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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아의 눈이 힘겹게 떠졌다. 낯선 천장이었다.
설아는 한동안 그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온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통증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여기가… 어디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공간이었다. 넓고 정돈된 방. 고급스러운 가구들. 자신이 덮고 있는 이불조차 낯설었다.
그리고 구겨진 침대 시트 위에서 눈이 멈췄다.
설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아니야. 아닐 거야.’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끌어올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어젯밤 기억이 없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다 취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다음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서진이었다. 샤워를 마쳤는지 젖은 머리칼을 한 채 서진이 들어서다 설아와 눈이 마주쳤다.
잠깐의 침묵.
"일어났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 태연함이 설아의 가슴을 더 세게 내리눌렀다.
"…오빠, 어젯밤에....."
목소리가 떨렸다.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어떤 말보다 더 선명한 대답이었다.
설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울지 않으려 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어젯밤 술에 취해 실수를 범한 자신에게 화가 난 건지, 서진에게 화가 난 건지 설아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손이 떨렸다. 벗어던져진 옷을 주워 입으면서도, 눈물이 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가볼게요.“
설아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서진의 손이 설아의 손목을 잡았다.
"기다려. 데려다 줄게.“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설아가 서진의 손목을 조용히 빼냈다. 그 눈빛을 본 서진은 그런 설아를 더 잡지 않았다.
그날 이후, 설아는 서진을 피했다.
마주칠 것 같으면 돌아갔고, 연락이 와도 읽지 않았다. 없었던 일처럼 지내고 싶었다. 그냥 흘려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몸이 이상했다.
생리가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잠이 쏟아졌고, 냄새에 민감해졌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약국에 들린 설아는 떨리는 손으로 테스트기를 꺼내 들었다.
두 줄이었다.
설아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손에 들린 작은 막대기를 바라보며,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조용히, 소리 없이.
어떻게 해야 하지.
혼자 끌어안기엔 너무 무거운 무게였다. 한참을 망설이다 설아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서진이었다.
"어, 설아야."
수화기 너머로 서진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오빠…"
"왜, 무슨 일이야? 설아야?"
"…저.... 할 말이 있어요."
"기다려. 지금 어디야. 내가 갈게.“
직접 마주 앉아 이야기를 꺼내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설아는 몇 번이나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끝까지 말했다.
서진은 처음엔 굳은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책임질게."
짧지만, 분명한 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 한마디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서진의 부모는 처음부터 설아를 몰아붙였다. 집안도 변변찮은 애가 아들 인생을 망쳐놨다며, 설아를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설아의 부모 역시 딸의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말을 잃었다.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서진은 흔들리지 않았다.
부모 앞에서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말했다.
"제가 잘못한 겁니다. 설아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결국 허락이 떨어졌다.
설아는 그 말을 듣던 순간을 오래 기억했다. 서진이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라고 믿었던 순간을.
그 믿음이, 훗날 가장 큰 상처가 될 줄은 몰랐다.
