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이 질문을 하려던 그때, 소우연이 먼저 말했다.“더 물을 것 없다. 내가 시키는 대로 준비하거라.”정연은 표정이 심각한 소우연을 보며 의아했지만 바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15분 뒤, 소우연과 정연은 저택 대문을 나서자마자 미리 마차를 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던 진우를 발견했다.“왕비님, 오셨습니까? 왕야께 왕비님이 운불사에 가신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까요?”진우의 물음에 소우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내가 어디에 가든 너희들은 왕야께 말씀드리지 않았느냐?”전에 이육진이 소우연의 하루 일과를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걸로 봐서는 그가 소우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게 분명하다.한편, 진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저기… 왕야께서는 특별하게 중요한 일이 아니면 왕비님의 행적을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소우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운불사로 가는 길이 꽤 멀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 사소한 일도 아니기에 이육진에게 얘기를 해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그럼 사람 시켜 궁궐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왕야를 태운 마차가 나오면 그때 보고를 올리라고 하여라.”“네.”고개를 끄덕인 진우는 이내 저택 대문을 지키고 있는 호위무사에게 다가가 몇 마디 당부했다.운불사는 경성 밖에 위치했기에 마차로 가도 최소 네 시간이 걸렸다.때문에 소우연이 운불사에 도착했을 때 절 안에는 참배자가 거의 없었다.“정연아, 이 돈을 절에 기부하거라.”소우연은 정연에게 미리 준비한 돈보따리를 건넸다.“네, 알겠습니다.”진우는 본당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정연은 돈 보따리를 들고 운불사 스님을 찾아갔다.한편, 소우연은 운불사 대문 앞에 놓인 불상들에게 경건하게 인사를 올린 뒤 마지막으로 본당에 들어섰다.그녀는 기도를 하면서 절을 올렸다.‘도대체 누구지? 왜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거지?’소우연이 의아해하던 그때, 발걸음소리가 들렸다.“언니.”소우희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린 소우연은 미
진우는 두 사람 뒤를 조용하게 따랐다.이를 힐끔 쳐다보던 소우희가 소우연에게 말했다.“언니 호위무사가 우리를 계속 따라오고 있네?”“할 말 있으면 그냥 해.”‘진우가 따라오는 게 뭐! 이게 안전감이라는 거거든!’“이 옥패의 주인이 누구인지 언니는 정말 모르는 거야?”소우희의 물음에 소우연이 고개를 저었다.“몰라.”소우연은 옥패를 가지고 있다가 경성에 돌아가면 사람 시켜 알아보려고 했는데 그럴 새도 없이 며칠 사이에 옥패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한편, 거짓말이 아닌 듯한 소우연의 대답에 소우희가 몰래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때 당시 남강에서 돌아오자마자 소우희는 사람을 시켜 옥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였고 수소문 끝에 겨우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이 옥패는 회남왕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다.그 말인 즉, 소우연이 구해줬던 그 소년이 바로 이육진이라는 뜻이다.만약 이육진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금보다 소우연에게 더 잘해주겠지?그리고 오늘, 소우희는 바로 그 옥패를 이용하여 소우연을 불러냈다.“옥패는?”소우연이 묻자 소우희가 입술을 살짝 오므리며 대답했다.“나한테 있어.”“그럼 네가 훔쳐간 거네.”“훔쳐가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건 엄연히 내가 주운 거야.”‘허허… 주웠다고? 소우희 얘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뻔뻔해지네.’“옥패는 평생 못 돌려받겠네.”“언니, 언니 것이 아닌 물건을 탐내지 마.”‘내가 미쳤어? 이 옥패를 너한테 돌려줬다가 그걸 이육진이 보기라도 하면 네가 자신을 살려줬던 사람이라는 걸 알 텐데? 그럼 이육진이 너한테 더 잘해주겠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난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소우연 넌 평생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 돼!’이런 생각에 소우희의 웃음이 점점 더 짙어졌다.“너랑 더 이상 할 말 없어.”한 마디 남긴 소우연이 돌아서서 떠나려던 그때, 소우희가 말했다.“언니를 만나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누구?”소우연은 그자가 혹시 이 옥패의 주인
