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은 급히 소우희의 몸을 치료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민간에서도 이름난 의원들이 찾아와 그녀를 살펴보았지만, 결국 모든 의원들의 결론은 하나였다.그렇게 소우희는 서서히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희야…!”임진숙은 가슴을 치며 죽을 듯이 울부짖었다.“희야…!”그때 밖에서 소 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으로 들어섰다.늙은 나인이 소 노부인의 몸을 부축하고 있었다. 소우희는 이미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상에 누워 있었지만,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진흙덩이처럼 축 늘어진 몸을 보자 소 노부인의 눈은 크게 흔들렸다.“이게 어찌된 일이냐?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이냐!”소 노부인의 분노 어린 외침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홍범아, 반드시 우희의 원수를 갚아줘야 한다.”소홍범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은 무력함으로 가득했다.지금 소우희는 평춘왕을 살해하고 도망친 혐의를 받고 있는 몸이었다.“분명 태자 짓이야! 그 요망한 소우연 짓이 틀림없어! 그 애가 나타난 이후로 우리 집안이 꼬이기 시작했어. 한준이는 다리를 잃고, 우희는 이렇게 살아도 산 게 아닌 꼴이 되고 말았어!”임진숙은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침상 위에서 그 말을 들은 소우희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바로 소우연이 그랬어요! 소우연과 이육진, 그 두 사람이 절 이렇게 만들었어요…’특히 이육진이 가장 증오스러웠다.그자는 어쩌면 그토록 잔인할 수가 있는가? 자신을 구더기처럼 움직이지도 못하는 꼴로 만들다니!“보세요! 우희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소우연이야, 그 악독한 소우연이 우희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거라고요!”임진숙은 격하게 흐느꼈다.“그만해라! 소우연은 태자빈이다. 태자빈을 건드렸으니 이런 꼴이 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소홍범이 날카롭게 꾸짖자 임진숙은 흐느끼며 입을 다물었다.소현우가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아버님, 과거 우리가 소우연에게 잘못한 건 맞습니다만, 어찌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습니까?”그의 시선이 다시 비
소 노부인은 머리를 주무르고 다리를 문질렀다. 그녀는 오랫동안 소우희를 원망하고 있었다. 소우희가 모든 사람을 속였기 때문이었다.그녀의 두통은 이제 더 이상 치료 약이 없었고, 하루하루 불안에 떨며 살아가며 자신이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것만 같았다. 자신은 죽어도 좋았지만, 소씨 가문은 계속 이어져야 했다.노부인은 울먹이며 소홍범을 불렀다.“홍범아, 잠시 밖으로 나오너라. 내 긴히 너한테 할 말이 있어.”소홍범은 잠시 망설였다. 어머니가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은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는 손짓으로 소현우와 소현준에게 별채에 있는 소한준을 불러 서재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했다.그렇게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임진숙은 침상 옆에서 힘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떨리는 두 손으로 소우희를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차마 손을 댈 곳이 없었다.“어미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다. 절대 용서치 않을 거야.”임진숙의 마음은 온통 증오로 가득했다. 이전에는 단지 소우연이 싫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셋째 아들을 망가뜨리고, 또 그녀가 가장 아끼는 막내딸마저 이렇게 만들어놓았다. 그 증오는 이미 극에 달한 상태였다.소우희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원한을 품고 있었다. 오늘은 아령이 가져다준 약도 먹지 못한 탓에 온몸이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근질거렸다.너무나 가렵고 고통스러웠다.온몸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사지마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입에서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누군가 머리카락을 긁어주고, 등이며 가슴이며 허벅지까지 긁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칠 듯이 근질거려 그녀는 작게 신음 소리를 냈다.임진숙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희야, 왜 그러니?”하지만 묻고 나서야 딸이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당황한 채 나인을 돌아보며 물었다.“얘가 무얼 원하는 게냐?”나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소녀도 모르겠습니다, 마님.”“손도 다리도 부러지고 혀까지 잘렸으니… 틀림없이 소우연 그 계집
