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소아 병동 502호 격리실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7층 VIP 면담실을 박차고 돌아온 서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진의 침대 곁에 무릎을 꿇었다. 도현의 뺨을 때린 손바닥이 아직 화끈거렸지만, 서연의 머릿속에는 우진에게 남은 시간밖에 없었다.
"엄마…… 손이 왜 이렇게 빨개? 어디 아파?"
산소마스크 너머로 우진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서연의 떨리는 손등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네 살배기 아들의 티 없이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서연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의료진이 잡은 72시간은 계속 줄고 있었다. 도현이 뒤늦게 치료 지원서에 서명해 해외 공여망은 가동됐지만, 적합 제제가 바로 잡히지는 않았다. 서연도 타 병원의 비축 제제와 등록 공여자를 직접 수소문했다. 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쥐고 전국 대학병원과 희귀혈액협회 연락처를 닥치는 대로 눌렀다.
"선생님, 국립중앙의료원이죠? Rh 음성 AB형이고 항체 선별까지 맞는 혈소판 제제가 남아 있나요? 등록 공여자라도 좋습니다. 네, 제발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혹한 재고 부족 통보뿐이었다. Rh 음성에 항체 조건까지 겹친 탓에 당장 쓸 수 있는 제제는 나오지 않았다. 선진재단의 해외 공여망이 가장 빠른 길인 것은 분명했다. 오후 5시, 마지막 후보도 항체 선별에서 제외됐다는 연락이 왔다. 서연은 통화 시각과 제외 사유를 수첩에 적고 검색 범위를 더 넓혀 달라고 요청했다.
"엄마, 또 안 맞는대?"
"응. 그래도 계속 찾고 있어. 엄마도, 의사 선생님들도 안 멈출 거야."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연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의 숨소리가 거칠어질 때마다 서연은 이를 악물었다.
'포기하지 않아.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내 아이는 내가 살려낼 거야.'
그때, 병동 복도 저편에서 날카로운 하이힐 굽 소리와 함께 험악한 고함이 들이닥쳤다.
***
"비켜! 이 병원 이사장 딸이 누군지 알고 감히 내 앞을 막아서?!"
7층 면담실 소동을 전해 들은 오유라가 명품 가죽 백을 거칠게 휘두르며 5층 복도로 난입했다. 그녀의 뒤에는 험상궂은 체격의 사설 경호원 둘이 살벌한 기세로 따라붙어 있었다.
5년 전 서연이 탄 택시를 들이받은 차량에 돈을 댄 여자. 사고가 실패했다는 보고까지 받았던 유라에게 서연의 귀환은 묻어둔 범죄가 다시 걸어 들어온 것과 같았다.
'죽었어야 할 년이 감히 기어 나와서 도현 씨를 흔들어?'
502호 병실 문이 벽에 부딪히며 열렸다. 서연이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튜베로즈 향수 냄새와 함께 오유라가 들어섰다. 손에는 복숭아 추출물이 든 향 핸드크림이 채 마르지 않은 듯 번들거렸다.
"한서연, 네가 기어이 살아서 도현 씨 발목을 잡으러 기어들어 왔구나?"
유라가 가죽 백으로 서연의 어깨를 내리쳤다. 서연은 백을 쳐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더러운 발 치워, 오유라. 여긴 중환아 격리 병실이야."
"중환아? 어디서 굴러먹던 딴 놈 씨를 선진가에 팔어먹으려고 사기극을 벌여? 이따위 근본도 없는 버러지 같은 핏덩이를 감히 도현 씨 호적에 올리겠다고?!"
유라의 고함이 병실 안을 울렸다. 그때, 침대에 기대어 있던 네 살배기 우진이 링거 바늘을 꽂은 손으로 서연의 코트 자락을 잡아당겼다. 아이가 차가운 눈빛으로 유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줌마, 병원에서 그렇게 소리 지르면 안 돼. 향수 냄새도 너무 세니까 나가."
우진의 말에 유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게 어린 게 벌써부터 주둥이를 놀려?!"
이성을 잃은 유라가 우진의 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서연은 곧장 아이 앞을 가로막았다.
