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진화연을 만난 건 이번이 두 번째였지만, 여전히 강솔의 눈길을 빼앗길 만큼 멋진 사람이었다.“화연 이모.”“내가 늦었다, 기다리게 했네.”진화연은 강솔의 맞은편에 앉았다. 말을 건넬 때 입가에는 다정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두 사람은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았다.강솔은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진화연에게 설명했다. 전화로 이미 말하긴 했지만, 그것도 이미 며칠 전 일이었다.“괜찮아. 네가 가 보면 혹시라도 다른 성과가 있을까 해서였어.”진화연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상대는 어쨌든 중현이었다.“협의가 안 됐으니, 내일 법원에 소장 접수할게. 이후 절차는 내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오면 돼.”강솔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진화연이 말했다.“다만 한 가지는 미리 알아둬야 해.”강솔이 대답했다.“말씀하세요.”“긴 싸움이 될 수 있어.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진화연은 강솔이 중간에 무너지지 않도록 가능한 상황을 먼저 짚어 주었다.“하 대표가 이혼을 막으려고 여러 방법을 쓸 가능성이 높아.”강솔도 미리 알아본 내용이 있었다.“알고 있어요.”법원 연락을 못 본 척해 서류 송달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고, 결국 공시송달 절차까지 끌고 갈 수도 있었다. 이후에는 관할권 이의신청이나 조정 절차를 꺼낼 수도 있었다.어떤 행동들은 실제로 효과가 크지 않더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 쓰이곤 했다.그런 과정이 하나씩 이어지면, 실제 재판 절차에 들어가기까지 1년 가까이 걸릴 가능성도 있었다.“그럼 됐어.”진화연은 준비해 온 자료를 강솔에게 건넸다.“이거 확인해 봐. 문제 없으면 내일 바로 진행할게.”강솔은 자료를 받아 훑어보았다.“문제없어요.”진화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두 사람은 이후에도 몇 가지 세부 사항을 더 이야기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이미 오전 11시가 넘어 있었다.강솔은 진화연에게 점심을 대접하려 했지만, 진화연은 다른 약속이 있어 함께 먹지 못했다. 대신 진화연은 강솔에게 돌아가는 길 조심하고, 집에
“회장님, 하도현 도련님 연락처 필요하십니까?”강 비서가 붕대를 다시 감아 준 뒤 물었다.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제가 드리겠습니다.”“필요 없다.”여윤재는 아직도 안색이 창백한 중현을 한 번 훑어보았다.“나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 일까지 챙길 만큼 한가하지 않다.”여윤재는 말을 끝내자마자 돌아섰고, 더 머물지 않았다.차에 오른 뒤에야 여윤재는 자신이 중현의 차창을 두드린 이유를 떠올렸다. 애초에 중현이 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지 물으려던 참이었다.여윤재는 몸을 돌려 뒷유리 너머로 중현의 차를 한 번 바라보았지만, 더 생각하지 않았다. 곧바로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지시했다.중현은 바로 떠나지 않았다. 강 비서에게 차를 비교적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옮겨 세우게 했다. 밤 10시 반, 불꽃이 터지며 별장 앞 하늘이 환하게 밝아지자 중현은 비로소 그곳을 떠났다.중현은 핸드폰을 꺼내 강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생일 축하해.]강솔은 메시지를 보았다. 창밖에서 잇따라 피어나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저 불꽃이 중현이 준비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H시도 J시처럼 특별한 사정이나 허가가 없으면 불꽃놀이가 금지되어 있었다. 예전 생일마다 중현은 관련 부서와 미리 협의했고,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허가받아 당당히 불꽃을 올렸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밤 12시.강솔은 중현과의 대화창을 열고 ‘생일 축하해’라는 한 마디를 입력했다. 손끝이 전송 버튼 위로 움직였고, 누르려던 찰나에 망설임이 찾아왔다.요 며칠 중현은 강솔에게 J시로 돌아가자는 말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감정도 몹시 안정되어 보였다.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 이혼 전이었다.강솔은 한참 고민하다가 입력했던 글자를 모두 지웠다.마침 그때, 중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내 생일 됐네. 무슨 소원 빌고 싶어? 나랑 상관없는 걸로.]강솔은 잠시 멈췄다.해마다 생일이면 강솔은 소원을 두 개 빌었다. 하나는 자신의 생일 소원이었고, 하나는 자정이 지난 뒤 중현의
