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연수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 쪽을 힐끗 봤다.“근데 있잖아.”“왜.”“나는 아직은 답 되게 쉬운 것 같은데.”“무슨 소리야.”“하나는 네 글을 살리고.”“응.”“하나는 네 감정을 살리잖아.”나는 그 말을 듣고 그대로 멈췄다.강도윤은 내 글을 살리고. 도화준은 내 감정을 살린다.그 문장을 마음속으로 아주 천천히 반복했다. 너무 정확해서, 조금 아플 정도였다. 내가 지금 어디쯤 서 있는지, 왜 두 남자가 다 다르게 크게 느껴지는지 단번에 설명해주는 문장 같았다.“근데 그게 꼭 답이 하나라는 뜻은 아니야.”연수가 덧붙였다.“사람은 글도 살려야 하고, 감정도 살아야 되니까.”나는 그제야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복잡했다.그때 핸드폰이 다시 짧게 울렸다.나도 모르게 연수와 동시에 화면을 봤다.도화준이었다.연수가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와, 타이밍 봐라.”“보지 마.”“이미 봤거든.”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황급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오늘 저녁 공기가 괜찮네요.’‘걷고 계실 것 같았습니다.’나는 그 문장을 읽고 그대로 굳었다.‘뭐야, 이건 또. 어떻게 알았지.’물론 추측이겠지. 내가 생각 많을 때 집에 바로 안 들어가는 타입일 수도 있다고 그냥 짚은 걸 수도 있고. 그런데 문제는, 그게 맞았다는 거다.나는 지금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고, 방금 전까지 걸었고, 실제로 오늘 저녁 공기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야, 소름.”연수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속삭였다.“쟤 뭐야? 너 위치 추적해?”“그럴 리가.”“근데 왜 이렇게 잘 맞춰.”나는 입술을 깨물며 화면만 내려다봤다.‘대답을 해야 하나. 안 해야 하나.’연수가 내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빨리 뭐라고 해봐.”“왜 네가 더 신났어.”“재밌잖아. 나는 구경꾼 입장이 제일 재밌어.”나는 어이없어서 연수를 한 번 째려본 뒤, 천천히 답장을 쳤다.‘맞아요. 지금은 걷는 게 좀 낫더라고요.’보내자마자 답이
나는 지하철역 계단 앞에 멈춰 섰다가, 결국 방향을 틀었다. 바로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할 땐 조금 걸어야 한다. 나는 늘 그랬다. 생각이 많을수록 좁은 방보다 바깥 공기가 나았다.근처 공원까지 천천히 걸어 들어가 벤치 하나에 앉았을 때, 바람이 아주 살짝 불었다. 여름과 가을 사이 어디쯤의 바람. 차갑진 않지만, 오래 앉아 있으면 얇은 소매 안으로 스며드는 종류의 바람이었다.나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너무 익숙한 동작처럼, 도화준과의 채팅창을 다시 열었다. 방금 나눴던 몇 줄의 문자. 그걸 가만히 보다 말고, 화면을 내렸다 올렸다. 그러다 문득, 강도윤 채팅창도 다시 열어봤다.‘작가님은 생각보다 훨씬 잘 쓰세요.’‘그거면 충분히 좋은 쪽 아닌가요.’그리고 다시 도화준 채팅창. 오늘은 저도 조금 덜 신경 썼습니다.그 정도면 충분한 밤이네요.오늘도 생각보다 괜찮은 하루셨으면 좋겠어서요.나는 그대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정말 미쳐버리겠다.누가 보면 동시에 두 남자랑 줄다리기라도 하는 사람 같지 않나. 물론 현실은 전혀 다르다. 강도윤과는 철저히 일이고, 도화준과는 철저히 서비스여야 한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은 그렇게 깔끔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그게 제일 문제였다.“도희야?”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흠칫했다.고개를 들자 오연수가 공원 산책로 쪽에서 커피 두 잔을 든 채 서 있었다. 정말 사람 인생이란 건, 민망한 타이밍을 정확히 골라 지인을 만나는 데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너 왜 여기 있어?”내가 묻자 연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렸다.“그건 내가 할 말이거든. 이 시간에 혼자 공원 벤치에서 심각한 얼굴 하고 있으면 당연히 수상하지.”“산책 왔어.”“거짓말. 너 방금 누군가 채팅창 번갈아보다가 양심 찔린 얼굴이었어.”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이 인간은 왜 자꾸 쓸데없이 정확하지.연수는 내 옆에 털썩 앉더니 커피 한 잔을
