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진 속 서경은 활을 들고 웃고 있었다.
시우가 그 사진을 뒤집었다.
“그것보다 이게 낫겠네.”
그가 고른 것은 병실 사진이었다. 서경은 오른손에 두꺼운 붕대를 감고 있었고, 시우는 침대 곁에 앉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누가 찍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전 연주 사진이 좋아요.”
“후원 사례집이잖아. 무슨 도움을 받았는지 보여야지.”
주말 아침, 시우는 오래된 자료 상자를 거실로 가져왔다. 홍보팀에 넘기기 전에 서경이 사진과 이력을 확인하면 된다고 했다. 박 실장은 이미 사본 한 묶음을 준비해 옆에 놓아두었다.
맨 위의 투명 파일에는 영문 표제가 붙어 있었다.
Project: 서경.
서경은 파일을 꺼내놓고도 바로 열지 못했다.
“왜 이름을 이렇게 써놨어요?”
“그때 담당자가 그렇게 정리했겠지.”
시우는 소파에 기대앉아 커피를 마셨다.
“너한테 해준 게 많으니까. 치료하고, 진학 도와주고, 여기 들어온 뒤에는 생활도 챙겨주고.”
서경은 첫 장을 넘겼다. 어머니의 병원 연락처, 학교, 성적, 장학금 내역이 정리되어 있었다. 다음에는 고등학교 때 받은 연주회 초청장이 나왔다.
연주 사진에는 그녀 혼자 있었다. 병실 사진에는 시우도 있었다.
서경은 그가 골라둔 사진의 모서리를 맞췄다. 붕대를 감은 손 옆에 시우의 손이 놓여 있었다. 자신은 무릎 아래까지 이불을 덮고 있었고, 그가 입은 셔츠는 조금도 구겨지지 않았다.
누가 찍었을까. 셔터가 울릴 때 그가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이 초청장은 제 거니까 가져가도 돼요?”
“그럼. 다 네 얘기잖아.”
시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필요한 건 사진 찍어놔. 홍보팀에서 정리하고 원본은 다시 보관할 거야.”
그녀는 연주 사진 두 장을 골랐다. 사진 뒷면에는 아버지 글씨가 있었다.
[서경이. 끝나고 냉면 먹으러 감.]
사진 가장자리에는 아버지의 손가락이 조금 찍혀 있었다. 렌즈를 가렸다고 그 자리에서 타박했던 기억이 났다. 한 장 더 찍어준다는 말에 배고프다며 먼저 걸어갔었다. 서경은 붉게 번진 그 귀퉁이까지 파일 밖으로 꺼냈다. 잘라내고 싶지 않았다.
그날 한 장 더 찍었으면, 아버지를 찍어드릴 수 있었을 텐데. 서경은 엄지로 사진 가장자리의 붉은 손가락을 쓸었다.
“아버지 생각나?”
시우가 물었다.
“응.”
“그래도 내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서경은 사진을 내려놓았다. 아버지의 글씨 위로 시우의 손이 겹치지 않게, 자기 쪽으로 조금 당겼다.
“이 사진은 제가 가질게요.”
“그러라니까.”
시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유세라였다. 그는 전화를 받으며 서재로 향했다.
“다 고르면 맨 뒤 동의서도 봐. 어렵게 쓰여 있으면 읽지 말고 사인해도 돼. 내가 검토했으니까.”
문이 닫혔다.
서경은 손을 멈춘 채 잠깐 기다렸다. 안에서 시우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의 업무 통화였다.
그녀는 동의서부터 펼쳤다.
사진을 쓰는 기간, 사용할 매체, 인터뷰 내용을 수정하는 절차가 적혀 있었다.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읽었다. 마지막 장에 서명하지 않고 접어놓았다.
그다음에야 앞의 자료를 다시 보았다.
지원 계획서의 작성일은 2016년 4월 11일이었다.
손을 다친 것은 4월 19일이었다.
