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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7화

작가: 주 한잔
오랜만에 다시 만난 연인은 말없이 곧장 이지윤의 방으로 향했다.

천둥이 치고 불꽃이 튀듯 뜨겁게 서로를 탐한 두 사람은 두세 번이나 물을 불러가며 한참을 얽혀 있었다.

기력이 다 빠진 뒤, 아령은 지윤의 가슴 위에 힘없이 몸을 기대었다.

남자는 그녀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젖히며 그 고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얼굴의 진짜 모습을 본 사람은 오직 자신뿐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아령이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저하, 사실 이민수도 저의 진짜 얼굴을 봤어요.”

“뭐라고?”

남자가 놀라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아령이 그의 가슴을 눌러 제지했다.

“진정하세요. 전 괜찮아요.”

이지윤은 짧게 숨을 들이쉬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네가 그 자 곁에 있는 건 위험한 일이 아니냐?”

아령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하지만… 더 놀랄 일이 하나 더 있어요.”

그녀는 일부러 말을 아끼며 여운을 남겼다.

이지윤의 눈엔 그녀를 향한 갈망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냐?”

“이민수… 이제 남자로서 기능을 모두 잃었어요.”

아령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그렸다.

“어떻게 된 건지 맞혀보시겠어요?”

이지윤은 얼굴을 찌푸렸다.

“병이라도 걸린 것이냐?”

“비슷해요.”

더 이상 밀당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듯, 아령은 숨김없이 말했다.

“소우연이 이민수의 그곳을 잘라버렸어요. 거의… 환관이 된 거나 마찬가지죠.”

“뭐라…?”

이지윤은 숨이 턱 막힌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 일이 아니더냐.”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흥분이 그의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이로써 이민수는 완전히 끝장났다는 생각에 이지윤은 묘한 희열을 느꼈다.

“아령아, 이제 내 곁으로 돌아오너라. 더는 평서왕부에 머물 필요 없다.”

평춘왕이 죽은 뒤부터, 이지윤의 야망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권력을 쟁취하기보다는 지금의 지위를 지키는 쪽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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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날엔 폭우가, 오늘은 뙤약볕이 내리쬐었다.이런 날씨 속에서, 소우희의 시신은 또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까.강직한 무장이자 소씨 가문의 주인인 소홍범조차 그 앞에선 중심을 잃을 뻔했다.말을 꺼내려다 삼킨 그는, 결국 큰아들 소현우와 둘째 소현준에게 시신을 찾으러 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난장골.산바람은 살을 찌를 듯이 뜨겁고, 공기마저 눅눅하게 달아올라 있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숙취에 시달리던 소현우는 동생과 함께 난장골에 도착했다.주위를 둘러보니, 시신을 찾아 이곳을 헤매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그중 한 무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희고 단정한 옷차림의 소녀가 한 대의 수레를 따라가고 있었고, 수레 위엔 희미한 천이 덮인 시신 하나가 실려 있었다.소녀의 눈가엔 희미한 붉은 기가 맴돌았다.썩은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소현준은 코끝을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호위병 하나는 이미 참지 못하고 옆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소현준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둘째 아씨 시신부터 찾아라.”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이를 악물고 악취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였다.하얀 옷의 소녀와 그 일행이 소씨 가문의 마차 앞으로 다가왔고, 소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실례합니다. 혹시 소씨 가문의 도련님들이신지요?”마차 안에 있던 소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마차 옆에 서 있던 소현준만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리고 그 소녀 옆에 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혜주였다.혜주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조용히 예를 올렸다.그 눈동자엔 아련한 빛이 어려 있었고, 그리움과 슬픔이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소현준은 미간을 좁히며 소녀에게 물었다.“너는 누구냐?”시선은 혜주에게 있었지만, 질문은 분명 그 소녀에게 향한 것이었다.소녀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몸을 낮추며 답했다.“아령이라 합니다. 예전에 소우희 아씨를 몇 차례 뵌 적이 있고, 개인적인 은혜를 입은 바 있습니다. 서로 손수건을 나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5화