탁자 앞에 앉아있던 소한준은 주먹을 꽉 쥔 채 기고만장하게 말하는 소우연을 보며 화가 더할 나위 없이 치밀었다.예전의 소우연은 감히 소한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는데 지금은 심지어 기세 등등하기까지 하다니!“뭐라고 하였습니까? 지금 왕비가 됐다고 친정 가족들이 눈에 뵈지도 않은 겁니까?”“그렇습니다. 장군님 아직도 그걸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왕비…”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하게 듣고 있던 소우희가 입을 삐죽 내밀며 소한준에게 고자질하듯이 말했다.“오라버니, 저 태도 좀 보십시오! 소우연에게 이제 그 어떤 말도 안 통합니다!”“우리 사이에 할 말이 있긴 해? 이제 얘기해봐. 그 옥패를 네가 가지고 있어?”소우연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소우희는 서러운 표정으로 소한준을 쳐다보았고 소한준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소우연에게 말했다.“도대체 어떻게 해야 아버지와 두 형들에게 진실을 얘기할 겁니까? 우리 가문에서 진정으로 의술을 익힌 사람은 왕비가 아니라 우희이지 않습니까!”“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겁니까?”씁쓸하게 웃던 소우연은 이내 고개를 돌려 소우희를 쳐다보았다.“네가 이런 말로 소 장군을 속은 거야? 너 정말 양심이 있긴 해?”“아니야! 난 속인 적 없어! 오라버니, 소우연 좀 보십시오! 저를 죽일 듯이 째려보면서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하고 있습니다!”“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하는 사람은 소우희 너잖아!”“난,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 어떻게 날 이렇게 망가트릴 수가 있어? 내가 평춘왕 저택에 시집간 게 너와 회남와의 책임이 조금도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소우희의 뻔뻔한 태도에 소우연은 이제 밖에서도 소우희와 다정한 자매 연기를 더 이상 못할 것 같았다.그녀와 소우희는 이제 명백한 원수이다!전생의 잔인한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온 소우연은 심장이 찢어지듯 아팠다.다른 건 몰라도 전생에 소우희가 소우연에게 회남왕 저택에서 도망치라고 부추기지 않았다면 소우연은 그렇게까지 처참한 죽음을 당하
깊이 숨을 들이마신 소한준은 소우희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눈빛만으로 서로의 뜻을 알았다. 결국 소한준이 소우희의 제안에 동의한 것이다.“됐으니, 일단 앉아서 차나 마시자.”소한준은 옆에 있던 의자를 가리키며 소우희와 소우연에게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소우희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지만, 둘의 시선은 모두 소우연에게 쏠렸다.소우연은 두 사람을 흘긋 바라보며 방안의 분위기가 매우 불쾌하다고 느꼈다. 만약 자신을 불러낸 사람이 소우희란 걸 알았다면 십중팔구 오지 않았을 것이다!애초에 그녀는 전에 치료해 준 그 소년이 소우희 손에 붙잡혔다고 생각했고, 소우희가 그를 미끼로 이용할까 염려되어 따라온 것이었다.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그 옥패 역시 분명히 소우희의 손안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우희는 절대로 자신과 옥패 이야기를 길게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뒤돌아 걸어 나갔다.소우희는 초조해져 소한준의 어깨를 가볍게 밀며 말했다.“오라버니, 이대로는 저 정말 소우연 때문에 죽어요. 아버님, 큰 오라버니, 둘째 오라버니와 할머님까지 모두 저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할 게 분명해요…”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매우 가련한 모습이었다.소한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침내 탁자 위의 찻잔을 들어 그대로 던졌다.찻잔이 소우연의 목덜미를 명중하자, 그녀는 몸을 한 번 떨고 곧바로 쓰러지려 했다.“왕비마마, 괜찮으십니까!”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는 매우 컸다. 밖에 있던 진우의 귀에도 그대로 들렸다. 검을 쥔 채 선방 문 앞에서 즉시 물었다.이때 방 안에서 하얀 옷을 입고 쓰개치마를 쓴 여인이 나와 밖을 향해 말했다.“아무 일도 없다.”진우는 소우연의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방 안에서 소한준은 하얀 옷을 입은 그 소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녀의 목소리가 소우연과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소우희는 그의 의혹을 알아챈 듯 말했다.“오라버니,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제가 지금 소우연을 객줏집으로
진우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알겠습니다. 그럼 소인은 문밖에 있겠습니다.”“좋다.”방 안에서 소우희가 큰 소리로 말했다.“좋아요. 언니가 저랑 이야기하기 싫다면 전 좀 쉬고 있을게요. 오라버니, 언니랑 이야기 좀 해주세요.”소한준도 이에 대답했다.“알겠다. 그럼 너는 일단 쉬고 있거라.”“네, 오라버니.”소우희는 곧바로 검은 옷을 입은 호위의 도움을 받아 뒷창으로 나갔다.소한준은 하얀 옷을 입은 여인에게 말했다.“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느냐?”아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와 대각선 방향으로 단정하게 앉아 작게 물었다.“이름이 무엇이냐?”“소녀는 아령이라 합니다.”소한준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아령과 간간이 말을 나누었다.