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어색하게 시작된 사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가까워졌다. 서진은 자주 설아 앞에 나타났고, 부담스럽지 않은 선을 지키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다른 여자들에게는 한결같이 차갑고 무뚝뚝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유서진이, 설아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먼저 말을 걸었고, 소소한 것들을 챙겼고, 무심한 듯 곁에 있었다.
친구들이 먼저 눈치챘다.
"야, 설아야. 유서진 선배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
설아는 웃어 넘겼다. 하지만 그 말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던 건 설아도 인정하기 싫었지만, 사실이었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설아의 생일이었다.
같은 과 친구들이 학교 앞 술집에 모였다. 조용히 밥이나 먹을 줄 알았는데, 친구들은 처음부터 작정한 듯 설아 앞에 잔을 들이밀었다.
"생일이잖아, 오늘만큼은 마셔!"
"설아 주량이 얼마야, 우리 오늘 알아보자~"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설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고 버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시각, 술집 안쪽 룸에서는 서진이 친구들과 자리를 잡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그 자리에서 끝날 저녁이었다. 그런데 잠깐 자리를 비우고 나오던 길이었다. 복도를 지나치다 홀 쪽 테이블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고, 무심코 시선이 갔다.
그리고 설아를 발견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테이블에 기대어 있는 설아를. 서진은 잠깐 멈칫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야, 이설아 완전 취했다. 내가 기숙사 데려다 주고 올게.“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 하나가 일어서며 설아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괜찮은 척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은 달랐다. 음흉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서진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서진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남자가 설아를 이끌고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서진의 손이 그 손목을 잡았다.
차갑고, 단호하게.
"놔."
한 마디였다. 하지만 그 한 마디가 담고 있는 온도는 설명이 필요 없었다.
남자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가, 서진을 보자마자 표정이 사색이 됐다.
"아…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는 ...그냥 설아.. 데려다 주려고..."
"놓으라고."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는데, 왜인지 주변이 잠깐 조용해진 것 같았다.
남자친구의 손이 스르르 풀리면서 그 순간 중심을 잃은 설아의 몸이 미끄러지듯 기울었고 서진이 자연스럽게 그 몸을 받아냈다. 설아가 서진의 품 안으로 안겨들었다.
서진은 잠시 그대로 있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 힘없이 감긴 눈. 남자라면 참을 수 없는 본능이 차올랐다. 그런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채 무방비하게 취해 있었다.
'바보같이.'
낮게 중얼거린 혼잣말은 설아의 귀에 닿지 않았다.
서진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좌석 쪽을. 그리고 다시 품 안의 설아를 내려다보았다.
잠시의 망설임 끝에 서진은 조용히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먼저 간다.
설아를 자신의 고급스러운 자취방으로 데려온 서진은, 그녀를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눕혔다.
술에 취해 가쁘게 몰아쉬는 숨결. 그 사이로 비치는 설아의 매혹적인 실루엣이 서진의 시선을 아찔하게 뒤흔들었다.
단단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순간, 끓어오르는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한 서진은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읍……!"
술기운과 갑작스러운 질식감에 설아가 본능적으로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건장한 서진의 체구를 작은 체구의 설아가 감당하기란 애초에 역부족이었다.
서진은 저를 밀어내는 작은 손목을 한 손으로 거칠게 제압하며, 그녀의 숨결을 더욱 깊숙이 탐했다.
"하아, 설아야…….“
낮게 가라앉은 서진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설아의 온몸을 서서히 탐닉하던 그의 거친 숨결이, 마침내 그녀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아윽……! 흑, 잠시만…… 요……!"
처음 마주하는 날카로운 통증에 설아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
서진은 고통으로 굳어진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으며, 더 깊숙이 몸을 밀착했다
"조금만 참아. …….“
설아의 첫 순간을 증명하듯, 붉은 흔적이 선명하게 번져 가고 있었다.