    반 시진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붉게 타오른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맑고 푸른 하늘은 마치 물로 씻어낸 듯 투명했다.그 풍경은 마치 소우연의 마음과도 같았다.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고 평온했다.소우희는 죽었다.이 세계의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남주는 더 이상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었다.모든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새로 쓰일 터였다.진원 장군부.소현우는 돌아오자마자 술을 들이켰고, 그날 밤을 고스란히 의식을 잃은 채로 보냈다.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기 직전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헝클어진 머리에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그는 하인에게 명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을 전부 정청으로 불러라.”며칠째 앓고 있던 소홍범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군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 부장들에게 넘긴 상황이었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육진이 그의 군권을 서서히 회수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지금 그의 수하 중 대부분은 본래 이육진의 옛 부하였다.이육진은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그저 말 한마디면 모두가 따랐다.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소홍범, 그리고 그의 아들들마저도 과거엔 모두 이육진의 군 아래 있었다.5년 전,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이육진이 매복을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소현우는 전방에서 적과 싸우며 지원 한 번 받지 못한 채 중상을 입었다.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순간, 그를 구해낸 사람은... 소우희가 아니었다.소우연이었다.소홍범은 이를 악물었다.소우희를 미워했다.믿고 싶었지만, 결국 기대를 저버린 딸이었다.소우연이 그의 큰아들을 살려냈다고 해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족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그게 소우희의 자리를 대신할 이유는 아니었다.결국 일을 망쳤다.감히 소우연을 건드려,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를 자초했다.정청에 모두가 모였다.눈이 퉁퉁 부은 임진숙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님은 안 오는 거니...? 혹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4화

    ‘세상에 진심이란 없어.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그 말이 또렷이 귓가에 맴돌았다.마지막까지 아령의 목소리가 소우희의 머릿속을 울렸다.‘날 미워하지 마. 미워할 거면 너 자신을 미워해. 네가 소씨 집안의 자식이라는 걸. 네 어머니가 악독한 여자였다는 걸. 그 여자가 내 어머니 인생을 망쳤고, 그래서 난 태어나자마자 천민이 되었어.’‘난 바라는 거 없어. 단 하나, 너희 소씨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보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의 이유야.그리고 지금 난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소우희는 그녀가 정말로 복수가 성공하길 바랐다.여자의 숨소리가 멎었다.소현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비틀거리며 주저앉을 뻔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우희의 콧날 아래를 짚어보았다.숨이 없었다.정말로 죽은 것이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오라버니’라 불렀던 여동생.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건만.소우희는 정말로 죽었다.그는 허둥지둥 감방을 뛰쳐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임진숙이 그 얼굴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니?”소현우는 눈을 피하며 단호히 말했다.“아무 일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요. 어머니, 어서요.”말을 재촉한 뒤, 급히 달려가는 소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본 옥졸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불안한 기운에 곧장 감방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소우희가 죽어 있었다.그녀는 움직일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건 단 하나.소현우 장군.그는 자신의 손으로 친여동생의 목숨을 거두었다.옥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어떻게 이런 일을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더욱이 태자에게...그는 급히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소우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옥졸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직접 태자부로 달려갔다.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금세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3화