소씨 가문을 돌봐주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달라는 뜻이 아니었다.그저 더 이상 소우연을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살아, 소씨 가문이 그나마 숨이라도 붙어 있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소홍범은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명심하겠습니다.”“그래.”소 노부인은 이제야 안심한 듯 보였지만, 곧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녀는 손을 흔들어 소홍범을 내보냈다.“어서 가서 아이들과 의논하거라.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네, 아들이 바로 가겠습니다.”소홍범은 예를 갖추고 서둘러 서재로 향했다.서재 문 앞에 하인이 서 있었으나, 방 안에는 아들들이 보이지 않았다.“다들 어디 간 것이냐?”하인이 당황하며 답했다.“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요.”모른다고?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소홍범이 찾으러 나가려던 참에, 소현우가 소한준을 등에 업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셋째가 우희를 보고 싶다 하여 조금 늦었습니다.”소홍범이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 이야기하자.”형의 등에 업힌 소한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 소우희를 뼛속까지 미워했다. 거짓으로 모든 사람을 속이고, 결국 자신이 다리를 잃게 만든 사람이 그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자신보다 더 비참한 꼴이 된 것을 보니,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어느새 그의 증오는 소우연과 태자 이육진을 향해 있었다.그렇게 서재에 부자 넷이 모이게 되었다.한동안 침묵이 방 안을 짓누르며 서로 눈치만 보았다. 결국 소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소우연이 우희를 저렇게 잔혹하게 짓밟았으니, 언젠가는 우리도 같은 꼴이 될 겁니다. 소우연 그 여자는 애초에 정이란 게 없는 여자예요. 그리고 이육진은 예전의 그 태자가 아닙니다. 다리를 다친 이후 성정이 난폭해져서, 세간에서 그를 염라대왕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결코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소홍범은 긴장한 얼굴로 밖을 흘끔거렸다. 누가 이 말을 듣지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집안이고 밖을 지키는 사람도 믿을 만했
세 아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신신당부를 한 뒤 소홍범은 소현우에게 소한준을 업고 돌아가라 지시했다.그리고 남아 있던 소현준을 향해 말했다.“둘째야, 이 집안에서 가장 냉정한 사람이 너뿐이다. 네가 나서서 우희한테 이런 짓을 한 자가 누구인지 한번 알아보거라.”소현준은 고개를 들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아버님께서 조금 전 태자부를 건드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조사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소우희는 현재 평춘왕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몸입니다. 그런 아이를 장군부에 데리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위험합니다.”소홍범은 말문이 막혔다.소현준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굳이 조사할 필요 없습니다. 필시 그들의 짓일 테니까요. 이 상황에서 소씨 가문을 지키려면 소우희를 내치는 편이 현명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힐 수 있을 테니까요.”“우희가 평춘왕을 죽였다고? 그럴 리가 없다.”“왜 그럴 리가 없습니까? 제가 어머니를 모셨던 나인을 불러 직접 물어봤습니다. 나인의 말에 따르면, 우희는 평춘왕부에서 제멋대로 권세를 휘둘렀답니다. 호위병들도 그 아이의 지시를 따랐다 하니, 우희는 결코 순진한 사람이 아닙니다.”소현준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그런 우희를 여전히 감싸고 계신다면, 소우연이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소현준은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순 없었지만, 늘 소우연이 소씨 가문 사람들에게 품고 있는 깊은 원한을 느끼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소우연이었다면, 소우희와 형제들 그리고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았을까?당연히 미웠을 것이다!자신의 공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가고, 원치 않는 혼인을 강요받았다면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아버님, 소우연은 결코 이 상황에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소우희를 내치는 겁니다. 차라리 밖에서 의원을 찾아 치료시키더라도, 더는 가문에서 보호하지 않는 편이 현명합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소우희의 죄가 결코 가볍지
