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여왕벌. 구미호. 남자들의 최고의 환상이자 팜므파탈.
그리고 먹이사슬의 최상의 포식자’
고등학교 때 유진은 그렇게 불렸다.
그렇다고 그녀가 바람둥이이거나 아무나 막 사귀는 쉬운 여자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너무도 어려운 여자였다. 어쩌면 남자들이 만난 가장 어려운 여자.
그녀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했지만 동시에 절대 선을 넘지 않았다.
어설프게 여러 남자들을 두고 비교를 한다던지 어장을 관리하는 인기 좀 있다는
여자들의 싸구려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신에게 늘 버거운 조건의 남자들만 골라 그들의 자존심부터
무너트리고 자신에게 굴복하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주변에서 가장 인기 많은 또래 남학생들의
끊임없는 구애에도 꿈쩍도 안했던 유진이 선택했던 첫 상대는 체육 선생님이었다.
프로축구선수로 꽤나 많은 인기를 끌다 부상으로 은퇴 후 처음 고등학교로 부임 온
잘생긴 젊은 선생님…
학교 1층 로비에서 그를 처음 마주친 유진은 단번에 그를 찍었다.
“저 남자… 누구야?”
어떤 남자가 학교 본관 1층 로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지나가는 주변마다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아이들의 동경어린 시선과 설레임…
유진은 뒷모습의 남자를 가리키며 윤정에게 물었다.
“어? 아… 이번에 새로 온 3학년 체육쌤 일 걸?”
“학기 중에 왔다고?”
“응. 뭐… 국가대표에 유명한 선수였다는데… 부상 당해서… 이사장이 인맥으로
잠깐 동안만이라도 학교 축구 코치 겸 쌤으로 모셔 온 거래”
“나… 저 남자랑 사귈래”
“뭐? 야… 너 저 쌤 얼굴은 봤어?”
“왜 얼굴 별로야?”
“그건 아닐 걸… 요즘 얘들 저 쌤 멋있다고 난리 났으니까…
그런데 네 타입이 아닐 수도 있잖아”
“아니 됐어. 그리고 아까 저 쌤… 지나가는데 얘들 눈빛 보고 잘생겼을 줄 알았어”
“근데… 유진… 너 진짜 많이 변한 것 같아…”
“뭐 가?”
“너… 남자에게 관심 없었잖아. 아니… 무서워하지 않았어? 막 남자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극도로 싫어했는데…”
“그랬나? 글쎄…”
유진은 기억이 안난다는 듯 딴청을 피웠다.
그녀의 시치미에 윤정이 그녀를 무안할 정도로 빤히 바라봤다.
“아니… 너 변했어. 완전!”
“어떻게 변했는데?”
“너 부산에 있었을 때는… 완전 아기 강아지 그 자체 였는데… 그래서 별명도
순둥 순둥 순둥이였잖아. 진짜 겁도 많고 눈에 띄는 것도 싫어해서 사람들이랑
눈도 잘 못 맞추고… 근데 지금은…”
“지금은… 뭐?”
“너 애들이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너… 여왕벌이래. 내가 여기 전학와서 그 별명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어떻게 순둥이 별명이 여왕벌로 바뀔 수가 있어?”
유진은 잠시 아무 말없이 예전 생각에 잠겼다.
[그랬지… 그때 난 한심하고 순진 했으니까… 아무 것도 못하는 멍청이였으니까…]
“그래서 나 싫어?”