서울구치소 특별 접견실의 차가운 방탄 아크릴 유리 칸막이 너머. 푸른색 미결수 수의를 입은 오유라가 수갑에 묶인 두 손을 덜덜 떨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화려했던 명품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풀메이크업 대신, 헝클어진 머리칼과 핏기 없는 얼굴, 눈물에 짓무른 눈가에는 오만했던 과거의 흔적 따위는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철컥-!철제 문이 열리고 검은 수트 차림의 도현이 들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접견은 수사팀 요청으로 잡혔다. 유라가 피해자에게 합의 조건을 전달해 달라고 고집했고, 도현은 그 요구를 거절하는 말을 기록으로 남기러 왔다."도, 도현 씨……!"유라는 유리창에 손을 대고 울기 시작했다."도현 씨, 제발 날 여기서 살려줘요…… 나 여기서 단 하루도 못 있겠어요! 밥도 모래 같고, 다른 년들이 날 때려요! 다 강 여사님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에요! 난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당신 곁에 있고 싶어서 그런 것뿐이라고요!"도현은 유라의 말을 끝까지 듣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사랑?"도현이 짧게 되물었다."5년 전 서연이와 내 아이를 죽이려 흥신소를 사주하고, 어제 네 살 아이의 링거를 강제로 뜯어내 피를 쏟게 만든 게 네 추악한 사랑인가?"도현은 가죽 서류철 하나를 유리창 앞에 내려놓았다."네 명의의 펜트하우스와 스위스 계좌, 오성택 일가의 은닉 자산에 대한 추징보전·가압류 결정문이다. 서연 씨가 제기할 손해배상 소송 자료도 전부 제출했다."유라의 눈이 커졌다."검찰은 횡령과 살인미수 교사 혐의를 함께 기소할 거다. 형량은 법원이 정하겠지만, 네가 숨긴 기록은 전부 증거로 남았다.""도현 씨, 제발……! 나 감옥에서 죽으라는 소리예요?!"유라가 바닥에 무릎을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앞. 수백 명의 방송 취재진과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져 나오며 법원 계단 주변으로 삼엄한 폴리스라인이 쳐졌다. 끼익-! 검찰 호송차의 육중한 문이 열리고, 포승줄과 수갑에 묶인 오유라와 오성택이 모습을 드러냈다.화려했던 명품 옷 대신 헝클어진 머리와 초췌하게 탈색된 얼굴로 호송차에서 내린 오유라가 취재진의 마이크를 향해 발악하듯 소리쳤다."난 결백해요! 차도현이 날 모함한 거라고요! 난 아무 죄도 없어요!"하지만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은 차갑고 냉혹하기 그지없었다."5년 전 차도현 총수의 불임 차트 조작을 교사한 게 사실입니까?""네 살 환아의 링거를 강제로 뽑고 폭력을 휘두른 혐의를 인정하십니까?""500억 대 제약사 불법 리베이트 수수 혐의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십시오!"영장심문실 안, 판사 앞에는 검찰이 정리한 핵심 증거 목록과 원본 보관 내역이 놓여 있었다. 스위스 김진수 과장의 실시간 자백 영상, 조작된 차트의 전산 IP 포렌식 로그, 502호 병실에서 우진을 공격하던 CCTV 원본 영상, 그리고 흥신소 살인 교사 계약서. 판사의 시선이 심문석에 앉은 오유라와 오성택을 차례로 향했다."피의자 오유라, 오성택. 범죄 사실이 극히 중대하고, 증거 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명백하다.""피의자 전원에 대한 구속 영장을 발부한다.""꺄아아악-! 안 돼! 도현 씨! 살려줘요 도현 씨-!"오유라는 바닥에 주저앉아 비명을 질렀지만, 법정 경위들이 일으켜 세워 구치소 호송차로 데려갔다. 선진의료원 이사회는 오성택의 직무를 정지하고 외부 회계법인과 공익이사를 포함한 비상 운영위원회를 꾸렸다.***같은 시각, 선진의료원 502호 격리 병실. 벽걸이 TV 화면에서 오유라의 구속 수감 속보와 압수수색 현장 뉴스가 속속들이 흘러나고 있었다. 서연은
