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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or: 루에나
이혼 서류를 제출할 때 입고 있었던, 맞춤 회색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그의 자세는 늘 한결같았다.

느슨하면서도 냉담하고, 여유롭지만 차가웠다.

의사와 가볍게 잡담을 나누는 모습은, 방금 이혼한 사람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평온했다.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지.’

강솔의 손끝이 저도 모르게 오므라들었다.

중현을 바라보는 눈에는 분명한 불쾌와 혐오가 담겨 있었다.

그때, 주치의인 주승현이 강솔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오셨군요.”

“네.”

짧게 대답하고 시선을 피했다.

“아까 전화로 얘기 들으셨죠?”

주승현은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이건 매달 지출되는 치료비 명세서입니다. 확인하시고, 문제가 없으면 서명해 주세요.”

강솔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

숫자를 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매달 몇 천만 원에 달하는 금액들.

예전 같으면 감당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병원비... 혼자선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의사가 그녀의 얼굴색을 살피더니, 또 다른 서류를 꺼냈다.

“부담스러우시면, 비용이 조금 낮은 이쪽 옵션도 있습니다.”

새 치료안은 조금 더 저렴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매달 수백만 원이 필요했다.

강솔이 계속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자, 의사는 곁눈질로 하중현을 바라봤다.

그가 아무 말없이 가볍게 눈짓을 하자, 의사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잠깐 고민해 보시죠. 저는 다른 예약 환자가 있어서 잠깐...”

“네.”

강솔은 눈도 떼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의사가 나가며 문을 닫자, 조용한 공간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렸다.

“아무리 계산을 돌려 봐도 답이 안 나올 거야.”

중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늘 그렇듯, 담담하고 느긋한 톤이었다.

“당신 혼자로는 그 돈 감당 못 해. 특히 지금처럼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면.”

강솔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런 말을 지금 왜 해?”

“현실적인 얘기야.”

중현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말했다.

“집도 구해야 하고, 지안이도 네가 키운다며. 그 돈으론 둘 다 챙기기 힘들 걸.”

“하중현,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강솔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중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닥을 울리는 구두굽 소리가 묘하게 불편했다.

“이혼, 난 당신이 잠깐 감정적으로 그런 결정을 한 거라고 생각해.”

중현이 강솔 앞에 바짝 다가섰다.

“지금이라도 없던 일로 하면, 어머니 치료비는 내가 계속 내 줄게.”

“그리고 넌 여전히 내 아내야.”

“소아연은?”

강솔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최대한 당신이랑 안 부딪히게 할게.”

중현의 눈빛엔 미안함도, 죄책감도 없었다.

“아연이 다시는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하겠어.”

“그럼... 난 당신의 그 세심한 배려에 내가 고마워해야겠네?”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너도 알잖아.”

그는 담담하게, 마치 협상이라도 하듯 말했다.

“지금 네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넌 지금껏 경제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살아 왔어.”

“하지만 이제부터는 절약하고 아끼면서 살아야 할 텐데, 그게 쉽지 않단 말이지.”

강솔도 알고 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늘 풍요롭게 살았다.

강씨 가문이 몰락하기 전까지.

집안에 변고가 생긴 뒤에는 곧바로 중현과 결혼했다.

결혼 후에는 남편의 카드를 마음껏 쓰면서, 한 번도 궁색하게 산 적이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금 삶에 만족하고 살았을 것이다.

중현이 아연과 함께 하더라도, 절대 강솔을 나 몰라라 할 사람은 아니니까.

강솔이 원하는 건 다 들어줄 것이며, 예전과 똑같이 세심하고 따뜻하게 살필 것이다.

물질적인 것만 쫓으면서 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강솔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자존심하고 존엄 따위가 밥 먹여줘?”

중현은 그녀의 속내를 읽은 듯, 덧붙였다.

“지금 직면한 현실은 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버겁고 힘들 거야.”

“그건 내 일이야.”

강솔이 날카롭게 잘라 말했다.

“당신은 그냥 당신 인생이나 잘 살아.”

“야, 강솔...”

그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고집을 피우는 거야?”

“여보세요, 하 대표님...”