“아니. 멋있어. 전보다 훨씬 더… 전에도 진짜 예뻤는데 너무 자신감 없이 주눅
들어 있어서 좀… 뭐랄까… 네 미모가 좀 아까웠거든… 왜 저 얼굴로 저렇게
쭈그리고 사나 싶어서? 근데… 지금은 너무 빛나… 그래서 네가 자랑스러워”
“자랑스러워? 야! 너무 띄워주지 마… 떨어지면 아파”
“아니 서울 와서 1년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알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 지… 네가 친구에서 사촌이 됐으니까…”
“그렇기는 하지… 사실 나도 많이 놀랐으니까… 네가 외삼촌 딸이었다는 게…
근데 왜 나한테까지 비밀로 한 거야? 나… 그거 진짜 서운했어”
“딸은 무슨… 인정도 안한 딸이 딸이야? 지금이야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받아준 거고… 그리고 솔직히 나도 전혀 몰랐어. 엄마가 내 생부에 대해 아무 것도
얘기 안해줬으니까…”
“그럼 언제 안 거야? 네가 우리 외삼촌 딸인 거”
“서울로 올라왔을 때… 갑자기 내가 그 분 딸이라는데 그때는 솔직히 나조차도
그 사실을 못 믿겠더라고… 근데 그걸 너에게 어떻게 말해? 내가 너의 외삼촌
사생아였다고… 어떻게 너에게 쉽게 말할 수가 있어? 그래서 네게 계속 말한다
말한다 하면서 미루고 미루다… 네가 먼저 가족들 통해서 알게 될 때까지
말 못한 거야”
“그래도… 우리… 중학교 2년 내내 제일 친한 단짝이었는데…”
“그래서 고마웠어. 미국에서 와서 한국어도 서툴렀을 때인데… 아무 것도 아닌
나에게 먼저 다가와 주고 보살펴 줘서… 그래서 나… 내 생부에 대한 사실 알고
무너졌을 때 네 생각하며 위안 많이 받았어. 친척인 지도 몰랐던 네가 나에게 먼저
손 내밀어줘서… 무슨 운명처럼…”
“어우 야… 나 눈물 나… 진짜…”
윤정의 귀여운 오두방정에 유진은 잠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수업 종이 울렸다. 그리고 윤정이 자리로 돌아갔다.
유진은 혼자가 되자 이내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는 냉소로 변했다.
그리고 떠올리기 싫은 과거가 강제로 머리 속에 소환 됐다.
[ 미안해…… 정말 미안해, 유진아. 네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널 그 지옥 같은 공포 속에 홀로 방치하고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소독약 냄새가 서늘하게 감도는 대학병원 응급 병실 앞 복도.요스케는 피와 땀으로 얼룩진 셔츠 차림 그대로 차가운 벽에 기대어 고개를 깊숙이 떨군 채, 완전히 영혼이 나간 사람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흉포하게 들이닥쳤던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는 멎었으나,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유진의 숨이 멎어가던 오피스텔 거실의 잔상으로 터질 듯이 어지러웠다.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요스케가 신속하게 도어락을 따고 들어가 선호를 제압하고,곧바로 기도 확보 후 CPR을 시행한 덕에,유진의 뇌와 장기에는 큰 손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가느다란 호흡을 되찾은 유진은 병실로 이송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의식을 회복했다.하지만 수액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병실 안,요스케의 시야 속으로 들어온 유진의 상태는 그를 분노로 불타오르게 만들었다.새하얗고 가녀린 그녀의 목덜미 위로, 강선호라는 괴물이 남기고 간 시커넓고 선명한 다섯 손가락의 목 졸린 손자국이 끔찍한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그 가혹한 상흔을 똑바로 마주하는 순간,요스케는 속에서부터 살의가 치밀어 올랐다.주먹을 꽉 쥐고 떨고 있는 그의 앞에서,산소마스크를 벗어 던진 유진이 꺼칠하게 굳은 입술을 열어 나직하게 첫마디를 뱉어냈다.“선배…… 오빠… 그 사람은 지금 어떻게 됐어요?”유진은 지옥 같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간신히 의식을 찾자마자,제 목숨을 걱정하기는커녕,자신을 죽이려 들었던 가해자 강선호의 안위부터 다급하게 물었다.유진의 그 황당한 질문에,요스케는 허탈함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그 자식… 아직 이 병원 다른 병실에 누워있어. 근데 신체적으로 별문제는 없으니까 걱정 마. 그냥 잠깐 충격 줘서 기절시켰을 뿐이니까.”“그럼…… 우리 부모님은요? 서회장님이나 엄마한테 연락 갔어요?”유진이 창백해진 얼굴로