밖에 있던 진우는 여전히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후, 마침 정연이 돌아와서 그에게 물었다.“왕비마마께서 아직 안에 계십니까?”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네.”“왕비마마께선 평소 소씨 가문과 사이가 좋지도 않으신데, 어찌 이렇게 오래 이야기를 나누신단 말입니까?”진우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연과 눈이 마주치며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설마 왕비마마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왕비마마…” 진우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정말 별일 없으십니까?”방 안에서 남녀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명확하진 않았다. 그래도 진우는 확실히 소우연이 소한준과 이야기하는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방 안에서 아령이 잠시 긴장한 표정을 짓더니 밖을 향해 말했다.“나는 괜찮으니 마차나 준비해라. 곧 관저로 돌아갈 것이다.”그제야 진우와 정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정연은 밖에서 기다리고, 진우는 운불사 마구간으로 마차를 가지러 갔다.소한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아령과 함께 천천히 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내가 배웅해주마.”아령은 소한준의 뒤를 따르며 작게 답했다.“저와 소우희는 평생 화해할 일 없을 테니 헛수고하지 마십시오.”“그래도 우리는 뼈
진우는 예의고 뭐고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정연을 마차에 태우고는 곧장 진원 장군부의 마차를 쫓기 시작했다.처음엔 꽤 힘들게 뒤쫓아야 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진원 장군부의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며 자신들을 따돌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정연이 말했다.“왕비마마께선 분명 소씨 가문 사람들을 가장 싫어하셨는데 말이죠… 오늘 대체 무슨 말씀을 나누신 건지 사이가 좋아진 듯 보이네요.”진우도 영문을 몰랐다.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그래도 본래 남매지간이니, 혈육의 정이 아주 없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정연뿐 아니라 진우 자신조차도 소우연이 소씨 가문에 품은 적개심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물론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소우연의 입장이라면 소씨 가문에 버려져 대신 회남왕부로 시집을 가야 했다면 그 역시 화가 났을 테니까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소우연과 이육진의 사이도 좋아졌는데, 왜 여전히 소우연은 소씨 가문을 용서하지 못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어느덧 저녁 무렵이 되어 마차는 성문을 지나 불빛 환한 거리를 지났다.반 시진이 지나고, 진원 장군부의 마차는 포목점 앞에서 멈춰 섰다.진우와 정연도 서둘러 따라잡자, 아령은 돌아보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들어가서 천을 좀 가져올 테니,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거라.”정연이 말했다.“소녀가 함께 들어가겠습니다.”아령은 아무 말 없이 소한준을 바라보았다. 소한준이 정연을 막으며 말했다.“회남왕부의 하인들은 참으로 방자 하구나. 이제 주인의 말까지 거역하려 드는 것이냐?”정연은 바로 반박했다.“소장군께서 오해하시는 겁니다. 소녀는 그저 왕비마마의 안위가 염려되어 함께 가려고 한 것뿐입니다...”“상운국의 태평성세에 무슨 위험이 있겠느냐?”이런 식으로 시간을 끄는 바람에, 진우는 더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을 지나쳐 곧장 포목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막 들어가자마자 아령의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진우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밖에서는 소한준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만두
진우는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하며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은 이미 선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소우희는 또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진우가 급히 물었다.“너희들이 나올 때 소장군과 왕비마마뿐이었느냐? 소우희는 어찌 되었느냐?”“아씨요…?” 정연이 크게 외쳤다. “아씨는 없었습니다. 계시지 않았어요!”진우는 주인을 노려보며 말했다.“왕비마마를 찾지 못하면 왕야께서 분명 노하실 것이다. 그때 가면 그 누구도 왕야의 분노를 견디지 못할 거야!”주인은 두려워 무릎을 꿇었다.“나으리, 소인은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말로요! 왕비마마께서 왜 하필 제 가게에서 도망치셨는지 소인은 정말 모르겠습니다!”