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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مؤلف: 명여
이 질문에 대해 유소담은 매우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안 궁금해요.”

이정빈은 그녀의 태도에 자극을 받은 듯 얇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녀가 정말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곤 창밖 풍경을 흘긋 보며 화제를 돌렸다.

“인수안은 사인했어. 내일 인수합병팀이랑 관련 사항 조율하고 창운 그룹 책임자 만나서 1차 협상해.”

유소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업무에 관해서는 토를 달지 않는 것이 그녀의 원칙이었다.

다만 이번 창운 그룹 인수 건은 생각보다 복잡한 실타래가 엉켜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이정빈이 훅 다가와 서늘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앞에 편의점이야. 갓길에 대.”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서자 남자는 턱짓으로 편의점을 가리켰다.

“가서 콘돔 좀 넉넉하게 사 와. 지난번에 쟁여둔 거 다 썼어. 이런 건 두둑이 쌓아두고 써야지.”

유소담은 오늘 밤 있었던 일로 약간 짜증이 난 상태였다

“싫어요. 갈 거면 혼자 가세요.”

하지만 이정빈은 특유의 비열하고도 나른한 웃음을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안 사 오면 오늘 밤은... 그냥 할 거야.”

경구 피임약은 몸에 해롭고 덜컥 아이라도 생기면 그야말로 파국이었다.

콘돔을 사용하는 것은 확실히 쾌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지만 다행히 이정빈은 언제나 콘돔을 사용했고 그 덕에 그녀도 피임약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유소담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몇 분 후, 그녀는 편의점 진열대의 콘돔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들 전부 다 봉투에 담아주세요.”

점원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뒤에서 웅성거렸다.

한편 유소담은 못 들은 척하며 계산을 마치고 콘돔이 담긴 두 개의 커다란 봉투를 뒷좌석에 던져 넣었다.

이정빈이 봉투를 확인하더니 픽 웃음을 흘렸다.

“도매라도 하게?”

유소담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동을 걸었다.

“넉넉하게 사두라면서요.”

“우리 소담이, 내 체력을 테스트하겠다는 건가?”

남자가 ‘우리 소담이’라고 부르는 순간, 마치 주문을 거는 듯 온몸이 짜릿해지고 몽글몽글해졌다.

그는 유소담에게 ‘우리’라는 호칭을 쓰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오직 잠자리에서 절정에 다다를 때만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반복해서 속삭였다.

“내가 더 분발해야겠는데?”

유소담의 눈매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녀는 다소 불만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아까 이미 한 번 했잖아요.”

내일은 창운 그룹과의 인수 협상을 하러 가는 날, 상대의 태도가 늘 애매하니 필시 힘든 싸움이 될 터였다. 그녀는 체력을 비축하여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이 남자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녀를 위한 배려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정빈은 눈꼬리를 올리며 얼굴 윤곽이 그림자에 가려졌다. 유소담을 향한 그의 시선에는 약간의 경박함이 담겨 있었다.

“고작 한 번? 내가 겨우 그 정도로밖에 안 보여?”

유소담은 그를 흘긋 쳐다보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말싸움에서는 그녀가 언제나 밀리는 법이니까.

더원 별장에 도착해 방에 들어서자마자 이정빈은 기다렸다는 듯이 덮쳐들었다.

거대한 벽 같은 몸이 등 뒤를 덮쳤고 곧이어 빽빽한 입맞춤이 그녀의 뺨과 목덜미에 쏟아졌다. 약간 거친 손길은 그녀의 치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남자의 손은 GPS라도 달린 듯 오차 없이 한 방에 원하는 곳을 찾아간다고 하더니... 유소담은 벽을 짚고 버티며 자신의 몸을 더듬는 남자의 손을 짓눌렀다.

“씻고... 씻고 해요.”

하지만 이미 활시위가 당겨진 상태, 이정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거절을 용납하지 않았다. 남자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회유가 섞여 있었다.

“하고 나서 씻자.”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벨트 금속 버클이 풀렸다.

그 소리는 고요한 방 안에서 마치 기름에 불을 붙인 듯 순식간에 분위기를 달아 올렸다.

유소담은 그를 말릴 수 없어 마지못해 애원했다.

“딱 한 번만 하고 끝내요, 알았죠? 내일 아침에 인수 건 협상하러 가야 한단 말이에요. 제발...”

그 말과 함께 둘 사이에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이정빈은 갑자기 그녀를 놓아주며 앞쪽으로 밀쳤다.

