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어느 봄날 오후
봄 햇살이 유리창을 가득 채운 학교 앞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두꺼운 전공서적을 펼쳐 놓은 설아는 주변 소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형광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식어가는 아메리카노 옆으로 빼곡히 필기된 노트가 쌓여 있었다. 그 모습이, 봄날 카페 안에서 유독 선명하게 빛났다.
그 앞을 지나치던 두 남자 중 한 명이 발걸음을 멈췄다.
유서진.
졸업을 목전에 둔 4학년. 국내 손꼽히는 그룹사 회장의 외동아들. 훤칠한 키에 날카롭고 차가운 이목구비 어딜 가든 시선이 쏠리고, 어딜 가든 먼저 자리가 만들어지는 남자였다. 웬만한 것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가, 지금 카페 유리 너머 한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친구 민혁이 그 시선을 따라가다 피식 웃으며 서진의 어깨를 툭 쳤다.
"야, 유서진. 너도 반했냐?"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거두지도 않았다.
민혁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들어온 새내기래. 경영학과. 얼굴이야 뭐 보면 알겠고 근데 그것만이 아니라 머리도 엄청 잘 돌아간다더라고. 교수들한테도 벌써 이름 알려졌다던데? 저런 애랑 사귀는 남자는 진짜 무슨 복이냐. 부럽다, 진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올라갔다.
"새내기.“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묘한 온도가 실려 있었다. 차갑지도, 그렇다고 따뜻하지도 않은 무언가 갖고 싶은 걸 발견했을 때의 그 눈빛.
민혁이 그 눈빛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야, 설마 번호라도 물어보게 천하에 유서진이?
서진은 대답 대신 카페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천천히, 마치 이미 결정을 내린 사람처럼.
"갖고 싶은게 있으면 가져야지."
그것이 시작이었다.
서진은 자연스럽게 설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마치 원래 거기 앉으려 했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그리고 잠시 후 툭."아, 미안."일부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서진의 커피가 설아의 소매 위로 흘러내렸다."옷 괜찮아요? 정말 미안하게 됐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보통이라면 당황하거나 화를 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설아는 옷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형광펜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고개도 들지 않고 짧게 말했다."괜찮아요."그리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서진의 입꼬리에 피식,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재미있었다.
그 웃음을 본 설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상한 사람 보듯, 거리낌 없이.
그 순간, 서진은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까이서 마주한 얼굴이었다. 새하얗고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이목구비, 꾸밈없이 순수하면서도 묘하게 매혹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스스로는 전혀 모르는 것 같은, 그래서 더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이런 얼굴이 있었나.
서진은 내심 감탄하면서도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테이블 위에 놓인 설아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설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능숙하게 자신의 번호를 저장하고 다시 내려놓았다.
"옷값은 내가 보상할게. 연락해요."
설아는 그 번호를 내려다보다가 서진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딱 하나의 감정만 담겨 있었다.
불쾌하다.
"괜찮아요. 그냥 세탁하면 되는걸요. 신경 쓰지 마세요.“
설아가 자신에게 관심 없다는 건 명확했다.
그날 밤, 서진에게서 문자가 왔다.
설아는 화면을 한 번 보고 덮었다. 답장 따위는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관심 없는 척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관심이 없었다.
별 이상한 사람 다 있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학교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야외 부스가 늘어선 행사장 한켠에서 설아는 친구들과 구경을 하던 중이었다. 바람이 심했던 탓일까. 갑자기 옆에 세워져 있던 천막이 기울더니, 그대로 설아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쾅—
하지만 설아에게 충격은 오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의 팔이 설아를 감싸 안으며, 그 충격을 대신 받아냈다.
"…괜찮아?"
낮은 목소리. 고개를 드니 서진이었다. 인상을 살짝 구긴 채 어깨를 털어내는 그의 팔뚝에 긁힌 자국이 나 있었다.
설아는 할 말을 잃었다.
"왜…"
"지나가다 봤어."
짧은 대답. 서진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설아의 시선을 잠깐 받아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날 이후였다. 설아가 서진을 다시 보게 된 것이.
