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는 두 사람 뒤를 조용하게 따랐다.이를 힐끔 쳐다보던 소우희가 소우연에게 말했다.“언니 호위무사가 우리를 계속 따라오고 있네?”“할 말 있으면 그냥 해.”‘진우가 따라오는 게 뭐! 이게 안전감이라는 거거든!’“이 옥패의 주인이 누구인지 언니는 정말 모르는 거야?”소우희의 물음에 소우연이 고개를 저었다.“몰라.”소우연은 옥패를 가지고 있다가 경성에 돌아가면 사람 시켜 알아보려고 했는데 그럴 새도 없이 며칠 사이에 옥패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한편, 거짓말이 아닌 듯한 소우연의 대답에 소우희가 몰래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때 당시 남강에서 돌아오자마자 소우희는 사람을 시켜 옥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였고 수소문 끝에 겨우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이 옥패는 회남왕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다.그 말인 즉, 소우연이 구해줬던 그 소년이 바로 이육진이라는 뜻이다.만약 이육진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금보다 소우연에게 더 잘해주겠지?그리고 오늘, 소우희는 바로 그 옥패를 이용하여 소우연을 불러냈다.“옥패는?”소우연이 묻자 소우희가 입술을 살짝 오므리며 대답했다.“나한테 있어.”“그럼 네가 훔쳐간 거네.”“훔쳐가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건 엄연히 내가 주운 거야.”‘허허… 주웠다고? 소우희 얘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뻔뻔해지네.’“옥패는 평생 못 돌려받겠네.”“언니, 언니 것이 아닌 물건을 탐내지 마.”‘내가 미쳤어? 이 옥패를 너한테 돌려줬다가 그걸 이육진이 보기라도 하면 네가 자신을 살려줬던 사람이라는 걸 알 텐데? 그럼 이육진이 너한테 더 잘해주겠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난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소우연 넌 평생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 돼!’이런 생각에 소우희의 웃음이 점점 더 짙어졌다.“너랑 더 이상 할 말 없어.”한 마디 남긴 소우연이 돌아서서 떠나려던 그때, 소우희가 말했다.“언니를 만나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누구?”소우연은 그자가 혹시 이 옥패의 주인
탁자 앞에 앉아있던 소한준은 주먹을 꽉 쥔 채 기고만장하게 말하는 소우연을 보며 화가 더할 나위 없이 치밀었다.예전의 소우연은 감히 소한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는데 지금은 심지어 기세 등등하기까지 하다니!“뭐라고 하였습니까? 지금 왕비가 됐다고 친정 가족들이 눈에 뵈지도 않은 겁니까?”“그렇습니다. 장군님 아직도 그걸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왕비…”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하게 듣고 있던 소우희가 입을 삐죽 내밀며 소한준에게 고자질하듯이 말했다.“오라버니, 저 태도 좀 보십시오! 소우연에게 이제 그 어떤 말도 안 통합니다!”“우리 사이에 할 말이 있긴 해? 이제 얘기해봐. 그 옥패를 네가 가지고 있어?”소우연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소우희는 서러운 표정으로 소한준을 쳐다보았고 소한준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소우연에게 말했다.“도대체 어떻게 해야 아버지와 두 형들에게 진실을 얘기할 겁니까? 우리 가문에서 진정으로 의술을 익힌 사람은 왕비가 아니라 우희이지 않습니까!”“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겁니까?”씁쓸하게 웃던 소우연은 이내 고개를 돌려 소우희를 쳐다보았다.“네가 이런 말로 소 장군을 속은 거야? 너 정말 양심이 있긴 해?”“아니야! 난 속인 적 없어! 오라버니, 소우연 좀 보십시오! 저를 죽일 듯이 째려보면서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하고 있습니다!”“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하는 사람은 소우희 너잖아!”“난,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 어떻게 날 이렇게 망가트릴 수가 있어? 내가 평춘왕 저택에 시집간 게 너와 회남와의 책임이 조금도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소우희의 뻔뻔한 태도에 소우연은 이제 밖에서도 소우희와 다정한 자매 연기를 더 이상 못할 것 같았다.그녀와 소우희는 이제 명백한 원수이다!전생의 잔인한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온 소우연은 심장이 찢어지듯 아팠다.다른 건 몰라도 전생에 소우희가 소우연에게 회남왕 저택에서 도망치라고 부추기지 않았다면 소우연은 그렇게까지 처참한 죽음을 당하