서진은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비서를 불러 이음의 거래처 목록을 샅샅이 파악해 오라고 지시했다.강윤의 회사가 아무리 유망하다고 한들, 이제 막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곳이었다. 거래처 명단을 알아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진은 비서가 올린 보고서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거래처 목록을 하나씩 훑어 내려갔다.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서진은 당장 거래가 중단되었을 때 이음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핵심 업체들부터 우선순위를 매기기 시작했다.마침 목록 중에는 서진의 회사와도 오랫동안 거래를 이어오던 대형 업체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판이 아주 쉽게 짜이는데?.'서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업계에서 서진의 회사가 가진 영향력과 규모는 강윤의 이음과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거대한 체급 차이를 이용해 압박을 넣는다면, 저 작은 회사 하나쯤 말려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자신에게 건방지게 굴면 어떤 꼴이 되는지, 그리고 감히 내 여자를 욕심낸 대가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알려주지.”서진은 보고서를 툭 던져 놓으며 차갑게 중얼거렸다.서진은 곧바로 자리에 앉아 인터폰을 눌러 구매담당 이사를 자신의 방으로 호출했다."대표님, 부르셨습니까?"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이사를 향해, 서진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이음의 거래처 내역서를 툭 던지듯 내밀었다."당장 여기 적힌 거래처들에 연락해서 이음과의 거래를 전면 중단하라고 해요."서진의 지시에 이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서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늘하게 말을 이었다."중단 사유는 입단속 확실하게 시키고, 만약 우리 요구대로 거래를 끊지 않으면 유씨그룹과의 거래도 오늘부로 끝이라고 정확하게 전하세요. 오늘 안으로 전부 연락 돌린 뒤 나한테 직접 보고하도록."갑작스러운 강경책에 이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하지만 대표님, 아무리 그래도 업계에서 저희 유씨그룹이 특정 중소업체를 매장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돌면 기업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이
한편, 매끄럽게 달리는 강윤의 차 안. 설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아니,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가장 숨기고 싶었던 비참하고 추악한 밑바닥을 전부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마치 강윤의 앞에서 온몸이 발가벗겨진 것만 같은 수치심에, 도저히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자신 때문에 아무 상관도 없는 강윤까지 자꾸만 저런 저급한 언쟁에 휘말리게 만드는 것 같아 미안함과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울음을 참으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주고 있던 설아의 손 위로, 강윤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가만히 덮여왔다. 위로하듯 다정하게 손을 감싸 쥐는 그 온기에, 아슬아슬하게 견디고 있던 설아의 제방이 무너지듯 참았던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흑…… 흐읍…….“갑작스러운 설아의 오열에 놀란 강윤은 급히 비상등을 켜고 차를 갓길에 세웠다."설아 씨, 왜 그래요? 아까 그 인간들 때문에 그래요? 아니면 어디 아픈 거에요?“걱정 어린 강윤의 목소리에 설아는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한번 터진 서러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그…… 그게 아니라…… 자꾸, 자꾸 저 때문에 강윤 씨까지 저런 대우를 받는 게…… 흣, 너무 죄송해서요…… 정말 이런 모습까지는 정말 안 보여주고 싶었는데…… 흐흡……."서러움과 미안함이 복받쳐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설아를 바라보던 강윤의 눈
기분 좋게 밖으로 들어서던 수현의 눈빛이 순간 음흉하게 반짝였다. 수현은 설아에게 다가가 일부러 어깨를 강하게 치며 지나갔다. 전혀 예상치 못하고 무방비하게 서 있던 설아는 강한 충격에 균형을 잃고 앞으로 쏠리며 보도블록 위로 크게 넘어졌다."으읏……!“무릎이 긁히며 서서히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는 설아를 내려다보며, 수현은 가증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어머, 미안해요 설아 씨! 일부러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내가 진짜 못 봐서 그랬어요. 어쩌면 좋아!“사과하는 목소리에는 미안함이라곤 눈곱만큼도 들어있지 않았다. 옆에 있던 서진의 어머니 역시 넘어진 설아를 보며 고소하다는 듯 혀를 찼다."얘, 수현아! 네가 왜 미안해하니? 길 한복판에 멍하니 서 있던 저 기집애 잘못이지! 너야말로 괜찮니? 어디 다친 데는 없고?“서진의 어머니는 쓰러져 있는 설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히려 수현의 옷가지나 살피며 뻔뻔하게 적반하장으로 굴었다.그때, 매서운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강윤의 고급 세단이 그들 바로 앞에 거칠게 멈춰 섰다.차문이 열리고 급하게 내린 강윤은 넘어진 설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조심스레 일으켜 세웠다. 피가 나는 설아의 무릎을 확인한 강윤의 눈매가 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난번 요트에서 설아를 밀쳐낸 것도 모자라, 또다시 뻔뻔하게 이런 짓을 저지르는 박수현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사실 강윤은 신호 대기 중 차 안에서 이 모든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던 참이었다."박수현 씨를 여기서 또 보네요? ……참, 이번 수주 건은 아쉽게 됐습니다. 유씨 그룹에서 많이 신경 쓰신걸로 알고 있는데"약을 올리는 강윤의 말에 수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거리며 붉게 물들었다. 강윤과 설아 앞에서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며 오만하게 굴었던 자신이 떠올라 수치심이 밀려왔다.그 옆에 있던 서진의 어머니는 설아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은 채 부축하고 있는 강윤을 훑어보며 가당찮다는 듯 소리쳤다."당신이 얘랑 바람피운 그 남자
