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손목이 조금 더 보이게 해줄래?”
사진기사가 말했다.
바이올린을 들고 있던 여자아이가 소매를 만졌다. 손목 안쪽에는 옅은 화상 흉터가 있었다. 아이가 주춤하자 진행 담당자가 웃으며 설명했다.
“민지야, 후원자분들이 어떤 도움을 주시는지 알아야 하잖아. 네가 이렇게 잘 이겨내고 연주하는 게 얼마나 기특해.”
월요일 오전, 자선 경매장 옆 연습실에는 아이들 다섯이 모여 있었다. 서경은 무대 순서를 확인하고 행사 물품을 전달하러 왔다. 유세라가 지시했던 일이었다.
카메라 앞에 선 아이는 13살 권민지였다. 명단에 적힌 전공은 바이올린. 서경은 나이보다 연습 기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려운 곡을 빽빽하게 적어놓았고, 마지막에 공연 예정 곡 옆으로 작은 체크 표시가 있었다.
민지는 소매를 조금 올렸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고개도 들고. 그래, 그렇게.”
셔터가 울리기 전에 서경이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연주 자세 사진부터 찍으면 안 될까요?”
사진기사가 카메라를 내렸다.
“기획안에 흉터가 보이는 컷이 있어서요.”
“아이한테 확인하셨어요?”
진행 담당자의 웃음이 굳었다.
“보호자 동의는 받았습니다.”
서경은 민지를 보았다. 아이가 아무 말 없이 소매를 꼭 잡고 있었다.
“민지야. 이 사진 찍어도 괜찮아?”
민지의 입이 조금 열렸다가 닫혔다.
“저…… 연주하는 거 먼저 하면 안 돼요?”
사진기사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악기 턱에 올려볼래?”
진행 담당자가 서경을 옆으로 불렀다.
“한 실장님, 사진은 저희가 정해놓은 방향이 있어요. 사연이 있어야 후원도 움직입니다.”
“연주를 보여주면 되잖아요.”
서경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아이들 쪽을 보았다. 민지는 소매를 쥔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흉터가 잘 나온 사진보다, 저 아이가 잘하는 걸 찍어주세요.”
담당자가 순서표를 접었다.
“관장님께는 한 실장님 요청이라고 말씀드릴게요.”
서경은 목 안쪽으로 올라온 사과를 삼켰다.
“네. 제가 말씀드렸어요.”
카메라가 다시 올라갔다. 이번에는 민지가 먼저 턱받침에 얼굴을 댔다.
촬영을 마친 민지는 제 자리로 돌아와 악기를 내려놓았다. 빈 의자 옆에 가방을 놓고 활의 장력을 풀었다.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이었다.
“연습 많이 했나 보네.”
서경이 말하자 민지가 바로 자세를 고쳤다.
“수요일에는 안 틀릴 수 있어요.”
“지금 틀렸다는 말 아니야.”
“아.”
민지가 눈을 내렸다. 무슨 대답을 잘못했는지 찾는 것처럼 보였다.
서경은 한 칸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나도 바이올린 했어.”
민지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도 하세요?”
“지금은 오래 못 켜.”
“어떤 곡 하는지 들어도 돼?”
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기를 들고 첫 악절을 시작했다. 첫 몇 마디는 단단했지만 빠른 부분에 들어가자 오른쪽 어깨가 올라갔다. 민지가 멈추고 곧바로 처음으로 돌아가려 했다.
“거기부터 해도 돼.”
서경이 말했다.
“처음부터 안 해도요?”
“방금 앞부분은 들었잖아.”
서경은 일어나 악보 옆에 섰다.
“여기 숨 한번 쉬고 들어가면 어때? 활을 끝까지 쓰려다 어깨가 같이 올라가는 것 같아.”
민지가 고개를 끄덕이고 짧게 해보았다. 한 번에 좋아지지는 않았다. 음이 조금 걸렸고, 두 번째에는 활이 모자랐다.
“죄송해요.”
“나한테 사과할 일 아니야. 어떤 쪽이 손이 편했어?”
민지는 대답을 생각했다.
“뒤가 조금 짧아도, 두 번째가요.”