소우연 집안이 모조리 멸문당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이민수는 고개를 돌려 무릎 꿇고 있는 아령을 바라보았다.이제 그녀는 예전처럼 소우연을 흉내 낸 화장을 하지 않고 있었다.지금 그녀는 그저 의지할 곳 없는 가엾은 아이처럼 보였다.자신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불쌍한 존재 같았다.불쌍하다니.아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예전에는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오늘 아령이 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그는 눈빛을 바짝 세우며 경계하듯 그녀를 노려보았다.“너 소우연을 많이 미워하는구나. 소씨 집안 사람들도. 그들이 멸문당하길 바라는 거냐?"아령은 숨이 턱 막힌 듯 입을 벌린 채 말이 나오지 않았다.한참을 머뭇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저는… 그저… 그들 때문에 세자 저하께서 이런 고초를 겪으신 것 같아서요. 그들이 저하를 망쳐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아령은 마치 비에 젖은 병아리처럼 몸을 한껏 낮추며,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이민수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려 했다.역시나 그녀의 그 약한 태도는 이민수의 눈빛을 조금 누그러뜨렸다.그녀를 바라보며 이민수는 생각했다.이유가 무엇이든 소씨 집안은 죽어 마땅했다.소우희가 천명을 타고났다는 말이 없었더라면, 어릴 적 소우연이 복성이라며 자신과 정혼하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소씨 집안은 다 죽어야 마땅했다.그중에서도 이육진과 소우연은 반드시…“세자 저하… 그럼 저는…”아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이민수는 한참을 침묵하다 낮게 말했다.“가 보거라.”“예.”아령은 조용히 숨을 돌리며 자리를 물러났다.이민수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그의 내면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고, 정신은 극도로 일그러지고 있었다.어릴 적부터 곁을 지켜오던 환관 상평조차 자신과 닮았다는 이유로 무참히 죽였다.지금은 아령이 치료해주고 있기에 그나마 몇 날 며칠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그다음은?아령은 알고 있었다.이대로는 끝장이라는
오랜만에 다시 만난 연인은 말없이 곧장 이지윤의 방으로 향했다.천둥이 치고 불꽃이 튀듯 뜨겁게 서로를 탐한 두 사람은 두세 번이나 물을 불러가며 한참을 얽혀 있었다.기력이 다 빠진 뒤, 아령은 지윤의 가슴 위에 힘없이 몸을 기대었다.남자는 그녀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젖히며 그 고운 얼굴을 바라보았다.이 얼굴의 진짜 모습을 본 사람은 오직 자신뿐일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아령이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그리고 조용히 말했다.“저하, 사실 이민수도 저의 진짜 얼굴을 봤어요.”“뭐라고?”남자가 놀라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아령이 그의 가슴을 눌러 제지했다.“진정하세요. 전 괜찮아요.”이지윤은 짧게 숨을 들이쉬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네가 그 자 곁에 있는 건 위험한 일이 아니냐?”아령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하지만… 더 놀랄 일이 하나 더 있어요.”그녀는 일부러 말을 아끼며 여운을 남겼다.이지윤의 눈엔 그녀를 향한 갈망과 호기심이 가득했다.“무슨 일이냐?”“이민수… 이제 남자로서 기능을 모두 잃었어요.”아령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그렸다.“어떻게 된 건지 맞혀보시겠어요?”이지윤은 얼굴을 찌푸렸다.“병이라도 걸린 것이냐?”“비슷해요.”더 이상 밀당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듯, 아령은 숨김없이 말했다.“소우연이 이민수의 그곳을 잘라버렸어요. 거의… 환관이 된 거나 마찬가지죠.”“뭐라…?”이지윤은 숨이 턱 막힌 듯 눈을 크게 떴다.“그건…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 일이 아니더냐.”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흥분이 그의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랐다.이로써 이민수는 완전히 끝장났다는 생각에 이지윤은 묘한 희열을 느꼈다.“아령아, 이제 내 곁으로 돌아오너라. 더는 평서왕부에 머물 필요 없다.”평춘왕이 죽은 뒤부터, 이지윤의 야망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권력을 쟁취하기보다는 지금의 지위를 지키는 쪽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소녀의 걱정 어린 얼굴을 바라보며, 이지윤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그리고는 아래에 누운 소녀를 찬찬히 내려다보며 말했다.“모란꽃 아래서 죽는 게 정녕 풍류라 하였으니, 그 말이 틀리진 않구나.”그 말처럼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듯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처음엔 서로 추위를 피하려고 안겼던 두 사람.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향한 진심과 오래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그녀가 바라는 것을 이뤄주려 했다.그녀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그는 주저 없이 함께할 작정이었다.