    임진숙은 손에 손수건을 꼭 쥔 채, 바닥에 뼈만 남은 듯 축 늘어진 딸을 바라보며 울먹였다.“최소한... 최소한 한 번은 구해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가을에 죽는다고 해도... 1년 넘게 이렇게 고통받게 두는 게 옳은 일이냐고!”소현우는 대답하지 못한 채 입술만 꾹 다물었다.아까 수감된 소우희를 직접 본 그는… 아무리 각오하고 간다 해도 그 몰골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남아 있는 얼굴엔 경련처럼 일렁이는 근육 떨림.보이지 않는 곳엔 진작부터 욕창이 생겼을 테고, 전신에 퍼진 독은 군데군데 곪아 올라 보기조차 끔찍했다.의원들이 말했었다.소우희는 하루하루 살이 뼈를 파고드는 고통과 극심한 가려움 속에서 미쳐갈 거라고.지금 그녀는 정말로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잔인한 처지였다.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나았다.사실 소우희가 사형 선고를 받고 난 뒤 그는 몰래 움직였다.‘내년 가을’이라는 형 집행 시기는 태자 이육진의 뜻, 즉 소우연의 의중이었다.죽는 시간조차... 그녀의 뜻대로 흘러갔다.임진숙은 아들이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걸 보고는 가슴을 내리치며 또 한 번 쓰러질 듯 몸을 휘청였다.“알겠습니다, 어머니. 제가 다시 옥사에 가볼게요. 우희를 위해... 뭔가 방법을 생각해보겠습니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무슨… 방법이라도 있단 말이냐? 대체… 무슨 수로 우희를 기다리겠다는 게야?”임진숙은 의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소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일단… 다시 우희를 보러 가겠습니다.”그는 다시 어두운 감방 안으로 들어갔다.그곳엔 과거의 그림자만이 앉아 있었다.언젠가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온 집안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소우희.이제 그녀는 단지 숨만 붙어 있는 형체일 뿐이었다.소현우는 이육진의 수하에게 두 다리를 잃었고, 소우희는... 독에 중독되어 사지가 끊기고 혀마저 뽑혔다.그 모든 시작은 소우연이었다.이게 정말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2화

    이민수는 마차 안에 숨어 있었다.소우연과 이육진이 그 앞을 지나갈 때, 마차를 못 본 건 아니었지만… 이민수는 고개 한 번 들 용기도 없었다.두 사람 역시 굳이 그를 찾아 조롱할 생각 따윈 없었다.그건 오히려 자신들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니까.그렇게 한참이 지났다.이민수는 초조함에 발끝을 떨며 인내심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었다.이 짧은 시간 동안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소우연과 이육진이 자신을 얼마나 비웃고 조롱했을지, 그런 장면만이 반복되어 떠올랐다.그 생각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드디어 아령이 마차에 올라타자, 이민수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대체 뭘 그리 오래 떠들었느냐!”그 순간, 그가 얼마나 벼랑 끝에 몰려 있는지 단박에 느껴졌다.남자의 본분을 잃은 뒤로, 그는 늘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이성도, 판단도 모두 무너져 있었다.그래서 아령은 주저 없이 꿇어앉았다.마치 하늘을 우러르듯, 그를 전부로 삼는 듯한 태도로 애원했다.“세자 저하, 화내지 마세요. 전 그저… 소우연을 어떻게든 죽일 방법이 없는지, 그년에게 물어본 것뿐이에요.”“지금 소우희는 손발도 못 쓰고, 입도 못 열고 글도 못 쓰는 처지야. 그런 애한테 뭘 물어보겠다는 것이냐.”“저하, 소첩이 어리석었습니다. 앞으로는 다시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세자 저하는 소첩의 의지처인걸요. 저하가 싫어하시는 건, 무엇이든 고치겠습니다.”그녀는 조심스레 말했다.모든 것이 부서진 남자 앞에서, 자신의 전부를 그에게 바치는 듯한 태도로 말이다.이민수는 입을 열었다가, 잠시 숨을 들이켰다.아령의 태도는 얌전하고, 그의 기분을 살피는 데에 매우 능숙했다.“그만 일어나거라. 내 아들을 다치게 하면 안 되니.”“예, 저하.”아들. 정말 그녀 뱃속에 이민수의 씨가 자리 잡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혹여 거짓이라면, 그 거짓을 유지하기 위해 더 큰 거짓이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었다.이민수처럼 이성을 잃은 자를 속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는 평범한 남자와는 달랐다. 마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1화