원래도 술이 약한 데다 안좋은 몸상태 눈앞의 시야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웅성거리는 동기들의 목소리가 수중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해졌다.설아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통증으로 간신히 버텼다.‘버텨야 해.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설아의 시야가 가파르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테이블 건너편의 공기는 잔인할 만큼 다정했다.서진은 설아가 독한 위스키를 삼키는 순간조차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니, 돌리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눈앞의 대화에 가려 정말 보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철저하게 외면당한채 설아는 의식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다.수현은 그런 설아의 하얗게 질린 안색을 놓치지 않았다. 서진의 시선이 아주 잠깐이라도 맞은편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그녀는 더욱 자극적인 카드를 꺼내 들었다.수현이 묵직한 크리스탈 글라스에 빛깔이 아주 짙은 위스키를 새로 따랐다. 얼음도 섞이지 않은, 스트레이트 잔이었다."유서진, 우리 옛날에 학회 마감 끝내고 밤새 마셨던 거 기억나? 그때 네가 나한테 완패했었잖아."수현이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잔을 서진의 눈앞으로 바짝 들이밀었다. 술잔 너머로 수현의 집요한 시선이 서진의 눈에 꽂혔다."오늘 그때 복수할 기회 줄게.“서진의 시선이 수현이 건넨 잔으로 향했다. 승부욕을 자극하는 수현의 노련한 말솜씨와 눈앞을 가로막은 독한 술잔 때문에, 서진의 세계는 순식간에 수현이 짜놓은 판 안으로 좁혀졌다. 맞은편에서 힘겨워하는 설아의 존재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내가 너한테 졌다고? 기억을 왜곡하네, 박수현.“서진이 피식 웃으며 수현이 건넨 잔을 받아 들었다.두 사람의 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순간, 수현은 만족스러운 듯 설아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내 말이 맞지? 넌 여기 끼어들 자리가 없어'라고 속삭이는 듯한, 조롱 가득한 눈빛이었다.설아는 당장 그 숨 막히는 방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쓰러져 버릴
명령조의 말에 설아는 어떤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영혼이 탈탈 털려나간 몸을 움직여 드레스룸에서 손에 잡히는 하얀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거울 앞에 섰지만, 흐릿한 거울 속 여자는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저 주인이 입으라는 대로 입은 인형에 불과했다.거실로 나오자, 소파에 앉아 있던 서진의 시선이 설아에게 닿았다. 순백의 원피스를 입은 설아를 본 서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확장되며 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불쾌한 감정을 숨기듯 휙 돌아서며 먼저 현관을 나섰다.차 안을 채운 건 숨이 막힐 듯한 침묵뿐이었다.모임 장소인 고급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서진의 동기들이 두 사람을 요란하게 맞이했다."오, 제수씨는 올 때마다 더 예뻐지네.""서진이 이 자식,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설아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당겨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짓는 웃음이라는 걸, 이 활기찬 테이블 위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때, 레스토랑의 문이 열리며 세련된 단발 오피스룩 차림의 박수현이 들어왔다."애들아 미안! 프로젝트 마무리가 늦어져서 이제야 왔네."시원시원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던 수현의 시선이, 서진의 옆자리에 앉은 설아에게 머물렀다. 그 순간 수현의 완벽했던 포커페이스가 찰나의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0.1초 만에 다시 싱그러운 미소로 포장했지만, 신경이 곤두서 있던 설아는 그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설아 씨. 여전히 고우시네요.""네, 안녕하세요, 수현 씨.“수현은 자연스럽게 서진의 비어 있는 옆자리에 앉으며 가방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서진을 힐끗 보며 뼈 있는 말을 던졌다."야, 유서진. 설아 씨 데려올 거면 단톡방에 미리 말을 했어야지. 이런 칙칙한 동기 모임까지 재미없게 끌고 다니냐? 설아 씨 불편하게."배려를 가장한, 명백한 배척이었다. ‘너는 우리와 섞일 수 없는 이방인’이라는 날이 숨겨져 있었다.눈치 없는 친구 하나가 껄껄 웃으며 받아쳤다."야, 수현이 너 분위기 파악 못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거칠었던 움직임이 멈추고 서진이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방문을 닫고 나갔다.설아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니,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와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일어나려던 그 순간 허리와 아랫배에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설아는 그대로 주저앉았다.자신도 모르게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병원에서도 참았고, 공원에서도 참았고, 오늘 하루 내내 참았는데.그래도 눈물은 남아 있었다.‘나는 그 사람한테 뭐지.’서진에게 설아는 아내도 아니었다.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 필요할 때 쓰고, 필요 없으면 나가버리는.설아는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묻었다.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울음소리조차 내고 싶지 않았다.이혼하고 싶다...아까 자신이 내뱉었던 그 말이 확신으로 느껴졌다. 두렵지 않았다. 아니, 두려움보다 이대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 더 무서웠다.서진과 엮어 있는 끈을 끊어 내야 자신이 살수 있을 것 만 같았다.다음 날 아침, 설아는 일찍 눈을 떴다.방문을 열고 나가니 집 안이 조용했다. 서진은 이미 출근한 듯 흔적도 없었다. 설아는 물 한 컵을 마시고 탁자 앞에 앉았다.서랍에서 꺼낸 이혼 신고서. 손이 떨렸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한 칸 한 칸 천천히 채워나갔다.다 작성한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바람을 쐴 겸 외출을 나갔다.설아는 걸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언제부터 고개를 숙이고 다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3년이라는 시간 동안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겼다. 지금 이 도시에서 설아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커피숍에 들러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고 집으로 돌아온 설아는 현관에서 멈췄다.불이 켜져 있었다. 서진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외투도 벗지 않은 채, 탁자를 바라보며..설아의 시선이 탁자로 향했다. 올려두었던 서류가 없었다. 시선
