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설아는 매일 서진이 좋아하는 음식을 차렸다. 다림질한 셔츠를 옷장에 걸어두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간혹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서진은 설아를 찾았다. 하지만 그건 설아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다정함도, 온기도 없었다. 그저 거칠고 무심한 손길이 지나가고 나면, 서진은 돌아누워 잠들었다. 설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게 결혼인가.’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울면 더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일도 밥을 차리고, 셔츠를 다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버텼다.
설아는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시들어가고 있었다.
이후 서진과 수현의 회사가 같은 프로젝트를 맡게 된 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처음엔 일이었다. 회의가 잦아졌고, 저녁 자리가 생겼고, 출장이 겹쳤다. 서진은 설아에게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바쁘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고, 설아도 더 묻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보게된 수현의 SNS는 설아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수현의 생일 파티 사진. 고급 레스토랑의 테이블, 샴페인 잔, 웃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 서진이 있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설아는 그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언제 저런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출장 중 올라오는 사진에도 서진은 늘 수현 곁에 있었다. 같은 도시, 같은 풍경, 같은 시간. 우연치고는 너무 많이 겹쳐있었다.
설아는 조용히 날짜를 떠올렸다.
자신의 생일. 서진은 늦게 들어왔다. 미역국은 식어 있었고, 케이크는 혼자 잘랐다.
서진이 미안하다고 했는지조차 기억이 흐릿했다.
결혼기념일. 서진은 출장 중이었다.
그는 나보다 수현과 더 잘 어울리는구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설아는 스스로 놀랐다. 슬프지 않았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싶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에 무뎌진 탓인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탓인지.
창밖엔 불빛이 가득했다. 저 불빛들 속에서 서진은 지금쯤 웃고 있겠지. 자신 없이도, 아무렇지 않게.
그게 가장 설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잘못됐다고 따질 수도 없었다. 증거가 없었고, 서진은 선을 넘겼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다만 자신의 자리가, 조금씩 조금씩 비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서진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사라지기 시작한 게.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은 그 자리에 없었던 건 아닐까.
현재
설아의 눈이 힘겹게 떨리며 떠졌다.
하얀 천장이었다. 낯선 냄새가 났다. 소독약 냄새. 어딘가에서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병실이었다.
설아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손등에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고, 몸은 솜을 잔뜩 집어넣은 것처럼 무거웠다.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테이블 위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누가 다녀간 흔적조차 없었다.
‘사람을 보낸다고 했었지....’
설아는 천장을 다시 바라보았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사람을 보냈겠지. 아마도. 그래서 지금 이렇게 병원에 누워 있는 거겠지. 서진이 직접 온 게 아니라, 누군가가 와서 구급차를 불렀겠지.’
그게 전부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간호사가 들어와 몇 가지를 확인하고 나갔다. 설아는 조용히 물었다.
"저 ..여기 어떻게 왔어요?"
"집에 쓰러져 계신걸 직원분이 발견해 모셔왔어요 .“
직원...
설아는 그 단어를 속으로 한 번 되뇌었다. 남편이 아니라, 직원.
"보호자분은 연락이 됩니까?"
설아는 잠시 생각했다.
"…괜찮아요."
간호사가 나가고 나서 설아는 창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바깥엔 햇살이 가득했다. 눈부시게 맑은 날이었다. 그게 왜인지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아팠다. 몸도.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이 더 아팠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그 생각이 처음으로, 아주 선명하게 들었다.
설아는 떨리는 손으로 링거 줄을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다 써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살아 있었다.