한편, 소범준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커다란 귀비의자 위에 누워 있었다.방은 제법 넓었지만 사람이 드나든 흔적은 없었고, 공기엔 눅눅하고 텁텁한 곰팡내가 배어 있었다.그는 주위를 둘러봤다.여기가 어디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검을 뽑으려 팔을 들자, 손발이 축 늘어지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바로 그때, 한 하인이 들어왔다.그는 공손하게 말했다.“나으리,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아씨께서 오실 겁니다.”‘아씨…?’그제야 소범준은 쓰러지기 직전에 자신의 등 뒤에 있던 이가 아령이었다는 걸 떠올렸다.그녀가 돌아서는 찰나, 손에 들고 있던 미약을 확 뿌렸던 것이다.손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고작 어린 계집아이한테 당하다니…그녀가 뭘 노리는지는 몰라도, 몸에 상처 하나 없는 걸 보니 죽일 생각은 아닌 듯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아령과 이지윤이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이지윤을 보는 순간, 소범준은 여기가 평춘왕의 본채였다는 사실을 단번에 깨달았다.“나으리.”아령이 다가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이지윤은 그를 흘긋 보며 말했다.“이 자가 너를 쫓아온 자더냐?”“예, 왕야.”두 사람은 대놓고 다정한 기색을 드러냈다.소범준 앞에서도 아무 거리낌 없는 태도.세자 이민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이토록 노골적인 걸 보면,자신이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단 뜻일 터.그렇다면… 자신을 살려둔 이유는?입막음을 할 생각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과연
소범준은 말없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아니, 설마 그럴 리가…“그럴 리 없다고요? 예전엔 그래도 온화한 군자였죠. 하지만 지금은 저에게조차 온갖 핑계를 대며 억압하고 있어요. 상평조차 그렇게 쉽게 죽였는데 저나 소 장군이라고 다르겠어요?”아령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이지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아령 말이 맞아. 너 자신을 위하지 않더라도 네 아내와 자식들은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소범준은 이를 악물었다.“…하지만 저는 세자 저하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전 모두 세자께서 만들어주신 것이니까요.”아령은 조용히 말했다.“그렇다면 제가 하는 일은 못 본 걸로,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너… 정말…”“예전의 세자께서는 분명 훌륭한 분이셨어요. 하지만 지금 당신이 희생한다고 해도, 장군의 아내와 아이들까지 함께 희생시킬 건가요?”그녀는 조용히 말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소범준은 잠시 고민하다 일단은 상황을 넘기기로 했다.입을 열려는 찰나 아령이 먼저 말했다.“아이들도 이제 글을 배워야 할 나이가 되었잖아요. 마을 훈장은 별다른 학식도 없고요. 왕야께서 이미 아이들을 위해 훈장을 초빙하셨어요. 걱정 마세요, 소 장군.”“너희… 너희들…”거짓말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범준은 후원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직접 보게 되었다.그는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지금 상황에서 무슨 낯으로 마주할 수 있겠는가.뒤돌아보며 아령과 이지윤을 바라봤다.가슴에 팔짱을 끼고 턱을 괴고는 낮게 물었다.“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 나리께서는 지윤 왕야 같은 곁가지 황족이 왕좌를 다툴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소범준은 말없이 웃었다.아령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역사 속 황제들 가운데엔 뜻밖의 인물들이 꽤 많아요. 결과는 말보다 강하죠.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몰라요.”“그래. 그렇지.”소범준은 사실 이민수든 이지윤이든, 그들이 이육진을 이길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그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
“오라버니, 그렇게까지 격식 차리실 필요 없어요.”소우연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 이육진은 밤새도록 그녀에게 오라버니라 부르게 했다.겉으론 무심한 척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생각해보면 자신이 평소에 용강한을 오라버니라 부르는 것도 한몫했는지도 모른다.두 사람은 예전부터 서로를 형제처럼 여기기로 했고, 오랜 시간 그렇게 지내왔다.하지만 지금처럼 신분이 달라지고, 관계가 미묘하게 바뀐 뒤에는 그 친근한 호칭조차 누군가에겐 불편함이 될 수 있었다.특히 이육진이라면 겉으론 태연해도, 그 속마음은 질투심에 가득 차 있을 것이다.그 생각에 소우연은 괜히 조심스러워졌다.가을이 끝나가고 있었지만, 아직 날이 매섭게 춥지는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강한은 벌써 겨울 외투에 털 망토까지 두르고 있었다.몸이 정말로 차갑긴 한 모양이었다.그 모습에 소우연은 마음이 살짝 저릿해졌다.“태자빈 마마, 혹시 목이 불편하신 겁니까?”용강한이 조심스레 물었다.들리는 목소리로 봐선 확실히 쉰 듯했다.