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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Author: 소담결
last update Last Updated: 2026-03-04 19:37:32

어딘가 힘없이 가라앉은 그녀의 어깨를 본 펠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잠시 어디로 자리를 옮길까? 카페라도…. 아니다, 괜찮으면 우리 집으로 갈래?”

말을 내뱉는 순간 서아는 아차 싶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가, 가까우니까. 밖은 춥기도 하고….”

서아는 변명하듯 어색하게 손짓을 해 보였다.

펠은 잠시 서아의 낡은 빌라 쪽을 바라보더니 짧게 답했다.

“좋아.”

앞장선 서아의 발걸음이 아까보다 더 꼬이는 듯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도착한 작은 자취방.

서아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누추하지만 들어와. 편한 데 앉으면 돼.”

서아는 아무 데나 가방을 급히 내려놓고는 정돈되지 않은 방 안이 부끄러워 서둘러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마실 거 필요 없어. 앉기나 해.”

“아, 그, 그래.”

누군가가 자신의 방에 들어온 것도 처음이었지만, 남자는 더더욱 처음이었다

서아는 손바닥에 배어 나오는 땀을 바지에 슬쩍 닦으며 펠의 맞은편에 천천히 앉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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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 사랑해 줘   25화

    서아가 질겁하며 주변을 살폈다.이 대낮에 이런 비현실적인 모습이라니, 당장이라도 이웃들이 튀어나와 비명을 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정작 당사자인 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되물었다.“내 모습이 왜?”“나, 날개! 날개 좀 어떻게 해봐!”“너 똑똑한 줄 알았더니 의외로 기억력이 나쁘구나? 어제 말했잖아. 이건 네 눈에만 보이는 거라고.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냥 평범하고 잘생긴 네 남자 친구로 보일 테니까 걱정하지 마.”“말로 들었다고 해서 바로 적응되는 건 아니거든! 근데 왜 그 모습으로 온 거야?”“이 모습이어야 널 가장 빨리 데려갈 수 있으니까.”“뭐? 데려가다니, 어떻게….”“무서우면 눈 감고 있으면 돼. 금방이니까.”펠은 대답 대신 서아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미처 뒷걸음질 칠 새도 없이 서아의 몸이 그의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잠시 실례.”낮게 울리는 펠의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허리와 어깨를 감싼 손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펠의 품에선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숲의 향기가 났다.그 향기에 취해 멍해진 것도 잠시, 펠의 날개가 크게 요동쳤다.휙!“꺅!”갑자기 발밑의 지면이 사라지고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감각에 서아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눈앞에 있는 펠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고막을 울리는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중력을 거스르는 짜릿한 속도감이 온몸을 휘감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란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서아는 아주 살짝 눈을 떴다.“……!”눈앞에는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서아는 떨리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매일 땀 흘리며 뛰어다니던 거리는 장난감 조각처럼 작아져 있었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은빛 비늘처럼 반짝였다.‘하늘이다… 진짜 날고 있어.’서아는 비현실적인 해방감과 여전한 공포심에 펠을 더 세게 감싸안았다.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자 거친 바람조차 잦아드는 기분이었다.한편, 펠은 품 안에서

  • 날 사랑해 줘   24화

    짜증이 난 서아는 핸드폰을 침대 위에 내팽개치고 다시 털썩 누웠다.하지만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띠링 소리가 들렸다.다시 팔을 뻗어 확인한 문자엔 짧은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1시간 후에 데리러 갈게.]“끊기 전에 진작 말할 것이지….”서아는 투덜거리며 ‘알겠다’라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이상하게도 정확한 약속 시간을 듣고 나니 날카로웠던 짜증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단순해, 진짜.’자신이 너무 쉬운 여자처럼 보이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었다.펠이라는 존재의 속도에 자꾸만 휩쓸리고 있었다.‘내 말은 알아들었는데 동의는 안 한다고? 그럼 내 말을 무시하고 계속 직진하겠다는 뜻인가?’머리가 지끈거렸다.아무 생각 없이 일과 집만 반복하던 단조로운 일상은 펠을 만난 그날 밤 이후로 엉망진창이 되었다.물론, 솔직히 말하자면 설레지 않는 건 아니었다.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고, 그토록 잘생긴 남자가 제 손을 잡아주는데 설레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걱정부터 앞섰다.연애하려면 돈이 들고, 시간이 든다.당장 다음 달 월세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연애라니.게다가 펠은 평범한 인간도 아니지 않은가.그가 가진 검은 날개 말고 또 어떤 기괴한 모습이 숨겨져 있을지 알 수 없었다.대인관계조차 어려워하는 내가 초월적 존재와의 연애를 감당할 수 있을까?많은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당장 닥친 현실적인 문제가 그녀의 생각을 끊어버렸다.“아… 1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도대체 뭘 입어야 하는 거야?”서아는 한숨을 내쉬며 몇 벌 없는 낡은 옷들이 걸린 행거 앞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좋아요, 루루 님! 아주 잘하고 계세요. 손 하나 안 다치고 야채들을 저렇게 일정하게 썰어내시다니, 장하십니다! 자, 이제 끓는 물에 된장을 크게 한술 떠서 풀어주세요.”달봉은 지금 흡사 요리 교실의 강사가 된 기분으로 펠에게 된장찌개 조리법을 전수하고 있었다.아침 일찍부터 거실을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던 펠이, 갑