“그럼 담당 선생님한테 그 느낌을 말씀드려봐. 내가 잠깐 본 것보다 네 연습을 오래 아시니까.”
민지는 악보 여백에 작은 표시를 했다.
“여기에 활 방향도 적어주실 수 있어요?”
서경은 연필을 받았다. 악보 위에 손을 올리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머리로는 기억하는 선이 손끝에서 조금 늦게 나왔다.
그때 뒤편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연필 너무 진하게 쓰면 선생님이 지우실 때 힘들어요.”
첼로 케이스 옆에 앉아 있던 남자아이였다. 최준우라고 명찰에 적혀 있었다. 민지보다 한 살 어렸다.
민지가 돌아보았다.
“알아. 너나 다음 페이지 펴.”
“아까 누나가 접어놔서 계속 넘어가.”
준우가 악보 밑에 지우개를 괴었다. 그 사소한 말다툼에 서경의 입가가 풀렸다. 사연집에 실릴 문장이 아닌, 아이들이 하는 말이었다.
“이 정도면 지울 수 있겠다.”
서경이 연필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민지는 표시된 마디를 한 번 더 켰다. 음은 또 걸렸다. 그래도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스스로 숨을 쉬고 다음 마디로 이어갔다.
“아까보다 덜 급해요.”
아이가 웃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서경은 연필을 내려놓지 못했다. 손이 예전처럼 움직이지 않아도, 방금 저 소리를 조금 바꾸었다.
“담당 선생님하고도 해봐. 지금 느낌 잊기 전에.”
민지가 악보를 가방 맨 위에 넣었다.
***
점심이 가까워지자 태주가 행사장을 방문했다. 하성의 실무 담당자와 함께 무대 설비와 진행 동선을 확인하러 온 길이었다.
“아이들 리허설 중입니까?”
“사진 촬영도 같이 했어요.”
서경은 정리한 명단을 건넸다. 태주는 수령하고서야 그녀의 손에 묻은 연필 자국을 보았다.
“지도하셨군요.”
“잠깐 봤어요. 함부로 선생님 흉내 내면 안 되는데.”
“아이 표정은 좋아 보입니다.”
민지는 새로 표시된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준우는 그 옆에서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도록 악보를 잡았다. 두 사람은 일부러 조용히 지나갔다.
복도로 나오자 서경이 물었다.
“하성이 빠지면 아이들 지원도 없어지나요?”
“기존 장학사업과 이번 경매 후원은 계약이 다릅니다. 당장 전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당장은요.”
태주가 발을 멈췄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서경은 촬영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아이에게 괜찮으냐고 물었다는 것까지 말하자 문득 불안해졌다.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지적받을 수도 있었다.
태주는 수행하던 직원에게 물었다.
“지원 대상자 사진 사용 조건도 심의 자료에 있습니까?”
“초안에는 전체 홍보 활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별도 조건은 확인해보겠습니다.”
“실무팀과 먼저 확인해주십시오.”
직원이 물러나자 태주가 서경을 보았다.
“대여를 끊겠다는 말은 아직 없었습니까?”
“아직은요. 아이도 그걸 무서워해요.”
서경은 민지가 소매를 붙잡던 손을 떠올렸다.
“동의서를 바꿔주셨으면 해요. 아이가 자기 손목을 내놔야 악기를 빌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요.”
태주가 실무 담당자를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사진 사용과 악기 대여를 분리한 답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잠깐 실례하겠다며 통화를 받았다. 들려오는 말은 짧았다. 자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 심의 일정은 바꿀 수 없다는 이야기. 통화가 끝난 뒤에도 입가의 주름은 남아 있었다.
서경이 먼저 물었다.
“잘 안 풀려요?”
“쉽지는 않군요.”
“밥은 드셨어요?”
태주가 눈을 들었다. 잠깐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은 얼굴이었다.
“아직 못 먹었습니다.”
서경은 연습실 안을 가리켰다. 도시락 상자가 쌓여 있었다.
“하나 남았어요. 특별한 음식은 아니고, 김밥인데.”
태주는 서경을 보다가 자기 시계를 확인했다.
“남은 시간이 10분입니다.”
“김밥 먹기에는 되겠네요.”
