 상대를 기다리게 만드는 쪽이었다.

지금은 반대였다.

나는 그게 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입을 열었다.

“사람들 만나 봤어.”

“그래.”

“리아나도. 안 받아줬어.”

“하르트 백작 부인은 차는 줬고.”

“근데.”

“하룻밤은 있어도 된대.”

“그런데 안 있었네.”

“불쌍해서 재워 주는 것 같아서 싫었어.”

“지금은?”

벨리사가 눈을 들었다.

젖은 속눈썹.

그 눈빛에서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갈 데가 없어.

그 말을 입에 담는 건 그녀에게 칼을 쥐는 것보다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먼저 물어 주지 않았다.

기다렸다.

이번에는 그녀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여기 있어도 돼?”

드디어 나왔다.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돼.”

“왜 이렇게 쉽게 받아줘.”

“네가 돌아올 걸 알았으니까.”

벨리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갈 데 없잖아.”

“그래서 온 거잖아.”

“그래서 받아주는 거야?”

“응. 네가 먼저 온 게 좋아서.”

벨리사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평생 모든 말을 계산해서 꺼내는 여자가, 조건 없는 대답 앞에서 멍하니 있었다.

그 표정이 꽤 볼만했다.

“조건은?”

“없어.”

“없다고?”

“지금 이 궁에서 자는 데는.”

벨리사가 잠시 나를 보다가 웃으려는 듯 입꼬리를 움직였다. 나는 그걸 보고 말했다.

“그 표정.”

“뭐.”

“열세 살 때 사탕 달라고 할 때랑 똑같아.”

벨리사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가 그 기억을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자기가 처음으로 연기로 사람을 움직이던 순간이니까.

그때 나는 사탕을 받고도 웃지 않았다.

벨리사는 내가 웃지 않는 게 마음에 안 들어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기억을 꺼낸 건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그게 더 그녀를 찔렀다.

“머물게 해줘.”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고개도 기울이지 않았다.

목소리를 부드럽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냥 말했다.

“그래.”

너무 쉬웠다.

벨리사도 그걸 알았다.

그래서 이상하게 목이 아팠는지, 그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따라와.”

개인 거처로 데려갔다.

욕실에 온수를 받치고 수건을 꺼냈다.

시녀를 물렸다.

문을 닫았다.

벨리사가 뒤를 돌아봤다.

눈동자가 방 안을 한 바퀴 돌았다.

문.

창문.

도망칠 곳을 세는 눈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벗어.”

“뭐?”

“젖은 거. 다.”

벨리사의 손이 드레스 끈을 찾지 않았다.

알아듣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눈빛은 당황이었다.

평생 모든 상황에서 자기 표정을 골라 쓰던 여자가, 어디에 손을 둬야 할지 모르는 얼굴.

“여자끼리는……”

“그래서.”

“본 적 없어.”

“해본 적 없어서?”

벨리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귀까지.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남에게 보여 준 적 없는 부분.

황녀라는 이름도, 예쁜 얼굴도, 익숙한 웃음도 없는 부분.

벨리사 아르젠티아가 처음으로 낯선 땅에 서 있는 얼굴.

“그럼 내가 풀어줄게.”

“칼리아.”

“저항해도 돼. 그래도 내가 벗길 거야.”

등 뒤로 돌아갔다.

젖은 매듭을 풀었다.

벨리사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진짜로.

지금까지 나에게 건넨 모든 가짜 웃음보다, 그 손끝의 힘이 더 솔직했다.

“놔.”

“싫어.”

“싫지 않아.”

“거짓말.”

“네 몸이 말해주잖아.”

벨리사는 내 손목을 놓지 않았다.

놓지 못한 건지, 놓기 싫은 건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그대로 둔 채, 한 손으로 드레스를 밀어 내렸다.

어깨.

쇄골.

가슴.

젖은 속옷이 살에 붙어 있었다.

벨리사가 팔을 들어 가슴을 가렸다.

평생 모든 사람에게 자기 몸을 보여 주던 여자가, 팔로 가렸다

. 나는 그 팔목을 잡아 천천히 벌렸다.

“가리지 마.”

“……이상해.”

“뭐가.”

“여자랑. 이렇게.”

“이상한 건 네가 떨고 있다는 거야.”

“안 떨어.”

“떨고 있잖아.”

벨리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존심과, 그 밑에서 자라난 다른 무언가가 싸우는 눈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팔을 내렸다.

예쁜 건 알아. 그래서?

나는 그녀의 가슴을 봤다.

젖은 살 위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젖꼭지는 이미 서 있었다. 차가워서가 아니라, 내가 보고 있어서.

그 사실이 그녀의 자존심을 긁는 게 보였다.

수건을 집어 목부터 닦았다.

어깨.

팔.

쇄골.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벨리사는 숨을 참았다.

가슴 근처에 닿자 호흡이 조금씩 얕아졌다.

수건 너머로 젖꼭지를 스치자, 허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추워?”

“아니.”

“그럼 왜 이래.”

“모르겠어.”

그 대답에 수건을 옆으로 던졌다.

맨손으로 가슴을 감쌌다.

굳은살 박인 손바닥.

젖은 젖꼭지가 손바닥 한가운데를 찔렀다.

벨리사는 소리를 삼켰다.

참으려는 숨이 목에서 갈라졌다.

“소리 내도 돼.”

“안 내.”

“낼 거야.”

엄지와 검지로 젖꼭지를 잡고 비볐다.

벨리사의 입술이 열렸다.

참으려다 새어 나온 소리.

아주 작은, 그녀답지 않은 소리.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손을 뗐다.

“……!”

벨리사의 몸이 쫓아왔다.

아주 조금.

자기 몸이 먼저 움직인 걸 그녀도 알아챘다.

얼굴이 확 붉어졌다.

“왜 멈춰.”

“가고 싶어?”

“……아니.”

“거짓말.”

나는 손을 등 뒤로 돌려 속옷 끈을 풀었다.

천이 미끄러져 내려가자 젖은 젖꼭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벨리사가 다시 팔을 들어 올렸다.

나는 그 손목을 잡아 내리고, 그대로 젖꼭지에 입을 댔다.

“아……!”

혀끝으로 서 있는 그 끝을 눌렀다.

벨리사의 등이 활처럼 휘어졌다.

손가락이 내 머리를 움켜쥐었다.

밀어내는 힘인지, 눌러 담는 힘인지 모를 힘이었다.

“하…… 그런, 거기……!”

“여기?”

“아……! 거기……!”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또 멈췄다.

입을 뗐다.

벨리사의 손이 허공에서 머물렀다.

숨이 거칠었다.

젖꼭지는 젖어서 붉게 서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이 여자가 평생 어떤 무기로 사람을 움직여 왔는지 떠올렸다.

그 무기가 지금 나한테는 한 조각도 통하지 않았다.

대신 그 밑에서 올라온 것이 있었다.

참다가 무너지는 소리.

연기가 아닌 소리.

그게 듣고 싶었다.

“칼리아……”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아까까지의 낯선 떨림이 아니라, 아주 익숙한 음색이 섞이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간절하고,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아낸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열세 살부터 들어 온 목소리였다.

“그 표정.”

“뭐...”

“예쁘게 부탁하려는 표정.”

벨리사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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