  • 날 사랑해 줘   23화

    펠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평소의 능청스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무표정한 얼굴이라, 서아는 그가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황당해하는 것인지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어. 내일 보자.”한참 뒤에 터져 나온 펠의 대답은 의외로 담백했다.“어, 그래. 응? 내일?”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서아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분명 연애는 생략하자고 방금 못을 박았는데, 당연하다는 듯 내일을 기약하는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내일도 오늘처럼 비슷한 시간에 퇴근해?”“아, 아니. 내일은 주말 야간 알바라 모레 아침에나 끝나.”“내일 아침에 출근은 하고?”“아니, 주말 알바는 따로 있어서 주말 동안은 야간만 해.”“그럼, 월요일은 밤을 꼬박 새우는 거야?”펠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인간의 몸으로 어떻게 그런 일정을 견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그렇긴 한데, 다행히 편의점 점장님이 월요일은 배려해 주셔서 한 시간 늦게 출근해.”“무슨 일을 밤새워서까지…. 인간들은 참 피곤하게 사는군.”펠이 낮게 읊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코트 깃을 세우며 문가로 향했다.“일단 알았어. 문자 할게.”“어, 그래. 조심히 가.”서아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를 문밖까지 배웅했다.좁은 복도에 선 펠이 마지막으로 서아를 한번 응시하더니, 그대로 난간 너머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어!”서아가 놀라 난간을 붙잡기도 전, 암흑 속에서 휙! 하는 거친 바람 소리가 들렸다.가로등조차 닿지 않는 밤하늘 속에서 웅장한 검은 날개가 거대하게 펼쳐졌다.펠은 단숨에 중력을 거스르며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서아는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렸다.펠이 어두운 밤하늘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어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그 자리에 뿌리박힌 듯 서 있었다.방금까지 좁은 방 안에서 고백이니 썸이니 논하던 남자가 인간이 아님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띠링. 띠링.

  • 날 사랑해 줘   22화

    고백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히는 순간, 서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좁은 자취방 벽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 같은 진동이었다.하지만 펠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그리고 말이야, 너도 책임은 좀 져야지. 진심으로 사랑해 달라고 날 꼬셔놓고 이제 와서 연애는 안 하겠다니. 세상에 그런 이기적인 계약이 어디 있어? 내가 분명히 말했지, 거절은 거절한다고.”“꼬, 꼬시다니! 내가 언제!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어? 꼬시긴 누가 꼬셨다고!”서아는 ‘꼬셨다’라는 단어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혀가 꼬여버렸다.반박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은데, 정작 입 밖으로는 의미 없는 파열음만 튀어나왔다.펠의 능청스러운 눈빛과 제 손을 감싸 쥔 온기에 머릿속이 하얗게 타버려, 도무지 논리적인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왜, 틀린 말 아니잖아. 네 영혼까지 걸게 만들 만큼 간절하게 구애한 건 너니까.”펠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그 여유로운 미소에 서아는 자신이 완전히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었음을 직감했다.“연애하자, 이러면 뭐… ‘그래, 좋아!’하고 바로 연애부터 하냐?”서아가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이자, 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그러면 뭐부터 하는데?”“아니, 그게… 사람이 감정이 있는 동물인데! 아무 감정도 없이 어떻게 덜컥 연애할 수 있냐, 뭐 그런 말이지.”“내가 싫어?”단도직입적인 펠의 질문에 서아의 사고회로가 다시금 엉켰다.싫으냐고?이 비현실적인 외모를 가진 남자를 눈앞에 두고 감히 싫다는 말이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좋다'고 하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그, 그런 말이 아니잖아!”서아는 제 손을 잡은 펠의 손길이 뜨거워질수록 더욱 당황했다.“뭐 썸도 타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연애하고 그런다던데.”서아는 부끄러움에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바닥의 장판 무늬를 다 외울 기세였다.“아하!”펠은 마치 난해한 마법 주문이라도 해독한 사람처럼 무릎을 탁 치며 서아