진우는 사다리 쪽으로 가서 위를 보았다. 사다리 위엔 진흙 발자국이 선명했고, 만져보니 아직 촉촉했다. 이는 왕비가 확실히 사다리를 타고 도망쳤다는 증거였다.하지만 왕비는 어째서 자신과 정연을 피해 도망쳤단 말인가?이상하다!모든 것이 이상했다!진우는 더 이상 정연에게 신경 쓸 겨를 없이 바로 경공을 펼쳐 회남왕부로 달려가 회남왕에게 이 일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회남왕부에 돌아갔을 때 그가 본 사람은 간석뿐이었다.“태감 나리, 왕야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진우는 초조하게 물었다.간석이 불진을 휘두르며 말했다.“왕야께서는 왕비마마께서 운불사에 가신 걸 알고, 진규를 데리고 직접 모시러 가셨네.”“뭐라고요…?”운불사로 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은 서로 달랐다. 그렇다면 그들은 서로 엇갈렸을 가능성이 컸다!“큰일이군!” 진우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간석은 당황한 듯 되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냐? 네가 왕비마마를 모시고 운불사로 간 것 아니었느냐? 헌데 어찌 혼자 돌아온 것이야?”그는 진우 뒤편을 살폈지만 왕비와 정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왕비마마께서 사라지셨습니다!”진우는 서둘러 돌아서서 즉시 호위들과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암위 몇 명을 급히 소집하기
“그렇다면 어째서 소 장군을 추천하지 않았느냐?”“게다가 당시 남강 전투에서 소 장군이 출정하여 적지 않은 공을 세우지 않았느냐? 실상은 진 장군보다 소 장군이 더 적합하다고 보는데.”이육진이 담담히 대답했다.“아바마마, 소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그는 스스로를 ‘소자’라 칭했다.황제 앞에서 ‘신’이 아닌 ‘소자’라 칭하는 것은, 좀 더 친밀감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황제는 순간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오늘따라 유독 이육진과의 대화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그 옛날, 이육진이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다리까지 불구가 되었을 때, 조정 전체가 발칵 뒤집혔었다. 대신들은 앞다투어 그를 회남왕으로 책봉하라 청했고, 그로 인해 황태자였던 이육진의 지위를 강등시키려는 듯한 분위기마저 형성되었다.당시 이육진은 미쳐 날뛰듯 전국을 뒤집어 자신을 배신한 자들을 찾아냈고, 그로 인해 경성은 큰 혼란에 휩싸였다. 무고한 많은 이들이 옥에 갇히는 피해를 보았다.황제로서 그는 온 힘을 다해 대신들의 입을 막고 태의원과 민간의 명의들을 총동원하여 이육진을 치료했다.하지만 그의 얼굴과 두 다리는 끝내 고칠 수 없었다.태자의 지위를 보장할 수 없게 되자, 황제는 어쩔 수 없이 강경한 수단을 써서 그동안 발생한 억울한 사건들을 정리하고 이육진의 평생 안위를 지켜줄 수밖에 없었다.회상은 언제나 가슴을 아프게 했다.이 아들은 수완이 탁월하여, 황제인 그조차 회남왕부에 첩자를 심는 것이 불가능했다.덕빈만이 이육진의 모친으로서 은밀히 사람을 둘 수 있었는데, 그것 역시 이육진 자신이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는 덕빈을 통해 그 부부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그런데 최근, 덕빈의 사람조차 이육진이 철수시켜 버렸다. 이제 황제는 이육진과 소우연 사이가 정말 좋은지 나쁜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아들아, 소우연은 소씨 가문의 적녀다. 네가 혹시라도 소 씨 가문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면, 난 그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감히 내
전날엔 폭우가, 오늘은 뙤약볕이 내리쬐었다.이런 날씨 속에서, 소우희의 시신은 또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까.강직한 무장이자 소씨 가문의 주인인 소홍범조차 그 앞에선 중심을 잃을 뻔했다.말을 꺼내려다 삼킨 그는, 결국 큰아들 소현우와 둘째 소현준에게 시신을 찾으러 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난장골.산바람은 살을 찌를 듯이 뜨겁고, 공기마저 눅눅하게 달아올라 있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숙취에 시달리던 소현우는 동생과 함께 난장골에 도착했다.주위를 둘러보니, 시신을 찾아 이곳을 헤매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그중 한 무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희고 단정한 옷차림의 소녀가 한 대의 수레를 따라가고 있었고, 수레 위엔 희미한 천이 덮인 시신 하나가 실려 있었다.소녀의 눈가엔 희미한 붉은 기가 맴돌았다.썩은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소현준은 코끝을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호위병 하나는 이미 참지 못하고 옆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소현준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둘째 아씨 시신부터 찾아라.”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이를 악물고 악취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였다.