소우연은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요.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무리하지 마십시오.”말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동편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혹여 불편하신 게 있으시면 꼭 말씀해 주세요.”소우연은 정중히 말했다.용강한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신세를 지게 되어 송구합니다.”곁에 서 있던 경문이 조용히 앞으로 나와 예를 올렸다.“실례를 무릅쓰고 여쭙습니다. 소인은 어디서 묵게 될지요…”소우연이 정연을 바라보자, 정연이 자연스럽게 답했다.“이 방 옆에 통방이 하나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별채 객실이 하나 있네.”경문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용강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객실에서 머무르도록 하게. 자네 코 고는 소리가 너무 크지 않은가.”“……!”경문은 한순간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자신이 코를 곤다는 사실은 처음 들었다.늘 가까운 방에서 주
밤은 깊어가고, 뜰 안의 등불들이 하나둘씩 환히 켜졌다.하늘엔 엷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고, 둥근 달은 반쯤 가려진 채 수줍은 듯 사람 세상을 엿보고 있었다.이내 구름이 걷히자, 달빛은 유난히 밝고 또렷하게 아래를 비추기 시작했다.태자부 전체가 불을 밝힌 듯 환했고, 그 중심인 본채는 바람 소리마저도 따스하게 느껴질 만큼 봄기운이 감돌았다.온 뜰이 달빛에 잠긴 밤, 마치 봄날처럼 포근하고 평화로웠다.그렇게 두 시진쯤 흘렀을까.본채 밖 풍경에 달린 방울이 서너 번이나 울려 퍼졌다.그날 밤, 물을 부른 것만 해도 벌써 서너 번째였다.간석은 먼지떨이를 품에 안은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태자 전하, 정말 대단하십니다…’속으로 감탄이 절로 나왔다.하지만…‘태자빈 마마의 배는 어째서 아무 소식이 없단 말인가…’간석은 하늘을 향해 조용히 마음속 기도를 올렸다.‘하늘이시여, 두 분이 이토록 정성껏 애쓰시니, 부디 귀한 아기를 점지해 주시옵소서. 태자부는 물론 상운국 전체가 기뻐할 일 아니겠습니까…’그날 밤 마지막으로 물을 부른 것은 소우연이 반쯤 정신이 나간 채였을 때였다.기억나는 것은 이육진이 직접 그녀를 정갈히 씻기고, 이불을 덮어준 장면뿐이었다.정신을 온전히 차린 것은 다음 날 새벽,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눈을 뜬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정연을 불렀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고양이보다도 작고, 새된 소리조차 내지 못할 만큼 목이 완전히 쉬어 있었다.결국 그녀는 손을 들어 침상 옆에 달린 방울 끈을 당겼다.딸랑, 딸랑.방울 소리가 울리자 정연이 곧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태자빈 마마, 깨어나셨습니까?”소우연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대답 대신 정연을 바라보았다.입을 열 기운조차 없었기에.말없이 누운 그녀의 모습을 본 정연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피했다.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전날 밤, 태자빈 마마는… 많은 것을 견뎌내신 것이다.오늘은 하루 종일 침상에 누워 계셔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창밖으로는 눈이 부실만큼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따스한 봄바람이 불자 뜰 안의 꽃잎과 풀잎들이 살랑살랑 몸을 흔들거렸다. 곳간에서 피어난 은은한 꽃 향은 마치 봄기운처럼 방 안을 가득 채웠다.향이 번지자, 간석과 정연은 눈치껏 본채 문 앞에서 조용히 물러섰다.누군가는 옷가지를 준비하고, 누군가는 욕탕을 손질하며 각자 맡은 일을 묵묵히 해냈다.그로부터 한 시진이 흐른 뒤, 하늘은 어느새 어둠으로 뒤덮였다.그제야 이육진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물을 준비해라.”간단한 세신을 마친 뒤, 두 사람은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소우연은 숟가락을 들었지만, 밥을 뜨는 손끝이 자꾸만 힘을 잃어갔다.이육진이 손짓을 하자 정연이 얼른 앞으로 다가서려 했으나, 예상과 달리 그뿐만 아니라 간석과 명심에게도 전부 물러가라는 명이 떨어졌다.갑자기 시중 드는 사람을 내보내시다니… 또 그럴 작정이신 건가?정연은 속으로 아연실색했다.요즘 태자저하의 정력은… 지나치다 못해 겁이 날 지경이었다.태자빈은 눈에 띄게 지쳐 있었고, 윤기 없는 손끝, 가늘어진 숨결, 나긋하게 젖은 눈매까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얼마나 부른 걸까. 목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라니.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닫힌 뒤에야 소우연은 문득 깨달았다.방 안에는 이제 자신과 이육진, 단둘뿐이라는 것을.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순간, 이육진이 조용히 웃으며 그녀의 젓가락을 빼앗았다.곁으로 다가와 바짝 앉더니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반찬이 먹고 싶으냐?”“예…? 제가 먹을 수 있어요.”얼떨결에 말하면서도, 소우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럴 수 있느냐? 방금 전엔 분명 못 하겠다 하지 않았느냐.”‘못 하겠다’라니…?소우연은 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머릿속으로 장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숨이 벅차오르던 그 순간.‘저… 더는 못 하겠어요…’맞다, 분명 그렇게 말했다.‘못 하겠다’… 그 말이 또 그런 의미로 들렸을 줄이야