"와이프는 제대로 된 대학 졸업조차 못하게 막아두고, 다른 여자와 유학을 떠나셨지 않습니까. 돌아와서도 같은 프로젝트를 핑계로 버젓이 내연 관계를 유지하고…….“"……!“강윤이 정곡을 찌르며 파헤치자, 서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강윤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린 서진은 위협적인 보폭으로 다가와 그의 코앞에서 서늘하게 속삭였다."더 이상 선 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참아주는 건 딱 여기까지니까.“치부라도 들킨 듯 분노로 가득 찬 서진의 눈빛이 오한이 끼칠 만큼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그는 설아를 품에 안아 감싸쥔 강윤을 멸시하듯 내려다보며 낮게 읊조렸다."이음 그리고 강서윤…… 둘이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처신 잘 시키는 게 좋을 겁니다. 둘 다 지옥을 맛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뼈 있는 경고와 비꼬는 투를 던진 서진은 묵직한 발걸음으로 뒤돌아 룸을 나가버렸다. 스르륵 닫히는 문을 보며 강윤은 기가 차다는 듯 나지막한 실소를 터뜨렸다."이렇게까지 밑바닥 인성일 줄이야…… 하. 누가 참고 있는 건지 한번 두고 봅시다, 유서진 씨.“서진의 그림자가 룸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강윤은 지쳐 있는 설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몸 아래로 팔을 넣어 단숨에 안아 들었다."흐읏…….“강윤의 품에 안긴 설아가 작은 신음을 뱉어내며 그의 목덜미에 붉어진 얼굴을 파묻었다. 술기운으로 뜨거워진 그녀의 숨결이 귓가에 그대로 와닿자, 강윤의 귀밑까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강윤은 열기로 달아오른 설아를 단단히 안아 든 채,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차 조수석에 앉히고는 편히 누울 수 있도록 시트를 젖혀주었다.차 안의 정적 속에서도 설아는 여전히 힘겨운 듯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강윤은 안타까움과 넘쳐흐르는 감정이 섞인 눈빛으로 설아를 가만히 바라보며 조용히 운전석의 시동을 걸었다.한편, 룸 안으로 들어온 서진은 아무런 말 없이 수현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서진의 얼
한편, 밖을 샅샅이 뒤지고 돌아온 강윤의 꼴은 엉망이었다.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에 머리카락은 푹 젖어 있었고, 거칠어진 숨소리가 턱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선 그가 급히 지나가던 직원의 소매를 잡아챘다."저기요, 실례지만…… 혹시 아까 저쪽 룸에서 나온 여자분 못 보셨어요? 피부가 새하얗고,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계셨는데…….“강윤은 간절한 눈빛으로 설아의 인상착의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하지만 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글쎄요…… 워낙 손님이 많이 들락거리는 날이라서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술에 취해서 나갔다고 들었는데 연락이 전혀 안 돼서요...“"잠시만요. 사장님한테 말씀드려 볼게요.“직원이 귀에 꽂은 무전으로 상황을 전하자, 곧 카운터 뒤에서 묵직한 인상의 사장이 걸어 나왔다. 사장은 강윤의 걱정 가득한 눈빛을 금세 읽어냈다."손님, CCTV 확인해 드릴 테니 따라오시죠. 룸 안이야 개인정보 때문에 안 찍히지만, 복도는 찍힙니다. 일단 매장 밖으로 나가셨는지부터 확인해 드리면 되는 거죠?“"네, 네! 정말 감사합니다!“강윤은 연신 숙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화면 속, 설아가 룸을 나선 시각부터 CCTV 영상을 꼼꼼히 살피던 강윤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졌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차가운 벽을 겨우 짚고 힘겹게 걸어 나오는 설아의 모습이 모니터에 찍혀 있었다."아, 사장님! 이 사람이에요!“사장은 녹화 영상을 조금 더 뒤로 되돌렸다.설아가 식당 복도를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며 화장실 방향으로 가고 있던 바로 그때 설아의 그 뒤를 따라 유서진이 화면에 나타났다.그리고 주저 없이 설아의 허리를 강하게 잡아채더니, 복도 구석에 위치한 룸 안으로 그녀를 끌고 들어가는 장면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이 룸 밖으로 나오는 영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그 순간, 강윤의 눈빛이 차갑고 서늘하게 식어 내렸다."감사합니다!“강윤은 사장에게 급하게 목인사를 건네자마자,
생각해보면 자신과 함께했던 결혼 생활 동안, 설아는 잔뜩 시든 꽃처럼 매일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생기가 만연하게 감도는 얼굴, 당당하고 또렷한 눈빛. 마치 대학 시절, 서진이 처음 반했던 바로 그 시절의 모습이었다. 누구에게도 휩쓸리지 않고 독보적인 아우라를 풍기던 그 반짝이던 이설아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넋을 놓은 채 한참 동안 설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서진은, 그녀가 술기운과 어지러움에 힘겨워하며 찌푸리는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내가 왜 이러지.‘그렇게 못할 짓을 해놓고 쫓아내듯 이혼해 놓고, 왜 아직도 이설아에게 온 신경이 쏠리는 건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건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이 서진의 머릿속을 사정없이 어지럽혔다.강윤과 강서윤, 그리고 이설아. 세 사람을 둘러싼 알 수 없는 관계. 그리고…… 혹시 이설아가 정말로 강윤 그 자식을 마음에 품기라도 한 건지.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열감이 치밀어 올랐다. 서진은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오는 걸 느끼며 커다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는, 신경질 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한편, 그 시각.