그가 시계를 덮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두 사람은 복도 끝의 작은 테이블에서 김밥을 나눠 먹었다. 태주는 서류를 옆으로 치웠다. 서경도 공연 순서표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태주가 물병을 집었다. 서경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그의 잔에 물이 차는 것을 보고 거두었다.
“10분 지났어요.”
서경이 말했다. 태주는 울리는 전화의 발신인을 보고 받았다.
“5분 뒤 출발하겠습니다. 먼저 시작해주십시오.”
전화를 끊고 남은 김밥을 집었다.
“저 때문에요?”
“제가 아직 먹고 싶어서요.”
그가 이번에는 시계를 보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조각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서경은 그것을 반으로 나누었다.
***
아이들이 돌아갈 시간이 되자 민지가 서경에게 다가왔다.
악보를 내미는 줄 알았는데 아이 손에는 촬영 동의서 사본이 들려 있었다.
“저기요, 선생님.”
“응.”
“아까 손목 사진은 안 찍었잖아요.”
민지가 종이 아래를 손톱으로 눌렀다.
“그거 안 찍어도 다음 달에 악기 계속 빌릴 수 있어요?”
서경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민지도 재촉하지 않았다. 무조건 괜찮다는 말보다 정확한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확인해볼게. 네가 연주 배우는 일이 사진 때문에 끊기지 않게.”
민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진은 싫은데, 바이올린은 계속 하고 싶어요.”
서경은 동의서 사본의 빈 여백에 민지가 한 말을 적었다. 사진은 싫지만 바이올린은 하고 싶다고.
내일 그 말이 빠진 답이 오면, 다시 물을 것이었다.
태주는 병원 맞은편 식당에서 기다렸다.서경이 먼저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었다. 오늘은 많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과 밥을 먹고 싶었다. 태주는 그녀가 들어오자 물컵을 옮겨 자리를 만들었다.“진료는 어떻습니까?”“무리해서 확인하지 말래요.”그녀가 웃지 않고 말했다.“저는 자꾸 해보게 되거든요. 되나 안 되나.”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주문한 죽이 나왔지만 서경은 바로 먹지 않았다.“어제 화내고 싶으셨죠.”태주가 시선을 들었다.“위험한 데 왜 갔느냐고요.”그의 손이 수저 옆에서 멈췄다.“그 말을 하려던 건 맞습니다.”“원래는 같이 만나기로 한 곳이었어요. 안으로 들어가서 훔쳐오려고 한 것도 아니고요.”“압니다.”“그런데도 제가 잘못한 것 같았어요. 봉투를 받아왔으면 덜했을까요.”태주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는 서경을 한동안 보았다.“사진이라도 남기라고 내가 먼저 말했습니다.”목소리가 낮아졌다.“서경 씨가 어떤 자리에서 그 말을 듣게 될지는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료를 놓칠까 봐 급했습니다.”서경은 숟가락을 들었다가 죽을 한 번 저었다.“저도 받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못 나온다고 할 때도 봉투 생각부터 했어요.”“그래도 두고 나오라고 하셨습니다.”“다음에 같은 일이 생겨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태주가 물컵을 내