다치기 8일 전, 시우는 이미 치료 계획을 세워놓았다.
서경은 다음 장을 넘겼다. 연주 지원 계획이어야 했다. 아직 다치지 않은 사람에게 그밖에 무엇을 준비했겠는가.
계획서에는 서경의 하교 시간과 연습실 이용 시간이 적혀 있었다. 어머니에게 연락이 닿지 않을 때 학교에서 누구를 부를 수 있는지도. 이런 내용은 누구에게 받은 걸까.
서경은 해당 장과 표제를 함께 촬영했다. 자신이 본 종이의 앞뒤가 섞이지 않도록 차례로 확인했다. 시우가 허락한 일인데도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다음 장은 악기 임대 관련 서류였다.
어릴 때 아버지가 구해준 악기. 돈을 모아 산 게 아니라, 지인의 소개로 대여한 바이올린이었다. 대학을 그만둘 때 시우는 대여 기간이 끝나 돌려보냈다고 했다. 서경은 그 말을 믿고 케이스를 내주었다.
그런데 파일에 남은 최종 반출처는 해외 공방이 아니었다.
더 아르떼 보관실.
유세라의 갤러리였다.
서경은 뒤집힌 연주 사진을 다시 들었다. 사진 속 악기의 턱받침 옆에는 작은 색 얼룩이 있었다. 닳은 부분을 공방에서 손본 자국이었다. 활을 들기 전마다 엄지로 만지던 자리.
그 악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물을 수 없었다니.
시우의 통화가 끝나는 소리가 들렸다. 서경은 자료를 다시 쌓았다. 계획서와 악기 반출서를 원래 자리에 두고, 연주 사진 두 장만 따로 골라놓았다.
“다 봤어?”
“동의서는 월요일에 여쭤보고 사인해도 될까요?”
“누구한테?”
“담당자한테요. 사진을 어디까지 쓰는지 제가 잘 몰라서.”
시우의 표정이 달라졌다.
“내가 확인했다고 했잖아.”
“알아요. 그런데 제 사진이라서, 저도 알고 싶어요.”
“불편하면 쓰지 말자.”
서경이 눈을 들었다.
“그 대신 인터뷰도 못 하겠다고 내가 말할게. 이번 행사 준비한 사람들은 좀 곤란하겠지만.”
“그런 뜻은 아니에요.”
“그럼 무슨 뜻인데.”
질문은 천천히 왔다. 서경은 익숙한 답을 삼켰다. 제가 예민했어요. 괜찮아요. 그냥 쓰세요.
그 말을 하면 다시 편안해질 것이다.
“월요일까지 답드릴게요.”
시우가 그녀를 한참 보았다.
“네가 그렇게까지 확인하고 싶으면 그래.”
그는 동의서를 내려놓고 웃었다.
“밖에 몇 번 다녀오더니 어려운 말이 늘었네.”
서경은 사진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걸어오는 동안 등이 곧게 펴지지 않았다. 문을 닫고 침대에 앉자 허리가 아팠다.
손에 쥔 사진이 조금 휘었다. 서경은 그것을 침대 위에 펴고, 손가락으로 네 귀퉁이를 눌렀다.
동의서는 거실에 두고 왔다. 비어 있는 서명 칸을 시우가 보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돌아가서 채워주지 않았다.
***
오후에 정 변호사에게 동의서를 보냈다. 자기 자료를 확인하다 계획서를 보았다는 경위도 함께 적었다. 변호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질문을 할지 정리해 보내주겠다고 했다.
악기 반출서는 따로 열어놓았다. 태주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갤러리의 공식 담당 연락처부터 찾았다. 경매 자료를 준비하면서 주고받던 메일에 회신을 달았다.
[과거 보관 악기 중 본인 사용 악기의 반환 여부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반출서 사본 첨부합니다.]
메일을 보내고 나니 다른 걱정이 생겼다. 담당자는 유세라에게 보고할 것이다. 그러면 시우에게도 전해질 수 있었다.