불도 켜지 않은 채였다. 소파에 팔짱을 낀 자세로, 굳은 얼굴로 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어디 다녀와?"낮고 날이 선 목소리였다.설아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냥 바람 좀 쐬고 왔어요.""병원에서 왜 퇴원했어?""아무 이상 없다길래요.“서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간호사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빈혈 수치, 면역력,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몸. 그런데 설아는 지금 아무 이상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아무 이상 없다고?""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평소와 달랐다. 목소리에 온기가 없었다. 기대도, 서운함도 담기지 않은 그냥 건조한 말투. 서진은 그게 묘하게 불편했다.설아는 더 말을 잇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 빨리 눕고 싶었다. 눈앞이 계속 흔들렸다.그때 서진이 설아의 손목을 잡아 돌려세웠다."내가 말하는 중이잖아.“설아는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진을 바라보았다.화가 난 얼굴이었다. 평소라면 그 얼굴에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먼저 말했을 것이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할 말이 있어요?""….""없으면 저 좀 쉬어도 될까요. 좀 쉬고 싶어요....“설아의 차갑지도, 슬프지도 않은 눈빛을 보던 서진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문을 닫고 들어가는 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던 서진이, 결국 참지 못하고 방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갔다.방문이 거칠게 열렸다.설아는 침대에 누운 채 고개를 돌렸다. 서진이었다. 문틀에 손을 짚고 서서 설아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진이 설아의 앞에 멈춰 서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낮게 입을 열었다."왜 전화 안 받았어.“"오빠....미안한데... 오늘은 쉬고 싶어요....“"나한테 화난 거야?"설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화가 난 건지도 잘 몰랐다. 그냥 지쳐 있었다. 화를 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그 순간 서진
기운을 차린 설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내려다보다가조용히 뽑아냈다.작은 통증이 왔지만 설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침대 옆에 개어두었던 자신의 옷을 집어 들고 환자복을 벗었다.손이 떨려 단추를 잠그는 것조차 생각보다 힘들었다.겨우 옷을 갈아입고 일어서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어지러움이 물밀듯 밀려오며 몸이 휘청였다. 설아는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잠시 버텼다. 숨을 고르고, 다시 섰다.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이설아씨, 잠깐만요!"담당 간호사였다. 링거 알람이 울렸는지, 빠르게 들어온 간호사가 설아의 모습을 보고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지금 이러시면 안 돼요. 링거는 왜 빼셨어요?""괜찮아요.""괜찮지 않으세요.지금!“간호사가 설아의 앞을 막아섰다. 단호한 목소리였다."이설아씨, 지금 빈혈 수치가 심각하게 높아요. 면역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이 상태로 나가시다가 복도에서 쓰러지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몸이에요. 보호자분께도 연락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보호자 연락은 안 하셔도 돼요."설아는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간호사가 잠시 설아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눈치챈 것 같았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설아는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퇴원 수속은 제가 할게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설아는 그 손을 꼭 쥐었다. 들키지 않으려고.병실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설아는 잠깐 눈을 감았다.이대로 돌아가면 또 똑같겠지.아픈 몸으로 빈 집에 돌아가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누워 있고, 그래도 아무도 오지 않는.설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그리고 걸었다. 어지럽고, 몸이 무거웠지만 그래도 걸었다.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았다.이대로는 안 된다...퇴원 수속을 마치고 설아가 병원 정문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로비 자동문이 거
설아는 매일 서진이 좋아하는 음식을 차렸다. 다림질한 셔츠를 옷장에 걸어두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간혹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서진은 설아를 찾았다. 하지만 그건 설아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다정함도, 온기도 없었다. 그저 거칠고 무심한 손길이 지나가고 나면, 서진은 돌아누워 잠들었다. 설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이게 결혼인가.’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울면 더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일도 밥을 차리고, 셔츠를 다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버텼다.설아는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시들어가고 있었다.이후 서진과 수현의 회사가 같은 프로젝트를 맡게 된 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처음엔 일이었다. 회의가 잦아졌고, 저녁 자리가 생겼고, 출장이 겹쳤다. 서진은 설아에게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바쁘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고, 설아도 더 묻지 않았다.그런데 우연히 보게된 수현의 SNS는 설아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수현의 생일 파티 사진. 고급 레스토랑의 테이블, 샴페인 잔, 웃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 서진이 있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설아는 그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언제 저런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출장 중 올라오는 사진에도 서진은 늘 수현 곁에 있었다. 같은 도시, 같은 풍경, 같은 시간. 우연치고는 너무 많이 겹쳐있었다.설아는 조용히 날짜를 떠올렸다.자신의 생일. 서진은 늦게 들어왔다. 미역국은 식어 있었고, 케이크는 혼자 잘랐다.서진이 미안하다고 했는지조차 기억이 흐릿했다.결혼기념일. 서진은 출장 중이었다.그는 나보다 수현과 더 잘 어울리는구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설아는 스스로 놀랐다. 슬프지 않았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싶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에 무뎌진 탓인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탓인지.창밖엔 불빛이 가득했다. 저 불빛들 속에서 서진은 지금쯤 웃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