“가서 씻어.”

유소담은 잠시 멍해졌다. 그가 왜 마음을 바꿨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순순히 욕실로 향했다.

다 씻고 나왔더니 조금 전까지 의욕이 넘치던 이정빈은 어느새 잠들어버렸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조용히 그의 곁에 누웠다.

때로는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과연 젊고 활기 넘치는 이정빈인지 아니면 지금의 오만하고 퇴폐적인 그인지 말이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결코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그 괴리감이 그녀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머릿속에는 오늘 밤 들었던 말이 쉴 새 없이 맴돌았다. 이정빈이 결혼을 한다니...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아침에 씻고 나왔더니 이정빈은 그녀의 다크서클을 바로 알아챘다.

“밤잠 설쳤어?”

유소담은 그에게 넥타이를 골라주려던 손길이 멈췄다.

‘지금 날 신경 써주는 건가?’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곧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그 꼴로 어떻게 인수 협상을 하겠다는 거야?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집에 박혀 있어.”

“컨실러로 커버해주면 돼요.”

유소담은 말없이 그에게 다가가 넥타이를 매주었다. 몇 초 만에 깔끔하고 간결한 윈저 노트 매듭이 완성되었다.

이정빈이 고개를 숙여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음엔 넥타이로 묶어볼까?”

그의 눈에 서린 불순한 의도를 읽은 유소담은 입술을 깨물었다. 할아버지는 분명 천하를 평정하고 위대한 공적을 이뤄서 정점에 서라는 뜻으로 손주에게 ‘정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을 텐데 이토록 엇나가 버리다니.

아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면 이정빈도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었다.

수행비서 우도영이 이정빈을 모시러 올 예정이었기에 유소담은 먼저 그룹으로 향했다.

몸에 딱 달라붙는 보라색 슬릿 스커트와 8센티미터 굽의 하이힐을 신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다소 빠른 걸음걸이는 변함없었다.

양옆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인사를 건넸고 그녀는 일일이 응하며 성숙한 여성의 자신감 넘치는 매력을 한껏 발산했다.

“유소담 씨!”

문득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뒤돌아보자 한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한이설 씨? 무슨 일이시죠?”

눈앞의 여자는 이정빈이 만났던 수많은 여자 중 가장 오래 곁에 머물렀던, 그러나 결국 비참하게 버려진 전 연인 한이설이었다.

둘이 이별하지 않았다면 이정빈이 정말 한이설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터였다.

“저 오늘 정빈 씨 만나야겠어요.”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설 씨는 대표님과 아무 관계도 없으니 만나실 수 없습니다.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마시죠.”

“일개 비서 주제에 감히 나랑 정빈 씨 일에 함부로 나서서 지시하고 있네요? 정빈 씨를 만나겠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체면 봐 드린 거예요!”

한이설의 얼굴이 분노로 잔뜩 일그러졌다.

유소담은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어 멀리 있는 경비원을 불렀다.

“경비원님, 여기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찰싹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이어서 얼굴에 불타는 듯한 통증이 번졌다.

“누가 경비원 부르래?”

유소담은 자신을 때리고도 의기양양한 여자를 바라보더니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똑같이 한 대 갚아주었다.

전에 훈련받은 적이 있는 터라 손의 힘이 일반 여자들보다 훨씬 강했다.

결국 한이설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입가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감히 날 때려?”

유소담은 여자를 경멸하듯 훑어보며 떠나려 했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이 대표님 오신다!”

모든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훤칠한 몸매의 이정빈이 나타나자 한이설은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뭐가 그리 억울한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정빈 씨, 흑흑... 난 그저 정빈 씨 얼굴 한 번 보려던 것뿐인데 저 여자가 날 이렇게 때렸어요!”

이정빈의 시선은 유소담의 약간 붉어진 얼굴을 훑었다.

“너 이설이 때렸니?”

유소담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대답했다.

“네.”

이에 한이설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정말 속상해요. 꼭 내 편 들어줘야 해요, 정빈 씨!”

이정빈의 눈길은 줄곧 유소담을 향해 있었다. 그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실렸다.

“그럼, 당연하지.”

말을 마친 남자는 유소담에게 다가갔고 한이설은 그 모습을 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 사람들도 대표님의 주위를 맴도는 차가운 살기를 여실히 느꼈다. 이번만큼은 유 비서님이 큰코다치리라 생각했다.