태주의 전화는 센터 앞 편의점에 앉았을 때 받았다.“밖으로 나왔어요.”서경이 먼저 말했다.“윤상혁 씨도 나왔고요. 경찰이 다녀갔어요.”태주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차창 밖의 소음이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어디에 있습니까?”서경은 편의점 이름을 알려주었다. 정 변호사와 같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태주는 가까운 곳에 차를 세운 뒤 연락하겠다고 했다.“가져오기로 한 건 못 받았어요.”그녀가 말했다.“일부를 가져갔대요. 수첩은 남았는데 봉투가…….”목소리가 끊겼다.태주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서경 씨는 다쳤습니까?”“손이 조금 아파요.”“조금이라는 게…….”그는 말을 멈췄다.“곧 가겠습니다. 설명은 만나서 듣죠.”서경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 자기 몸의 어디가 아픈지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정 변호사가 물을 건넸다. 서경은 왼손으로 병을 잡고 오른손을 대었다가 통증에 힘을 풀었다. 병을 몇 번 돌려보다 변호사를 보았다.“이것 좀 열어주세요.”변호사가 말없이 받아 열었다.병뚜껑이 열렸다. 서경은 받아들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날 방화문 앞에서는 아무도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그녀는 물을 조금 마셨다.자동문이 열리고 태주가 들어왔다. 그의 눈이 서경을 찾자마자 멈췄다. 급히 걸어오려다 테이블 사이에 낀 상자를 돌아서 오는 모습이 보였다.태주는 맞
태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 변호사가 공유한 연락을 보고 상황을 물었다.“지금 어디까지 확인됐습니까?”“태산에서 나왔는지는 몰라요. 여기 예약은 그대로예요.”그는 자신도 이동하겠다고 했다. 서경은 차가 막힐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 대신 직원과 같이 있겠다고 했다.태주가 잠깐 침묵하다 답했다.“도착한 뒤 연락하겠습니다. 그 전에 자리가 달라지면 알려주십시오.”전화를 마친 서경은 안내도에서 상담실 옆 통로와 바깥 출입구를 확인했다.정 변호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윤상혁의 대리인이었다. 태산과 통화하느라 조금 늦어지고 있으며, 지금 곧 센터로 가겠다고 했다.그때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온 승강기 문이 열렸다.윤상혁이 두 사람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한 명은 박 실장이었고 다른 한 명은 태산에서 본 적 있는 직원이었다. 윤상혁의 가방은 그 직원 손에 들려 있었다.서경이 몸을 일으켰다.박 실장이 먼저 그녀를 보았다. 입가에 인사하듯 웃음이 걸렸다. 그런데 윤상혁은 서경이 기다리는 자리로 오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팔꿈치를 잡은 채 상담실로 이어지는 옆 통로로 방향을 틀었다.서경의 휴대전화가 짧게 떨렸다.[센터 왔습니다. 1층. 저 혼자 못 나가게 합니다. 경찰 불러주세요.]메시지를 읽고 고개를 들자 윤상혁의 얼굴이 보였다.서경은 전화기의 긴급 신고 번호를 눌렀다.“사람이 못 나가게 붙잡혀 있어요.”서경은 센터 이름과 주소를 말했다. 정 변호사가 곁에서 건물 출입구를 직원에게 물었다. 윤상혁이 보이는지 묻는 말에 서경은 보인다고 답했다.몇 걸음 앞이었다. 박 실장이 가린 얼굴보다 직원 손의 가방이
윤상혁은 보관센터에 도착하기 전에 태산으로 불려갔다.월요일 오전, 지하철 출구를 나오던 길이었다. 박 실장이 전화를 걸어 열람 전에 확인할 서류가 생겼다고 했다. 오후 3시에 대리인들과 만나기로 한 일정까지는 시간이 있었다.윤상혁은 자기 변호사에게 방문 사실을 알렸다. 예상한 시간까지 연락이 없으면 확인해달라는 말도 남겼다. 그러고 태산 건물로 들어갔다.자기가 오랫동안 들고 다닌 출입증이 로비에서 멈췄다.“임시 출입증 받아가십시오.”보안 직원이 말했다.윤상혁은 목에 걸었던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어제까지 이 카드로 남들이 기다리는 문을 먼저 열었다. 오늘은 보안 직원 앞에서 자기 이름을 한 번 더 말해야 했다.목걸이 줄이 귀에 걸렸다. 윤상혁이 세게 당기자 카드가 가슴에 부딪쳤다.대표실에 시우가 있었다. 창가의 탁자에는 익숙한 파일들이 놓여 있었다.“여기 앉죠.”