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레미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중현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중현이 어떤 약속 때문에 강솔과 이혼했을 때 레미는 막지 않았다. 부부 사이의 일에 지나치게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것도 이유였고, 정말 이혼하더라도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이유도 있었다. 강솔은 못된 남편을 벗어나면 되고, 중현은 뒤늦게 후회하며 강솔을 다시 붙잡으러 다니면 그만이었다.그런데 이혼 과정에서 이런 짓까지 했다니.“솔이한테 상처 주기 싫으면 방법은 간단해.”레미는 중현의 말에 넘어가지 않고 소파에 기댄 채 나른하게 말했다.“솔이한테서 멀리 떨어지면 돼.”분위기가 어색하게 가라앉자 시후가 가볍게 헛기침했다.‘아까 그 얘기는 중요한 일 다 끝난 다음에 할걸.’[중현아.]시후가 침묵을 깼다.중현은 레미가 들고 있는 핸드폰을 바라봤다.시후는 화제를 돌렸다.[너 지금도 약속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중현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레미도 무의식적으로 중현을 한번 봤다.더 이야기하다가 실수로 뭔가 들키거나 중현이 더 많은 사실을 알아챌까 봐 레미는 영상통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나 이제 나가야 해. 더 할 말 있으면 나 빼고 둘이 핸드폰으로 얘기해.”여기까지 오자 중현도 더 머물러 봐야 얻을 게 없다는 걸 알았다.레미의 집을 나와 호텔로 돌아갔다. 스위트룸 거실 통유리창 옆에 앉아 아래를 오가는 차와 사람들을 내려다보니 레미와 시후에게 들은 말들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약속...’‘예전의 나는 약속 때문에 무슨 일을 한 거지?’생각에 빠져 있을 때 호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밖에는 상진과 아연이 서 있었다.“무슨 일이야?”중현이 물었다.“뭐겠어?”상진은 안으로 들어오며 중현과 아연을 번갈아 봤다.“누구 여자친구인지 모르겠는데, 어제 사람 기분 상하게 해 놓고 달래 줄 생각도 없더라.”말을 하며 상진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아연도 뒤따라 안으로 들어왔다.“말했잖아. 내 여자친구
시후의 말이 뚝 끊겼다.‘감당할 수 있나?’가장 먼저 든 생각은 중현에게 두들겨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중현이 마음먹고 보복하면 시후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딱 30분만 줄게.”레미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30분 뒤에는 나가 봐야 해.”“그럼 중요한 얘기부터 하자.”시후는 얼른 빠져나갈 구실을 잡았다.[할 얘기 다 끝나면 형이라고 부르는 문제는 그다음에 천천히 얘기하고.]그 말을 계기로 레미와 시후는 중현에게 과거 일을 일부 이야기했다.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무진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중현이 예전에는 강솔과 사이가 좋았고 하준호와는 관계가 험악했으며, 도현과는 경쟁하는 관계였다는 정도만 알려 줬다. 중현 주변의 인간관계도 간단히 정리해 줬다.끝까지 들어도 정작 궁금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자 중현이 대놓고 물었다.“소아연은?”“응?”시후가 되물었다.레미도 중현을 바라봤다.“내가 강솔을 그렇게 사랑했다면서 왜 아연이 때문에 강솔하고 이혼했어?”중현은 논리적으로 따졌다. 강솔이 한 말이 있었기에 두 사람의 설명 자체는 믿고 있었다.[앞뒤가 안 맞잖아. 그건...]시후는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무의식적으로 레미를 봤다.그 작은 움직임을 중현이 놓칠 리 없었다.중현은 곧 두 사람이 뭔가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우리도 정확히는 몰라.]시후는 거짓말을 하나 보탰다. 서무진에 관한 일은 아직 말하지 않기로 했다.[네가 연애 얘기로 우리한테 염장 지르는 건 잘했어도 정작 중요한 속사정은 거의 말 안 했잖아.]“맞아.”레미가 짧게 거들었다.[그때 나도 물어봤는데 너는 결국 아무 말도 안 했어.]시후는 진짜 있었던 일처럼 태연하게 말했다.[대신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눈으로 날 보더라.]중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말하지 않는다면 그 일은 파장이 꽤 큰 문제일 가능성이 높았다.단순히 자신이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 뿐이라면 레미 성격상 숨김없이 바로 말했을 것이다.“이혼 때문에 내가 강솔한테 무슨