한편 유소담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눈앞으로 다가온 남자는 곧장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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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30화

    복수에 성공했다는 통쾌함에 빠져 있던 유소담은 순간 이정빈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강하리가 입만 열면 자연스럽게 이정빈의 형을 가족처럼 부르는 걸 보면, 정말 이미 자신을 이정빈의 아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강하리의 이간질은 그리 고급스러운 수법도 아니었다. 하지만 유소담은 정말 가슴이 철렁했다. 어젯밤 이정빈이 차로 이건후를 치라고 명령하던 장면이 떠오르자 지금도 두피가 서늘해졌다.유소담은 저도 모르게 이정빈을 바라봤다.이정빈은 원래 늘 느슨하고 무심했다. 무슨 일이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 같았고, 사람을 볼 때도 얼굴에 희미하게 비웃으며 가지고 노는 듯한 미소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화가 난 듯 얼굴에 아무 표정도 없었다. 새까만 눈에 사나운 기운이 서린 채, 유소담 손목에 찬, 이건후가 준 팔찌를 썩은 고깃덩어리라도 보는 것처럼 바라봤다.유소담의 가슴이 철렁했다.“저 아직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갈게요. 두 분 얘기하세요.”이정빈은 꽤 미친 사람이니 삼십육계 줄행랑이 상책이었다.강하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소담 씨, 제가 돌아왔다고 정빈이랑 민찬이가 오늘 저녁 자리를 마련했어요. 저 환영해 주는 자리라니까 소담 씨도 정빈이랑 꼭 같이 와요. 제 체면 봐서라도 빠지면 안 돼요.”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유소담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유소담이 사무실을 나와 복도를 지나는데 동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들었어? 이 대표님 약혼한대! 상대가 아까 같이 있던 강하리 씨래.”“진짜야? 여자 바꾸는 걸 옷 갈아입듯 하는 사람이 벌써 결혼한다고?”“이 대표님 같은 사람이야 옆에 여자 있는 게 뭐가 이상해. 밖에서 놀 만큼 놀아도 결국 결혼은 집안에서 정해 주는 상대량 하겠지.”수군거리던 직원이 주변을 살핀 뒤 목소리를 낮췄다.“그래서 이 대표님은 뭐래?”“당연히 좋다고 하겠지. 강하리 씨는 예쁘고 학벌도 좋고 몸매도 좋은데 싫다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강하리 씨 아직 안 갔지?”“안 갔어! 유 비서도 벌써 나왔잖아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29화

    유소담은 강하리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아주 괜찮은 거래였어요.”자신이 준 물건을 유소담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처분하자 이정빈은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 말이었는데, 유소담이 정말 망설임 없이 팔찌를 넘길 줄은 몰랐다. 인제 와서는 괜히 그 말을 받았다는 후회가 밀려왔다.강하리는 바라던 대로 꼬임 옥 팔찌를 손에 넣었다.“정빈아, 네가 채워 줘.”이정빈은 거절하지 않았다. 유소담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전화만 만지고 있었다.그는 일부러 유소담의 관심을 끌고 약을 올리려는 듯 강하리의 손을 보며 말했다.“네가 차니까 훨씬 예쁘네.”유소담이 낮게 코웃음을 쳤다.“600억 원짜리인데 안 예쁠 수가 있겠어요?”강하리는 유소담의 텅 빈 손목을 보고 다정하고 사려 깊은 척 말했다.“그럼 소담 씨는 이제 찰 게 없잖아요. 제 가방에 여분으로 가져온 게 하나 있는데, 괜찮다면...”‘그러니까 나는 강하리가 쓰지 않는 것 정도나 받아야 한다는 건가?’강하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소담은 이미 거절할 말을 생각해 뒀다. 그런데 그때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유소담이 이정빈 대신 바로 말했다.“들어오세요.”들어온 사람은 우도영이었다.“대표님, 큰 도련님 쪽 수행비서가 왔습니다.”이정빈은 무심하게 물었다.“왜 왔대? 무슨 일인지 말했어?”우도영은 유소담을 한번 보며 조금 머뭇거렸다.“유소담 씨를 만나러 왔다고 합니다.”유소담이 나가려는데 이정빈이 느긋하게 한마디 던졌다.“들어오라고 해. 나도 마침 형이 얘한테 무슨 일로 사람을 보냈는지 궁금하네.”유소담은 이정빈을 바라보다가 그의 웃는 듯 마는 듯한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도무지 읽을 수 없는 감정이 그 안에 섞여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은 채 몇 초가 조용히 흘렀다. 말은 없었지만 오히려 더 많은 것이 오갔다.강하리는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이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28화