    “아깝기도 하지. 소우연, 그 계집 진짜 독하던데? 이민수의 그걸 잘라버렸어. 이제 일평생… 내시로 살아야 할 몸이 되었지.”아령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주변을 살폈다. 혹시라도 누가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그 말을 들은 소우희의 얼굴은 뒤섞인 감정으로 일그러졌다.소우연이 미웠다. 죽도록 미웠다.하지만… 이민수 역시 증오스러웠다. 그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자신을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이렇게까지 처참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이제 그는 ‘그것’을 잃었다.하하하. 그는 더 이상 남자가 아니었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참 잘 어울렸다.하지만 그 인과응보는… 왜 아직 소우연과 이육진에게는 해당하는 말이 아닌 걸까?그래… 결국 다 똑같았다. 잘난 척하는 놈들이 제일 추한 법이었다.갈라진 입술 틈 사이로 피가 배어나왔다. 소우희는 그저 웃었다. 피투성이 입술로 지은 그 웃음은 마치 짐승이 피 냄새를 맡고 흥분한 듯한 섬뜩한 표정이었다.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그녀 안에 넘쳐나는 증오와 절망을…하지만… 아령. 이 여자는 도대체 정체가 뭘까.이민수가 저 지경이 됐는데도, 그녀는 동정은커녕 미소만 짓다니.대체 속내가 무엇일까?“내가 왜 너한테 이러는지, 궁금하지? 아니면… 정말로 내가 이민수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그게 더 궁금한가?”아령이 비웃듯 말했다.“진심?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야.”“이거 찾고 있지? 가려움을 멎게 해주는 약 말이야.”소우희는 광기에 사로잡힌 듯, 거칠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알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약이 너무나 간절했다.몸을 뜯어버릴 만큼의 가려움. 그 지옥 같은 감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아령은 소매 속에서 작은 백자 약병을 꺼냈다. 그리고 병마개를 뽑으며 천천히 미소지었다.“이 약이 그렇게 갖고 싶어?”소우희의 눈동자가 커졌다. 벌어진 입술은 떨리며, 애타게 무언가를 갈구했다.단 한 알이라도… 먹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하지만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0화

    “그 아이… 소씨 가문 전체를 증오하는 걸까.”소우연이 혼잣말처럼 중얼였다.햇살 한 줄기가 주먹만 한 감방 창을 뚫고 들어와, 소우연의 하얗고 고운 얼굴을 비췄다.그녀는 그 빛 아래서도 당당하고 우아했다.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품격과 위엄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반면 소우희는 지푸라기 위에 쓰러진 채,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가려움이 피부를 찢을 듯 파고들었고, 근육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꼴사납게 널브러진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간신히 기어 올라온 잔재 같았다.왜?왜 소우연만 이렇게 타고난 운명이 다른 걸까?이육진에게 시집간다 했을 때, 누구나 그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지금은 당당히 태자빈 자리에 앉아 있으니. 소우희는 미칠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분했다. 억울했다.온몸이 분노로 들끓었다.아직도 아령이 왜 자신을 그런 지경으로 몰았는지 알지 못했다.알았다 해도, 그걸 소우연 따위에게 말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죽는다 해도, 절대 이 여자 앞에선 입을 열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소우연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됐어. 어차피 네 입에서 들을 얘기는 없을 테니까. 그럼 남은 시간, 실컷 고통을 누리도록 해.”“아아아아아아!!!”말은 알아들을 수 없어도, 무슨 말을 내뱉고 있을지 소우연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저주와 원망, 추악한 욕설…그녀에겐 이제 그것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잠시 후, 감옥 복도 끝에서 이육진이 걸어왔다.“다 정리했다. 간수들에겐 유동식을 먹이도록 했고, 의원도 붙였어. 죽을 수 없게 만들었지.”“아아악! 아아아아아악!!!”소우희는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절식으로 빨리 죽고 싶었건만, 그들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이육진… 그 자는 진짜 악마였다.죽을 권리조차 빼앗다니 말이다…그녀의 절규와 광기 어린 울부짖음에도 소우연과 이육진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감옥을 떠났다.그들의 뒷모습은 점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누구든 좋아… 날 좀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69화

