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널 지켜줄 것이니... 다시는 이런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마.”이육진은 소우연의 멍한 표정을 보고 부드럽게 안심시켰다.소우연은 살짝 미소 지으며 가슴속에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네, 왕야. 전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이육진이 이토록 그녀를 아껴주는데, 더 이상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니, 마치 그녀 인생의 방향보다도 더 뚜렷한 윤곽을 가진 듯했다.이런 남편이라면 칼날 위나 불구덩이는 물론, 인간 세상이나 지옥이라 한들 두려울 것이 없었다.이육진은 그녀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소우연은 웃으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고, 그의 얼굴에서 마치 꽃이라도 피어난 듯한 행복이 느껴졌다.이육진은 폐사 밖에 서서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다. 농가와 논밭, 이름 모를 여러 들꽃과 나무들까지, 평소엔 느끼지 못한 좋은 기분이 들었다.“이렇게 차분하게 경치를 바라본 것이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구나.” 그가 담담히 말했다.소우연은 그의 말을 듣고는, 시선을 따라 함께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소첩도 마찬가지입니다.”어릴 적 외가에 갔던 그 시절을 빼면, 진원 장군부에 있던 지난 몇 년간 그녀가 다녀봤던 곳은 고작해야 장안거리나 평안거리, 태평거리 같은 곳에서 생활용품을 사러 다닌 게 전부였다. 외출이나 나들이는 꿈도 꾸지 못했다.그때 바람이 한차례 불어왔다.소우연은 문득 피비린내가 느껴져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진규가 소우희를 붙잡고 이쪽으로 끌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당당하던 평춘왕비가 이제는 진규의 손아귀에 잡혀 얼굴엔 핏자국이 묻고, 머리는 이미 볏짚처럼 엉망이 되어 있었다. 마치 집 잃은 개처럼 바닥을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왕야, 왕비마마, 이 여자를 어떻게 처리할까요?”진규는 소우희를 두 사람 앞에 던져 놓았다.소우희는 땅바닥에 엎드린 채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방금 그녀는 자기 눈앞에서 이지윤이 붙여준 두 호위가 단칼
“소한준의 두 다리는 이미 망가졌다. 네가 그 자를 치료해낼 수 있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셋…셋째 오라버니의 다리가 어째서…”이육진은 코웃음을 쳤다.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그의 어조는 매우 담담했다.“그 자는 네놈과 결탁하여 짐의 왕비를 납치하지 않았느냐. 목숨을 남겨둔 것만으로도 짐의 자비다.”소우희는 온몸을 떨며 공포에 빠졌다.분명 이육진은 화난 기색도 없었고, 말투조차 평온했지만 오히려 그런 태도가 그녀를 더욱 두렵게 했다.그의 눈빛 한 번이 마치 다음 순간 그녀의 다리까지 부러뜨릴 듯한 위압감을 주었다.소우연이 차갑게 소우희를 바라보며 물었다.“소우희, 소한준의 다리를 고칠 수 있느냐?”소우희는 말 못 할 괴로움 속에서 결국 울먹이며 간청했다.“언니, 언니도 알잖아. 난 의술 같은 거 못 한다는 걸...”“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왜 함부로 일을 저질렀지? 소한준의 다리를 망친 건 바로 너야!”“아, 아니야… 언니… 아니야!”“바로 네가 저지른 일 때문에 오라버니의 다리가 그렇게 된 거야!”“네가 오라버니를 꼬드기지 않았으면, 오라버니는 공을 세우고 돌아와 진작 소씨 가문으로 갔을 거야… 그랬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안 그러고서야, 어째서 네가 나를 납치하는 걸 도왔겠어?”“나… 나는… 흑흑…!”“소우희, 내 앞에서 울며 가련한 척 연기해도 소용없어.”소우희는 얼굴이 창백해져 온몸이 망가진 듯한 몰골로 고개를 떨궜지만, 눈빛에는 한없는 원한이 서려 있었다.그녀는 오늘날 자신이 이렇게 된 건 전부 소우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왜 자신만 이렇게 비참한가? 소우연은 그녀를 저토록 애지중지하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 행복한데!회남왕의 그 다리도, 얼굴도 정말 소우연이 치료한 것일까?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대단한 의술을 가지게 된 걸까?세상은 불공평했다!어떻게 잠깐 의서를 읽는 것만으로 그렇게 뛰어나게 될 수 있단 말인가?소우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굽신거릴 수밖에
“이런...!”소우희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 위에 앉은 진규를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속으로는 온갖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저 회남왕의 사냥개에 불과한 진규는 콧방귀를 뀌며 말머리를 돌려 이육진을 뒤쫓아 갔다.말발굽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소우희는 갑자기 주변의 잡초들이 무서울 만큼 높게 자라난 것 같았다. 바람 소리조차 귀신의 흐느낌처럼 들려왔다.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끼쳐 정신없이 진규의 말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심지어 방금 전 죽은 두 호위의 영혼이 아직도 주변을 맴돌며 자신을 따라오는 듯했다.“제발 나를 버리지 마! 제발!”