“대표님.”강 비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약상자를 뒷좌석에 올려놓았다.중현은 입고 있던 짙은 색 캐주얼 상의를 벗었다. 얇게 잡힌 근육 위로 붕대가 감겨 있었고, 상처 부위에서는 이미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드레싱 갈 때 좀 아프실 수 있습니다.”강 비서는 구급상자를 열었다. 차 안은 이미 소독해 둔 상태였다.“조금만 참으십시오.”오기에 앞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강 비서는 의사에게 드레싱 하는 법을 배워 두었다.배워 두길 잘했다.안 그랬으면 병원으로 돌아갈 때쯤 더 심해졌을 것이다.“괜찮아. 대충 해.”중현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강솔과 지안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오후 내내 참고 있었다. 이 정도 통증은 견딜 만했다.강 비서가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막 손을 움직이려던 때, 누군가 차창을 두드렸다. 중현이 고개를 돌리자 차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여윤재였다. 손을 들어 창문을 내리려 하자, 강 비서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다치신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습니다.”“여긴 H시야. 웬만한 소식은 이쪽 4대 가문 눈을 피해 갈 수 없어.”중현은 상황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크게 개의치도 않았다.“그리고 저분은 이미 알고 있어.”저녁 식사가 그 증거였다.일부러 상처에 좋지 않은 음식만 중현 앞에 올려놓은 걸 보면, 여윤재는 분명 알고 있었다.중현이 강솔 앞에서 여윤재를 바로 들춘 것도, 나름대로 되갚아 준 셈이었다.차창이 내려갔다.강 비서는 계속 중현의 상처를 살피며 약을 갈고 있었다.붕대에 묻은 피를 본 여윤재의 눈에 뜻밖이라는 기색이 스쳤다.“이렇게 좋은 패를 왜 아까 안 써먹었냐? 솔이가 이거 봤으면 마음이 약해져서 널 걱정했을지도 모르는데.”중현은 오후 내내 너무 태연했다. 그래서 여윤재는 소문이 과장된 줄 알았다.그런데 중현은 그냥 참고 있었다.“회장님은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이 회장님 때문에 걱정하는 걸 감수하실 수 있습니까?”중현이 물었다.“평소
강솔은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강정숙은 강솔을 다시 서재로 데리고 가 오늘 대화에서 강솔이 체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짚어 주었다.“그 20% 지분은 네가 받아야 할 몫이야. 저쪽에서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쓸 필요 없어.”“네.”강솔은 고개를 끄덕였다.처음에는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당시 가격 그대로 수백 배나 오른 주식을 되사는 게 괜찮은 일인지 고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지분 매각 협의서에 그런 조항이 들어간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양심에 찔려서 넣어 둔 조항일 리는 없었다.정말 양심이 있었다면, 애초에 강정숙에게 그 지분을 팔라고 몰아붙이지도 않았을 테니까.그 뒤 30분 동안, 강정숙은 예전 JX그룹과 관련된 일을 강솔에게 대략 설명했다. 진씨 집안 사람들이 강정숙을 어떻게 대했는지, 진환식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짧게 넘겼을 뿐, 회사와 관련된 일만 중점적으로 이야기했다.그런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난 강솔은 한참 동안 마음이 아팠다.“중요한 건 대충 이 정도야.”강정숙이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나중에 다른 세부 내용이 생각나면 또 말해 줄게.”“엄마...”“응?”강솔은 따뜻한 엄마가 그렇게 많은 일을 겪어 왔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강솔은 이번만큼은 단단히 마음먹었다.“제가 반드시 엄마 것을 되찾아올게요.”JX그룹을 살린 사람은 강정숙어었다.중요한 거래처를 직접 찾아가 설득한 사람도 강정숙이었다.지분 역시 강정숙이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 낸 것이었다.그런데 끝내 여자가 회사를 쥐고 있다는 이유로, 세간의 말과 눈총을 핑계 삼아 진씨 집안 사람들은 온갖 수를 써서 강정숙의 지분을 빼앗다시피 내놓게 했다.정말 끝까지 썩어 빠진 사람들이었다.“응, 나도 내 딸을 믿어.”강정숙은 진심으로 강솔을 믿었다....같은 시각, 아래층.중현은 아직도 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여윤재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여 회장님은 아직도 안