서경은 전송 취소 버튼을 찾다가 손을 멈췄다.
이 정도 질문도 못 한다면, 앞으로 어느 것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다.
저녁 무렵 태주에게 전화가 왔다. 사진에 관해 공유해도 된다고 정 변호사에게 전한 뒤였다.
“악기 위치 확인을 요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시우 씨는 돌려보냈다고 했는데, 중간에 세라 씨 갤러리에 맡겼더라고요.”
“현재 위치는 아직 답이 없고요?”
“네.”
태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성 심의 자료에 갤러리 보관품 목록이 있습니다. 그 목록부터 확인할 수는 있겠습니다.”
“찾으시면 저한테 먼저 알려주세요.”
“대여처까지 확인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서경은 사진 속 악기를 보았다.
“다시 갖겠다는 말은 아직 못 하겠어요. 그냥 어디 있는지만 알고 싶어요.”
태주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네. 그거부터 하겠습니다.”
서경은 침대 옆 탁자에 연주 사진을 세워두었다. 시우가 들어와 그 사진을 보았다.
“오랜만에 꺼내놓았네.”
“제가 연주하던 사진이에요.”
“알아. 그때 힘들었잖아.”
서경은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날은 좋았어요.”
잠깐 대답이 없었다.
“그래?”
“네. 좋았어요.”
이번에는 고치지 않았다. 그날이 어떤 날이었는지는 그녀가 알고 있었다.
오후에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병원비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예전 진료 자료를 누가 정리했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기억나는 부분과 모르는 부분을 나누어 말했다. 시우가 가져다준 봉투가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 일로 받았던 서류도 비슷한 종이봉투에 있었다는 말이 뒤따랐다.“엄마, 그건 다 버렸어?”“집에 있던 건 네가 가져갔을 텐데.”서경은 작은 상자를 보았다.“응. 찾아볼게. 모르면 나중에 같이 보자.”통화를 마치고 재단 전달지를 다시 펼쳤다. 위쪽에 인계 분류가 적혀 있었다.HD-16.태산이 보낸 관리계정 표지에서 보았던 번호였다. 한도진 관련 유족 지원이라는 이름 아래, 지금도 이어지는 지출을 묶고 있던 분류.그녀는 두 자료를 나란히 놓고 정 변호사에게 알렸다.“병원 연락 자료에 아버지 쪽 관리번호가 있어요.”“두 자료가 연결되는지 작성자를 확인하겠습니다.”은행 빚은 아니었다. 아버지 사후 지원을 맡던 사람들이 서경의 부상 때도 등장했다. 서경은 HD-16 아래에 박 실장의 이름을 적었다.해가 기울 무렵 태주에게 날짜와 담당자 부분을 공유했다. 파일을 보낸 뒤에도 서경은 전화를 끊지 못했다.“제가 다 기억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오래전 일입니다.”“그런데 그 사람은 너무 잘 기억하는 것처럼 말해요. 제가 뭐 때문에 울었고, 왜 그만뒀고,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했는지까지.”서경은 창밖을 보았다.“제가 자꾸 거기다 제 기억을 맞췄나 봐요.”태주가 잠깐 침묵했다.&ld