그녀는 울부짖으며 몇 번이고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멈출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마마.”그때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우희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긴장이 풀렸고, 곧 풀숲 속에서 이지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세자… 너무 무서웠습니다…!”소우희는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흐느끼며 그를 붙잡았다. 그래야만 자신이 살아있음을, 누군가가 곁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이지윤은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회남왕을 건드리셨으니, 앞으로는 쉽지 않으실 겁니다.”소우희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세상 모든 것이 암흑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듯했다.“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 겁니까?”이지윤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이육진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이제 평서왕부밖에 없습니다.”“평서왕부 말씀이십니까…?”“그렇습니다. 마마께서는 이민수와도 가까우셨지 않습니까?”소우희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이지윤이 지금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없었다.지금 그녀는 평춘왕부의 왕비인데, 더구나 이지윤과도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었다. 그런데 그가 다시 이민수에게 가보라는 뜻인 걸까?“아니… 그게…”이지윤이 계속 말을 이었다.
“세자,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소우희는 이지윤을 결연히 바라보았다.이지윤은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마마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마마는 평춘왕의 왕비입니다. 이육진과 소우연은 지금 마마만이 아니라, 평춘왕부 전체를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힘을 합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맞아요, 우리 모두 살아남아야 합니다!”이지윤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그러니 마마는 이민수를 찾아가셔서 평서왕부와 회남왕부를 서로 싸우게 하셔야 합니다. 그들이 서로를 물어뜯을 때만이 우리에게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잘만 하면….”잘만 하면?소우희가 궁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지윤의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마마, 제가 정말 마마를 믿어도 되겠습니까?”“물론입니다. 우리는 비록 부부의 연을 맺은 사이는 아니지만 이미 같은 배에 탄 사이입니다. 세자께서 아니었다면 전 진작 평춘왕 손에 죽었을지도 모릅니다.”이지윤은 품속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그렇다면 오늘 밤, 평춘왕께 이 약을 먹이십시오.”소우희는 약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전까지는 대부분 이지윤이 직접 약을 먹여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의 손으로 직접 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결국, 평춘왕이 누구의 손으로 죽든 그들은 같은 운명으로 묶인 처지였다.“알겠습니다.”소우희는 약병을 쥐고 눈빛에 독기를 띄웠다. 이 세상에선 인자함 따윈 자기 목숨을 남에게 내맡기는 어리석음일 뿐이었다.평춘왕부로 돌아온 후, 소우희는 깨끗이 씻고 몸을 정돈한 뒤 약병을 들고 침실로 향했다.평춘왕 이종대는 이미 앙상하게 말라 뼈만 남아 있었다. 두 눈은 움푹 파이고 숨만 겨우 쉬고 있을 뿐이었다.방 안에는 이지윤이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소우희는 이지윤과 따로 인사를 나누지도 않은 채 바로 평춘왕에게 다가가 약을 억지로 입안에 들이부었다.“아니, 윽…커억…!”억지로 삼킨 약을 이종대가 도로 토해냈고, 약물이 그녀의 손에 튀었다. 방금 깨끗이 씻은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길고 길었던 밤이었다. 소우희는 어젯밤 자신이 지나치게 두려움에 떨었는지, 오직 이렇게 강렬한 자극만이 자신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이지윤의 품 안에 파고들어 조용히 속삭였다.“세자… 저를 정말로 사랑하십니까?”이지윤은 순간 멈칫했으나 곧 표정을 풀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물론입니다.”소우희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좋아요.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만약 죽게 된다면 반드시 한곳에서 죽고, 또 함께 묻히기로 해요. 그렇게 해주실 거죠?”이지윤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왜 그러세요?”이지윤은 급히 감정을 가라앉히고 미소를 지었다.“마마께선 죽지 않을 겁니다. 절대 쉽게 죽지 않을 거예요. 제가 그렇게 할 겁니다”그녀는 흠천감에서 인정한 천생 봉황의 운명을 타고난 자였다. 