강솔은 처음으로 남편에게 존칭을 사용했다.

그건 예의가 아니라, 선 긋기였다.

“더 하실 말씀 없으면, 나가줄래? 나 의사 선생님이랑 할 얘기 있거든...”

말끝이 차갑게 떨어졌다.

강솔은 중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중현은 끝까지 차분했다.

화를 내지도,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아내를 바라봤다.

그 시선 속에서, 강솔의 마음속 방어선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여유로울까?’

‘왜 나만, 이렇게 숨이 막히는 거야?’

손에 쥔 서류가 구겨질 정도로 꽉 움켜쥔 채, 강솔은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중현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이 싸움에서만큼은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중현이 입을 열었다.

“생각할 시간 줄게. 1분.”

말투는 여전히 평온했다.

“1분 안에 마음을 바꾸면,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하겠어.”

“하지만 1분이 지나면... 넌 그냥 ‘강솔’이 되는 거야.”

“그때 가서 후회해도, 내가 다시 받아주지 않아.”

강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협박해도, 이제는 두렵지도 않았다.

그렇게 1분 시간이 지나갔다.

“좋아.”

그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선택한 거야.”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병실 안에 울렸다.

그 소리와 함께, 그녀의 심장도 내려앉았다.

‘이게... 진짜 끝이구나.’

강솔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사랑했던 남자의 뒷모습이 이토록 낯설고 차가운 게, 믿기지 않았다.

결혼 생활 동안 늘 뜨거운 사랑으로만 함께한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진지하고 애틋한 관계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믿음조차 희미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치의가 들어왔다.

“강솔 씨.”

그녀는 얼른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선생님, 오늘 주신 치료안은 좀 더 검토해 보고, 내일쯤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치료비 정산일 열흘 전까지는 결정해 주셔야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서류를 들고 병원을 나서는 강솔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 돈을 어떻게 마련하지...’

병원 로고가 새겨진 대리석 벽을 무심히 쳐다봤다.

HS그룹 산하의 최고급 종합병원.

국내외 최고 의료진, 최고 장비.

그 모든 게 중현 덕분이었다.

‘병원을 옮기면, 엄마는 더 이상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겠지.’

‘그렇다고... 그 인간에게 다시 손을 벌릴 순 없어.’

강솔의 유일한 가족, 이 세상에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준 단 한 사람.

엄마만큼은 지켜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 창밖의 풍경이 흐릿하게 번졌다.

‘지안이한테는...어떻게 말해야 할까?’

지안은 어려서부터 영리했다.

동갑내기보다 훨씬 어른스러웠고, 엄마가 힘든 티를 내면 늘 먼저 눈치채던 아이였다.

그래서일까, 이번만큼은 왠지 말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혹시 상처받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걱정은, 집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산산조각이 났다.

거실.

거기엔 소아연이 있었다.

중현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고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여긴, 그래도 당신하고 솔이가 사는 집이잖아.”

아연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운 듯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좀 그렇지 않아?”

“괜찮아.”

중현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들렸다.

“곧 이혼 절차도 끝나.”

“그래도... 혹시 강솔이 불편해하면...”

“그럴 일 없어.”

중현은 부드럽게 손으로 여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조만간 자기가 이 집 안주인이 될 거야. 강솔은 곧 나갈 거야.”

아연은 눈을 들어 중현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를 향한 눈빛. 누가 봐도 완벽한 연인 그 자체였다.

그 순간까지도 두 사람은 강솔이 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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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결코 무너지지 않아   제962화