시우가 말했다.윤상혁은 의자를 당겼다. 가방은 발 사이에 두었다.“오늘 원자료 열람 건으로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그 전에 왜 밖에서 따로 약속을 잡았는지 듣고 싶군요.”시우가 종이를 돌려놓았다. 외부 보관센터에 보낸 상담실 이용 요청이었다. 윤상혁이 신청한 이름 아래에 대리인 동석이라고 적혀 있었다.“제 책임에 관해 상담받는 중입니다.”“누구에게 내 책임을 설명하려고?”“제 책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시우는 웃지 않았다. 윤상혁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 것을 살피고 있었다.“한서경 씨한테는 무슨 약속을 받았습니까?”“아무 약속도 받지 못
이문정은 칭찬하기 전에 누락된 쪽수를 물었다.일요일 오전, 서경은 숙소에서 최종 목록을 보내고 전화를 받았다. 어제 리허설에서 새로 출력한 반주보의 장수가 반환 목록에 반영되지 않은 상태였다.“기존 것을 폐기한 건가요, 연주자가 가져갔나요?”서경은 메모를 펼쳤다. 연주자가 비교하려고 두 판을 모두 가지고 갔다. 분명히 보았는데 반환 수량에서는 하나를 빼놓았다.“제가 마지막에 수량을 안 고쳤어요. 두 판 모두 대여 중으로 정리할게요.”“그렇게 해주세요. 나머지는 전달됐습니다. 현장 담당자도 다음에는 확인 자리부터 잡겠다고 하네요.”서경은 수정 목록을 다시 보냈다. 이번 현장 확인과 목록 정리 보수 18만 원은 그날 오후 들어왔다. 악보실의 60만 원과 별도였다.병원비 표에서 오늘 칸을 채우고 다음 달 칸을 보았다. 아직 비어 있었다.잠시 뒤 소극장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다음 행사도 가능하세요? 이번보다 자료가 많습니다.”서경은 일정부터 보냈다. 월요일에는 자료를 인계받는 약속이 있었고, 주중에는 기존 악보실 작업도 있었다. 담당자는 일정이 촉박하다며 우선 다른 사람을 알아보겠다고 했다.서경은 문자창에 오전만이라도 하겠다고 썼다. 하지만 자료량을 듣고도 끝낼 수 있는 양을 줄여 생각하고 있었다. 월요일 약속에는 대리인들도 있었고, 윤상혁이 다시 마음을 바꿀지 몰랐다.그녀는 문장을 지웠다.그녀는 이문정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다음 현장 일을 못 맡는다고 말씀드렸어요. 악보실 작업은 약속대로 할 수 있습니다.”“그건 별도니까요. 월요일 오실 시간은 그대로죠?”“네. 그런데 제가 놓친 수량 때문에
피아노가 멈췄는데 바이올린은 더 갔다.해진의 활이 공중에서 멎었다. 피아니스트는 건반 위에 손을 둔 채 자기 악보를 넘겼다. 두 사람이 동시에 상대를 보았다.“거기 반복 안 하기로 했잖아요.”“반복은 안 했습니다. 여기로 넘어가기로 했죠.”토요일 아침의 소극장은 난방이 덜 되어 있었다. 서경은 객석 두 번째 줄에서 메모지를 무릎에 놓고 앉았다. 전날 붙인 쪽지가 반주보 위에 그대로 있었다. 연주자들은 리허설을 시작하느라 그것을 읽지 않은 모양이었다.담당자가 객석에서 손을 들었다.“죄송합니다. 정리한 자료에 착오가 있나 봐요.”시선이 서경에게 돌아왔다.몸이 먼저 일어나려 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악보를 가져오면 이 난처한 순간이 빨리 지나갈 것이다. 서경은 의자 팔걸이를 잡았다가 손을 떼었다.“정리하다 틀린 부분이 아닙니다.”서경은 무대 위의 두 악보를 가리켰다.“어제부터 표시가 달랐어요. 두 분께 여쭤보려고 붙인 쪽지가 지금도 거기 있습니다.”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무대까지 닿았다.담당자가 말을 멈췄다. 피아니스트가 쪽지를 읽더니 자기 휴대전화의 파일을 열었다.“제가 보낸 파일이네요. 그런데 해진 씨는 앞 버전을 갖고 계십니다.”해진이 자기 악보를 내려다보았다. 누가 잘못했는지 정하는 대화가 시작되려 했다. 서경은 무대 옆 탁자로 가서 두 자료를 펼쳤다.“어느 쪽으로 하실지 정해주시면 맞추겠습니다. 두 분 결정한 날짜가 달랐어요.”두 연주자가 탁자 앞으로 왔다. 종이 위를 손가락으로 짚는 동안 서경은 한 발 물러섰다. 두 사람은 짧게 논의한 뒤 마지막으로 원한 진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