회의가 끝나자 채린이 문 앞에서 따라왔다.정 변호사가 두 사람 곁에 멈췄다. 채린은 서경의 손을 보다가 눈을 돌렸다.“그날…… 그냥 겁만 주면 될 줄 알았어.”서경은 가방끈을 잡은 손을 바꾸었다.“겁만 줬는데 내 손은 왜 이래?”서경이 오른손을 조금 들어 보였다. 채린의 시선이 내려갔다.“그 말로 내가 뭘 해주면 좋겠어?”채린이 대답하지 못했다.“오늘은 그 얘기 더 못 듣겠어.”서경은 먼저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려다가 손잡이를 잡고 멈췄다. 다리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변호사가 옆에서 엘리베이터로 가자고 했다.괜찮다고 대답하려다 고개를 끄덕였다.“네. 오늘은 그럴게요.”밖에 나와 태주에게 녹음 앞뒤를 들었다고 알렸다. 그가 만나겠느냐고 물었다.“오늘은 먼저 좀 쉴게요. 나중에 제가 전화해도 돼요?”“네. 전화 올 때까지 일하고 있겠습니다.”서경은 전화를 마쳤다. 태주의 하루까지 멈추게 한 것은 아니어서, 조금 편해졌다.숙소에 돌아와서는 음악을 틀지 않았다.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씻는다고 그 목소리가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물을 끄고 수건을 고르는 동작은 할 수 있었다.책상 위에 가져온 진료 봉투를 놓았다. 그날 자신이 직접 보았던 것과, 시우가 나중에 설명한 것이 자꾸 뒤섞이고 있었다.그녀는 두 줄로 나누어 적었다.병원에서 시우를 보았다.시우는 늦게 알았다고 말했다.같은 기억으로 묶어두었던 두 문장 사이에 처음으로 빈 줄이 생겼다.서경은 그 빈 줄
채린은 종이 한 장을 구겨서 가져왔다.“여기 사인하래.”서경은 테이블 건너의 여자를 보았다. 지난번 카페에서 보았을 때보다 얼굴이 말라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을 안쓰러워할 여유는 없었다.채린이 펼친 종이에는 지원 종료에 따른 사실 확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2016년 학교에서 발생한 개인 간 다툼에 시우가 사후 지원을 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서경의 눈이 개인 간 다툼이라는 말에 멎었다.종이에는 손도, 자퇴도 없었다. 서경은 테이블 위에 펴지지 않는 약지를 올려놓았다.“이걸 쓰려고 했어?”“그러니까 안 쓰고 왔잖아.”채린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붙였다. 곁에는 그녀가 따로 상담받은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 정 변호사와 연락해 마련한 자리였다. 서경의 대리인과 채린의 대리인은 서로 다른 쪽에 앉았다.채린이 가방을 쥐었다.“내일이 돈 들어오는 날이야. 이거 정리 안 하면 더는 안 준대.”“그래서 녹음을 주겠다는 거야?”“나도 방법이 없으니까.”채린이 입술을 씹었다.“너한테 다 넘기면, 넌 그걸로 강시우 잡고 나는 혼자 남잖아. 먼저 약속해. 나한테 불리한 건 빼.”서경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채린은 서경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날 문 앞을 막고 웃던 여자가 오늘은 자기에게 유리한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뭘 빼달라는 건데.”서경이 물었다.채린은 시선을 피했다.“내가 한 말. 쓸데없이 흥분해서 한 말도 있고.”“그럼 내가 들은 파일에서 네 말을 자른 거야?&
그날 오후, 윤상혁은 정 변호사 사무실로 왔다. 태주도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상혁은 창가를 확인한 뒤 앉았다. 서류 가방을 무릎 위에서 내려놓지 않았다.“가져오신 건 뭡니까?”정 변호사가 물었다.“제가 서명하라고 받은 확인서입니다. 실제 보고 내용하고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그가 한 장을 꺼냈다. 서경은 책임자 이름과 날짜부터 읽었다. 단독 처리라는 말이 여러 번 나왔다.태주는 끝까지 읽고 테이블에 놓았다.“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자료도 있습니까?”“있습니다.”윤상혁은 가방을 열지 않았다.“하성에서 제 경력은 인정해주셔야 합니다. 태산에서 이대로 잘리면 다른 곳에 같은 이야기를 흘릴 겁니다. 업계에서 제가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하성 채용을 약속하는 자리는 아닙니다.”