강윤은 급하게 차를 몰아 식당 앞에 도착했다. 금요일 저녁 퇴근길의 꽉 막힌 도로를 뚫느라 예정보다 시간이 훌쩍 늦어버린 뒤였다.'설아 씨 혼자 불편할 텐데... 혼자 너무 오래 있게 해서 어쩌나.‘마음이 급해진 강윤이 다급한 걸음으로 룸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열리자마자 이미 얼큰하게 술기운이 오른 기업인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강윤을 애워쌌다."아니, 오늘의 주인공이신 이음의 강윤 대표 아니야! 왜 이렇게 늦었어, 자, 일단 앉아서 한 잔 받아!“"죄송합니다. 오 오는 길에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 늦었습니다.“강윤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사과하며 룸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건네는 술잔을 받아들면서도 그의 시선은 재빨리 룸 안을 훑었다.'……어?‘하지만 어디에도 설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간단한 인사치레를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투명하게 새하얗던 그녀의 얼굴 위로 발그레한 열기가 번져갔다. 설아는 한순간이라도 흐트러지지 않으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있었다.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유서진은 슬쩍 술잔을 기울이며 비틀린 미소를 흘렸다. 곁에 앉은 박수현은 이미 분위기에 취해 옆자리 사람과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는 중이었다.서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설아의 비어 있는 맞은편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유씨 그룹의 수장이 직접 자리를 옮겨 앉자, 주변에 있던 기업인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서진에게로 쏠렸다. 반가운 표정의 한 대표가 냉큼 서진에게 잔을 건넸다."아, 유서진 대표! 왜 이렇게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모임에도 얼굴을 잘 안 비추고 말이야.“"아, 최근에 조금 바쁜 일이 있었습니다. 이젠 거의 정리되었으니 언제든 불러주세요.“서진은 여유롭고 능숙한 태도로 응대하며 단숨에 술잔을 비워 냈다.빈 잔을 내려놓은 서진의 서늘한 시선이 설아에게로 똑바로 꽂혔다. 그는 묵직한 병을 들어 설아의 잔에 술을 채우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축하드립니다, 이음의 이설아 씨. 한 잔 받으시죠.“예상치 못한 서진의 접근에 설아는 순간 굳어졌지만, 수많은 눈이 보고 있는 자리였기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잔을 받아들었다."자, 이음의 성과를 위해 다 같이 한 잔 하시죠.“서진의 주도 아래 또다시 독한 술잔이 오갔다. 안 그래도 한계에 다다랐던 설아는 핑 돌며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했다.설아는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을 꼭 쥐어 짜며 떨림을 참아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온 힘을 다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설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흐트러지지 않으려 발끝에 바짝 힘을 주고 걸었지만, 미세하게 흔들리는 어깨와 지탱하듯 테이블 끝을 살짝 짚는 손끝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3년의 결혼생활 동안 그녀의 모든 행
거래처가 다 막혀 아무것도 진척시키지 못한 채, 죽상을 하고 나타날 그의 꼴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서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마침내 만찬회 당일.강윤과 설아는 함께 일을 마치고 조금 일찍 회사를 나섰다. 금요일 저녁의 빽빽한 도로를 뚫고, 약속된 식당으로 향하던 그때 운전대를 잡고 있던 강윤이 컵 홀더에 놓인 커피를 집어 들었다.그 순간, 앞차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읏……!“강윤 역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고, 콰쾅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쏠리며 컵 홀더에 있던 커피가 그의 셔츠와 재킷 위로 왈칵 쏟아져 내렸다."강윤 씨! 괜찮아요?“설아가 깜짝 놀라 얼른 손수건을 꺼내며 묻자, 정작 강윤은 쏟아진 커피보다 설아의 상태를 먼저 살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설아 씨는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전 멀쩡해요! 저는 괜찮은데…… 어떡해요, 옷이 커피로 다 젖어버려서…….“짙은 아메리카노 물이 들어버린 옷을 보며 설아가 울상이 되자, 강윤은 그녀가 너무 걱정할까 봐 일부러 대수롭지 않다는 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옷이야 다시 빨거나 갈아입으면 되죠, 설아씨가 안 다쳤으니 다행이에요."하지만 당장 갈아입을 여분의 옷이 없는 상태였기에, 엉망이 된 재킷을 내려다보던 강윤의 눈빛에 곤란한 기색이 스쳤다. 시계를 확인한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결단을 내린 듯 설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설아 씨,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좀 불편하겠지만 설아 씨가 먼저 들어가 있을래요? 난 집에 들러서 옷만 갈아입고 금방 갈게요. 진짜 오래 안 걸릴 테니까.“"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운전 조심하시구요.“"금방 갈 테니 먼저 들어가 있어요.“강윤은 만찬회장 입구에 설아를 먼저 내려준 뒤, 옷을 갈아입기 위해 곧장 차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설아는 묵직한 목재 문 앞에서 얇게 한숨을 내쉬며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예약된 단독 룸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달칵—문이 열림과 동시에, 이미 도착해 담소를 나누던