    중현이 답장을 보냈다. [내일 오전 10시에 형 집으로 갈게.]그 짧은 문장을 보며 도현은 핸드폰을 쥔 손에 조금씩 힘을 주었다.‘이 동생 놈은 정말 잠깐도 방심할 수가 없군.’알겠다는 답장을 보낸 도현은 핸드폰을 치우고 옆에 있는 비서에게 지시했다. “진도엽한테 연락해서 나와 손잡을 생각이 있는지 물어봐.”“네.” 비서가 대답했다.도현의 안경 너머 눈은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었다.얌전히 말만 들으면, 자신도 중현에게 좋은 형이 되어 줄 생각이었다.하지만 중현에게 고분고분한 순종은 무리인 모양이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는 태휘와 연락하더니, 기억을 잃은 뒤에는 가장 믿는 사람이 형이라고 말하면서 속였다. 사람 마음을 쥐고 흔드는 데는 도가 튼 동생이었다.도현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생각이 있다면 우리 계획을 알려 주고 맞춰서 움직이라고 해. 싫다고 하면 진도엽 아버지한테 연락하고.”비서는 무언가 말하려다 망설였다.도현이 눈을 들었다. “문제 있어?”“혹시 중현 도련님께서 아시게 되면...” 비서가 겁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중현의 성격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었다. “일이 크게 번질 수도 있습니다.”“중현이도 나한테 거리낌없이 문제를 만드는데, 내가 겁낼 게 뭐지?” 도현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겉으로는 여전히 점잖고 부드러운 모습이었다.단아만 건드리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좋게 넘어갈 수 있었다.하지만 태휘와 손잡고 자신을 공격한 이상, 도현도 그에 맞게 응전해 줄 수밖에 없었다.“또 하나.” 도현은 강솔의 성격을 떠올리고 덧붙였다. “해외에도 사람을 보내. 소담이랑 토니를 놓치지 말고 잘 지켜보라고 해. 진씨 집안 쪽에서 일이 틀어지면 우리가 직접 움직인다.”비서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대답했다. “알겠습니다.”도현은 소파에 앉아 손안의 잔을 가볍게 돌렸다. 잔에 담긴 술이 잔잔하게 흔들렸다.‘중현아, 얌전히 말 듣는 게 좋을 거야.’‘안 그러면 강솔이 너 때문에 고생하게 될 테니까.’.

  • 난 결코 무너지지 않아   제961화

    “그럴 리 없어.” 홍일이 말했다.임훈은 홍일을 놀리는 데 재미를 붙였다. “왜 없어?”홍일은 기계처럼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누구든 우리 아가씨가 성공하는 데 걸림돌이 되면, 우리가 망설이지 않고 걷어차 버릴 거야.”“우리 보스는 아가씨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라니까.” 임훈이 반박했다.홍일이 대꾸했다. “어차피 돌이잖아. 다를 게 없지.”임훈은 할 말을 잃었다.임훈이 신동을 돌아보며 물었다. “홍일은 원래 저래?”신동이 고개를 끄덕였다.임훈이 다시 물었다. “한 대 때려 주고 싶지는 않아?”신동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싶지. 그런데 못 이겨.”임훈은 전에 겨뤘던 일을 떠올리고는 입 밖에 내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확실히 이길 수 없었다.홍일의 싸움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밖에서 그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안에서도 한참 차분한 이야기가 이어졌다.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야 강솔이 마음에 담아 둔 말을 꺼냈다. “지안 아빠.”“응?” 중현의 말끝이 살짝 올라갔다.“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 강솔은 진심이었다. 표정에도 그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당신이랑 다시 만날 생각 없어. 재결합할 생각은 더 없고.”중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강솔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중현을 보았다.‘알면서 왜 나한테 시간을 쏟는 거지?’“널 좋아하고 네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건, 그냥 내 일이야.”중현이 진심과 다정함이 담긴 검은 눈으로 강솔을 바라보았다. “결과가 어떻든 나는 받아들일 거야.”“물론 언젠가 네가 날 좋아하게 된다면, 나야 기쁘겠지만.”강솔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지금의 중현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다. 강솔이 찾아갔을 때 얼마나 냉정했는지도, 이혼을 두고 다투던 때 얼마나 모진 말을 했는지도 기억에 없었다.그 모든 일은 둘만 알고 있었다.강 비서와 임훈, 임풍도 대략적인 사정만 알 뿐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이번에 돌아가면 보름쯤