    대체 그놈 머릿속엔 뭐가 들었단 말인가.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함.짐승처럼 욕망에 눈이 멀어 움직이는 꼴이라니.이래서 사람들이 그를 고자 취급하는 게지.이민수의 눈동자엔 분노가 그대로 담겨 있었고, 그 감정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아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군자는 열 번 복수해도 늦지 않습니다.’이민수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난 마차에서 기다리겠다. 소우희를 만나고 나면 바로 나오거라.”아령이 물었다.“세자 저하는… 보지 않으실 겁니까?”그녀는 분명 이민수가 처음으로 마음 준 여인이었다.“아니.”소우연이든 소우희든.이제 소씨 가문의 피를 지닌 자라면 모두 증오스러웠다.“알겠습니다.”표정은 아쉬운 듯했지만, 속은 후련했다.애초에 그녀는 소우희를 단둘이 만나고 싶었다.……감옥 안.소우희는 지푸라기 더미 위에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모기떼가 온몸을 물어뜯었고, 하룻밤 사이 그녀의 얼굴은 부어오른 자국으로 뒤덮였다.붉고, 시퍼렇고, 검붉게.부어오른 자국과 뒤틀린 상처들이 뒤엉켜 있었다.그 얼굴로 흘러나오는 끊임없는 신음 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소우연이 그녀 앞에 다가서자, 소우희의 눈동자가 잠시 멍해지더니 곧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채 흔들렸다.“내가 널 죽여주길 바라는 거야?”소우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거지꼴로 누워 있는 소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온몸을 떨었다.이육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더 보고 있자니 불쾌감이 올라왔다.그는 감옥 책임자를 찾아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걱정 마. 넌 죽게 될 거야. 단지, 매일 매일 뼛속을 긁는 고통과 끝없는 가려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뿐이지.”“아아아악!!!”죽여줘… 제발, 죽여줘…그녀에겐 지금 이 순간이 지옥보다 끔찍했다.분노도, 원한도, 혐오도…어떤 말로도 지금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무언가를 저주하는 마음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것조차 무력했다.몸은 아팠고, 그보다 더 끔찍하게 가려웠다.그녀는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68화

    “세자 저하, 그럼 전 몸을 편히 하기 위한 약을 좀 구해오겠습니다.”아령은 이민수에게 조심스럽게 인사한 뒤, 소범준에게 직접 마차를 몰게 했다.소범준은 그 말을 듣고 목이 콱 막힌 듯했다.겉으로는 약을 구하러 간다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이지윤의 아이를 가지려는 수작이었다.마차는 한참이나 골목을 빙빙 돌았다. 누군가의 눈을 피하려는 건지, 혹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차는 어느 약방 앞에 멈췄다.이후 아령은 소범준에게 평서왕부의 후문까지 말을 타고 함께 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소범준은 툭 던지듯 말했다.“당신의 계략과 담대함은 웬만한 사내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오.”그 말엔 진심이 섞여 있었지만, 더 큰 비중은 냉소였다.아령이라고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는 귀하게. 누구는 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나으리는 종으로 사는 삶이 만족스러우신가 보지만, 전 아닙니다. 전 어머니의 한을 꼭 풀어드려야 해요.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이들을 절대로 편히 살게 두지 않을 겁니다. 나쁜 자들이 잘사는 세상, 그게 공평한가요?”그녀는 그림처럼 단정한 얼굴을 들고 소범준을 또렷이 바라봤다.“제가 나서지 않으면, 제가 저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어머니의 억울함은 끝내 땅속에서 잠들고 말아요.”소범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조용히 되물었다.“나으리의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고 죽었다면, 복수하지 않으시겠어요?”여전히 침묵하는 그를 향해, 아령은 코웃음을 쳤다.“관리들은 마음껏 불을 지르면서 백성은 등불 하나 못 켜게 하는 세상, 그게 정의인가요? 여자인 제가 가진 건 이 얼굴과 몸뿐이에요. 이걸 무기로 쓰는 거죠.”말을 마친 그녀는 묵묵히 문을 두드렸다.곧 누군가 문을 열었고, 소범준은 이끌려 별당으로 들어가 차와 다과를 대접받았다.그 사이 아령은 소매 안에서 약 한 알을 꺼내 삼켰다.혹시라도 이번에도 임신에 실패한다면, 다음 달은 더욱 조급해질 게 뻔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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