하얀 옷의 소녀와 그 일행이 소씨 가문의 마차 앞으로 다가왔고, 소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실례합니다. 혹시 소씨 가문의 도련님들이신지요?”마차 안에 있던 소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마차 옆에 서 있던 소현준만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리고 그 소녀 옆에 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혜주였다.혜주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조용히 예를 올렸다.그 눈동자엔 아련한 빛이 어려 있었고, 그리움과 슬픔이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소현준은 미간을 좁히며 소녀에게 물었다.“너는 누구냐?”시선은 혜주에게 있었지만, 질문은 분명 그 소녀에게 향한 것이었다.소녀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몸을 낮추며 답했다.“아령이라 합니다. 예전에 소우희 아씨를 몇 차례 뵌 적이 있고, 개인적인 은혜를 입은 바 있습니다. 서로 손수건을 나
반 시진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붉게 타오른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맑고 푸른 하늘은 마치 물로 씻어낸 듯 투명했다.그 풍경은 마치 소우연의 마음과도 같았다.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고 평온했다.소우희는 죽었다.이 세계의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남주는 더 이상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었다.모든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새로 쓰일 터였다.진원 장군부.소현우는 돌아오자마자 술을 들이켰고, 그날 밤을 고스란히 의식을 잃은 채로 보냈다.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기 직전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헝클어진 머리에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그는 하인에게 명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을 전부 정청으로 불러라.”며칠째 앓고 있던 소홍범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군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 부장들에게 넘긴 상황이었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육진이 그의 군권을 서서히 회수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지금 그의 수하 중 대부분은 본래 이육진의 옛 부하였다.이육진은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그저 말 한마디면 모두가 따랐다.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소홍범, 그리고 그의 아들들마저도 과거엔 모두 이육진의 군 아래 있었다.5년 전,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이육진이 매복을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소현우는 전방에서 적과 싸우며 지원 한 번 받지 못한 채 중상을 입었다.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순간, 그를 구해낸 사람은... 소우희가 아니었다.소우연이었다.소홍범은 이를 악물었다.소우희를 미워했다.믿고 싶었지만, 결국 기대를 저버린 딸이었다.소우연이 그의 큰아들을 살려냈다고 해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족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그게 소우희의 자리를 대신할 이유는 아니었다.결국 일을 망쳤다.감히 소우연을 건드려,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를 자초했다.정청에 모두가 모였다.눈이 퉁퉁 부은 임진숙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님은 안 오는 거니...? 혹
‘세상에 진심이란 없어.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그 말이 또렷이 귓가에 맴돌았다.마지막까지 아령의 목소리가 소우희의 머릿속을 울렸다.‘날 미워하지 마. 미워할 거면 너 자신을 미워해. 네가 소씨 집안의 자식이라는 걸. 네 어머니가 악독한 여자였다는 걸. 그 여자가 내 어머니 인생을 망쳤고, 그래서 난 태어나자마자 천민이 되었어.’‘난 바라는 거 없어. 단 하나, 너희 소씨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보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의 이유야.그리고 지금 난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소우희는 그녀가 정말로 복수가 성공하길 바랐다.여자의 숨소리가 멎었다.소현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비틀거리며 주저앉을 뻔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우희의 콧날 아래를 짚어보았다.숨이 없었다.정말로 죽은 것이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오라버니’라 불렀던 여동생.