이건 너무 타이밍이 절묘해서 오히려 웃겼다. 방금까지 ‘안정감이라는 이름의 남자’와 점심을 먹고 나왔는데, 그 직후 ‘심장을 살짝 건드리는 남자’에게서 점심 안부 문자가 오다니.나는 그대로 길가에 서서 한참 웃었다.진짜, 내 인생 너무 이상해졌다.그리고 아주 솔직히 말하면 이상한데도 조금 재밌었다.강도윤에게서 받은 안정감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이상한 표현이지만 정말 그랬다. 점심을 먹고, 표지 방향을 얘기하고, 내 글의 장점과 단행본의 결을 함께 정리하던 그 시간이 지나고 나니, 마음 한쪽이 가지런히 정돈된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내 작품을 제대로 읽고, 내 장점을 정확히 짚고, 내가 흔들리지 않게 문장 바깥의 자리까지 정리해주는 경험. 그건 설렘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었다. 사람이 무너질 때 어깨를 빌려주는 대신, 무너지지 않게 바닥을 먼저 받쳐주는 방식의 다정함.그래서 더 웃겼다.그 바로 다음 순간,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이 도화준이라는 게.나는 카페 앞 인도에 잠깐 멈춰 서서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오늘 점심은 잘 드셨습니까.정말 별것 아닌 문장이다.안부 중에서도 가장 무난한 안부.그런데도 하필 지금, 하필 이 타이밍이라서 사람을 더 웃게 만들었다.같은 날,한 남자는 내 글을 책으로 만드는 얘길 했고,다른 한 남자는 내가 점심을 잘 먹었는지 물었다.세상에 이런 흐름이 어디 있지.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길 건너편 신호 대기 중이던 사람들이 혹시 날 보진 않을까 싶어 괜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이상하게 좋은 일을 들킨 사람처럼 민망했다.도화준에게 뭐라고 답하지. 한참 고민하다가 나는 아주 무난한 문장을 골랐다.‘네. 덕분에요.’보내고 나서 그대로 멈췄다.아니, 잠깐. ‘덕분에요’는 왜 붙였지?나는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분명 강도윤과 점심을 먹고 와서 마음이 느슨해진 탓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솔직해져 있었고, 조금 더 잘 웃고 있었고, 그래서 문자 한 줄에
“좋은 쪽으로요?”그 질문이 의외로 다정해서, 나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좋은 쪽으로요?’보통 사람들은 ‘무슨 일 있어요?’부터 묻는다. 그런데 강도윤은 먼저 방향을 묻는다. 그게 이상하게 좋았다. 내가 겪고 있는 이 혼란을 꼭 문제라고 단정하지 않는 느낌이라서.“아직은 모르겠어요.”나는 솔직하게 말했다.“근데 전보단 덜 우울해졌어요.”강도윤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부드러워졌다.“그거면 충분히 좋은 쪽 아닌가요.”나는 포크 끝을 내려다봤다.그거면 충분히 좋은 쪽.도화준도 어젯밤 비슷한 말을 했다.그 정도면 충분한 밤이라고.같은 의미인데도, 두 사람의 말은 다르게 남는다.도화준의 말은 마음을 말랑하게 만들고, 강도윤의 말은 마음을 정리하게 만든다.그리고 나는 그 차이를 느끼는 내가 조금 낯설었다.“작가님은.”강도윤이 샌드위치를 한입 자르고 나서 말했다.“원래 혼자 오래 버티는 편이시죠.”나는 그대로 멈췄다.“네?”“그냥… 그런 쪽 같아서요.”그가 무심하게 덧붙였다.“스스로 다 해결하려는 사람.”그 문장이 너무 정확해서, 나는 잠깐 아무 말도 못 했다.사람이 무너질 때 제일 당황스러운 순간은 누군가가 자기가 숨겨둔 습관을 너무 쉽게 알아봤을 때다. 나는 늘 그랬다. 웬만한 건 혼자 처리하려 했고, 힘들어도 대충 괜찮은 척 넘겼고, 진짜 바닥일 때도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걸 잘 못했다. 강치열과 헤어지고도 며칠을 식음전폐하면서 연수에게조차 ‘괜찮다’고 했던 인간이 바로 나였다.그걸 이 남자가 어떻게 알았지.“그런가요…?”내가 아주 작게 묻자, 강도윤은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작가님 글이 그래요.”‘아.’“웃기고 가볍게 흘러가는 것 같아도, 결국 중요한 감정은 늘 혼자 오래 붙들고 있잖아요.”나는 그대로 조용해졌다.그건 거의… 내 글 얘기인 동시에 내 얘기였다.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부끄럽기보단 조금 안심이 됐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나를 조금 알아본다는 건 생각보다 큰