그런 운명을 지닌 그녀가 쉽게 죽을 리가 없었다.소우희는 그의 미묘한 반응에 잠시 당황했다.이지윤이 부드럽게 그녀를 달랬다.“잊으셨습니까? 마마는 봉황의 운명을 타고난 분입니다. 아직 이루셔야 할 일이 많아요.”소우희는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맞아요, 전 황후가 될 운명이죠. 그리고… 세자는 제 남자입니다. 세자 역시 반드시 성공하실 거예요!”이지윤은 만족스럽게 웃었다.“그렇습니다.”누가 감히 평춘왕부를 그저 황족의 변두리쯤으로 치부한단 말인가? 만약 회남왕부와 평서왕부가 서로 싸워 두 세력이 모두 힘을 잃는다면, 황제에게 남은 선택지가 얼마나 되겠는가?소우희가 잠시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만약 나중에… 제가 세자의 어머니뻘이 된다면… 저는…”이지윤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모자라 해서 문제 될 게 무엇입니까? 남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곁에서 모시는 태감이나 시녀들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들도 목숨이 아깝다면 입을 닫을 겁니다.”권력을 손에 넣으면, 흑도 백이라 할 수 있는 게 세상이다.소우희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그렇겠죠.”아
하늘이 점차 밝아오는 가운데, 소우희는 결심을 굳히며 이지윤을 바라보았다.“좋아요, 전 세자만 믿을게요.”생각할수록 그녀 곁에는 오직 이지윤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평춘왕을 해쳤고,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며 많은 일들을 계획해 주었다.소우희는 눈빛에 확신을 담아 말했다.“세자, 반드시 높은 곳에 오를 수 있을 거예요. 분명히 그렇게 될 거예요!"이지윤의 눈이 빛났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육진과 평서왕부가 서로 물고 뜯기게 만들면 자신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천생봉명인 소우희의 기운이 곁에서 그를 돕고 있으니, 실패할 이유가 없었다.평서왕에게 보내는 일은 일단 잠시 미뤄두고, 소우희는 먼저 빈 별채로 가서 소한준을 만나기로 했다.이때 소한준은 막 평춘왕부의 호위에게 들려서 빈 별채로 옮겨지고 있었다.“평춘왕비는 어디 계시냐?”소한준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물었다. 그를 왜 이렇게 먼 빈 별채로 옮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왕부의 본채까지는 걸어도 반 각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호위병이 대답했다.“왕비마마께서 곧 오실 테니, 소장군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소한준은 울화가 치밀었으나 화를 낼 수도 없었다.소우희가 평춘왕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필이면 이른 아침부터 이육진이 사람을 보내어 그가 평춘왕부에 있다는 소식을 전했고, 그 직후 소한준은 강제로 이곳으로 실려 왔다.대체 이 성경에서 이육진은 무엇이 두려워 저리도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날뛴단 말인가?자신은 황제께서 친히 봉한 장군이었는데, 이육진 그자가 고작 한순간에 그의 두 다리를 이렇게 만들다니.소한준은 오늘 아침 조정에서 아버지와 형님들이 꼭 자신을 위해 공정한 판결을 받아주기를 간절히 바랐다.분노가 치솟아 정신없이 잡생각에 빠져 있을 때, 의자에 앉은 채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던 소한준의 눈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그때였다.“셋째 오라버니!”소우희가 빈 별채로 들어오자마자
소우희는 마음을 다해 소한준을 달래놓았다. 그녀는 폐채를 대충이라도 정리하게 한 후에 말했다.“셋째 오라버니, 제가 회남왕부에서 지내는 형편이 좋지 않다는 거 아시잖아요. 자주 오가진 못해도, 제가 유명한 의원을 보내드릴 테니 일단 진료부터 받고 천천히 치료 방법을 찾아보도록 해요.”“그래, 우희 네 말만 믿으마.”소한준의 일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어, 소우희는 오후가 돼서야 겨우 평춘왕부를 빠져나와 이민수를 만나러 길을 나섰다.하지만 마차가 왕부를 나서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길 한가운데서 말 위에 앉은 진규가 비켜설 생각도 하지 않고 길을 막고 있었다.마부는 마차를 급히 멈추고는 진규에게 소리쳤다.“여보시오! 눈에 평춘왕부 마차가 안 보이시오?”진규가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냉랭하게 말했다.“보면 어쩌겠단 거냐? 설마 네 왕비를 위해 나보고 길이라도 비키라는 것이냐?”마부는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왕비마마께서 타신 마차인 줄 알면서 감히 길을 막아? 대체 뉘 집안의 무례한 놈이냐!”평춘왕부가 경성에서 실질적인 권력이 크지는 않아도, 그래도 엄연히 황실의 일족이었다. 어느 누가 감히 이렇게까지 무시한 적은 없었다.진규가 싸늘한 눈길로 마차를 흘깃 바라보았다.그러자 마차 안에서 소우희가 황급히 소리쳤다.“어서 길을 비켜드려라!”길을 비켜드려라고?마부는 얼떨떨해서 말을 잃었다. 마차 안의 춘화 역시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소우희는 돌아온 이후, 분명히 무언가 크게 달라진 듯했다. 심지어 주종 간의 정이 깊던 혜주를 소한준을 간호하라며 폐채로 보내버리기까지 했다.그때 문득, 소우희는 마차의 창문을 조심스럽게 들추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멀리서 파를 넣어 구운 전병을 파는 가게에서 나오는 이육진이 눈에 들어왔다.소우연이 제일 좋아하는 전병집이었다.이육진은 소우연을 위해 전병을 사러 들른 것이었다.그 위풍당당한 남자는 얼굴이 완전히 회복된 데다가, 다리까지 멀쩡해져서 사람의 마음을 흔들 만큼 눈부시게 빛나고