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건만.소우희는 정말로 죽었다.그는 허둥지둥 감방을 뛰쳐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임진숙이 그 얼굴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니?”소현우는 눈을 피하며 단호히 말했다.“아무 일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요. 어머니, 어서요.”말을 재촉한 뒤, 급히 달려가는 소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본 옥졸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불안한 기운에 곧장 감방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소우희가 죽어 있었다.그녀는 움직일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건 단 하나.소현우 장군.그는 자신의 손으로 친여동생의 목숨을 거두었다.옥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어떻게 이런 일을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더욱이 태자에게...그는 급히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소우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옥졸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직접 태자부로 달려갔다.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금세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
임진숙은 손에 손수건을 꼭 쥔 채, 바닥에 뼈만 남은 듯 축 늘어진 딸을 바라보며 울먹였다.“최소한... 최소한 한 번은 구해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가을에 죽는다고 해도... 1년 넘게 이렇게 고통받게 두는 게 옳은 일이냐고!”소현우는 대답하지 못한 채 입술만 꾹 다물었다.아까 수감된 소우희를 직접 본 그는… 아무리 각오하고 간다 해도 그 몰골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남아 있는 얼굴엔 경련처럼 일렁이는 근육 떨림.보이지 않는 곳엔 진작부터 욕창이 생겼을 테고, 전신에 퍼진 독은 군데군데 곪아 올라 보기조차 끔찍했다.의원들이 말했었다.소우희는 하루하루 살이 뼈를 파고드는 고통과 극심한 가려움 속에서 미쳐갈 거라고.지금 그녀는 정말로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잔인한 처지였다.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나았다.사실 소우희가 사형 선고를 받고 난 뒤 그는 몰래 움직였다.‘내년 가을’이라는 형 집행 시기는 태자 이육진의 뜻, 즉 소우연의 의중이었다.죽는 시간조차... 그녀의 뜻대로 흘러갔다.임진숙은 아들이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걸 보고는 가슴을 내리치며 또 한 번 쓰러질 듯 몸을 휘청였다.“알겠습니다, 어머니. 제가 다시 옥사에 가볼게요. 우희를 위해... 뭔가 방법을 생각해보겠습니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무슨… 방법이라도 있단 말이냐? 대체… 무슨 수로 우희를 기다리겠다는 게야?”임진숙은 의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소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일단… 다시 우희를 보러 가겠습니다.”그는 다시 어두운 감방 안으로 들어갔다.그곳엔 과거의 그림자만이 앉아 있었다.언젠가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온 집안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소우희.이제 그녀는 단지 숨만 붙어 있는 형체일 뿐이었다.소현우는 이육진의 수하에게 두 다리를 잃었고, 소우희는... 독에 중독되어 사지가 끊기고 혀마저 뽑혔다.그 모든 시작은 소우연이었다.이게 정말
이민수는 마차 안에 숨어 있었다.소우연과 이육진이 그 앞을 지나갈 때, 마차를 못 본 건 아니었지만… 이민수는 고개 한 번 들 용기도 없었다.두 사람 역시 굳이 그를 찾아 조롱할 생각 따윈 없었다.그건 오히려 자신들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니까.그렇게 한참이 지났다.이민수는 초조함에 발끝을 떨며 인내심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었다.이 짧은 시간 동안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소우연과 이육진이 자신을 얼마나 비웃고 조롱했을지, 그런 장면만이 반복되어 떠올랐다.그 생각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드디어 아령이 마차에 올라타자, 이민수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대체 뭘 그리 오래 떠들었느냐!”그 순간, 그가 얼마나 벼랑 끝에 몰려 있는지 단박에 느껴졌다.남자의 본분을 잃은 뒤로, 그는 늘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이성도, 판단도 모두 무너져 있었다.그래서 아령은 주저 없이 꿇어앉았다.마치 하늘을 우러르듯, 그를 전부로 삼는 듯한 태도로 애원했다.“세자 저하, 화내지 마세요. 전 그저… 소우연을 어떻게든 죽일 방법이 없는지, 그년에게 물어본 것뿐이에요.”“지금 소우희는 손발도 못 쓰고, 입도 못 열고 글도 못 쓰는 처지야. 그런 애한테 뭘 물어보겠다는 것이냐.”“저하, 소첩이 어리석었습니다. 