굳게 닫힌 철제 현관문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는 복도에 홀로 서 있던 요스케의 청각을 잔인하게 난도질하기 시작했다.선호의 낮고 축축한 음성이 좁은 공간을 서늘하게 울렸다.“나…… 윤정이와 결국 헤어질 거야.”“……그래서요?”유진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그러니까 넌 이제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줘.”“오빠, 진짜 미쳤어요?”유진의 입술 사이로 기가 막힌다는 듯한 날카로운 실소가 터져 나왔다.“윤정이…… 어제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해 전부 눈치채고 알았어. 그러니까 이제 너, 더 이상 윤정과의 의리 때문에 나를 피하거나 멀어질 필요 전혀 없어.”“……뭐라고요?”유진의 음성이 분노로 바르르 떨렸다.“진짜…… 오빠는 보면 볼 수록 너무 최악이네요.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윤정이를 책임질 생각조차 추호도 없고, 사리분별도 전혀 안 되고…… 심지어 제멋대로 망상에 빠져서 이 지독한 집착까지……. 도대체 어디까지 바닥을 더 보여줄 작정이에요? 제발 정신 좀 차려요, 강선호! 이건 내가 오빠에게 가족으로서 해줄 수 있는 정말 마지막 충고에요. 만약 오빠가 부모들의 재혼으로 엮인 내 가족이 아니었더라면…… 나 그날, 오빠 경찰에 당장 신고했을 거에요. 그러니까 이제 제발 더 이상 내 앞에 찾아오지 마세요. 날 끝까지 벼랑 끝으로 몰지 말란 말이에요!”유진의 처절한 절규에도 선호의 눈빛은 광기로 일렁였다.“네가 날 이렇게 망가뜨리고 괴물로 만든 거잖아, 서유진. 네 엄마 때문에 내 친엄마가 미쳐서 비참하게 사는 걸 뼈저리게 보면서, 내 인생에 사랑 같은 거…… 운명 같은 거…… 단 하나도 믿지 못하고 살았던 나를 이토록 변하게 만든 게…… 하필이면 너였어. 그런데…… 이제 와서 네가 날 이토록 비참하게 버리고 도망치겠다고? 아니, 난 너 절대로 못 놔줘. 너에게 난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구원이어야 해. 너도 여전히 나 사랑하잖아, 부정하지 마.”“맞아요. 한때는 오빠를 사랑했어.”유진이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직접 구운 따뜻한 브런치로 시작했던 눈부신 주말 아침은. 어느덧 저녁노을을 지나 짙은 밤하늘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주말의 남은 시간마저 온전히 서로에게 내어준 채 함께 하루 종일 붙어 있었다.삼청동의 고즈넉하고 분위기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촛불을 켜두고 나눈 저녁 식사까지,완벽하리만치 평화롭고 달콤한 시간의 연속이었다.하지만 행복이 깊어질수록 뒤틀린 비극의 잔상이 유진의 숨통을 조여왔다.식사를 모두 마치고 주차장으로 향한 요스케는, 부드러운 손길로 조수석 문을 열어 유진을 태우며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오늘은 일찍 너 놔줄게. 어제부터 내가 눈치 없이 내 욕심만 차리느라 널 너무 귀찮게 굴어서, 피곤하고 지쳤을 테니까.”운전석에 올라탄 그가 시동을 걸며 건넨 다정한 배려의 한마디.하지만 그의 배려 섞인 말에 유진은 가슴 한구석이 쿡 찔린 듯, 살짝 서운한 감정이 밀려왔다.참 이기적이고 모순적이었다.요스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살을 맞댈수록,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더 많이 그와 함께 얽혀 있고 싶다는 파멸적인 갈망이, 자꾸만 고개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유진은 뾰루퉁한 시선을 감추며 짐짓 새침하게 쏘아붙였다.“선배가 밤새 무리해서 피곤한 거 아니에요? 괜히 혼자 민망하니까 내 핑계 대는 거 나 다 알아요.”유진의 짓궂은 도발에, 요스케가 핸들을 잡은 채 슬며시 고개를 돌려 위험할 정도로 농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래? 그럼…… 지금 내 집으로 다시 갈래, 후배님?”“……!”순간 유진은 숨이 턱 막히며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위험했다.이대로 그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가는,정말로 그와 24시간 내내 몸을 섞으며 함께 하려 들 터였다.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한 달이 되다가……그러다 결국 평생을 이 다정한 남자의 곁에서 함께 하고 싶어질까 봐,유진은 덜컥 거 거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했다.유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그에게 다시 차가운 방어벽을 세우며 그를