  • 난 결코 무너지지 않아   제960화

    중현이 계속 물었다.“특별히 좋아하는 것이나 먹고 싶은 건?”강솔은 담담하게 답했다.“없어.”“그럼 내가 적당히 시킬게.” 중현은 그렇게 말하며 몇 가지 메뉴를 골랐다.주문하는 메뉴를 듣던 강솔의 움직임이 잠깐 멈췄다.‘이거...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인데?’‘기억이 돌아온 건가?’“이번에 J시 돌아가서 강 비서 애들이랑 연락했어. 네 취향도 조금 들었고.” 중현은 주문을 끝낸 뒤 메뉴판을 태휘에게 넘겼다. 태휘는 거의 없는 사람처럼 두고 강솔에게 계속 말했다. “같이 밥 먹은 지 오래돼서 지금 입맛이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더라.”강솔은 바로 반박했다.“지안이 데리러 왔던 날 같이 먹은 건 밥도 아니었나?”강솔이 사정없이 받아쳐도 중현은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함께 지낸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중현은 강솔이 아무에게나 함부로 말하거나 쏘아붙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강솔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건 적어도 중현 앞에서는 자신을 꾸밀 필요가 없다는 뜻처럼 느껴졌다.“그날 사람 많았고, 너는 모든 메뉴 조금씩 먹었잖아.” 중현은 사람을 세세하게 보는 편이었다. “뭘 좋아해서 먹은 건지, 그냥 맛만 본 건지 모르겠더라.”강솔은 미간을 좁힌 채 중현을 바라봤다.중현이 시선을 마주했다. “왜?”강솔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짧게 끝냈다. “아무것도 아니야.”‘당신이랑 같이 있으면 CCTV 하나 옆에 둔 것 같아. 무서워라.’다시 생각해 보면 중현이 기억을 잃은 뒤 지금까지 강솔에게 잘못한 일은 없었다. 지안을 데려왔을 때도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알린 건 맞지만, 결국 아이를 강솔의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줬다.지금의 중현은 과거의 기억도 없으면서 강솔이 뭘 좋아하는지 알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주변 사람들이 온갖 말을 주입하는 상황에서도 다시 강솔을 믿었다.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살핀 태휘는 핑계를 하나 만들어서 자리를 비켰다. 둘만의 시간을 남겨 준 셈이었다.“솔아.” 중현이 불렀다.강솔

  • 난 결코 무너지지 않아   제959화

    태휘는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유치하게.’‘나이가 몇인데.’“뭘 멍하니 있어? 얼른 가.” 진환식이 재촉했다.“솔이랑 저녁 약속 있습니다.” 태휘가 설명했다. “조금 있다 가겠습니다.”“점심도 안 먹었는데 뭐가 급해.” 진환식은 방금 태휘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탓에 더 언짢았다. “갔다가 저녁때 다시 와.”태휘가 되물었다. “정말 제가 가길 바라십니까?”진환식이 바로 반박했다.“뭘 또 확인해?”“오늘 종일 고모 피해서 다니셨다면서요?” 태휘는 체면을 봐주지 않고 바로 짚었다. “예전에 크게 앓아 입원했던 일 물어볼까 봐 그러신 겁니까?”진환식은 바로 정신이 번쩍 들어 태휘를 노려봤다. “안에서 뭐라고 했어?”“별말 안 했습니다.” 태휘는 장기판의 말을 하나씩 정리하며 무심하게 말했다. “제가 아는 건 고모도 다 압니다. 고모가 어떤 분인지 할아버지가 제일 잘 아시잖습니까.”진환식은 마음이 복잡해져 말없이 서 있었다.짧은 사이 머릿속으로 온갖 상황을 상상한 끝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숙이... 뭐라고 안 했어?”태휘는 더 불안하게 만들지 않았다. “네.”진환식이 생각하지도 못했다.“진짜?”태휘는 다시 답했다.“네.”진환식의 팽팽하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사실 강정숙을 피한다기보다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딸이 자기 일을 끝까지 조사하려 들까 봐 두려웠고, 자신에게 더 실망할지도 겁이 났다.이미 오래전에 충분히 실망했을 텐데도 그랬다.“장기 더 두시겠습니까?” 태휘가 정리한 판을 가리켰다. “안 두시면 저 먼저 가겠습니다.”진환식은 태휘를 빤히 바라봤다.태휘는 그 눈빛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진환식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너 방금 저녁에 솔이랑 밥 먹는다고 했지?”“네.”태휘는 사실대로 답했다.“왜 둘이 밥을 먹어?” 진환식은 전에 강솔에게서 중현도 단아 일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게 떠올랐다.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너 말고