깊이 숨을 들이마신 소한준은 소우희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눈빛만으로 서로의 뜻을 알았다. 결국 소한준이 소우희의 제안에 동의한 것이다.“됐으니, 일단 앉아서 차나 마시자.”소한준은 옆에 있던 의자를 가리키며 소우희와 소우연에게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소우희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지만, 둘의 시선은 모두 소우연에게 쏠렸다.소우연은 두 사람을 흘긋 바라보며 방안의 분위기가 매우 불쾌하다고 느꼈다. 만약 자신을 불러낸 사람이 소우희란 걸 알았다면 십중팔구 오지 않았을 것이다!애초에 그녀는 전에 치료해 준 그 소년이 소우희 손에 붙잡혔다고 생각했고, 소우희가 그를 미끼로 이용할까 염려되어 따라온 것이었다.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그 옥패 역시 분명히 소우희의 손안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우희는 절대로 자신과 옥패 이야기를 길게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뒤돌아 걸어 나갔다.소우희는 초조해져 소한준의 어깨를 가볍게 밀며 말했다.“오라버니, 이대로는 저 정말 소우연 때문에 죽어요. 아버님, 큰 오라버니, 둘째 오라버니와 할머님까지 모두 저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할 게 분명해요…”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매우 가련한 모습이었다.소한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침내 탁자 위의 찻잔을 들어 그대로 던졌다.찻잔이 소우연의 목덜미를 명중하자, 그녀는 몸을 한 번 떨고 곧바로 쓰러지려 했다.“왕비마마, 괜찮으십니까!”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는 매우 컸다. 밖에 있던 진우의 귀에도 그대로 들렸다. 검을 쥔 채 선방 문 앞에서 즉시 물었다.이때 방 안에서 하얀 옷을 입고 쓰개치마를 쓴 여인이 나와 밖을 향해 말했다.“아무 일도 없다.”진우는 소우연의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방 안에서 소한준은 하얀 옷을 입은 그 소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녀의 목소리가 소우연과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소우희는 그의 의혹을 알아챈 듯 말했다.“오라버니,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제가 지금 소우연을 객줏집으로
진우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알겠습니다. 그럼 소인은 문밖에 있겠습니다.”“좋다.”방 안에서 소우희가 큰 소리로 말했다.“좋아요. 언니가 저랑 이야기하기 싫다면 전 좀 쉬고 있을게요. 오라버니, 언니랑 이야기 좀 해주세요.”소한준도 이에 대답했다.“알겠다. 그럼 너는 일단 쉬고 있거라.”“네, 오라버니.”소우희는 곧바로 검은 옷을 입은 호위의 도움을 받아 뒷창으로 나갔다.소한준은 하얀 옷을 입은 여인에게 말했다.“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느냐?”아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와 대각선 방향으로 단정하게 앉아 작게 물었다.“이름이 무엇이냐?”“소녀는 아령이라 합니다.”소한준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아령과 간간이 말을 나누었다.밖에 있던 진우는 여전히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후, 마침 정연이 돌아와서 그에게 물었다.“왕비마마께서 아직 안에 계십니까?”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네.”“왕비마마께선 평소 소씨 가문과 사이가 좋지도 않으신데, 어찌 이렇게 오래 이야기를 나누신단 말입니까?”진우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연과 눈이 마주치며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설마 왕비마마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왕비마마…” 진우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정말 별일 없으십니까?”방 안에서 남녀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명확하진 않았다. 그래도 진우는 확실히 소우연이 소한준과 이야기하는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방 안에서 아령이 잠시 긴장한 표정을 짓더니 밖을 향해 말했다.“나는 괜찮으니 마차나 준비해라. 곧 관저로 돌아갈 것이다.”그제야 진우와 정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정연은 밖에서 기다리고, 진우는 운불사 마구간으로 마차를 가지러 갔다.소한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아령과 함께 천천히 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내가 배웅해주마.”아령은 소한준의 뒤를 따르며 작게 답했다.“저와 소우희는 평생 화해할 일 없을 테니 헛수고하지 마십시오.”“그래도 우리는 뼈
진우는 예의고 뭐고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정연을 마차에 태우고는 곧장 진원 장군부의 마차를 쫓기 시작했다.처음엔 꽤 힘들게 뒤쫓아야 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진원 장군부의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며 자신들을 따돌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정연이 말했다.“왕비마마께선 분명 소씨 가문 사람들을 가장 싫어하셨는데 말이죠… 오늘 대체 무슨 말씀을 나누신 건지 사이가 좋아진 듯 보이네요.”진우도 영문을 몰랐다.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그래도 본래 남매지간이니, 혈육의 정이 아주 없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정연뿐 아니라 진우 자신조차도 소우연이 소씨 가문에 품은 적개심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물론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소우연의 입장이라면 소씨 가문에 버려져 대신 회남왕부로 시집을 가야 했다면 그 역시 화가 났을 테니까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소우연과 이육진의 사이도 좋아졌는데, 왜 여전히 소우연은 소씨 가문을 용서하지 못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어느덧 저녁 무렵이 되어 마차는 성문을 지나 불빛 환한 거리를 지났다.