옆에 있던 수현도 이때다 싶어 불쌍한 척 얄밉게 거들었다."어머, 설아 씨…… 진짜 결혼 생활 내내 딴마음 품고 바람이라도 피운 거예요? 우리 서진이 불쌍해서 어떡해…… 대체 얼마나 돈을 빼돌린 거에요. 그리고 이런 곳이 설아씨랑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네?“수현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가증스러운 연기를 이어갔고, 그 모습에 부채질이라도 당한 서진의 어머니는 다시 한번 뒷목을 잡으며 악에 받친 폭언을 쏟아냈다."네가 사람이니? 어머, 어머! 내 혈압이야!“두 사람의 지독하고 뻔뻔한 폭언에 설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자신을 그토록 처절하게 짓밟고, 급기야 소중한 아이까지 잃게 만든 인간들. 이미 남남이 된 지금까지도 자신을 무시하고 모욕하고 있었다. 설아는 솟구치는 가슴속 분노를 꾹 눌러 담으며,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시어머니와 수현을 당당하게 쏘아보았다."결혼 생활 중에 바람을 피운 건 내가 아니라, 서진 씨와 지금 어머님 옆에 서 있는 박수현 씨잖아요.“"뭐, 뭐라고?!“"어머님도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거 아니었나요? 그리고 이혼하면서 정말 십원 한 장 가지고 나오지 않았으니 걱정 마세요.”설아는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결혼 기간 내내 자신의 말 한마디에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눈치만 보던 설아였다. 그런 설아가 자신의 말에 또박또박 대꾸하자, 서진의 어머니는 기가 차다 못해 악에 받쳐 펄쩍 뛰었다.급기야 그녀는 가슴을 팍팍 치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어설픈 연기를 이어갔다."어머, 어머! 저 기집애 말하는 것 좀 봐! 오냐오냐해줬더니 어디 감히 어른한테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어?!“서진의 어머니는 옆에 선 수현의 팔을 붙잡고 뒷목을 잡은 채 손가락질을 해댔다."이래서 집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 하는 법인데! 저런 복도 없는 몹쓸 것이 굴러들어 왔으니 우리 귀한 서진이 앞길이 제대로 풀릴 리가 있었겠니? 어휴, 독한 년! 지금이라도 갈라서서 쫓아낸 게 천만다행이지, 천만다행이
서진의 어머니가 멀지 않은 곳에서 뒷목을 잡으며 마치 쓰레기를 보듯 설아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그러나 설아의 앞에 선 여자는 눈 하나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온화하면서도 품격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반가워요, 설아 씨. 나 강윤이 사촌 누나예요. 강윤이가 어찌나 귀한 분 오시니까 신경 써달라고 달달 볶으며 부탁을 하던지…… 직접 인사하고 싶어서 들렀어요.“'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이용권'이라던 강윤의 말은, 혹여나 설아가 부담스러워 거절할까 봐 둘러댄 다정한 거짓말이었다. 사촌 누나의 등장은 순식간에 두 사람의 추악한 모함을 비웃듯, 숍 안의 공기를 완벽하게 반전시켰다."아, 안녕하세요! 이설아라고 합니다.“설아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춰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그 정중하고 예의바른 설아의 모습에 강윤의 사촌 누나는 눈꼬리를 접으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어머, 굳이 일어날 필요까진 없었는데. 편하게 계세요.“그녀는 다정한 눈빛으로 설아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불편한 건 없으시죠? 앞으로 우리 자주 보게 될 것 같은데,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말해요.“강윤의 사촌 누나는 옆에 서 있던 실장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신중하고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오늘 이설아 씨 케어, 최고급 VIP 풀코스로 진행해 주세요. 제 손님이시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부족함 없이 최선을 다해서 잘 모셔야 합니다. 아시겠죠?“"네, 대표님! 완벽하게 준비하겠습니다."직원의 깍듯한 대답과 함께 사촌 누나는 설아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뒤 자리를 떠났다.강윤의 사촌 누나가 자리를 떠나고 은밀한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주변에 앉아 있던 사모님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설아에게 쏠렸다."어머, 저 여자가 여기 대표였어? 실물은 처음 보네. 저 집안 어마어마하잖아. 다들 저 대표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줄을 선다더니…….“"에이, 그래도 그래 봤자 그냥 뷰티 숍 대표 아니야?“"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건 그냥 취미 삼아 재미로 하는