끝까지 우아함을 잃지 않은 채 대놓고 서진을 무시하는 그녀의 태도에, 서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 앉았다.서진이 차갑게 돌아서려던 찰나, 그녀의 고급스러운 원목 책상 위에 놓인 자그마한 명패로 시선이 꽂혔다.[ 대표 강서윤 ]'강서윤…….‘숍을 나와 차에 올라탄 서진은 핸들을 쥔 채 미간을 찌푸렸다. 명패의 이름도 이름이었지만, 방금 전 자신을 쏘아보던 그녀의 눈빛과 분위기가 묘하게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어디서 본 적이 있었나?‘생각을 더듬던 서진의 머릿속에 순간 떠오르지 말아야 할, 가장 불쾌한 얼굴 하나가 겹쳐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이 번뜩였다.강윤. 그리고 강서윤.서늘한 눈매와 상대를 압도하는 특유의 오만한 분위기.'그래…… 저번에 수현이가 숍 에서 이설아를 봤다고 했었지.‘뇌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소름 끼칠 정도로 딱딱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서진의 입가에서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리고 조금 전, 그 맹랑한 대표가 자신을 향해 쏘아붙였던 말이 환청처럼 귓가를 울렸다.'손님의 개인정보라 성함을 직접 말씀드릴 수는 없네요. 하지만…… 어머님과 그쪽 친구분께서 누구보다 아주 잘 알고 계시지 않겠어요?‘"하……이것들 봐라.“서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차가운 분노가 눈동자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기분 상하게 만들었다는 그 대단한 손님이…… 이설아였어?“서진은 곧장 차를 거칠게 몰아 회사로 향했다.대표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선 서진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곧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이사의 정중한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서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상대를 몰아붙였다."강윤 회사의 거래처들, 확실하게 끊어버린 거 맞습니까?“갑작스러운 서진의 날 선 태도에 수화기 너머의 이사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침착하게 답했다."네, 대표님. 현재 그만한 물량을 감당해 줄 만한 대체 거래처를 찾기도 힘든 상황이라 아마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을 겁니다.“"다시 한번 확실하게 단속하세요.”"
기운을 차린 설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내려다보다가조용히 뽑아냈다.작은 통증이 왔지만 설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침대 옆에 개어두었던 자신의 옷을 집어 들고 환자복을 벗었다.손이 떨려 단추를 잠그는 것조차 생각보다 힘들었다.겨우 옷을 갈아입고 일어서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어지러움이 물밀듯 밀려오며 몸이 휘청였다. 설아는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잠시 버텼다. 숨을 고르고, 다시 섰다.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이설아씨, 잠깐만요!"담당 간호사였다. 링거 알람이 울렸는지, 빠르게 들어온
결혼식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화려하지 않았다. 서진의 부모는 끝까지 탐탁지 않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고, 설아의 부모는 딸의 손을 잡고 눈물을 삼켰다. 그래도 서진은 설아의 곁에 있었다. 식이 끝나고 설아의 손을 잡으며 작게 말했다."잘 부탁해. 이설아“그 한마디가 설아에게는 충분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신혼 초, 서진은 누구보다 다정한 남편이었다.바쁜 와중에도 설아를 챙겼고, 서툴지만 함께 밥을 지어먹었고, 설아가 웃으면 따라 웃었다. 설아는 그 시간들이 영원할 거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하지만 행복은 오
다음날설아의 눈이 힘겹게 떠졌다. 낯선 천장이었다.설아는 한동안 그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온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통증에 그대로 굳어버렸다.‘여기가… 어디지.’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공간이었다. 넓고 정돈된 방. 고급스러운 가구들. 자신이 덮고 있는 이불조차 낯설었다.그리고 구겨진 침대 시트 위에서 눈이 멈췄다.설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아니야. 아닐 거야.’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끌어올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어젯밤 기억이 없었다. 친구들과
어색하게 시작된 사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가까워졌다. 서진은 자주 설아 앞에 나타났고, 부담스럽지 않은 선을 지키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다른 여자들에게는 한결같이 차갑고 무뚝뚝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유서진이, 설아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먼저 말을 걸었고, 소소한 것들을 챙겼고, 무심한 듯 곁에 있었다.친구들이 먼저 눈치챘다."야, 설아야. 유서진 선배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에이, 설마.""설마가 사람 잡는다."설아는 웃어 넘겼다. 하지만 그 말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던 건 설아도 인정하기 싫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