“용 감정의 병세가… 그리 심각한 것이냐?”이육진이 조심스레 물었다.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몸이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고, 맥도 약해요. 피가 흐르는 것조차 느릿느릿할 정도예요.”입술을 한 번 달싹이던 이육진은 소녀의 손을 쥐고 물었다.“생각해둔 방도가 있느냐. 완치할 수는 있겠느냐?”“지켜보면서 치료해나가야 해요.”소우연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치료를 맡게 되면 자주 뵈어야 해요. 솔직히 꽤 번거로운 일일 수도 있어요.”“자주라 하면… 얼마나 자주 말이냐.”이육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처음엔 매일 찾아가야 할지도 몰라요. 이후엔 차츰 경과를 봐가며 조절해야겠죠.”매일 얼굴을 본다.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소우연이 그를 ‘오라버니’라 부른 것도 그렇고, 이육진의 속은 은근히 뒤틀렸다.물론 소우연을 믿었다.그리고 용 감정이 자신과 소우연을 도와준 것도 고맙게 생각했다.하지만 아내가 매일 외간 남자의 집을 드나든다? 그것도 얼굴을 붉히며 ‘오라버니’라 부른다?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좋을 수 없는 일이었다.“혹시… 질투하시는 거예요, 부군?”소우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질투 안 한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한참을 망설이던 이육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아예 용 감정을 태자부로 데려오는 것이 어떠냐. 병세가 나아질 때까지만 머무르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정말… 그렇게 해도 되나요?”소우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듯 말했다.“하지만… 오라버니가 원치 않으실 수도 있어요.”오라버니? 이육진의 얼굴이 또 한 번 굳어졌다. 질투의 기운이 은근히 번져나갔다.그걸 눈치챈 소우연은 작게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용 오라버니는 점과 괘를 보는 분이에요. 이번 병도… 아마 저희를 도우시다 얻은 후유증 같아요. 그래서 더 신경이 쓰여요.”“그렇다면 네가 봐주는 게 마땅하지.”이육진은 조용히 대답하고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발걸음을 재촉했다.그 걸음이 얼마나 빠
미풍이 스치고 지나가며, 햇빛에 달아올랐던 소우연의 뺨에 잠시 시원한 기운이 스몄다.소우연은 손으로 뜨거운 햇살을 가리며 말했다.“오라버니, 이렇게 계속 햇볕 아래 계시는 건 좋지 않아요.”“하지만 이렇게 햇살을 맞고 있으면… 가장 편안합니다.”잠시 깊은 숨을 들이킨 후, 소우연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제가 반드시 방법을 찾아 치료해드릴게요.”용강한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엔 결심이 담겨 있었고, 그 표정은 단단했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전생에서 소우연을 위해 복수에 나선 이육진의 광기를 똑똑히 보았다.그 광기 속에 그는 자손도 남기지 못한 채 허무하게 사라졌다.그래서 이번 생에서, 그들이 진정한 인연이 되어 함께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그녀가 진심으로 웃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었다.비록 지금 그녀에게 솔직히 말한다 해도, 그녀와 함께 살기만 해도 자신의 병세가 조금씩 나아질 거라 해도, 그녀는 아마 이육진을 두고 자신을 택하지 못할 터였다.그녀가 택하더라도, 이육진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만약 그렇게 되면 이육진은 그의 머리를 단번에 잘라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좋습니다. 마마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됩니다.”그의 말은 담담했지만, 묘하게 따뜻했다.이후 두 사람은 병세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었고, 소우연은 치료 방향에 대해 몇 가지 방법들을 제시했다.용강한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그렇다면 앞으로 매일같이 마마와 뵙게 될 텐데요. 태자 전하께서 괜찮아 하실까요?”소우연은 잠시 입술을 깨물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그 부분은… 제가 태자 전하와 상의해보겠습니다.”“예, 알겠습니다.”그는 말을 아끼며 눈을 감았다.무슨 결과가 나오든 상관없었다.어차피 그는 이미 운명을 바꾸었다.또한 이육진의 능력이라면 전생처럼 몰락하지는 않을 터였다.소우연은 눈을 찌푸리며 손으로 햇빛을