“오늘…… 뭐 해?”주말의 시작을 알리는 토요일 아침 7시 정각.유진의 얌전하던 휴대폰 화면 위로 징하는 진동과 함께 요스케의 짤막한 톡이 띄워졌다.암전되어 있던 침실 안,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받으며 눈을 뜬 유진은 액정을 확인하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슥 올라가며 얼굴 가득 화사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선배… 이렇게 이른 아침에 벌써 일어난 거예요?”유진이 베개에 고개를 묻은 채 답장을 보내자, 요스케로부터 기다렸다는 듯 즉각적인 답이 날아들었다.“우리 브런치 먹으러 갈래, 후배님?”“몇 시에 요?”“바로 지금!”“네?! 나… 아직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안 하고 밍기적거리고 있는데……”유진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톡을 보냈다.어젯밤의 격정적인 사랑의 여파로 전신이 노곤하게 풀려 있었다.“그럼… 계속 침대에서 누워서 잘 거야? 많이 피곤해?”“조금요? 가만히 시간을 계산해 보니까… 우리 어제 밤늦게까지 함께 있었잖아요. 겨우 고작 5시간 전까지 우리 같이 붙어 있었네요, 선배.”유진이 살짝 민망함을 담아 톡을 쏘아붙이자, 화면 너머 요스케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답장이 도착했다.“알았어. 그럼 억지로 안 깨울 테니까… 계속 편하게 자.”“네. 그럼…”“문만 열어줘!”“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유진이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키자, 요스케의 거침없는 직진 대시가 문장으로 박혔다.“아니, 문 열 필요 없고 그냥 현관 비번만 톡으로 불러줘. 넌 침대 이불 속에서 계속 달콤하게 자고 있으면 되니까.”“선배, 지금 도대체 어디인데요?”유진의 다급한 물음 끝에, 곧바로 한 장의 사진이 전송되어 화면을 채웠다.낯익은 디지털 도어락과 네이비 컬러의 문틀.다름 아닌 지금 유진이 누워있는 이 오피스텔 호실의 현관문 바로 앞이었다.요스케는 이미 그녀의 집 문앞에 있었다.유진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분 좋은 설렘에 잠시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가녀리고 작은 손가락으로 그에게 톡을 전송했다.[ 9230*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한옥 침실 안,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까무룩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번쩍 눈을 떴다.순간 밀려오는 당혹감에 놀라, 급하게 어두운 스탠드 옆 시계를 가만히 확인했다.밤 11시 35분.이미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리기 직전의 늦은 밤이었다.유진은 심장이 조바심으로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침대 밑바닥에 허물처럼 나뒹굴고 있던 자신의 얇은 옷가지들을 서둘러 주워, 몸에 급하게 걸치기 시작했다.옷을 다 챙겨 입은 유진은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침대 위에서 자신으로 인해 지쳐 이미 단잠에 깊이 빠져 있는 요스케의 조각 같은 얼굴을, 잠시 동안 애틋한 시선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그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올 때마다,유진의 심장은 쿵쿵, 소리를 내며 사정없이 방망이질 쳤다.유진은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이 남자… 이 다정한 남자의 넓은 품 속에 영원히 갇혀서 안겨 있고 싶어. 이 가혹한 현실을 전부 다 잊어버린 채, 이대로 오늘 밤을 온전히 함께 지새우고 싶어…’하지만 유진은 찰나의 이기적인 갈망을, 서둘러 머릿속에서 지워내며 포기했다.자신이 이 남자에게 영영 눌러앉아 그를 망칠 수는 없었다.유진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아주 조심스럽고 고요한 걸음으로 그의 한옥 집을 슬며시 빠져나왔다.가로등 불빛만이 쓸쓸하게 내려앉은…한적한 순라길 밤거리를 홀로 걸어 집으로 가는 길,유진의 머릿속은 온통 요스케의 생각 밖에는 채워지지 않았다.뇌리 구석구석이 전부, 그의 다정한 눈빛과 목소리로 가득 차 숨을 쉬기조차 벅찼다.바로 그때,정적을 깨고 유진의 손바닥 안에서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하며 전화가 걸려 왔다.화면에 뜬 그의 이름.유진이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누르자마자,수화기 너머로 잠에서 막 깨어 거칠고 낮게 가라앉은 요스케의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왜 나 안 깨우고 혼자 갔어? 너 지금 도대체 어디야?”그가 자신을 걱정하며 다그치는 목소리를 들은 순간,유진의 눈가에서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