    유소담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계속 듣고 있었지만 속은 이미 싸늘하게 식었다. 강하리가 먼저 요구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이정빈이 아무렇지 않게 내줘 버렸다.예상 밖이기는 했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그가 그렇게 강하리를 좋아하는데 고작 물건 하나 때문에 강하리 마음을 거스를 리 없었다.강하리는 난처한 듯 유소담을 한번 봤다.“그건 좀 그렇지 않나? 네가 소담 씨한테 준 생일 선물인데 어떻게 달라고 해.”이정빈은 나른하게 기대앉아 유소담의 무표정한 얼굴을 훑다가 엄지로 손가락 마디를 꾹 누르며 말했다.“미안할 게 뭐 있어. 네가 원하는 건 다 해 줄 수 있어.”깊은 바다로 가라앉은 듯 거대한 압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당장이라도 흉곽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유소담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았다. 마음이 메마른 여자가 사랑에 목매고 인정에 굶주리면 결국 탈 나기 마련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과 많은 자원을 가졌어도 그 깊은 구렁에서 자신을 구할 수 없다.강하리가 무언가 더 말하려던 순간, 유소담은 붉은 입술을 살짝 올렸다.“이 대표님 말이 맞아요. 하리 씨, 전혀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무표정하던 유소담이 갑자기 환하게 웃는 순간, 이정빈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유소담은 손목의 꼬임 옥 팔찌를 빼고 있었다. 손에서 잘 빠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망설임 없이 힘껏 잡아당겼다. 결국 팔찌는 빠졌고, 뼈가 도드라진 손등은 마찰 때문에 붉게 달아올랐다.유소담은 두 손가락으로 팔찌를 집어 들어 두 사람을 향해 웃었다.“이 팔찌가 비싸긴 해도 돈 주고도 못 구하는 물건까진 아니에요. 하리 씨가 원하신다면 당연히 드릴 수 있죠.”이정빈과 강하리 모두 그녀가 정말 동의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하지만 유소담은 곧 말을 돌려 이정빈을 바라봤다.“다만 이미 제게 준 순간 이건 제 물건이 됐잖아요. 저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해요. 하리 씨의 환심을 사고 싶은 거라면 이 대표님이 제게 다시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27화

    유소담이 갑자기 이렇게 성질을 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순간 사무실 안의 분위기가 어색하게 굳었다.강하리가 재빨리 정적을 풀 듯 선물 상자 하나를 꺼냈다.“소담 씨, 미안한 마음에 생일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상자 안에는 비둘기 알만 한 푸른 다이아몬드가 고요히 놓여 있었다. 밝은 실내에서 옅은 푸른빛을 내뿜는 모습은 마치 ‘바다의 심장’처럼 신비로웠다. 그 자체로 막대한 돈이 만들어 낸 화려함이었다.유소담은 한눈에 알아봤다. 2016년 세계 경매 사상 최대 크기의 팬시 비비드 블루 다이아몬드 ‘오펜하이머 블루’였다. 스위스 제네바 경매에서 익명의 수집가가 5,060만 스위스프랑, 당시 약 850억에 낙찰받아 단일 다이아몬드 최고 거래가 기록을 갈아치웠던 보석이었다.유소담도 이 전설적인 블루 다이아몬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 익명의 수집가가 강하리일 줄은 몰랐다.14.62캐럿짜리 블루 다이아몬드는 직사각형으로 커팅돼 반지에 세팅되어 있었고, 양옆에는 작은 다이아몬드 두 개가 장식돼 있었다.당시 크리스티는 ‘오펜하이머 블루’를 경매에 나온 블루 다이아몬드 중 가장 큰 팬시 비비드 블루라고 소개했다. 유명 보석 전문가 역시 자신이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무결점 다이아몬드라고 평가한 바 있었다.유소담은 티 내지 않고 보석을 살펴봤다. 확실히 눈부시긴 했다.강하리가 이렇게까지 통 큰 선물을 꺼낼 줄은 몰랐다.‘대체 뭘 증명하려는 걸까. 잘난 척하고 싶은 건가?’강하리도 티 내지 않고 유소담의 미세한 반응을 살폈다.“작은 성의인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유소담이라면 분명 이 선물을 좋아하고, 이렇게 비싼 블루 다이아몬드 앞에서 놀랄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하지만 강하리는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유소담이 명문가 출신은 아니어도 어릴 때부터 지수정에게 철저히 교육받아 이런 물건들을 수도 없이 봐 왔다는 사실을.유소담은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고 느긋한 시선으로 강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사실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26화