소우연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용강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제 운명을 점쳐봤습니다. 앞으로 십여 년은 무리 없을 것입니다.”그가 말한 ‘십여 년’은 아마도 소우연과 이육진이 황제와 황후가 되는 그 순간까지를 의미하는 듯했다.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그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십 년 남짓이 뭐가 충분합니까. 용 감정께서는 아직... 스물셋이시잖아요.”“예, 스물셋입니다.”“이렇게 젊은데, 장수하셔야죠. 백 년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렇다면 말씀대로 백 세까지 살아보겠습니다.”그는 가볍게 웃었지만, 소우연의 눈빛엔 걱정이 가득했다. 이런 몸으로 백세까지 산다는 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 자신에게도, 곁에서 함께하는 이들에게도.용강한은 옆의 빈 안락의자를 바라봤다. 소우연도 그의 시선을 따라 그 자리에 앉았다.“복용하셨던 약 처방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참고해보고 싶습니다.”“아직도 저를 치료해보시겠다는 겁니까?”“당연하죠. 감정께서는 태자 전하께도, 저에게도 큰 은인이십니다.”용강한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그저... 인연이었을 뿐입니다.”그건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그 해, 세상에 홀로 남은 듯 외로웠던 어느 날. 그녀가 건넨 하나의 장명쇠가 그의 모든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후로, 그녀를 위해 선택한 모든 길은 그 자신의 의지였다.그녀가 진심으로 웃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한 날을 맞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 기나긴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다.“용 감정은… 저에겐 정말 오라버니 같으십니다.”잠시 망설이던 소우연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세상에서, 태자 전하 말고는 용 감정께서 저를 가장 따뜻하게 대해주신 분 같아요.”그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그렇다면 이제부턴 저를 진짜 오라버니라 생각해도 좋습니다.”“참, 태자 전하께 이미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 감정께서는 제 친정 식구 같은 존
용부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와 알리겠다고 했지만, 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으셔도 돼요.”정연과 진우를 데리고 주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소우연은 마당 한가운데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는 용강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대나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의 온몸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햇살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연은 잠시 숨을 삼켰다.곁에 있던 호위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저는 태자빈입니다. 용 감정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주군께서 가장 자주 안부를 묻던 이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도우라는 명까지 내려졌으니, 그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과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누구도 들이지 말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발소리조차 삼키며 마당을 가로질렀다.낙엽과 풀이 깔린 바닥 위로 바스락이는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돌려보내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용강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멈추지 않았다.“제가 오늘 올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으셨나요?”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햇살을 뚫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그대로 누운 채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했다.“태자빈 마마셨군요. 자리에 앉으시지요.”소우연은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발견했다.방석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리가,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자리였다.“이걸 미리 준비하셨군요. 오늘 제가 올 걸 아셨던 거네요.”“예. 그리고 약간의 수를 써서 태자 전하께서 잠시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단둘이 뵙고 싶었거든요.”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맥해드릴게요.”“괜찮습니다…”그의 말이 끝나