소우희는 속으로 비웃었다.‘흥, 탐내본들 무슨 소용이람? 이육진 그 남자는 소우연만 좋아하는걸. 하필 그 지독한 계집만 사랑하다니!’만약 자신이 이육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매일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하지만 이육진의 마음을 얻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그때 소우희는 문득 자신이 수년간 고이 간직했던 옥패를 떠올렸다. 귀한 옥이기에 조심스럽게 보관해왔던 물건이었다.사실 소우연에게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4년 전, 경성으로 돌아온 뒤 그녀는 몰래 이 옥패의 출처를 조사했었고, 그때 소우연이 구해준 사람이 바로 회남왕 이육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당시 이육진은 얼굴에 흉측한 상처를 입었고 다리까지 못 쓰게 되어 폭군처럼 변해, 경성에서 피비린내를 몰고 다니는 인물로 악명을 떨쳤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그런데 지금은…방금 본 이육진의 잘생긴 얼굴, 그리고 강력한 무예 솜씨는 4년 전의 회남왕과 완전히 딴판이었다.생각해 보니, 당시 이육진은 남강에 여러 번 갔었다고 했다. 그때마다 그 옥패의 주인과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찾으러 간 것이 아닐까?이 생각이 들자, 소우희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만약 그녀가 옥패를 가지고 이육진 앞에 나타나, 그가 잘못 알고 있다고, 진정한 은인은 자신이라고 말한다면?자신이 그의 생명의 은인이 된다면, 설마 그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증오할 수 있을까?가슴이 뛰었다.그렇게 상념에 빠진 사이, 마차는 다시 움직였고, 곧 소우희는 평서왕부 정문에 도착했다. 춘화가 내려가 문 앞의 호위에게 청첩을 건넸다.평서왕부의 호위는 다소 의아했다. 언제부터 평춘왕부와 평서왕부가 서로 왕래를 했단 말인가?춘화가 다시 마차로 돌아와 소우희에게 고했다.“왕비마마, 서신을 전달하였습니다.”“그래, 일품루에 가서 기다리자.”과거, 그녀는 일품루에서 다과를 먹는 걸 좋아했고, 이민수는 그곳에서 차를 마시는 것을 즐겼다.두 사람은 이미 몇 개월 동안 만나지 못했다. 이번엔 이
용부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와 알리겠다고 했지만, 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으셔도 돼요.”정연과 진우를 데리고 주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소우연은 마당 한가운데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는 용강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대나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의 온몸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햇살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연은 잠시 숨을 삼켰다.곁에 있던 호위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저는 태자빈입니다. 용 감정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주군께서 가장 자주 안부를 묻던 이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도우라는 명까지 내려졌으니, 그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과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누구도 들이지 말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발소리조차 삼키며 마당을 가로질렀다.낙엽과 풀이 깔린 바닥 위로 바스락이는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돌려보내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용강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멈추지 않았다.“제가 오늘 올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으셨나요?”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햇살을 뚫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그대로 누운 채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했다.“태자빈 마마셨군요. 자리에 앉으시지요.”소우연은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발견했다.방석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리가,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자리였다.“이걸 미리 준비하셨군요. 오늘 제가 올 걸 아셨던 거네요.”“예. 그리고 약간의 수를 써서 태자 전하께서 잠시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단둘이 뵙고 싶었거든요.”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맥해드릴게요.”“괜찮습니다…”그의 말이 끝나