반 시진이 지나고, 진원 장군부의 마차는 포목점 앞에서 멈춰 섰다.진우와 정연도 서둘러 따라잡자, 아령은 돌아보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들어가서 천을 좀 가져올 테니,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거라.”정연이 말했다.“소녀가 함께 들어가겠습니다.”아령은 아무 말 없이 소한준을 바라보았다. 소한준이 정연을 막으며 말했다.“회남왕부의 하인들은 참으로 방자 하구나. 이제 주인의 말까지 거역하려 드는 것이냐?”정연은 바로 반박했다.“소장군께서 오해하시는 겁니다. 소녀는 그저 왕비마마의 안위가 염려되어 함께 가려고 한 것뿐입니다...”“상운국의 태평성세에 무슨 위험이 있겠느냐?”이런 식으로 시간을 끄는 바람에, 진우는 더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을 지나쳐 곧장 포목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막 들어가자마자 아령의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진우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밖에서는 소한준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만두
진우는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하며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은 이미 선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소우희는 또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진우가 급히 물었다.“너희들이 나올 때 소장군과 왕비마마뿐이었느냐? 소우희는 어찌 되었느냐?”“아씨요…?” 정연이 크게 외쳤다. “아씨는 없었습니다. 계시지 않았어요!”진우는 주인을 노려보며 말했다.“왕비마마를 찾지 못하면 왕야께서 분명 노하실 것이다. 그때 가면 그 누구도 왕야의 분노를 견디지 못할 거야!”주인은 두려워 무릎을 꿇었다.“나으리, 소인은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말로요! 왕비마마께서 왜 하필 제 가게에서 도망치셨는지 소인은 정말 모르겠습니다!”진우는 사다리 쪽으로 가서 위를 보았다. 사다리 위엔 진흙 발자국이 선명했고, 만져보니 아직 촉촉했다. 이는 왕비가 확실히 사다리를 타고 도망쳤다는 증거였다.하지만 왕비는 어째서 자신과 정연을 피해 도망쳤단 말인가?이상하다!모든 것이 이상했다!진우는 더 이상 정연에게 신경 쓸 겨를 없이 바로 경공을 펼쳐 회남왕부로 달려가 회남왕에게 이 일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회남왕부에 돌아갔을 때 그가 본 사람은 간석뿐이었다.“태감 나리, 왕야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진우는 초조하게 물었다.간석이 불진을 휘두르며 말했다.“왕야께서는 왕비마마께서 운불사에 가신 걸 알고, 진규를 데리고 직접 모시러 가셨네.”“뭐라고요…?”운불사로 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은 서로 달랐다. 그렇다면 그들은 서로 엇갈렸을 가능성이 컸다!“큰일이군!” 진우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간석은 당황한 듯 되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냐? 네가 왕비마마를 모시고 운불사로 간 것 아니었느냐? 헌데 어찌 혼자 돌아온 것이야?”그는 진우 뒤편을 살폈지만 왕비와 정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왕비마마께서 사라지셨습니다!”진우는 서둘러 돌아서서 즉시 호위들과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암위 몇 명을 급히 소집하기
“그렇다면 어째서 소 장군을 추천하지 않았느냐?”“게다가 당시 남강 전투에서 소 장군이 출정하여 적지 않은 공을 세우지 않았느냐? 실상은 진 장군보다 소 장군이 더 적합하다고 보는데.”이육진이 담담히 대답했다.“아바마마, 소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그는 스스로를 ‘소자’라 칭했다.황제 앞에서 ‘신’이 아닌 ‘소자’라 칭하는 것은, 좀 더 친밀감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황제는 순간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오늘따라 유독 이육진과의 대화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그 옛날, 이육진이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다리까지 불구가 되었을 때, 조정 전체가 발칵 뒤집혔었다. 대신들은 앞다투어 그를 회남왕으로 책봉하라 청했고, 그로 인해 황태자였던 이육진의 지위를 강등시키려는 듯한 분위기마저 형성되었다.당시 이육진은 미쳐 날뛰듯 전국을 뒤집어 자신을 배신한 자들을 찾아냈고, 그로 인해 경성은 큰 혼란에 휩싸였다. 무고한 많은 이들이 옥에 갇히는 피해를 보았다.황제로서 그는 온 힘을 다해 대신들의 입을 막고 태의원과 민간의 명의들을 총동원하여 이육진을 치료했다.하지만 그의 얼굴과 두 다리는 끝내 고칠 수 없었다.태자의 지위를 보장할 수 없게 되자, 황제는 어쩔 수 없이 강경한 수단을 써서 그동안 발생한 억울한 사건들을 정리하고 이육진의 평생 안위를 지켜줄 수밖에 없었다.회상은 언제나 가슴을 아프게 했다.이 아들은 수완이 탁월하여, 황제인 그조차 회남왕부에 첩자를 심는 것이 불가능했다.덕빈만이 이육진의 모친으로서 은밀히 사람을 둘 수 있었는데, 그것 역시 이육진 자신이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는 덕빈을 통해 그 부부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그런데 최근, 덕빈의 사람조차 이육진이 철수시켜 버렸다. 이제 황제는 이육진과 소우연 사이가 정말 좋은지 나쁜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아들아, 소우연은 소씨 가문의 적녀다. 네가 혹시라도 소 씨 가문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면, 난 그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감히 내