태주가 말했다.윤상혁의 입가가 굳었다.“그러면 왜 왔는지 모르겠군요. 자료만 달라는 얘기 아닙니까.”“무슨 일을 했는지부터 듣겠습니다.”“강 대표 밑에서 하라는 일 한 겁니다.”서경이 고개를 들었다.“제 병원도, 제가 직접 물어본 것도 보고했죠. 그것도 여기 넣어주세요.”“그건 일정 관리였습니다.”“제 질문은 일정 관리고, 비서님 질문은 재검토 요청이에요?”윤상혁의 입술이 멎었다.“그것까지 안 했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서경은 확인서를 돌려주었다.“비서님이 억울해
서경은 악보실에서 첫 입금 알림을 받았다.20만 원.지난주 샘플 작업을 확인한 이문정이 정식으로 시범 묶음을 맡겼다. 10월 12일 월요일, 서경은 작업용 자리에 앉아 빌린 악보와 목록을 맞추고 있었다.한 장에 예상보다 시간이 걸려 맡는 양을 줄였다. 남은 40만 원은 일을 마쳐야 들어온다.서경은 은행 알림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보낸 사람은 이음악보실이었다. 오늘 끝낼 악보 옆에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들어왔어요. 감사합니다.”이문정이 파일 상자를 책상에 놓았다.“확인하셨으면 됐어요. 이건 다음 묶음인데 오늘 손대지 마세요. 지금 것 먼저 끝내고요.”서경은 습관적으로 상자를 끌어당기려다 멈췄다. 조금 더 하면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맡은 일에 시간이 걸린다고 말한 참이었다.“네. 금요일까지 중간 결과 보내드릴게요.”복도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다. 민지와 준우가 담당 교사와 함께 대여 악보를 반납하러 왔다. 민지는 서경을 발견하고 문가에서 고개를 내밀었다.“선생님, 여기서 일하세요?”“조금씩 해보려고.”“이 악보도 선생님이 고르시는 거예요?”“아니. 누가 무엇을 빌렸는지 찾기 좋게 정리하는 중이야.”준우가 악보 끝에 붙은 집게를 떼었다.“이것도 반납할 뻔했네.”민지가 손을 내밀었다.“내 거야.”“알아. 그래서 뺐잖아.”서경이 웃었다. 책상 위의 목록은 조금 늦어지고 있었지만 이 정도 멈춤은 괜찮았다.민지가 수정된 대여
확인 절차가 끝난 뒤 유세라가 복도에서 서경을 불렀다.태주는 주최 측과 후원 집행 자료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정 변호사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통화하고 있었다. 서경은 그들이 보이는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만족해요?”유세라가 물었다.“당신 이름 빼달라는 건 들어줬잖아요. 왜 여기까지 하시는 거죠?”“그 물건을 제가 받았다고 쓰셨으니까요.”“그래서 잘못된 부분 고쳤다고요.”“다른 데 보낸 자료도 고쳐주세요.”유세라가 헛웃음을 지었다.“권태주가 뒤에 서 있으니 뭘 요구해도 들어줄 것 같나 보네.”“제 서명은 남기고, 제가 쓴 말만 지우셨잖아요.”서경은 가방을 열었다.“돌려놓으세요. 제 말도, 이 종이가 간 곳마다.”서경은 가방에서 원래 수령증 사본을 꺼냈다. 메모가 보이도록 펼치자 유세라가 눈을 피했다.“그건 태산에 전달해요.”“태산에도 보냈어요. 갤러리에서 사용한 곳은 관장님께 요청할게요.”유세라가 더 대꾸하지 않고 돌아섰다. 문을 닫기 직전 직원에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윤상혁 연락해요. 원본 받은 사람부터 와서 설명하라고 해.”서경은 펼쳤던 수령증을 파일에 넣었다. 유세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닫힌 문 안에서 윤상혁이 전화를 받지 않느냐고 재촉하는 소리가 한 번 더 났다.밖으로 나오는 길에 운송업체 담당자가 짧게 인사했다.“아까 감사합니다.”“확인한 것만 말씀하신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