“표지 방향성 레퍼런스 몇 개 정리해봤어요. 작가님 취향이 중요해서, 오늘은 그냥 편하게 얘기해보려고요.”나는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조금 놀랐다.생각보다 훨씬 꼼꼼했다. 단순히 ‘로맨스 장르 느낌’ 정도가 아니라, 표지 컬러감, 타이포 방향, 인물 구도, 여성 독자 반응이 좋은 시선 처리, 심지어 플랫폼 첫 화면에서 어떻게 보이는지까지 정리해둔 상태였다. 나는 무심코 입술을 살짝 벌렸다.“이거… 되게 많이 보셨네요.”강도윤은 아주 자연스럽게 웃었다.“작가님 작품이잖아요.”그 말이 너무 담백해서, 오히려 더 크게 남았다.작가님 작품이잖아요. 저건 분명 업무적인 문장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내 글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노트북 화면을 보다가 아주 조용히 숨을 골랐다.“감사해요.”“제가 더 감사하죠. 사실 저는 치떡빠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작품이 종이책으로 나와도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나는 순간 눈을 들었다.“처음부터요?”“네.”강도윤은 내 반응을 보며 아주 약하게 웃었다.“조금 놀라셨네요.”“아니… 그냥.”나는 솔직하게 말했다.“그런 얘길 처음 들어봐서요.”강치열은 내 글을 거의 안 읽었다. 아니, 정확히는 초반 몇 화 정도는 읽는 척했지만, 나중엔 그냥 “재밌겠네” 같은 성의 없는 말로 넘겼다. 내가 밤새워 퇴고를 하고, 댓글 반응에 울고 웃고, 표지 한 장에도 고민하는 걸 가장 가까이서 보던 사람이 결국 내 글엔 아무 관심도 없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오래 상처로 남았다.그런데 지금 내 앞의 남자는 내가 한참 써온 작품을 ‘처음부터 종이책으로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이건 생각보다 꽤 큰 일이었다.“좋은 뜻으로요.”강도윤이 덧붙였다.“가볍고 발랄한데, 감정이 얕지 않아서요. 그 균형 잡기가 되게 어렵거든요.”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이 조금 이상해졌다.‘정확해서.’내가 늘 제일 고민하던 부분이었다. 로코는 가벼워 보여야 하지만, 인물 감정이 얄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본 건 핸드폰 화면이었다.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진짜 답도 없다….”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눈 뜨자마자 핸드폰부터 확인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무료 체험 남친한테 온 마지막 문자랑 출판사 대표한테 온 업무 톡이 같은 창에 남아 있는 상태로. 이쯤 되면 내 일상이 꽤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정돈되고 있는 게 분명했다.하지만 더 웃긴 건, 기분이 아주 나쁘진 않았다는 점이었다.강치열과 헤어진 뒤 처음 며칠은 아침이 제일 싫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아, 또 하루를 버텨야 하지’라는 생각이 먼저 올라왔다. 잘 때는 잠깐 잊었다가, 아침이 되면 다시 상실감이 정면으로 밀려왔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아주 상쾌한 건 아니어도, 적어도 일어나기 싫은 수준은 아니었다.그게 누구 덕분인지 굳이 이름 붙이고 싶진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나는 침대 위에 반쯤 누운 채 알림창을 내렸다. 페이지온 단체방에 새 파일 하나가 올라와 있었고, 강도윤 개인 톡엔 새 메시지가 하나 더 와 있었다.‘작가님, 오늘 점심쯤 잠깐 시간 괜찮으시면 단행본 표지 방향성도 같이 얘기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부담 안 되시면 근처에서 가볍게 뵐까요?’나는 그 문장을 읽고 아주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점심. 가볍게. 근처에서.’정말 업무적인 말인데, 왜 사람은 ‘가볍게 뵐까요’ 같은 문장에서 괜히 숨을 한 번 고르게 되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건 데이트가 아니다. 너무 당연하게도 일이고, 출판사 대표가 작가를 만나는 정상적인 업무 미팅일 뿐이다. 그런데도 요 며칠 내 일상에 ‘남자와 약속’이라는 이벤트가 갑자기 늘어나 버린 탓인지, 몸이 먼저 반응했다.“하….”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오늘은 정신 차려야 한다.오늘은 도화준이 아니라 강도윤이다.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업무다.그렇게 다짐하며 욕실로 들어갔지만,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