“왕야…!”진규와 진우,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깜짝 놀라 이육진을 바라보았다.그들에게 있어, 이육진이 두 발로 일어선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그런데 지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에 올라 타다니!얼굴이 시퍼렇게 굳은 이육진은 문득 며칠 전 진규와 진우가 보고했던, 소우연과 닮았다는 그 여자를 떠올렸다.그때도 그는 소우연에게 그 여자가 얼마나 닮았는지 물었지만, 소우연은 직접 보지 못했다고만 답했다.이육진이 매섭게 진우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전에 말했던 그 여자는 소우연과 얼마나 닮았느냐? 혹시 그 자가 왕비로 위장해 소한준과 함께 떠난 것이 아니더냐? 너희가 그들의 계략에 빠져 미끼를 따라간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진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실 왕비가 사라진 직후부터 그 역시 이 점을 의심하고 있었다.“설마 그들이 선방에서 왕비마마의 옷을 바꿔 입고, 일부러 저와 정연을 멀리 떨어뜨린 후…”“왕비를 찾아내지 못하면 너희들의 머리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이육진은 더 이상 진우의 변명을 들을 인내심이 없었다.곧바로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진규는 더 지체할 여력이 없어 급히 옆에 있던 호위의 말 위로 뛰어올라 이육진을 뒤따라갔다.“나으리…”뒤에 남겨진 몇몇 호위들은 서로 마주 보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결국 한 명이 나서서 진우에게 물었다.“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진우는 즉시 말 위로 올라타며 명령했다.“운불사의 그 선방으로 가서, 사소한 흔적이라도 빠짐없이 샅샅이 조사하라!”말을 마치자마자 그 역시 이육진과 진규를 쫓아 달려갔다. 그제서야 진우는 깨달았다. 선방에서 나온 뒤 왕비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했다는 것을 말이다.며칠 전 자신이 본, 왕비와 닮은 여자는 아무래도… 평서왕부에서 새롭게 양녀로 들인 그 여자가 아니었을까?“이랴!”진우는 미친 듯이 말을 몰아 운불사 산길로 향했다.……진원 장군부.길고 날렵한 그림자가 말 위에서 날듯이 내려와 저택 문을 지키던 호위들을 몇 합 만에 단번
용부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와 알리겠다고 했지만, 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으셔도 돼요.”정연과 진우를 데리고 주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소우연은 마당 한가운데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는 용강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대나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의 온몸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햇살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연은 잠시 숨을 삼켰다.곁에 있던 호위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저는 태자빈입니다. 용 감정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주군께서 가장 자주 안부를 묻던 이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도우라는 명까지 내려졌으니, 그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과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누구도 들이지 말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발소리조차 삼키며 마당을 가로질렀다.낙엽과 풀이 깔린 바닥 위로 바스락이는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돌려보내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용강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멈추지 않았다.“제가 오늘 올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으셨나요?”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햇살을 뚫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그대로 누운 채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했다.“태자빈 마마셨군요. 자리에 앉으시지요.”소우연은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발견했다.방석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리가,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자리였다.“이걸 미리 준비하셨군요. 오늘 제가 올 걸 아셨던 거네요.”“예. 그리고 약간의 수를 써서 태자 전하께서 잠시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단둘이 뵙고 싶었거든요.”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맥해드릴게요.”“괜찮습니다…”그의 말이 끝나