앞으로는 다시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세자 저하는 소첩의 의지처인걸요. 저하가 싫어하시는 건, 무엇이든 고치겠습니다.”그녀는 조심스레 말했다.모든 것이 부서진 남자 앞에서, 자신의 전부를 그에게 바치는 듯한 태도로 말이다.이민수는 입을 열었다가, 잠시 숨을 들이켰다.아령의 태도는 얌전하고, 그의 기분을 살피는 데에 매우 능숙했다.“그만 일어나거라. 내 아들을 다치게 하면 안 되니.”“예, 저하.”아들. 정말 그녀 뱃속에 이민수의 씨가 자리 잡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혹여 거짓이라면, 그 거짓을 유지하기 위해 더 큰 거짓이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었다.이민수처럼 이성을 잃은 자를 속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는 평범한 남자와는 달랐다. 마
“아깝기도 하지. 소우연, 그 계집 진짜 독하던데? 이민수의 그걸 잘라버렸어. 이제 일평생… 내시로 살아야 할 몸이 되었지.”아령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주변을 살폈다. 혹시라도 누가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그 말을 들은 소우희의 얼굴은 뒤섞인 감정으로 일그러졌다.소우연이 미웠다. 죽도록 미웠다.하지만… 이민수 역시 증오스러웠다. 그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자신을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이렇게까지 처참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이제 그는 ‘그것’을 잃었다.하하하. 그는 더 이상 남자가 아니었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참 잘 어울렸다.하지만 그 인과응보는… 왜 아직 소우연과 이육진에게는 해당하는 말이 아닌 걸까?그래… 결국 다 똑같았다. 잘난 척하는 놈들이 제일 추한 법이었다.갈라진 입술 틈 사이로 피가 배어나왔다. 소우희는 그저 웃었다. 피투성이 입술로 지은 그 웃음은 마치 짐승이 피 냄새를 맡고 흥분한 듯한 섬뜩한 표정이었다.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그녀 안에 넘쳐나는 증오와 절망을…하지만… 아령. 이 여자는 도대체 정체가 뭘까.이민수가 저 지경이 됐는데도, 그녀는 동정은커녕 미소만 짓다니.대체 속내가 무엇일까?“내가 왜 너한테 이러는지, 궁금하지? 아니면… 정말로 내가 이민수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그게 더 궁금한가?”아령이 비웃듯 말했다.“진심?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야.”“이거 찾고 있지? 가려움을 멎게 해주는 약 말이야.”소우희는 광기에 사로잡힌 듯, 거칠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알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약이 너무나 간절했다.몸을 뜯어버릴 만큼의 가려움. 그 지옥 같은 감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아령은 소매 속에서 작은 백자 약병을 꺼냈다. 그리고 병마개를 뽑으며 천천히 미소지었다.“이 약이 그렇게 갖고 싶어?”소우희의 눈동자가 커졌다. 벌어진 입술은 떨리며, 애타게 무언가를 갈구했다.단 한 알이라도… 먹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하지만
“그 아이… 소씨 가문 전체를 증오하는 걸까.”소우연이 혼잣말처럼 중얼였다.햇살 한 줄기가 주먹만 한 감방 창을 뚫고 들어와, 소우연의 하얗고 고운 얼굴을 비췄다.그녀는 그 빛 아래서도 당당하고 우아했다.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품격과 위엄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반면 소우희는 지푸라기 위에 쓰러진 채,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가려움이 피부를 찢을 듯 파고들었고, 근육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꼴사납게 널브러진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간신히 기어 올라온 잔재 같았다.왜?왜 소우연만 이렇게 타고난 운명이 다른 걸까?이육진에게 시집간다 했을 때, 누구나 그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지금은 당당히 태자빈 자리에 앉아 있으니. 소우희는 미칠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분했다. 억울했다.온몸이 분노로 들끓었다.아직도 아령이 왜 자신을 그런 지경으로 몰았는지 알지 못했다.알았다 해도, 그걸 소우연 따위에게 말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죽는다 해도, 절대 이 여자 앞에선 입을 열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소우연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됐어. 어차피 네 입에서 들을 얘기는 없을 테니까. 그럼 남은 시간, 실컷 고통을 누리도록 해.”“아아아아아아!!!”말은 알아들을 수 없어도, 무슨 말을 내뱉고 있을지 소우연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저주와 원망, 추악한 욕설…그녀에겐 이제 그것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잠시 후, 감옥 복도 끝에서 이육진이 걸어왔다.“다 정리했다. 간수들에겐 유동식을 먹이도록 했고, 의원도 붙였어. 죽을 수 없게 만들었지.”“아아악! 아아아아아악!!!”소우희는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절식으로 빨리 죽고 싶었건만, 그들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이육진… 그 자는 진짜 악마였다.죽을 권리조차 빼앗다니 말이다…그녀의 절규와 광기 어린 울부짖음에도 소우연과 이육진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감옥을 떠났다.그들의 뒷모습은 점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누구든 좋아… 날 좀