오전 8시, 서울 강남구 논현동 최고급 펜트하우스 단지 앞. 사이렌을 끈 검찰 호송 차량과 승합차 다섯 대가 요란한 타이어 마찰음을 내며 정문 바리케이드를 통과했다. 쾅-! 쾅-!"서울중앙지검 수사팀입니다. 법원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합니다. 문 여십시오."수사관 10여 명이 마스터키와 강제 개방 장비로 육중한 방탄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거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침실에서 전날 밤의 폭음과 히스테리로 쓰러져 자고 있던 오유라가 실크 가운을 걸친 채 튀어나와 큰 소리로 항의했다."이게 무슨 짓이야?!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래?! 내가 선진그룹 차도현 총수 약혼녀야! 당장 나가지 못해?!"하지만 현장을 지휘하던 특수부 부장검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붉은 직인이 찍힌 법원 영장을 유라의 눈앞에 들이밀었다."오유라 씨, 업무상 횡령과 진료기록 조작, 김진수 전 과장에게 보낸 30억 원의 범죄수익 은닉, 한서연 씨에 대한 살인미수 교사 혐의와 관련한 압수수색 영장입니다."부장검사가 펼쳐 든 영장 집행 서류 맨 앞장에는, 차도현이 직접 고발인으로 서명한 고소장과 스모킹 건 증거 목록이 첨부되어 있었다."도, 도현 씨가 날 고소했다고……? 그럴 리가 없어! 도현 씨가 날 왜!"유라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수사관들은 유라의 드레스룸 벽면 뒤편에 숨겨져 있던 비밀 금고를 강제로 절단해 개방했다.그 안에서 5년 전 한서연을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하려 흥신소에 건넸던 자금 내역 장부와 차트 조작 대가로 오고 간 비밀 차명계좌 통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사관들이 파란색 압수물 상자에 금괴와 장부들을 쓸어 담는 동안, 유라는 바닥을 뒹굴며 발악했다.같은 시각, 선진의료원 12층 이사장실. 오성택 이사장 역시 들이닥친 검찰 수사관들 앞에서 얼굴이 굳어 있었다."차도현 총수 연결해! 총수가 날 이
차도현이 눈을 떴다. 머리 위 형광등이 번져 보였다."헉……!"도현은 숨을 급히 들이쉬었다. 목이 말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총수님,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승압제와 수액이 들어가고 있습니다!"정 실장과 의료진이 다급하게 도현의 어깨를 억눌렀지만, 남자는 제 팔에 꽂힌 링거를 뽑으려 손을 뻗었다. 간호사가 곧바로 손을 막고 팔을 다시 침대 위에 놓았다. 도현은 제 상태보다 유리벽 너머 모니터부터 찾았다."우진이…… 내 아이는…… 우진이는 어떻게 됐어?!"도현의 초점이 흐린 시선이 옆 침대에 닿았다. 파랗던 우진의 입술과 뺨에는 조금씩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환자 감시 모니터의 산소포화도는 98%를 회복했고, 혈소판 수치도 위험선 위로 올라와 있었다. 정상 범위에는 못 미쳤지만 급한 출혈 고비는 넘긴 상태였다. 침대 곁을 지키고 있던 서연이 붉어진 눈으로 도현을 바라봤다."급한 출혈 고비는 넘겼어. 네가 준 혈소판이 반응했대.""완전히 나은 건 아니야. 골수 수치가 돌아오는지 며칠 더 봐야 해."도현은 ‘살았다’는 말부터 꺼내지 않고 교수 쪽을 바라봤다. 교수가 같은 설명을 다시 확인해 주자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서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입술 끝은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착각하지 마. 우진이 치료가 끝난 것도 아니고, 당신이 한 일이 없어진 것도 아니야. 의료진 말 듣고 누워 있어."서연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본 도현은 미안함에 고개를 떨궜다. 손은 다시 이불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때, 침대 위의 우진이 가늘게 눈꺼풀을 깜빡이며 스르르 눈을 떴다. 우진은 붕대를 감은 도현을 한동안 바라봤다."아저씨……."