이민수는 혜주와 소범준만 남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뒤, 아령은 소씨 가문 안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 소지윤에게 아이를 얻기 위한 계획도 한결 수월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아씨는 누구에게도 깊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소지윤 대인에게만은 그 마음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그의 아이를 가지려 하시는 걸까.한편, 태자부.이육진은 연회를 열고, 용강한과 심소균을 초대했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즈음, 소우연이 용강한더러 ‘오라버니’라 부르자 심소균은 술잔을 들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아니…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지?’태자빈이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라면, 절대 가벼운 인연이 아닐 터.그보다 더 놀라운 건, 태자 이육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심소균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에, 괜히 청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그냥 조용히 마시죠.”용강한은 무심히 말하며 자신도 잔을 비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소우희는 이미 죽었다.그토록 집요하게 소우연을 괴롭히던 이가 사라졌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법도 했다.하지만, 연회 자리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어딘가 무거웠다.심소균은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용강한은 알고 있었다.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심소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이육진은 하인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했다.연회가 마무리되고, 소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세요?”“괜찮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웃었지만, 이어진 기침은 거셌고… 이내 곧 수건에는 선혈이 스며들었다.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망토를 여미고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눈은 날카로웠다.소우연은 물론, 이육진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용 감정, 네 몸 상태가 왜 이리 나빠졌느냐.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그는
서재 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숨막히는 분위기로 가득했다.이민수는 의연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희가 소우연에게 얼마나 애원했는지, 부인께서 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도 소우연은 우희를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답니다.”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잠시 조용하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셨으니,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고, 서늘한 눈빛을 떨구었다.“우희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령이 눈물로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소씨 가문을 위해 이 더러운 일에 제 발로 들어설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어차피 저희 평서왕부는, 태자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소홍범의 안색이 굳어졌다.평서왕의 야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이육진이 불구가 되고 얼굴까지 망가졌을 무렵, 평서왕은 황태자의 자리를 가장 가까이서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직접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장남 이민수가 황제에게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거란 이야기는 조정에 이미 돌고 있었다.수년간 평서왕부는 조용히 인맥을 조율하고 관료를 포섭해왔다. 이육진이 회복했다고는 하나, 평서왕 부자의 야망은 그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았다.소씨 가문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아버지…”소현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우희를 향한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소우연에 대한 원망은 이미 마음속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지옥이라면, 차라리 평서왕세자의 손을 잡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소홍범은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소현준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소우연을 직접 만나야 하나… 아직은 이르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 순간.이민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자, 소현우가 갑작스레 그의 등