  • 날 사랑해 줘   21화

    어딘가 힘없이 가라앉은 그녀의 어깨를 본 펠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잠시 어디로 자리를 옮길까? 카페라도…. 아니다, 괜찮으면 우리 집으로 갈래?”말을 내뱉는 순간 서아는 아차 싶어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그, 가, 가까우니까. 밖은 춥기도 하고….”서아는 변명하듯 어색하게 손짓을 해 보였다.펠은 잠시 서아의 낡은 빌라 쪽을 바라보더니 짧게 답했다.“좋아.”앞장선 서아의 발걸음이 아까보다 더 꼬이는 듯했다.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도착한 작은 자취방.서아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누추하지만 들어와. 편한 데 앉으면 돼.”서아는 아무 데나 가방을 급히 내려놓고는 정돈되지 않은 방 안이 부끄러워 서둘러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마실 거 필요 없어. 앉기나 해.”“아, 그, 그래.”누군가가 자신의 방에 들어온 것도 처음이었지만, 남자는 더더욱 처음이었다서아는 손바닥에 배어 나오는 땀을 바지에 슬쩍 닦으며 펠의 맞은편에 천천히 앉았다.방 안은 좁았다.그래서일까, 펠이 내뿜는 서늘하고도 짙은 향기가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서아는 눈치를 살피며 펠의 표정을 읽으려 애썼다.왠지 아침의 장난기 어린 모습과는 다른 침착함이 느껴졌다.‘전화를 잊어버려서 진짜 화난 건가? 아니면 집이 너무 좁아서 불쾌한 건가?’정적이 길어질수록 서아의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릴 듯 크게 울렸다.“할 말이 뭔데?”펠이 식탁 너머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의 짙은 눈동자가 서아의 얼굴을 빤히 비추자, 서아는 목 안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아, 그게….”서아는 지금이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하루 종일 아르바이트에 시달려 몰골은 엉망이었고, 좁은 자취방의 공기는 두 사람의 존재감만으로도 이미 포화 상태였다.하지만 오늘 아침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이 생각을 털어버리지 않으면, 내일도 모레도 펠의 페이스에 휘말릴 것만 같았다.서아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는

  • 날 사랑해 줘   20화

    오늘 서아의 일과는 오전 편의점 타임으로 시작해, 오후 치킨집 서빙으로 이어지는 강행군이었다.원래대로라면 주말 야간 PC방 아르바이트까지 총 세 개의 일을 전전해야 하지만, 평일인 오늘은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편이었다.주말에는 치킨집 알바가 따로 있어 쉬는 날이었지만, 서아는 그 비어버린 시간조차 견디지 못하고 PC방 아르바이트로 메꾸어 제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다.오전의 편의점은 평소처럼 한산했다.유동 인구가 적은 외진 길목에 자리 잡은 탓에 다른 지점보다 훨씬 여유로웠지만, 오늘따라 서아는 그 정적이 고통스러웠다.차라리 정신없이 바빠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자꾸 왜 떠오르는 거야, 대체.’머릿속에는 자꾸만 펠의 잔상이 맺혔다.아침 햇살을 등지고 전봇대에 기대어 있던 모습, 거대한 검은 날개를 펼치며 앞을 막아서던 비현실적인 광경, 그리고 장난스럽게 건네던 목소리까지.서아는 잡념을 털어내려 일부러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굳이 건드릴 필요 없는 음료 진열장의 줄을 자로 잰 듯 다시 맞추고, 출근하자마자 반짝이게 닦아둔 테이블을 괜히 한 번 더 박박 문질러 닦았다.할 일을 억지로 만들어내며 몸을 혹사시켰지만, 생각이라는 놈은 비웃기라도 하듯 틈만 나면 비집고 들어왔다.이미 그에게 홀린 기분이었다.사실 어제저녁, 그와의 계약에 대해 어느 정도 결론을 내렸었다.'연애는 생략해도 상관없다'라고 스스로 합의를 보았고, 펠이 인간이 아닌 초월적 존재라는 사실도 눈앞에서 확인했으니 믿기지 않아도 받아들이면 그만인 일이었다.하지만 서아는 스스로가 펠을 떠올리는 것조차 강렬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왜일까.그 의문에 대한 답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그저 그를 떠올리면 가슴 한구석이 일렁이며 심란해질 뿐이었다.평생을 생존에만 몰두하며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의 벽 사이로, 펠이라는 존재가 묘하게 간지러운 몽글몽글한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평생 받아본 적 없는 누군가의 일방적인 관심과 아침 인사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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