대체 그놈 머릿속엔 뭐가 들었단 말인가.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함.짐승처럼 욕망에 눈이 멀어 움직이는 꼴이라니.이래서 사람들이 그를 고자 취급하는 게지.이민수의 눈동자엔 분노가 그대로 담겨 있었고, 그 감정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아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군자는 열 번 복수해도 늦지 않습니다.’이민수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난 마차에서 기다리겠다. 소우희를 만나고 나면 바로 나오거라.”아령이 물었다.“세자 저하는… 보지 않으실 겁니까?”그녀는 분명 이민수가 처음으로 마음 준 여인이었다.“아니.”소우연이든 소우희든.이제 소씨 가문의 피를 지닌 자라면 모두 증오스러웠다.“알겠습니다.”표정은 아쉬운 듯했지만, 속은 후련했다.애초에 그녀는 소우희를 단둘이 만나고 싶었다.……감옥 안.소우희는 지푸라기 더미 위에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모기떼가 온몸을 물어뜯었고, 하룻밤 사이 그녀의 얼굴은 부어오른 자국으로 뒤덮였다.붉고, 시퍼렇고, 검붉게.부어오른 자국과 뒤틀린 상처들이 뒤엉켜 있었다.그 얼굴로 흘러나오는 끊임없는 신음 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소우연이 그녀 앞에 다가서자, 소우희의 눈동자가 잠시 멍해지더니 곧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채 흔들렸다.“내가 널 죽여주길 바라는 거야?”소우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거지꼴로 누워 있는 소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온몸을 떨었다.이육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더 보고 있자니 불쾌감이 올라왔다.그는 감옥 책임자를 찾아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걱정 마. 넌 죽게 될 거야. 단지, 매일 매일 뼛속을 긁는 고통과 끝없는 가려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뿐이지.”“아아아악!!!”죽여줘… 제발, 죽여줘…그녀에겐 지금 이 순간이 지옥보다 끔찍했다.분노도, 원한도, 혐오도…어떤 말로도 지금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무언가를 저주하는 마음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것조차 무력했다.몸은 아팠고, 그보다 더 끔찍하게 가려웠다.그녀는
“세자 저하, 그럼 전 몸을 편히 하기 위한 약을 좀 구해오겠습니다.”아령은 이민수에게 조심스럽게 인사한 뒤, 소범준에게 직접 마차를 몰게 했다.소범준은 그 말을 듣고 목이 콱 막힌 듯했다.겉으로는 약을 구하러 간다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이지윤의 아이를 가지려는 수작이었다.마차는 한참이나 골목을 빙빙 돌았다. 누군가의 눈을 피하려는 건지, 혹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차는 어느 약방 앞에 멈췄다.이후 아령은 소범준에게 평서왕부의 후문까지 말을 타고 함께 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소범준은 툭 던지듯 말했다.“당신의 계략과 담대함은 웬만한 사내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오.”그 말엔 진심이 섞여 있었지만, 더 큰 비중은 냉소였다.아령이라고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는 귀하게. 누구는 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나으리는 종으로 사는 삶이 만족스러우신가 보지만, 전 아닙니다. 전 어머니의 한을 꼭 풀어드려야 해요.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이들을 절대로 편히 살게 두지 않을 겁니다. 나쁜 자들이 잘사는 세상, 그게 공평한가요?”그녀는 그림처럼 단정한 얼굴을 들고 소범준을 또렷이 바라봤다.“제가 나서지 않으면, 제가 저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어머니의 억울함은 끝내 땅속에서 잠들고 말아요.”소범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조용히 되물었다.“나으리의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고 죽었다면, 복수하지 않으시겠어요?”여전히 침묵하는 그를 향해, 아령은 코웃음을 쳤다.“관리들은 마음껏 불을 지르면서 백성은 등불 하나 못 켜게 하는 세상, 그게 정의인가요? 여자인 제가 가진 건 이 얼굴과 몸뿐이에요. 이걸 무기로 쓰는 거죠.”말을 마친 그녀는 묵묵히 문을 두드렸다.곧 누군가 문을 열었고, 소범준은 이끌려 별당으로 들어가 차와 다과를 대접받았다.그 사이 아령은 소매 안에서 약 한 알을 꺼내 삼켰다.혹시라도 이번에도 임신에 실패한다면, 다음 달은 더욱 조급해질 게 뻔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