성분채혈기의 경보음이 짧게 반복됐다."공여자 혈압 86에 54입니다. 구연산 반응까지 옵니다. 채혈을 중단하고 칼슘과 수액을 투여하겠습니다."수혈의학과 교수가 밸브를 잠그자 도현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우진이에게 필요한 양은 확보됐습니까?""1회분은 충분합니다. 적혈구와 혈장은 모두 돌려드렸고, 더 뽑는 건 도움이 아니라 위험입니다."도현은 더 하겠다고 입을 열었다가 서연의 시선과 마주쳤다."의사 말 들어. 여기서 쓰러져서 치료 방해하지 말고."그제야 도현은 손을 내렸다. 입술은 창백했고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지만, 의료진의 처치를 거부하지 않았다. 서연은 우진의 머리맡에서 창백해진 도현을 바라봤다.5년 전 자신을 내쳤던 남자가 지금은 의료진 지시를 따르며 우진의 수치만 보고 있었다. 서연은 아이 쪽을 보다가도 도현 모니터의 혈압이 올라오는지 확인했다. 미움은 그대로였지만, 그가 다시 눈을 뜨는지는 확인하고 싶었다. 수액 펌프가 일정한 속도로 돌아갔다. 마지막 혈소판 제제가 우진의 정맥으로 들어간 직후였다. 삐이이-! 도현의 맥박이 급격히 느려지며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장시간 긴장과 채혈이 겹친 미주신경성 실신이었다.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도현은 자기 침대 난간을 쥔 채 유리벽 너머 우진을 보려 했다."침상 눕히고 산소 주세요. 칼슘과 수액 먼저, 심전도 계속 확인해요!"서연도 자리에서 일어나 의료진이 지나갈 길을 비웠다. 도현의 손끝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때 옆 침대에 누워 있던 우진의 작은 손가락이 파르르 움직였다. 도현이 잠깐 의식을 잃은 사이, 우진의 혈소판 수치는 위험선 아래에서 멈춰 섰다. 출혈 반점의 번짐도 더뎌졌다."수치가 반응합니다. 아직 고비를 넘겼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투여는 성공적이에요."교수는 30분 뒤 재검 수치와 출혈 상태를
수혈실 문이 닫힌 뒤에도 서연의 말은 분명했다."착각하지 마요. 당신은 지금 우진이를 도울 수 있는 공여자일 뿐이에요. 의료진이 허용하는 절차만 따르고, 용서받을 생각은 하지 마요."도현은 젖은 수트 소매를 걷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우진이에게 필요한 것부터 해."새벽 3시, 도현은 성분채혈실 침상에 누웠다. 우진은 유리벽 너머 소아 수혈 구역에 누워 있었고, 서연은 두 공간이 모두 보이는 자리에서 의료진 설명을 들었다."친자라고 바로 수혈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ABO·Rh와 비예기항체, HLA 적합도를 확인한 뒤 혈소판 성분채혈을 하겠습니다. 채혈한 제제는 교차시험과 방사선 조사를 거쳐 우진 군에게 투여합니다."수혈의학과 교수의 설명에 도현은 동의서를 받아 들었다."얼마나 걸립니까?""긴급 절차로도 2시간은 필요합니다. 공여자 안전 한계를 넘길 수는 없습니다.""그 한계 안에서 가장 빨리 진행해 주십시오."간호사는 도현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다시 확인한 뒤 양팔 혈관을 살폈다."입술이나 손끝이 저리면 바로 말씀하세요. 어지럽다고 참으시면 안 됩니다.""알겠습니다."서연은 유리벽 맞은편에서 동의서 사본을 들고 있었다."한 번이라도 숨기면 바로 중단해요. 우진이 살리겠다고 공여자 하나 더 쓰러뜨릴 생각 없어요."도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양팔에 굵은 바늘이 꽂히고 성분채혈기가 낮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계는 도현의 혈액에서 혈소판만 분리한 뒤 적혈구와 혈장을 다시 몸으로 돌려보냈다.차가운 혈액이 돌아올 때마다 도현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끝이 저리기 시작하자 그는 참지 않고 간호사에게 알렸다. 간호사는 곧바로 칼슘 보충 속도를 올리고 혈압을 다시 쟀다."잘 말씀하셨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