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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화. 내가 적은 연락처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8 15:57:30

정 변호사는 녹음을 두 번 듣지 않았다.

첫 재생을 마친 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서경에게 물었다.

“이 파일을 받은 경위를 처음부터 말해주세요. 추측은 빼고, 직접 보고 들은 것만요.”

서경은 수령 확인서를 발견한 일부터 설명했다. 말이 엉킬 때마다 시우가 나쁜 사람이라는 설명을 붙이고 싶었다. 정 변호사는 왜 그렇게 오래 몰랐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날짜가 모호한 부분만 다시 확인했다.

“원래 녹음 전체는 김채린 씨가 가지고 있다고 했고요?”

“네. 지금 받은 건 일부예요.”

“받은 파일은 그대로 보관해주세요. 전체 녹음을 얻을 방법은 제가 검토하겠습니다.”

정 변호사가 수령 날짜를 적었다.

“서경 씨가 다시 혼자 만나서 가져오실 필요는 없어요.”

“저를 믿으세요?”

변호사가 펜을 멈췄다.

“서경 씨의 이야기를 듣고 검토하는 게 제 일입니다. 믿어달라고 하시느라 기억하지 않는 내용까지 채워 넣으실 필요는 없어요.”

서경은 펜을 들었다. 정확한 시간까지 기억나지 않는 날짜 옆에 물음표를 적었다. 시우 앞이었다면 그가 기억하는 시간으로 고쳤을 것이다.

정 변호사는 물음표를 지우지 않았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서경도 의자 등받이에 처음으로 등을 붙였다.

책상 위에는 상담 신청서가 놓여 있었다. 이름과 생년월일 아래에 연락 가능한 번호를 적는 칸이 있었다. 비상 연락처를 쓰려던 손이 습관처럼 움직였다가 멎었다.

강시우.

세 글자 중 첫 글자도 다 쓰지 못했다.

“그 칸은 나중에 정하셔도 됩니다.”

정 변호사가 다른 종이를 건넸다. 서경은 자기 휴대전화 번호만 적었다.

“권 대표님한테는 오늘 이야기가 다 전해지나요?”

“누구에게 무엇을 전할지는 서경 씨와 먼저 정합니다. 권 대표가 소개했다는 이유로 제가 자동으로 보고하지는 않아요.”

“그럼 오늘은, 상담받았다는 것만 알려드릴게요.”

“직접 그렇게 하세요.”

정 변호사는 어머니의 진료 계획과 납부 내역부터 물었다. 옮겨야 한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어머니는 어디에 있고 싶어 하는지도.

“병원은 계속 다니실 수 있게 하고 싶어요. 갑자기 엄마를 낯선 곳으로 옮기는 것도 무서워요.”

“그럼 옮기는 것만 답으로 놓지 맙시다. 병원에서 연락을 누구에게 하는지부터 바꿀 수도 있겠죠. 실제 상황을 확인하고요.”

서경은 병원에 물어볼 내용을 적었다. 첫 줄 옆에 담당자 번호를 붙였다.

***

사무실에서 나오자 태주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상담은 마치셨습니까. 답하기 어려우면 나중에 주셔도 됩니다.]

서경은 잠깐 생각한 뒤 답했다.

[마쳤어요. 파일은 아직 공개하지 말아주세요.]

[알겠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상담 내용을 묻지 않는 걸 확인하고서야 서경은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시우의 비서가 연결해준 번호가 아닌, 지난 면회 때 직접 받아온 담당 연락처였다.

오후 면회가 한 번 더 가능하다는 답을 받았다. 그녀는 기사에게 일정 변경을 알렸다. 시우가 물으면 어머니 진료 설명을 들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럴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창가 쪽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서경이 들어오자 이번에도 짧아진 머리부터 만졌다.

“아직도 이상해?”

서경이 물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괜찮다.”

어머니는 잠깐 웃더니 딸의 가방을 보았다.

“먹었어?”

“오늘은 먹었어.”

“잘했다.”

서경은 어머니 옆에 앉았다.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우와 따로 지낼 생각을 하고 있다고, 아직 준비 중이라고. 그가 어떤 짓을 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한꺼번에 받아들일 수 있을지 판단할 자신이 없었다.

“싸웠어?”

“응. 조금.”

어머니가 딸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조금 아닌데.”

서경은 가방의 지퍼를 만졌다.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내가 그 사람한테 모르는 게 있었어.”

어머니의 손이 천천히 움직여 그녀의 무릎에 닿았다.