    강하리는 오드리 헵번을 떠올리게 하는 차림이었다. 모자 장식에는 진주가 박혀 있었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진 곳이 하나도 없었다. 복사해 붙여 놓은 듯 완벽했으며,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까지 오랫동안 다듬어진 사람처럼 우아했다.‘과연 명문가 아가씨 다워.’ 유소담조차 속으로 감탄할 정도였다. 몸에 밴 단정함과 우아함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소담 씨, 왔네요.”“하리 씨.”유소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더더기 없는 옷차림에 선명한 색감, 몸짓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자신감마저, 강하리와 나란히 있어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소담 씨, 정빈이 찾으러 온 거죠?”강하리가 안쪽 휴게실을 가리켰다.“정빈이가 옷 갈아입는 중이니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유소담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휴게실 안에서 이정빈의 느긋하고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걔는 그냥 대체품일 뿐이야.”‘대체품... 설마 나를 말하는 건가? 강하리의 대체품?’이정빈은 어젯밤 자신을 찾아왔던 일을 강하리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자신의 존재가 이정빈과 강하리라는 잘 어울리는 한 쌍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모양이다.곧이어 강하리가 안쪽을 향해 말했다.“난 신경 쓰지 않아.”유소담은 더 듣고 싶지 않았지만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알아서 차단하는 것도 자기 보호의 한 방법이었다.강하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눈빛으로 슬쩍 유소담의 손목에 있는 꼬임 옥 팔찌를 훑었다.“소담 씨, 어젯밤 정말 미안했어요. 어제가 소담 씨 생일인 줄 몰랐거든요. 알았더라면 제가 아무리 아팠어도 정빈이를 소담 씨한테 보냈을 거예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저만 아니었으면 소담 씨가 다치는 일도 없었을 텐데.”유소담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류의 말은 이정빈 곁에 있으면서 수도 없이 들어 본 것 같았다.“하리 씨가 마음 쓰실 필요 없어요.”그녀가 다시 물었다.“이렇게 일찍부터 이 대표님이랑 회사에 나오신 걸 보니 몸은 괜찮아지셨나 봐요?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25화

    말하고 나니 조금 후회됐다. 어떤 일은 굳이 입 밖에 꺼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말해 버리면 재미가 없어지니까.유소담은 어쩔 수 없이 그의 곁에 묶여 지금은 호랑이와 함께 길을 걷는 신세가 되었다. 평소에는 참고 말없이 버티는 것처럼 보여도 속은 꽤 고집 세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빈정거리는 말인 줄 알면서도 이정빈의 마음에는 파문이 일었다. 억눌러 둔 감정이 조금씩 번져 나갔다.이정빈의 뜨거운 시선을 받자 유소담은 괜히 몸 둘 바를 몰랐다.어둡고 누런 가로등 불빛이 번갈아 차 안을 스쳤다. 이정빈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더니, 뜨겁게 타고 있는 담배 끝을 자신의 손가락 마디에 눌렀다. 차갑고 하얀 피부가 붉은 불씨에 닿는 순간 검붉게 달아올랐고, 담뱃불은 그렇게 조금씩 꺼져 갔다. 거의 자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유소담은 주먹을 꽉 쥔 채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이정빈을 바라봤다. 이정빈은 전혀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오히려 즐거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깊고 어두운 눈 속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음침함과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 모습은 강렬한 충격을 줬다.뼛속까지 위험을 즐기는 미친 인간이었다.이정빈은 완벽에 가까운 집안 배경과 타고난 외모, 치밀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의 앞에서는 공손해야 했고, 늘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그런 사람에게 잇따른 반항과 거절은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다.유소담은 그가 자신에게 경고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만약 이 자리에 이건후가 앉아 있었다면, 방금 담뱃불이 눌린 곳은 이정빈 자신의 손이 아니라 이건후의 손이었을 것이다.이정빈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그의 재떨이가 될 수 있었다.이 방탕한 남자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미쳐 있었다.“우도영, 차 세워.”차가 천천히 멈췄다. 유소담은 그가 뭘 하려는지 몰랐다. 다음 순간 차 문이 열리며 찬바람이 거칠게 들이쳤고,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달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내려.”비는 이미 완전히 그쳐있었다. 유소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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