이민수는 혜주와 소범준만 남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뒤, 아령은 소씨 가문 안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 소지윤에게 아이를 얻기 위한 계획도 한결 수월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아씨는 누구에게도 깊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소지윤 대인에게만은 그 마음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그의 아이를 가지려 하시는 걸까.한편, 태자부.이육진은 연회를 열고, 용강한과 심소균을 초대했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즈음, 소우연이 용강한더러 ‘오라버니’라 부르자 심소균은 술잔을 들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아니…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지?’태자빈이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라면, 절대 가벼운 인연이 아닐 터.그보다 더 놀라운 건, 태자 이육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심소균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에, 괜히 청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그냥 조용히 마시죠.”용강한은 무심히 말하며 자신도 잔을 비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소우희는 이미 죽었다.그토록 집요하게 소우연을 괴롭히던 이가 사라졌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법도 했다.하지만, 연회 자리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어딘가 무거웠다.심소균은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용강한은 알고 있었다.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심소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이육진은 하인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했다.연회가 마무리되고, 소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세요?”“괜찮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웃었지만, 이어진 기침은 거셌고… 이내 곧 수건에는 선혈이 스며들었다.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망토를 여미고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눈은 날카로웠다.소우연은 물론, 이육진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용 감정, 네 몸 상태가 왜 이리 나빠졌느냐.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그는
서재 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숨막히는 분위기로 가득했다.이민수는 의연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희가 소우연에게 얼마나 애원했는지, 부인께서 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도 소우연은 우희를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답니다.”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잠시 조용하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셨으니,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고, 서늘한 눈빛을 떨구었다.“우희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령이 눈물로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소씨 가문을 위해 이 더러운 일에 제 발로 들어설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어차피 저희 평서왕부는, 태자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소홍범의 안색이 굳어졌다.평서왕의 야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이육진이 불구가 되고 얼굴까지 망가졌을 무렵, 평서왕은 황태자의 자리를 가장 가까이서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직접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장남 이민수가 황제에게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거란 이야기는 조정에 이미 돌고 있었다.수년간 평서왕부는 조용히 인맥을 조율하고 관료를 포섭해왔다. 이육진이 회복했다고는 하나, 평서왕 부자의 야망은 그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았다.소씨 가문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아버지…”소현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우희를 향한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소우연에 대한 원망은 이미 마음속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지옥이라면, 차라리 평서왕세자의 손을 잡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소홍범은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소현준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소우연을 직접 만나야 하나… 아직은 이르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 순간.이민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자, 소현우가 갑작스레 그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