이민수는 혜주와 소범준만 남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뒤, 아령은 소씨 가문 안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 소지윤에게 아이를 얻기 위한 계획도 한결 수월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아씨는 누구에게도 깊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소지윤 대인에게만은 그 마음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그의 아이를 가지려 하시는 걸까.한편, 태자부.이육진은 연회를 열고, 용강한과 심소균을 초대했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즈음, 소우연이 용강한더러 ‘오라버니’라 부르자 심소균은 술잔을 들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아니…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지?’태자빈이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라면, 절대 가벼운 인연이 아닐 터.그보다 더 놀라운 건, 태자 이육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심소균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에, 괜히 청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그냥 조용히 마시죠.”용강한은 무심히 말하며 자신도 잔을 비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소우희는 이미 죽었다.그토록 집요하게 소우연을 괴롭히던 이가 사라졌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법도 했다.하지만, 연회 자리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어딘가 무거웠다.심소균은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용강한은 알고 있었다.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심소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이육진은 하인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했다.연회가 마무리되고, 소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세요?”“괜찮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웃었지만, 이어진 기침은 거셌고… 이내 곧 수건에는 선혈이 스며들었다.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망토를 여미고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눈은 날카로웠다.소우연은 물론, 이육진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용 감정, 네 몸 상태가 왜 이리 나빠졌느냐.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그는
서재 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숨막히는 분위기로 가득했다.이민수는 의연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희가 소우연에게 얼마나 애원했는지, 부인께서 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도 소우연은 우희를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답니다.”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잠시 조용하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셨으니,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고, 서늘한 눈빛을 떨구었다.“우희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령이 눈물로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소씨 가문을 위해 이 더러운 일에 제 발로 들어설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어차피 저희 평서왕부는, 태자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소홍범의 안색이 굳어졌다.평서왕의 야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이육진이 불구가 되고 얼굴까지 망가졌을 무렵, 평서왕은 황태자의 자리를 가장 가까이서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직접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장남 이민수가 황제에게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거란 이야기는 조정에 이미 돌고 있었다.수년간 평서왕부는 조용히 인맥을 조율하고 관료를 포섭해왔다. 이육진이 회복했다고는 하나, 평서왕 부자의 야망은 그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았다.소씨 가문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아버지…”소현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우희를 향한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소우연에 대한 원망은 이미 마음속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지옥이라면, 차라리 평서왕세자의 손을 잡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소홍범은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소현준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소우연을 직접 만나야 하나… 아직은 이르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 순간.이민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자, 소현우가 갑작스레 그의 등