원래도 술이 약한 데다 안좋은 몸상태 눈앞의 시야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웅성거리는 동기들의 목소리가 수중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해졌다.설아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통증으로 간신히 버텼다.‘버텨야 해.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설아의 시야가 가파르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테이블 건너편의 공기는 잔인할 만큼 다정했다.서진은 설아가 독한 위스키를 삼키는 순간조차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니, 돌리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눈앞의 대화에 가려 정말 보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철저하게 외면당한채 설아는 의식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다.수현은 그런 설아의 하얗게 질린 안색을 놓치지 않았다. 서진의 시선이 아주 잠깐이라도 맞은편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그녀는 더욱 자극적인 카드를 꺼내 들었다.수현이 묵직한 크리스탈 글라스에 빛깔이 아주 짙은 위스키를 새로 따랐다. 얼음도 섞이지 않은, 스트레이트 잔이었다."유서진, 우리 옛날에 학회 마감 끝내고 밤새 마셨던 거 기억나? 그때 네가 나한테 완패했었잖아."수현이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잔을 서진의 눈앞으로 바짝 들이밀었다. 술잔 너머로 수현의 집요한 시선이 서진의 눈에 꽂혔다."오늘 그때 복수할 기회 줄게.“서진의 시선이 수현이 건넨 잔으로 향했다. 승부욕을 자극하는 수현의 노련한 말솜씨와 눈앞을 가로막은 독한 술잔 때문에, 서진의 세계는 순식간에 수현이 짜놓은 판 안으로 좁혀졌다. 맞은편에서 힘겨워하는 설아의 존재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내가 너한테 졌다고? 기억을 왜곡하네, 박수현.“서진이 피식 웃으며 수현이 건넨 잔을 받아 들었다.두 사람의 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순간, 수현은 만족스러운 듯 설아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내 말이 맞지? 넌 여기 끼어들 자리가 없어'라고 속삭이는 듯한, 조롱 가득한 눈빛이었다.설아는 당장 그 숨 막히는 방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쓰러져 버릴
명령조의 말에 설아는 어떤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영혼이 탈탈 털려나간 몸을 움직여 드레스룸에서 손에 잡히는 하얀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거울 앞에 섰지만, 흐릿한 거울 속 여자는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저 주인이 입으라는 대로 입은 인형에 불과했다.거실로 나오자, 소파에 앉아 있던 서진의 시선이 설아에게 닿았다. 순백의 원피스를 입은 설아를 본 서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확장되며 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불쾌한 감정을 숨기듯 휙 돌아서며 먼저 현관을 나섰다.차 안을 채운 건 숨이 막힐 듯한 침묵뿐이었다.모임 장소인 고급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서진의 동기들이 두 사람을 요란하게 맞이했다."오, 제수씨는 올 때마다 더 예뻐지네.""서진이 이 자식,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설아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당겨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짓는 웃음이라는 걸, 이 활기찬 테이블 위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때, 레스토랑의 문이 열리며 세련된 단발 오피스룩 차림의 박수현이 들어왔다."애들아 미안! 프로젝트 마무리가 늦어져서 이제야 왔네."시원시원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던 수현의 시선이, 서진의 옆자리에 앉은 설아에게 머물렀다. 그 순간 수현의 완벽했던 포커페이스가 찰나의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0.1초 만에 다시 싱그러운 미소로 포장했지만, 신경이 곤두서 있던 설아는 그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설아 씨. 여전히 고우시네요.""네, 안녕하세요, 수현 씨.“수현은 자연스럽게 서진의 비어 있는 옆자리에 앉으며 가방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서진을 힐끗 보며 뼈 있는 말을 던졌다."야, 유서진. 설아 씨 데려올 거면 단톡방에 미리 말을 했어야지. 이런 칙칙한 동기 모임까지 재미없게 끌고 다니냐? 설아 씨 불편하게."배려를 가장한, 명백한 배척이었다. ‘너는 우리와 섞일 수 없는 이방인’이라는 날이 숨겨져 있었다.눈치 없는 친구 하나가 껄껄 웃으며 받아쳤다."야, 수현이 너 분위기 파악 못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거칠었던 움직임이 멈추고 서진이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방문을 닫고 나갔다.설아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니,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와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일어나려던 그 순간 허리와 아랫배에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설아는 그대로 주저앉았다.자신도 모르게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병원에서도 참았고, 공원에서도 참았고, 오늘 하루 내내 참았는데.그래도 눈물은 남아 있었다.‘나는 그 사람한테 뭐지.’서진에게 설아는 아내도 아니었다.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 필요할 때 쓰고, 필요 없으면 나가버리는.설아는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묻었다.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울음소리조차 내고 싶지 않았다.이혼하고 싶다...아까 자신이 내뱉었던 그 말이 확신으로 느껴졌다. 두렵지 않았다. 아니, 두려움보다 이대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 더 무서웠다.서진과 엮어 있는 끈을 끊어 내야 자신이 살수 있을 것 만 같았다.다음 날 아침, 설아는 일찍 눈을 떴다.방문을 열고 나가니 집 안이 조용했다. 서진은 이미 출근한 듯 흔적도 없었다. 설아는 물 한 컵을 마시고 탁자 앞에 앉았다.서랍에서 꺼낸 이혼 신고서. 손이 떨렸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한 칸 한 칸 천천히 채워나갔다.다 작성한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바람을 쐴 겸 외출을 나갔다.설아는 걸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언제부터 고개를 숙이고 다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3년이라는 시간 동안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겼다. 지금 이 도시에서 설아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커피숍에 들러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고 집으로 돌아온 설아는 현관에서 멈췄다.불이 켜져 있었다. 서진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외투도 벗지 않은 채, 탁자를 바라보며..설아의 시선이 탁자로 향했다. 올려두었던 서류가 없었다. 시선