“누구지?” 임진숙이 물었다.“평서왕부의 세자저하, 그리고 스스로 둘째 아씨의 지기라 밝힌 여인입니다.”소현우가 곧장 말했다. “어머니, 우희와 친하다고 했던 그 손수건 친구입니다. 어제 시신 수습을 도왔던 그 아가씨예요.”임진숙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모셔라. 우희의 친구라니...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예.”소현우는 급히 나가 마중을 나갔다.지금의 소씨 가문에겐 더 이상 발버둥칠 힘도, 핑계도 없었다.평서왕 세자 이민수, 한때는 소우희의 혼처 상대였던 사내. 소우연만 아니었다면, 소씨 가문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일도, 우희가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직접 여동생의 목을 조르는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이민수가 도착하자, 병중에 있던 소홍범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맞았다.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태자부는 이제 발붙일 수 있는 곳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아니었다.소씨 가문이 마지막으로 기대어볼 곳은 오직 평서왕부뿐.본래부터도 세상은 소씨 가문이 평서왕부의 그늘 아래 있다고 여겨왔다.“소 장군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다시 뵙는 자리가 이리도 쓸쓸할 줄은 몰랐습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얼굴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있던 소한준은 냉랭하게 내뱉었다.“소우연만 없었더라면, 우희는 진작에 세자저하의 곁에 있었을 겁니다. 이런 참변도 없었겠지요.”이민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 다 지켜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형식적인 위로가 몇 마디 오간 뒤, 아령은 이민수의 배려로 이당에 남아 임진숙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소홍범과 이민수, 소현우, 소현준은 서재로 향했고, 소한준은 하인의 부축을 받아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임진숙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을 흐느꼈다.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았다.‘우리 우희가 왜 이리 비참하게 갔을까… 우리 집안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그녀는 끝없는 자책과 회한 속에 빠져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믿었어. 그 은인이 우리 어머니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피를 말리며 상운국에 도착했을 땐 외가 쪽은 이미 떠난 뒤였지. 나중에야 들었어. 멀리 남강으로 이사했다는 걸 말이야. 그 은인은 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나 봐. 결국 어머니를 다시 백화루에 팔아넘겼어. 그리고 나도… 결국 기생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지.”아령은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조용히 혜주를 바라봤다.“넌 어떻게 생각해? 내 이모인 임진숙이라는 사람… 참 무섭지 않아?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지 않아? 왜 그 사람은 고귀한 장군 부인으로 살아가고, 우리 어머니는 천한 기생이어야 해? 왜 그 사람 자식들은 다들 한 자리씩 가질 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신분이었던 걸까? 우리 어머니가 그걸 참지 못했어. 나도 마찬가지였고.”아령의 눈빛은 억눌린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그래서 맹세했어. 어머니랑.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 사람과 그 사람 가문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겠다고.”그녀는 눈물을 훔친 뒤, 환하게 웃었다.그 미소는 해맑았지만, 그 속에 담긴 결심은 날카롭고 서늘했다.“그게 바로 내가 살아 있는 이유야.”그 이야기를 들은 혜주는 마음 깊은 곳이 흔들렸다.‘그랬군요… 그래서…’소 부인 임진숙. 겉으론 다정하고 자애로워 보였지만, 어린 동생을 백화루 문 앞에 유기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소우희 아씨가 그렇게 악랄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군요.’‘진짜…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네요…’“그 진홍색 비단함, 꼭 잘 보관해. 그 안엔… 언젠가 그 집안 사람들의 뼛가루를 담게 될 거야. 그래야 어머니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테니까.”아령은 혜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았잖아. 그 마음, 나도 잘 알아. 평서왕부로 돌아가면 널 풀어줄거야. 그때 내가 준 돈으로 아무도 널 모르는 곳에 가서… 조용히, 너답게 살아.”그 말을 들은