서진은 곧바로 강윤의 회사를 뿌리째 흔들어 놓을 치밀한 계획은 짜기 시작했다.그시각 '이음'의 대표실. 강윤은 설아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네, 대표님. 혹시 따로 지시하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서류 봉투를 품에 안고 들어선 설아가 묻자, 강윤은 업무용 의자에서 일어나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를 올렸다."아뇨, 그냥 설아 씨 보고 싶어서요.“"앗, 여긴 회사잖아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세요.“설아가 당황한 듯 말했다.갑작스러운 애정 표현에 당황한 설아가 주변을 살피며 소곤거리자, 강윤은 풋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걱정할 거 없어요. 제 방 방음 하나는 정말 완벽하거든요. 그것보다, 이거 주려고 불렀어요.“강윤이 설아의 손에 살포시 쥐어준 것은 정갈하게 포장된 카드 형태의 티켓이었다."이게 뭐예요?“"누가 피부 관리 이용권을 선물로 줬는데, 남자인 제가 이런 데 가기도 좀 그렇고…… 설아 씨가 가줬으면 좋겠어서요.“강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설아가 티켓에 적힌 상호를 확인하자마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최고급 에스테틱 숍의 VIP 이용권이었다. 1회 케어 비용만 수백만 원을 호가해 유명 연예인이나 상류층 재벌가 인사들만 다니기로 소문난 곳이었다."이건 너무 부담스러운데요…….“액수를 가늠하기도 힘든 티켓의 가치에 설아가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려 하자, 강윤이 눈꼬리를 접어 보이며 다정하게 말을 가로챘다."나도 선물 받은 거라니까요. 전혀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프로젝트 시작되면 쉴 틈 없이 바빠질 텐데, 일 잘해 달라고 미리 주는 '뇌물'이라고 해 두죠.“"설아 씨가 안 쓰면 이건 그냥 버려지는 불쌍한 휴지 조각이 되는 겁니다. 말 나온 김에, 오늘 퇴근하고 제가 숍까지 모셔다줄 테니까 마음 편하게 관리받고 와요.“설아가 몇 번이고 손사래를 치며 거절해 보았지만, 강윤의 고집 역시 만만치 않았다. 퇴근길, 그는 설아를 차에 태우고 숍 문
불도 켜지 않은 채였다. 소파에 팔짱을 낀 자세로, 굳은 얼굴로 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어디 다녀와?"낮고 날이 선 목소리였다.설아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냥 바람 좀 쐬고 왔어요.""병원에서 왜 퇴원했어?""아무 이상 없다길래요.“서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간호사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빈혈 수치, 면역력,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몸. 그런데 설아는 지금 아무 이상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아무 이상 없다고?""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평소와 달랐다. 목소리에 온기가 없었다. 기대도,
기운을 차린 설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내려다보다가조용히 뽑아냈다.작은 통증이 왔지만 설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침대 옆에 개어두었던 자신의 옷을 집어 들고 환자복을 벗었다.손이 떨려 단추를 잠그는 것조차 생각보다 힘들었다.겨우 옷을 갈아입고 일어서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어지러움이 물밀듯 밀려오며 몸이 휘청였다. 설아는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잠시 버텼다. 숨을 고르고, 다시 섰다.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이설아씨, 잠깐만요!"담당 간호사였다. 링거 알람이 울렸는지, 빠르게 들어온
설아는 매일 서진이 좋아하는 음식을 차렸다. 다림질한 셔츠를 옷장에 걸어두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간혹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서진은 설아를 찾았다. 하지만 그건 설아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다정함도, 온기도 없었다. 그저 거칠고 무심한 손길이 지나가고 나면, 서진은 돌아누워 잠들었다. 설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이게 결혼인가.’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울면 더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일도 밥을 차리고, 셔츠를 다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버텼
결혼식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화려하지 않았다. 서진의 부모는 끝까지 탐탁지 않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고, 설아의 부모는 딸의 손을 잡고 눈물을 삼켰다. 그래도 서진은 설아의 곁에 있었다. 식이 끝나고 설아의 손을 잡으며 작게 말했다."잘 부탁해. 이설아“그 한마디가 설아에게는 충분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신혼 초, 서진은 누구보다 다정한 남편이었다.바쁜 와중에도 설아를 챙겼고, 서툴지만 함께 밥을 지어먹었고, 설아가 웃으면 따라 웃었다. 설아는 그 시간들이 영원할 거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하지만 행복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