“누구지?” 임진숙이 물었다.“평서왕부의 세자저하, 그리고 스스로 둘째 아씨의 지기라 밝힌 여인입니다.”소현우가 곧장 말했다. “어머니, 우희와 친하다고 했던 그 손수건 친구입니다. 어제 시신 수습을 도왔던 그 아가씨예요.”임진숙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모셔라. 우희의 친구라니...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예.”소현우는 급히 나가 마중을 나갔다.지금의 소씨 가문에겐 더 이상 발버둥칠 힘도, 핑계도 없었다.평서왕 세자 이민수, 한때는 소우희의 혼처 상대였던 사내. 소우연만 아니었다면, 소씨 가문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일도, 우희가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직접 여동생의 목을 조르는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이민수가 도착하자, 병중에 있던 소홍범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맞았다.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태자부는 이제 발붙일 수 있는 곳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아니었다.소씨 가문이 마지막으로 기대어볼 곳은 오직 평서왕부뿐.본래부터도 세상은 소씨 가문이 평서왕부의 그늘 아래 있다고 여겨왔다.“소 장군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다시 뵙는 자리가 이리도 쓸쓸할 줄은 몰랐습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얼굴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있던 소한준은 냉랭하게 내뱉었다.“소우연만 없었더라면, 우희는 진작에 세자저하의 곁에 있었을 겁니다. 이런 참변도 없었겠지요.”이민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 다 지켜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형식적인 위로가 몇 마디 오간 뒤, 아령은 이민수의 배려로 이당에 남아 임진숙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소홍범과 이민수, 소현우, 소현준은 서재로 향했고, 소한준은 하인의 부축을 받아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임진숙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을 흐느꼈다.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았다.‘우리 우희가 왜 이리 비참하게 갔을까… 우리 집안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그녀는 끝없는 자책과 회한 속에 빠져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믿었어. 그 은인이 우리 어머니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피를 말리며 상운국에 도착했을 땐 외가 쪽은 이미 떠난 뒤였지. 나중에야 들었어. 멀리 남강으로 이사했다는 걸 말이야. 그 은인은 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나 봐. 결국 어머니를 다시 백화루에 팔아넘겼어. 그리고 나도… 결국 기생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지.”아령은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조용히 혜주를 바라봤다.“넌 어떻게 생각해? 내 이모인 임진숙이라는 사람… 참 무섭지 않아?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지 않아? 왜 그 사람은 고귀한 장군 부인으로 살아가고, 우리 어머니는 천한 기생이어야 해? 왜 그 사람 자식들은 다들 한 자리씩 가질 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신분이었던 걸까? 우리 어머니가 그걸 참지 못했어. 나도 마찬가지였고.”아령의 눈빛은 억눌린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그래서 맹세했어. 어머니랑.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 사람과 그 사람 가문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겠다고.”그녀는 눈물을 훔친 뒤, 환하게 웃었다.그 미소는 해맑았지만, 그 속에 담긴 결심은 날카롭고 서늘했다.“그게 바로 내가 살아 있는 이유야.”그 이야기를 들은 혜주는 마음 깊은 곳이 흔들렸다.‘그랬군요… 그래서…’소 부인 임진숙. 겉으론 다정하고 자애로워 보였지만, 어린 동생을 백화루 문 앞에 유기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소우희 아씨가 그렇게 악랄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군요.’‘진짜…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네요…’“그 진홍색 비단함, 꼭 잘 보관해. 그 안엔… 언젠가 그 집안 사람들의 뼛가루를 담게 될 거야. 그래야 어머니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테니까.”아령은 혜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았잖아. 그 마음, 나도 잘 알아. 평서왕부로 돌아가면 널 풀어줄거야. 그때 내가 준 돈으로 아무도 널 모르는 곳에 가서… 조용히, 너답게 살아.”그 말을 들은