그녀가 한때 이민수의 침소를 지키던 몸이었다는 사실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그랬군요...”소현우는 장정답지 않게 눈가가 붉어졌다.멀찍이서 하인들이 수레를 끌고 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저건...”“우희 언니에요.”아령은 숨김없이 고백하며, 눈가를 눌렀다. 슬픔을 삭이는 듯한 손짓이었다.소현우에게는 낯선 장면이었다.소우희에게 이런 절절한 마음을 나누던 벗이 있었던가.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소현준은 그리 쉽게 믿지 않았다.여인의 말은 빈틈이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그럼에도 혜주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소현준은 혜주를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맞췄다.“정말... 둘째를 원망하지 않느냐?”혜주는 힘 있게 고개를 저었다. 그 눈빛엔 감사와 충성이 담긴 듯 보였다.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그녀는 소우희를 증오했다. 결국 바랐던 대로 소우희는 혀를 잃고,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그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소현우는 그런 혜주의 내면까지는 읽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어릴 적부터 함께한 사이니... 주인과 종이라도 정이 있었겠지.”사실 혀를 자른 것도 그날 격분한 소홍범의 지시였다.이제 소우희는 죽었고, 더는 이 하녀에게 뭐라 할 이유도 없었다.소현우는 이마를 짚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맙다. 혜주가 그대 곁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 또한 우희가 남긴 인연이라 생각한다.”아령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오라버니... 아니, 장군님. 죄송해요. 순간 감정이 북받쳐서...”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실수라도 한 듯 웃어 보였다.소현우는 손을 내저었다.“우희의 벗이라면, 오라버니라 불러도 괜찮다.”잠시 후, 소씨 가문의 하인들이 아령 일행의 수레 대신 소우희의 시신을 직접 실었다.이제 그녀를 보내는 건, 가족의 몫이었다.소현준은 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형은 어
전날엔 폭우가, 오늘은 뙤약볕이 내리쬐었다.이런 날씨 속에서, 소우희의 시신은 또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까.강직한 무장이자 소씨 가문의 주인인 소홍범조차 그 앞에선 중심을 잃을 뻔했다.말을 꺼내려다 삼킨 그는, 결국 큰아들 소현우와 둘째 소현준에게 시신을 찾으러 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난장골.산바람은 살을 찌를 듯이 뜨겁고, 공기마저 눅눅하게 달아올라 있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숙취에 시달리던 소현우는 동생과 함께 난장골에 도착했다.주위를 둘러보니, 시신을 찾아 이곳을 헤매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그중 한 무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희고 단정한 옷차림의 소녀가 한 대의 수레를 따라가고 있었고, 수레 위엔 희미한 천이 덮인 시신 하나가 실려 있었다.소녀의 눈가엔 희미한 붉은 기가 맴돌았다.썩은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소현준은 코끝을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호위병 하나는 이미 참지 못하고 옆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소현준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둘째 아씨 시신부터 찾아라.”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이를 악물고 악취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였다.하얀 옷의 소녀와 그 일행이 소씨 가문의 마차 앞으로 다가왔고, 소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실례합니다. 혹시 소씨 가문의 도련님들이신지요?”마차 안에 있던 소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마차 옆에 서 있던 소현준만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리고 그 소녀 옆에 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혜주였다.혜주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조용히 예를 올렸다.그 눈동자엔 아련한 빛이 어려 있었고, 그리움과 슬픔이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소현준은 미간을 좁히며 소녀에게 물었다.“너는 누구냐?”시선은 혜주에게 있었지만, 질문은 분명 그 소녀에게 향한 것이었다.소녀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몸을 낮추며 답했다.“아령이라 합니다. 예전에 소우희 아씨를 몇 차례 뵌 적이 있고, 개인적인 은혜를 입은 바 있습니다. 서로 손수건을 나