불도 켜지 않은 채였다. 소파에 팔짱을 낀 자세로, 굳은 얼굴로 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어디 다녀와?"낮고 날이 선 목소리였다.설아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냥 바람 좀 쐬고 왔어요.""병원에서 왜 퇴원했어?""아무 이상 없다길래요.“서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간호사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빈혈 수치, 면역력,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몸. 그런데 설아는 지금 아무 이상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아무 이상 없다고?""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평소와 달랐다. 목소리에 온기가 없었다. 기대도, 서운함도 담기지 않은 그냥 건조한 말투. 서진은 그게 묘하게 불편했다.설아는 더 말을 잇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 빨리 눕고 싶었다. 눈앞이 계속 흔들렸다.그때 서진이 설아의 손목을 잡아 돌려세웠다."내가 말하는 중이잖아.“설아는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진을 바라보았다.화가 난 얼굴이었다. 평소라면 그 얼굴에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먼저 말했을 것이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할 말이 있어요?""….""없으면 저 좀 쉬어도 될까요. 좀 쉬고 싶어요....“설아의 차갑지도, 슬프지도 않은 눈빛을 보던 서진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문을 닫고 들어가는 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던 서진이, 결국 참지 못하고 방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갔다.방문이 거칠게 열렸다.설아는 침대에 누운 채 고개를 돌렸다. 서진이었다. 문틀에 손을 짚고 서서 설아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진이 설아의 앞에 멈춰 서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낮게 입을 열었다."왜 전화 안 받았어.“"오빠....미안한데... 오늘은 쉬고 싶어요....“"나한테 화난 거야?"설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화가 난 건지도 잘 몰랐다. 그냥 지쳐 있었다. 화를 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그 순간 서진
기운을 차린 설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내려다보다가조용히 뽑아냈다.작은 통증이 왔지만 설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침대 옆에 개어두었던 자신의 옷을 집어 들고 환자복을 벗었다.손이 떨려 단추를 잠그는 것조차 생각보다 힘들었다.겨우 옷을 갈아입고 일어서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어지러움이 물밀듯 밀려오며 몸이 휘청였다. 설아는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잠시 버텼다. 숨을 고르고, 다시 섰다.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이설아씨, 잠깐만요!"담당 간호사였다. 링거 알람이 울렸는지, 빠르게 들어온 간호사가 설아의 모습을 보고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지금 이러시면 안 돼요. 링거는 왜 빼셨어요?""괜찮아요.""괜찮지 않으세요.지금!“간호사가 설아의 앞을 막아섰다. 단호한 목소리였다."이설아씨, 지금 빈혈 수치가 심각하게 높아요. 면역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이 상태로 나가시다가 복도에서 쓰러지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몸이에요. 보호자분께도 연락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보호자 연락은 안 하셔도 돼요."설아는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간호사가 잠시 설아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눈치챈 것 같았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설아는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퇴원 수속은 제가 할게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설아는 그 손을 꼭 쥐었다. 들키지 않으려고.병실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설아는 잠깐 눈을 감았다.이대로 돌아가면 또 똑같겠지.아픈 몸으로 빈 집에 돌아가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누워 있고, 그래도 아무도 오지 않는.설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그리고 걸었다. 어지럽고, 몸이 무거웠지만 그래도 걸었다.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았다.이대로는 안 된다...퇴원 수속을 마치고 설아가 병원 정문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로비 자동문이 거
설아는 매일 서진이 좋아하는 음식을 차렸다. 다림질한 셔츠를 옷장에 걸어두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간혹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서진은 설아를 찾았다. 하지만 그건 설아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다정함도, 온기도 없었다. 그저 거칠고 무심한 손길이 지나가고 나면, 서진은 돌아누워 잠들었다. 설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이게 결혼인가.’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울면 더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일도 밥을 차리고, 셔츠를 다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버텼다.설아는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시들어가고 있었다.이후 서진과 수현의 회사가 같은 프로젝트를 맡게 된 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처음엔 일이었다. 회의가 잦아졌고, 저녁 자리가 생겼고, 출장이 겹쳤다. 서진은 설아에게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바쁘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고, 설아도 더 묻지 않았다.그런데 우연히 보게된 수현의 SNS는 설아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수현의 생일 파티 사진. 고급 레스토랑의 테이블, 샴페인 잔, 웃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 서진이 있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설아는 그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언제 저런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출장 중 올라오는 사진에도 서진은 늘 수현 곁에 있었다. 같은 도시, 같은 풍경, 같은 시간. 우연치고는 너무 많이 겹쳐있었다.설아는 조용히 날짜를 떠올렸다.자신의 생일. 서진은 늦게 들어왔다. 미역국은 식어 있었고, 케이크는 혼자 잘랐다.서진이 미안하다고 했는지조차 기억이 흐릿했다.결혼기념일. 서진은 출장 중이었다.그는 나보다 수현과 더 잘 어울리는구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설아는 스스로 놀랐다. 슬프지 않았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싶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에 무뎌진 탓인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탓인지.창밖엔 불빛이 가득했다. 저 불빛들 속에서 서진은 지금쯤 웃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