“나 떠보려고 하지 마.”레미는 물을 한 잔 따라 소파에 기대앉았다.“내 입으로 과거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캐낼 생각도 하지 말고. 성인이라면 자기가 한 일은 자기가 책임져야지.”중현은 레미를 바라봤다. 머릿속에서 방금 말을 빠르게 정리했다.강솔은 레미를 믿어도 된다고 했다. 그런 레미가 자신을 돕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지금 상황이 과거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결과이기 때문이라는 뜻이었다.“그럼 내가 기억을 잃은 건 다른 사람이랑 싸우다가 머리를 다쳐서가 아니네?”중현이 물었다.도현은 말다툼 끝에 사고가 나 머리를 다쳤다고 설명했었다.도현이 말한 다툼 자체는 흔한 사건에 가까웠다. 그런 일 때문에 레미가 중현을 돕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그렇다면 둘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강솔이 레미를 믿으라고 했으니, 중현의 기준에서는 도현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결론밖에 남지 않았다.레미는 미간을 꾹 눌렀다.중현은 수단이 매섭고 속을 읽기 어려우며 계산에 빈틈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예전에는 그저 똑똑하고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보니 기억을 몇 번이고 초기화해도 머리 좋은 사람은 그대로일 것 같았다.강솔의 집에서 저녁 한 끼 먹고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이만큼을 추론해 냈다.레미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싶었다.“네가 나를 찾아온 건 솔이가 나를 믿어도 된다고 해서야, 아니면 내가 네 친구라서야?”레미가 물었다.그 대답에 따라 중현을 도울지 말지가 정해질 터였다.“강솔.”중현은 망설이지 않았다. 중현의 직감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강솔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강솔을 볼 때 거세게 뛰던 심장도 거짓말이 아닐 것이고, 몸이 본능적으로 먼저 반응하는 것도 속일 수 없었다.“뭘 도와주면 되는데?”“내 과거.”레미는 컵을 내려놨다.“솔이나 시후한테는 왜 안 물어봐?”“강솔은 안 알려 줄 거야.”중현은 자기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고시후는 너무 시끄러워. 핵
레미는 문 앞에 서 있는 중현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느슨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연기 너무 못한다.”중현은 레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오더니 익숙한 사람처럼 거실 소파에 앉았다.“진짜 나를 모르면 처음 봤을 때 눈에 낯선 기색이 보여야지. 너처럼 사람을 위아래로 뜯어보지는 않아.”레미는 중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문을 닫았다. 더는 연기하지 않았다.“왜 왔어?”“네 도움을 받으려고.”“내 주소를 알려 준 사람이 내가 널 별로 안 좋아한다는 말도 했을 텐데.”레미는 빙빙 돌려 말하지 않았다. 중현이 기억상실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봐줄 생각도 없었다.“들었어.”“그런데도 왔어?”“강솔이 넌 내가 믿어도 되는 사람이랬어.”레미는 중현을 다시 한번 봤다.‘기억을 잃었다면서?’시후 말대로라면 중현은 하준호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계속 이야기를 들은 뒤, 강솔이 돈 때문에 자신과 결혼한 여자라고 믿어야 했다. 그런데 왜 강솔의 말을 믿는지 이해되지 않았다.“솔이 만났어?”“응.”중현은 거리낌없이 대답했다.“어제 강솔 집에서 밥도 먹고, 우리 예전 관계랑 몇 가지 세부적인 것도 떠봤어.”“뭘 알아냈는데?”“예전에는 사이가 꽤 좋았던 것 같아. 어떤 이유로 소아연과 관련된 일로 이혼한 것 같고.”중현이 말했다.“지금 강솔은 겉으로는 나를 밀어내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아주 싫지는 않은 것 같아.”레미는 어이없는 눈으로 봤다.중현이 거의 맞는 말을 하자 일부러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갔다.“자기애도 그 정도면 병이야. 너 치료받아.”“보니까 너랑 강솔이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네.”중현은 또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너는 내 친구고 강솔 친구는 아니야.”레미는 할 말을 잃었다.“네가 강솔하고 정말 친한 친구면 방금 내 말을 듣자마자 뻔뻔하다고 욕하고 쓰레기라고 했겠지.”중현의 머리는 여전히 빠르게 돌아갔다.“그런데 넌 그냥 반박하면서 나를 헷갈리게 만들려고만 했어.”“기억은 잃어도 머리는 멀