“집 나올 거야?”

서경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엄마가 여기 계시니까.”

“나는 여기 있어.”

어머니가 창밖을 가리켰다가 손을 내렸다.

“너는 네 집에 있어야지.”

“엄마가 불편해지면 어떡해.”

어머니는 쉽게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다가 딸의 손을 당겼다. 서경이 의자를 가까이 옮기자, 힘없는 손바닥이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너 불편한 집에서 사는 건?”

서경은 어머니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병원 냄새가 났다. 집에서 쓰던 비누 냄새는 없었다. 그런데도 여기서야 울 수 있었다.

“그것도…… 싫어.”

어머니가 등을 한 번 더 두드렸다.

“나오면 엄마한테 전화는 더 자주 할게.”

“그래.”

“혹시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하면 먼저 말해줄게. 엄마 싫으면 싫다고 해.”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짚었다.

“머리도 다음엔 먼저 물어봐.”

서경은 울면서 웃었다.

“물어봤잖아.”

“뒤에도 자르는 줄은 몰랐지.”

면회를 마치고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달 비용은 이미 납부되어 있었다. 다음 정산 날짜를 확인했고, 어머니에게 필요한 돌봄은 장소가 바뀌더라도 준비를 맞춰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서경은 다음 정산 날짜를 달력에 표시했다. 오늘 집을 나와도 어머니가 오늘 병실을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며칠 안에 거처를 구하기로 했다. 연락처란에는 자기 번호를 적었다.

***

돌아가는 길에 서경은 자기 계좌를 열었다.

비서 급여가 남아 있었다. 생활비에는 시우의 카드를 쓰면서도 그의 생일 선물과 행사 물건은 제 월급으로 샀다. 남은 돈이 많지 않았다.

서경은 메모장에 며칠 머물 숙박비와 상담 비용을 적었다. 집을 나와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안전한 곳을 알아보고 있다는 정 변호사의 안내도 있었지만 빈자리가 바로 있다는 답은 아직 받지 못했다.

일단 자신이 낼 수 있는 범위의 숙소를 찾았다. 번쩍이는 로비도, 한강이 보이는 창도 없는 작은 레지던스였다. 예약 전에 사무실에 위치를 보내 확인을 부탁했다. 예약금이 빠져나간 뒤에도 생활할 돈은 조금 남아 있었다.

확인 화면에 자신의 이름이 떴다.

체크인 예정일은 자선 경매가 열리는 다음 주 수요일이었다. 아직 거기에 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날짜가 생겼다.

집으로 돌아오니 박 실장이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모님, 오늘 병원에 또 다녀오셨습니까?”

서경은 가방을 놓았다.

“네. 진료 설명 들으러요.”

“대표님께 먼저 전달해주셨으면 저희가 준비했을 텐데요.”

“제가 직접 들으면 되는 일이었어요.”

박 실장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어머님 관련한 일은 대표님께서 책임지고 계십니다. 중간에 연락이 달라지면 병원도 혼란스럽습니다.”

서경은 방금 적은 연락처를 떠올렸다. 누가 그것을 벌써 전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알아내려 들면 목소리부터 떨릴 것 같았다.

“제 어머니니까요. 제 번호로도 연락받을게요.”

박 실장은 곧장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가방을 한 번 보았다.

“뜻은 알겠습니다. 대표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병원에 다시 전화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박 실장이 떠나고 나서 태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연락처를 바꿨어요. 병원에서 저한테 먼저 연락하도록요.”

태주가 잠시 뒤 물었다.

“그쪽에서 곤란하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곤란해하는 사람은 여기 있었어요.”

서경은 박 실장이 앉았던 빈 소파를 보았다.

“그런데 그냥 제 번호 적고 왔어요.”

“병원에는 다시 바꾸겠다는 말 안 했습니다.”

서경이 덧붙였다.

“박 실장이 시우 씨한테 전해도요.”

“지금 집에 계십니까?”

태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서경은 예약해둔 숙소의 날짜를 알려주었다. 그가 걱정하는 말보다, 나올 날을 말하는 자기 목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렸다.

통화를 마친 뒤에야 무릎이 떨렸다. 서경은 소파에 앉아 숙소 예약 화면을 열었다. 카드 결제 내역 아래에 한서경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취소하면 예약금은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는 확인 화면을 저장했다. 체크인까지 5일.

수요일을 어머니 면회 일정 옆에 적었다. 저 날짜가 지나면, 시우에게 돌아올 시간을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가 생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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