반 시진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붉게 타오른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맑고 푸른 하늘은 마치 물로 씻어낸 듯 투명했다.그 풍경은 마치 소우연의 마음과도 같았다.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고 평온했다.소우희는 죽었다.이 세계의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남주는 더 이상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었다.모든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새로 쓰일 터였다.진원 장군부.소현우는 돌아오자마자 술을 들이켰고, 그날 밤을 고스란히 의식을 잃은 채로 보냈다.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기 직전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헝클어진 머리에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그는 하인에게 명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을 전부 정청으로 불러라.”며칠째 앓고 있던 소홍범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군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 부장들에게 넘긴 상황이었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육진이 그의 군권을 서서히 회수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지금 그의 수하 중 대부분은 본래 이육진의 옛 부하였다.이육진은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그저 말 한마디면 모두가 따랐다.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소홍범, 그리고 그의 아들들마저도 과거엔 모두 이육진의 군 아래 있었다.5년 전,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이육진이 매복을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소현우는 전방에서 적과 싸우며 지원 한 번 받지 못한 채 중상을 입었다.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순간, 그를 구해낸 사람은... 소우희가 아니었다.소우연이었다.소홍범은 이를 악물었다.소우희를 미워했다.믿고 싶었지만, 결국 기대를 저버린 딸이었다.소우연이 그의 큰아들을 살려냈다고 해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족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그게 소우희의 자리를 대신할 이유는 아니었다.결국 일을 망쳤다.감히 소우연을 건드려,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를 자초했다.정청에 모두가 모였다.눈이 퉁퉁 부은 임진숙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님은 안 오는 거니...? 혹
‘세상에 진심이란 없어.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그 말이 또렷이 귓가에 맴돌았다.마지막까지 아령의 목소리가 소우희의 머릿속을 울렸다.‘날 미워하지 마. 미워할 거면 너 자신을 미워해. 네가 소씨 집안의 자식이라는 걸. 네 어머니가 악독한 여자였다는 걸. 그 여자가 내 어머니 인생을 망쳤고, 그래서 난 태어나자마자 천민이 되었어.’‘난 바라는 거 없어. 단 하나, 너희 소씨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보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의 이유야.그리고 지금 난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소우희는 그녀가 정말로 복수가 성공하길 바랐다.여자의 숨소리가 멎었다.소현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비틀거리며 주저앉을 뻔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우희의 콧날 아래를 짚어보았다.숨이 없었다.정말로 죽은 것이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오라버니’라 불렀던 여동생.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건만.소우희는 정말로 죽었다.그는 허둥지둥 감방을 뛰쳐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임진숙이 그 얼굴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니?”소현우는 눈을 피하며 단호히 말했다.“아무 일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요. 어머니, 어서요.”말을 재촉한 뒤, 급히 달려가는 소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본 옥졸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불안한 기운에 곧장 감방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소우희가 죽어 있었다.그녀는 움직일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건 단 하나.소현우 장군.그는 자신의 손으로 친여동생의 목숨을 거두었다.옥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어떻게 이런 일을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더욱이 태자에게...그는 급히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소우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옥졸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직접 태자부로 달려갔다.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금세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