강솔은 조금 뜻밖이라는 눈빛이었다.민하가 바로 알아챘다.“내가 왜 그 말을 엄마한테 직접 안 했는지 궁금하지?”“응.”“우리 엄마는 원래 걱정이 많아.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냥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치부하고 귀담아듣지 않아.”민하는 강솔과 함께 백화점 명품 매장 안으로 들어가 물건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게다가 그 남매가 집에 들어온 뒤에도 내가 딱히 적대적으로 굴지 않았잖아...”뒤의 말은 하지 않았다.하지만 강솔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뭐 마음에 드는 거 있어?”민하가 물었다.“사 줄게.”“응?”“기분 좋아서 돈 좀 쓰고 싶어.”강솔은 익숙한 명품 브랜드들을 바라봤지만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그 표정 뭐야. 마음에 안 들어?”“내가 지 대표의 선물을 받을 이유가 없잖아.”강솔은 민하와 함께 매장을 나가며 민하 말투를 흉내 냈다.“아무 이유 없이 선물을 받으면 지 대표가 나한테 무슨 함정을 파는 건가 싶을 것 같은데.”민하가 웃었다.“내가 그런 사람이야?”“응.”“그럼 내가 함정 파면 빠질 거야?”“하는 거 봐서.”“너 변했다.”민하는 여전히 태연했다.“귀엽고 세상 물정 모르던 나의 강솔을 돌려줘!”둘이 장난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매장 절반 이상을 돌았다.한 바퀴를 돌아도 강솔이 어떤 물건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자 민하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너 이렇게 물욕이 없으면 이 바닥 소문이 진짜인 거 아니야?”“무슨 소문?”“하중현이 세계 각지에서 명품을 싹 쓸어다가 네 앞에 갖다 놨다는 거.”민하는 예전엔 남의 이야기 구경하는 기분으로 들었지만 이제는 정말 궁금했다.“보석이랑 가방만 해도 온 방 안을 채웠다던데.”강솔은 잠깐 말을 잃었다. ‘온 방 안’이라는 표현은 사실 정확하지 않았다.중현이 강솔에게 사 준 물건은 방 여러 개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중 신제품과 소장 가치가 높은 보석만 눈에 띄는 곳에 따로 전시해 놓았을 뿐이다.“왜 말이 없어?”민하가 물었다.“소
“H시 젊은 세대에서 집안과 조건을 다 따질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도명란은 복잡한 표정으로 민하를 바라봤다.“지효정이 정말 리재하고 결혼하게 되면 너는 어떡하려고 그래.”진씨 집안은 내부 사정이 복잡해 결혼 상대로 적당하지 않았다.여씨 집안에는 집안을 이을 자녀가 없었고, 여윤재가 직접 키운 회사 후계자만 있었다.이리저리 따져 봐도 네 가문 가운데 가장 적합한 사람은 서리재뿐이었다.“엄마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민하가 말했다.도명란은 답답하다는 듯 딸을 바라봤다.민하는 여전히 느긋했다. 웬만한 일에는 감정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지효정을 너무 높게 보시는 건지, 서리재가 배우자 고르는 기준을 너무 낮게 보시는 건지 모르겠어요.”“얘 좀 봐요.”도명란은 강솔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놓고 판단을 맡기려는 태도였다.“내가 진지하게 얘기할 때마다 자꾸 딴소리만 한다니까요.”“저는 민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강솔은 도명란에게 쓰는 말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했다.“지효정이 서씨 집안에 들어가려면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요. 기본적인 예절만 익히는 데도 꽤 오래 걸릴 거예요.”상류층 가문 안에서는 사소한 말과 행동 하나까지도 신경 써야 했다. 손님을 대하고 사람을 만나는 방식에도 집안별로 규칙과 예법이 있었다.효정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 서씨 집안은 물론 그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규칙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게다가 서씨 집안에서 이 혼인을 받아들인다는 보장도 없어요.”강솔은 전에 한 번 봤던 서리재를 떠올렸다. 이야기를 많이 나누진 않았지만, 첫인상만으로도 집안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 강했다.민하가 턱을 살짝 들었다.“들으셨죠?”도명란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설득해 달라고 불러 온 사람이 오히려 민하 편에 서 버릴 줄은 몰랐다.“그래도...”“서씨 집안이 정말 동의한다고 해도 당사자인 서리재 씨에게는 서리재 씨 나름의 판단이 있을 거예요.”강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