그녀가 한때 이민수의 침소를 지키던 몸이었다는 사실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그랬군요...”소현우는 장정답지 않게 눈가가 붉어졌다.멀찍이서 하인들이 수레를 끌고 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저건...”“우희 언니에요.”아령은 숨김없이 고백하며, 눈가를 눌렀다. 슬픔을 삭이는 듯한 손짓이었다.소현우에게는 낯선 장면이었다.소우희에게 이런 절절한 마음을 나누던 벗이 있었던가.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소현준은 그리 쉽게 믿지 않았다.여인의 말은 빈틈이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그럼에도 혜주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소현준은 혜주를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맞췄다.“정말... 둘째를 원망하지 않느냐?”혜주는 힘 있게 고개를 저었다. 그 눈빛엔 감사와 충성이 담긴 듯 보였다.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그녀는 소우희를 증오했다. 결국 바랐던 대로 소우희는 혀를 잃고,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그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소현우는 그런 혜주의 내면까지는 읽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어릴 적부터 함께한 사이니... 주인과 종이라도 정이 있었겠지.”사실 혀를 자른 것도 그날 격분한 소홍범의 지시였다.이제 소우희는 죽었고, 더는 이 하녀에게 뭐라 할 이유도 없었다.소현우는 이마를 짚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맙다. 혜주가 그대 곁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 또한 우희가 남긴 인연이라 생각한다.”아령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오라버니... 아니, 장군님. 죄송해요. 순간 감정이 북받쳐서...”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실수라도 한 듯 웃어 보였다.소현우는 손을 내저었다.“우희의 벗이라면, 오라버니라 불러도 괜찮다.”잠시 후, 소씨 가문의 하인들이 아령 일행의 수레 대신 소우희의 시신을 직접 실었다.이제 그녀를 보내는 건, 가족의 몫이었다.소현준은 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형은 어
전날엔 폭우가, 오늘은 뙤약볕이 내리쬐었다.이런 날씨 속에서, 소우희의 시신은 또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까.강직한 무장이자 소씨 가문의 주인인 소홍범조차 그 앞에선 중심을 잃을 뻔했다.말을 꺼내려다 삼킨 그는, 결국 큰아들 소현우와 둘째 소현준에게 시신을 찾으러 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난장골.산바람은 살을 찌를 듯이 뜨겁고, 공기마저 눅눅하게 달아올라 있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숙취에 시달리던 소현우는 동생과 함께 난장골에 도착했다.주위를 둘러보니, 시신을 찾아 이곳을 헤매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그중 한 무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희고 단정한 옷차림의 소녀가 한 대의 수레를 따라가고 있었고, 수레 위엔 희미한 천이 덮인 시신 하나가 실려 있었다.소녀의 눈가엔 희미한 붉은 기가 맴돌았다.썩은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소현준은 코끝을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호위병 하나는 이미 참지 못하고 옆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소현준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둘째 아씨 시신부터 찾아라.”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이를 악물고 악취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였다.하얀 옷의 소녀와 그 일행이 소씨 가문의 마차 앞으로 다가왔고, 소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실례합니다. 혹시 소씨 가문의 도련님들이신지요?”마차 안에 있던 소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마차 옆에 서 있던 소현준만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리고 그 소녀 옆에 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혜주였다.혜주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조용히 예를 올렸다.그 눈동자엔 아련한 빛이 어려 있었고, 그리움과 슬픔이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소현준은 미간을 좁히며 소녀에게 물었다.“너는 누구냐?”시선은 혜주에게 있었지만, 질문은 분명 그 소녀에게 향한 것이었다.소녀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몸을 낮추며 답했다.“아령이라 합니다. 예전에 소우희 아씨를 몇 차례 뵌 적이 있고, 개인적인 은혜를 입은 바 있습니다. 서로 손수건을 나