현관 미닫이문이 닫히고,혜경이 완전히 안심한 얼굴로 한옥을 떠나자마자,요스케는 곁에 가만히 세워두었던 유진의 가녀린 몸을 부서질 듯,그대로 다시 한번 강하게 감싸 안았다.갑작스럽게 밀려드는 그의 거대하고 단단한 악력에 유진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가만히 원망 섞인 나직한 목소리를 뱉어냈다.“선배…… 왜 이렇게 갑자기 무모하게 일을 크게 키우면 어떻게 해요? 우리 엄마한테 사귀는 사이니 뭐니 그런 엄청난 폭탄을 덜컥 던져버리면 어떡하냐고 요…….”유진이 전전긍긍하며 그를 밀어내려 버둥거렸지만,요스케는 아무런 말도 받아치지 않은 채,그저 묵묵히 그녀의 가냘픈 허리를 더 꽉 안고만 있을 뿐이었다.그의 품 안에서 심장 박동이 위태롭게 뛰어대고 있었다.“……요스케? 선배? 왜 그래요, 진짜?”이상하리만치 무거운 그의 침묵에…유진이 의아함을 느끼며 그의 목덜미를 조심스레 붙잡았다.한참 동안 유진의 살결에 고개를 묻고 있던 요스케가,마침내 지독하게 낮고 물기에 가득 잠겨 있는 서글픈 목소리로 어렵게 입술을 뗐다.“너……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차가운 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던 거야?”“네……? 갑자기 그게 무슨……”“아까 너희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 돈 한 푼 없이, 휴대폰도 없이 길거리에 맨몸으로 쫓겨났었다며. 너…… 겨우 고작 고등학교 1학년이었잖아. 그 어린 나이에 차가운 거리에서 도대체 며칠이나 견뎌낸 거냐고, 서유진?”그의 잠긴 목소리 틈새로…억누를 수 없는 지독한 분노와 유진을 향한 눈물겨운 연민이 고스란히 묻어 흘러나왔다.유진은 그의 의외의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혀 멍하니 가슴을 들썩였다.“……4일 동안요.”“4일……?”요스케의 팔 근육이 일순간 거대하게 경직되었다.“자그마치 4일씩이나?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길바닥에 혼자 버려져 있었다고? 그럼 그 시간 동안 먹는 건 대체 어떻게 해결하고… 잠은 어디서 자고 어디서 씻었던 거야?”“그냥…… 계속 멍하니 걷다가, 엘리치 본사 건물 주변만
자정이 다 된 시각. 유진은 낯선 도시 서울의 한복판에서 혼자가 되었다.그리고 거의 패닉 상태였다.무서워서 한 자리에 서 있지도 못할 만큼…그래서 그 주변을 챗바퀴 돌듯 빠른 걸음으로 돌고 또 돌았다.그렇게 밤을 세웠다.새벽 5시 30분. 거리가 조금씩 밝아지며 사람들이 하나 둘씩 거리로 나왔다.그제서야 밤새 잔뜩 얼어 붙었던 몸의 긴장이 조금 풀어져 정신이 돌아왔다.그리고 주변에 보이는 공공 화장실로 숨어 들었다.가장 안쪽 화장실 빈 칸에 몸을 숨기고 그냥 앉아 있었다.발과 다리가 욱씬거렸다.가만히 발바닥을 확
3년 전… 처음으로 서울에 왔다.그리고 이 낯선 도시에서 엄마에게 가차없이 버려졌다.‘부산 집… 보증금 뺐어.그러니까 부산으로 내려가도 너 거기서 못 살아.그리고 네 휴대폰도… 내가 가져갈 게.그러니 지난 인생은 다 잊어. 네 생부에게 가.가서 새 인생 살아.이제 엄마… 찾지 마. 엄마가 네게 해 줄 수 있는 건 이것 뿐이야.미안해’KTX에서 내려 유진과 그녀의 엄마 혜경은 택시를 잡아 타고 종로로 향했다.그리고 큰 건물 1층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아직 호텔 체크인 시간이 안되서… 여기서 시간 좀 때우다 가
“오랜만…이네”윤정 정혁과 헤어져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마주한 자신의 악몽…유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유진아! 우리 선호… 왔다!오랜만에 오빠 왔는데… 인사도 안하고 거기서 뭐 해?”유진의 어머니… 혜경이 인위적인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애써 화목한 가족 흉내를 냈다.유진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그녀는 간신히 그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인사를 건넸다.“잘… 지내셨어요…?”“소식도 없이… 어떻게 온 거니?”“왜 아버지는 내가 집에 올 때마다 쫒아내려고 안달이시죠?”“어험… 이 놈아 내가 언제? 암튼
유진은 그의 톡에 설레이면서도 반갑지 않았다.상반된 감정.그녀는 불편한 상황을 자꾸 만들어 내는 이 남자가 부담스러웠다.괜히 소비되는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오늘 그녀는 그와의 정리를 결심했다.일주일 전처럼 둘은 그의 차를 타고 유진의 단골 커피 바로 향했다.그리고 이번에는 이전과 다르게 테이블이 아닌 바 테이블에 앉았다.“지난 번에 보여줬던 보고서… 괜찮던데…”“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오빠… 나… 오늘 커피가 왜 싱거운 것 같지?원두 바꿨어요?”“귀신이네. 코스타리카 중배두. 대신 고소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