  • 난 결코 무너지지 않아   제958화

    중현은 강솔이 도현에게 이용당할까 걱정해 늘 거리를 두라고 여러 번 말했다.지금 보니 단아가 떠났는데도 도현이 저렇게 차분한 것만으로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단아가 떠나든 말든 상관없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일을 꾸미는 건지 알 수 없었다.“솔아.” 태휘가 불렀다.강솔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왜요?”태휘는 J시에서 중현에게 약속했던 일을 떠올렸다. 한참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 시간 있어?”“네.” 강솔은 별생각 없이 답했다. “왜요?”“같이 밥 먹을래?” 태휘는 이유를 숨기지 않으려 했다.강솔이 바로 그 제안을 받았다.“좋아요.”태휘는 잠깐 말이 없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하중현도 와.”강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이제 강솔은 중현을 만나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현이 나타난다고 해서 감정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고마워.” 태휘가 진심으로 말했다.돌아오는 길 내내 태휘는 강솔이 중현 때문에 식사 자리를 거절하면 어떤 식으로 중현에게 설명할지 고민했다.당시에는 단아의 상황이 워낙 급해 다른 것까지 따질 여유가 없었다.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뒷마당에 도착했다.태휘 곁에 누군가 함께 오는 걸 본 진환식은 반가움이 올라오려 했다. 하지만 바로 옆 사람이 단아가 아니라 강솔이라는 걸 알아보고 감정이 복잡해졌다.잠깐...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태휘 왔구나.” 여윤재가 장기 말을 내려놓았다. “와서 네 할아버지랑 한 판 둬라. 오전 내내 져서 기운 빠지신 것 같다.”진환식은 바로 반박했다. “누가 오전 내내 졌어? 둘 다 두 판씩 이겼잖아. 그게 어떻게 내가 진 거야!”“단아 일 물어보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여윤재는 두 사람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태휘가 회장님 기분이 안 좋은 줄 알면 대답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할 겁니다.”진환식은 머리를 굴렸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네가 한 판 둬.” 여윤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 난 결코 무너지지 않아   제957화

    강정숙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두 오빠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 예전과 똑같았다.“어제 일은 감사했습니다.” 태휘가 진심을 전했다.강정숙이 물었다. “넌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할아버지의 마음과 몸 상태를 잘 챙기고,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게 먼저입니다.” 태휘는 이미 충분히 고민해 둔 상태였다. “과거 일은 할아버지가 더 파고들고 싶어 하지 않으시면 당분간 묻어 두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강정숙은 태휘의 눈을 보며 물었다. “네 할아버지 때문이야, 아니면 네 아버지 때문이야?”태휘는 솔직하게 답했다. “할아버지 때문입니다.”예전에 태휘도 강솔처럼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지만, 진환식이 태휘에게 직접 더 조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진환식은 이 일이 온 집안과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진씨 집안이 다시 싸움에 빠지는 것도 싫어했고, 추측으로만 남아 있는 일을 진짜 사실로 눈앞에서 확인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진무천 쪽에서 직접 인정한 적도 없고, 태휘 쪽에도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모든 것은 아직 추측에 머물러 있었다.정말 사실로 확인되면 진환식에게는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었다.의심과 확정된 사실은 받아들여지는 무게가 달랐다.강정숙은 짧게 대답하고 더 말하지 않았다.진환식 본인이 더 알아보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이라면 진씨 집안에서 쫓겨난 딸인 강정숙도 굳이 깊게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태휘가 말한 대로 주변을 더 세심하게 살피고, 같은 일이 자기 눈앞에서 반복되지 않게 막는 정도면 됐다.“아버지는 뒷마당에서 여윤재랑 장기 두고 있어.” 이야기가 끝나자 강정숙이 화제를 바꿨다. “요즘 네 얘기 자주 했어. 네가 돌아온 거 알면 좋아하실 거야.”태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가 보겠습니다.”“응.”강정숙은 대답했다.태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J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강솔을 바라보는 표정에는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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