반 시진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붉게 타오른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맑고 푸른 하늘은 마치 물로 씻어낸 듯 투명했다.그 풍경은 마치 소우연의 마음과도 같았다.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고 평온했다.소우희는 죽었다.이 세계의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남주는 더 이상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었다.모든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새로 쓰일 터였다.진원 장군부.소현우는 돌아오자마자 술을 들이켰고, 그날 밤을 고스란히 의식을 잃은 채로 보냈다.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기 직전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헝클어진 머리에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그는 하인에게 명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을 전부 정청으로 불러라.”며칠째 앓고 있던 소홍범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군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 부장들에게 넘긴 상황이었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육진이 그의 군권을 서서히 회수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지금 그의 수하 중 대부분은 본래 이육진의 옛 부하였다.이육진은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그저 말 한마디면 모두가 따랐다.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소홍범, 그리고 그의 아들들마저도 과거엔 모두 이육진의 군 아래 있었다.5년 전,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이육진이 매복을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소현우는 전방에서 적과 싸우며 지원 한 번 받지 못한 채 중상을 입었다.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순간, 그를 구해낸 사람은... 소우희가 아니었다.소우연이었다.소홍범은 이를 악물었다.소우희를 미워했다.믿고 싶었지만, 결국 기대를 저버린 딸이었다.소우연이 그의 큰아들을 살려냈다고 해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족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그게 소우희의 자리를 대신할 이유는 아니었다.결국 일을 망쳤다.감히 소우연을 건드려,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를 자초했다.정청에 모두가 모였다.눈이 퉁퉁 부은 임진숙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님은 안 오는 거니...? 혹
‘세상에 진심이란 없어.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그 말이 또렷이 귓가에 맴돌았다.마지막까지 아령의 목소리가 소우희의 머릿속을 울렸다.‘날 미워하지 마. 미워할 거면 너 자신을 미워해. 네가 소씨 집안의 자식이라는 걸. 네 어머니가 악독한 여자였다는 걸. 그 여자가 내 어머니 인생을 망쳤고, 그래서 난 태어나자마자 천민이 되었어.’‘난 바라는 거 없어. 단 하나, 너희 소씨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보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의 이유야.그리고 지금 난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소우희는 그녀가 정말로 복수가 성공하길 바랐다.여자의 숨소리가 멎었다.소현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비틀거리며 주저앉을 뻔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우희의 콧날 아래를 짚어보았다.숨이 없었다.정말로 죽은 것이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오라버니’라 불렀던 여동생.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건만.소우희는 정말로 죽었다.그는 허둥지둥 감방을 뛰쳐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임진숙이 그 얼굴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니?”소현우는 눈을 피하며 단호히 말했다.“아무 일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요. 어머니, 어서요.”말을 재촉한 뒤, 급히 달려가는 소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본 옥졸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불안한 기운에 곧장 감방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소우희가 죽어 있었다.그녀는 움직일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건 단 하나.소현우 장군.그는 자신의 손으로 친여동생의 목숨을 거두었다.옥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어떻게 이런 일을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더욱이 태자에게...그는 급히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소우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옥졸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직접 태자부로 달려갔다.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금세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