자기 아이가 자신을 싫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강솔이 자신과 정숙의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여윤재는 20년 넘게 고목 껍질처럼 버티던 몸에 다시 생기가 도는 기분이었다.강솔을 데려오기 위해 여씨 집안으로 돌아가 철저히 준비까지 해 두었다.“필요 없습니다.”강솔의 거절은 단호했다.“회장님께서 정말 그때 일로 엄마에게 미안하셨다면, 20년이 넘게 지나서야 사과하진 않으셨을 거예요.”그 말이 나오자, 구경하듯 보고 있던 진환식의 눈빛도 조금 달라졌다.생각해 보면 진환식의 방식도 여윤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정숙아.”여윤재는 강정숙을 통해 관계를 풀어 보려 했다.“내 딸의 뜻이 내 뜻이야.”강정숙에게 여윤재를 향한 감정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의 일과 20년이 넘는 세월은 남아 있던 마음마저 닳게 만들기에 충분했다.“케이크 드셨으면 이제 가셔.”여윤재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한참 침묵하던 끝에, 여윤재는 결국 한마디를 꺼냈다.“솔이는 그래도 내 딸이야.”강정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증거는?”중현이 막고 있는 탓에, 여윤재는 강솔과 친자 확인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중현을 보는 눈빛이 더 싸늘해졌다.중현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신경 써야 할 사람은 강솔과 강정숙뿐이었다.인정받지 못한 장인어른 따위는... 미움을 사도 상관없었다. 설령 여윤재가 나중에 뻔뻔하게 매달려 강솔과 강정숙의 용서를 받아 낸다 해도, 여윤재의 집안 내 입지는 쉽게 흔들릴 것이다.작은 소동이 지나간 뒤, 강솔은 케이크를 자르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생일 절차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내내 침묵하던 진환식이 강솔과 강정숙 앞으로 다가왔다.“시간 있느냐? 너희와 이야기할 일이 있다.”네 사람은 위층 서재로 올라갔다.강정숙과 강솔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태도를 보자, 진환식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강솔이 바로 물었다.진환식은 김 집사를 한 번 보았다.김 집사는 가
식사 자리의 분위기는 유난히 묘했다.강솔은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쪽에서 나눴던 대화의 일부를 들었다. 그중에서도 진환식이 했던 아이는 ‘자네가 솔이를 지우라고 정숙이를 몰아붙였잖아’라는 말이 뇌리에 깊게 박혔다.그 말 때문에 강솔이 여윤재를 향해 품고 있던 인상은 점점 더 나빠졌다.여윤재는 정작 강솔이 그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식사 중에서는 세대가 다른 세 사람이 서로 신경전을 벌였다. 진환식이 여윤재를 못마땅하게 보다가, 어느새 진환식과 여윤재가 함께 중현을 못마땅하게 보는 식이었다.세 사람은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겉으로는 평범한 말처럼 들렸지만, 말끝마다 비꼬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여긴 가족 식사 자리예요. 사업상 만난 식사 자리가 아니고요.”강솔은 세 사람이 바깥에서 거래처 사람들과 협상하듯 굴자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세 분이 누가 말솜씨가 더 좋은지 겨루고 싶으시면, 따로 약속 잡아서 천천히 하세요.”세 사람은 그제야 얌전해졌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저녁을 준비한 셰프는 강정숙이 특별히 밖에서 부른 사람이었다. 강솔의 생일을 제대로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자리를 세 사람이 비즈니스 식사처럼 만들어 버리니, 강솔이 나서서 막을 수밖에 없었다.강솔은 중현 앞에 환자가 먹기에는 맞지 않는 음식이 한 접시 수북하게 쌓인 것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중현은 강솔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바로 설명했다.“여 회장님이랑 진 회장님께서 억지로 올려 주신 거야. 내가 집은 거 아니야.”진환식과 여윤재는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강솔은 마음속 감정을 눌러 삼키고 더 말하지 않았다.그 뒤로 한 시간 가까이 모두 평범하게 식사했다. 더는 누가 일을 만들지 않았다.서로 못마땅해하는 세 사람이 갑자기 얌전해진 건 아니었다. 진환식과 여윤재는 중현에게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어떤 일은 한 번 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저녁 식사가 끝났다.진환식과 여윤재는 자리에 앉은 채 말을 꺼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