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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기대라는 걸 들키는 순간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4 08:59:24

강치열과의 사랑이 아니라, 강치열이 내 하루의 중심이던 시간이. 그건 생각보다 꽤 큰 일이었다.

나는 노트북을 켰다.

문서창이 열리고, 깜빡이는 커서가 보였다.

오늘은 이상하게 망설임이 덜했다.

나는 천천히 문장을 썼다.

누군가를 잊는다는 건 그 이름이 완전히 지워지는 일이 아니라,

더 이상 제일 먼저 떠오르지 않게 되는 일일지도 몰랐다.

쓰고 나니 가슴이 조금 시큰했다.

그래도 맞는 말 같았다.

그리고 그 아래, 거의 생각 없이 한 줄을 더 적었다.

오늘 내 하루엔 먼저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저장했다.

지우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이 감정의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붙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먼저 떠오른 사람.

지금의 내겐 그 정도로 충분했다.

사람은 꼭 감정을 인정한 다음 날부터 더 이상해진다.

전날 밤, 노트북 화면에 먼저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라는

문장을 써놓고 잠들었을 땐 나름 스스로를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다.

좋다, 인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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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친 쇼핑몰   43. 자존감을 조용히 받쳐주는 문장

    그리고 그 감탄은 단순히 일 잘하는 사람에 대한 감탄이 아니었다. 내 작품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더 컸다. 강도윤은 내 글을 ‘상품’으로만 보지 않았다. 물론 출판사 대표니까 결국은 판매와 기획을 생각하겠지만, 그 안에서도 작가가 지키고 싶은 감정의 결을 존중하는 방식이 있었다.그게 이상하게, 사람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나는 파일을 넘기다가 그가 표시해둔 한 문장 앞에서 손을 멈췄다.“도희의 장점은,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을 우습게 만들지 않는 시선에 있어요.”나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아무도 그렇게 말해준 적 없었다.강치열과 헤어진 뒤, 나는 내 소설조차 조금 우습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사랑을 믿고, 사랑을 쓰고, 사랑을 팔아먹으면서 정작 내 현실은 이렇게 망가졌다는 사실이 너무 우스워서. 그래서 며칠 동안 원고 창도 제대로 못 열었다. 그런데 강도윤은 오히려 그 반대의 지점을 봤다.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완전히 조롱하지 않는 시선. 그게 내 글의 장점이라고.그 말을 읽는 순간, 이상하게 눈이 조금 뜨거워졌다.나는 재빨리 머그컵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괜히 눈물 날 것 같아서.이상하다.도화준은 사람 심장을 살짝살짝 건드려서 흔들어놓고,강도윤은 사람 자존감 어딘가를 조용히 받쳐준다.둘 다 다른 방식으로 크게 남았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화면을 봤다.‘도화준.’정말 미친 사람처럼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와….”나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메시지는 아주 짧았다.‘오늘은 원고가 좀 써지십니까.’나는 그 문장을 읽고 그대로 멈췄다.‘뭐야.’‘왜 하필 그걸 묻지.’오늘 아침 내내 내가 붙들고 있던 게 원고였고, 방금 전까지 강도윤이 보낸 피드백 문서를 읽으며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저 사람은 왜 또 이렇게 정확한 데를 건드리는 걸까.아니, 물론 우연일 수 있다. 내가 작가라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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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치열과의 사랑이 아니라, 강치열이 내 하루의 중심이던 시간이. 그건 생각보다 꽤 큰 일이었다.나는 노트북을 켰다.문서창이 열리고, 깜빡이는 커서가 보였다.오늘은 이상하게 망설임이 덜했다.나는 천천히 문장을 썼다.누군가를 잊는다는 건 그 이름이 완전히 지워지는 일이 아니라,더 이상 제일 먼저 떠오르지 않게 되는 일일지도 몰랐다.쓰고 나니 가슴이 조금 시큰했다.그래도 맞는 말 같았다.그리고 그 아래, 거의 생각 없이 한 줄을 더 적었다.오늘 내 하루엔 먼저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나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저장했다.지우고 싶지 않았다.아직은 이 감정의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붙이고 싶지도 않았다.그냥, 먼저 떠오른 사람.지금의 내겐 그 정도로 충분했다.사람은 꼭 감정을 인정한 다음 날부터 더 이상해진다.전날 밤, 노트북 화면에 먼저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라는 문장을 써놓고 잠들었을 땐 나름 스스로를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다. 좋다, 인정하자. 아직 사랑은 아니고, 아직 위험한 수준도 아니고, 그냥 조금 더 신경 쓰이는 사람 하나쯤 생긴 거다. 그 정도는 인생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그런데 문제는, 감정을 한 번 인정하고 나면 몸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한다는 데 있었다.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찾았다.그리고 손끝이 먼저 도화준 채팅창을 눌렀다.정말 무섭게도 망설임이 없었다.나는 침대에 반쯤 누운 채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그럼 저도 오늘은 조금 다행이네요.’그 짧은 문장을 밤에 세 번은 더 읽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아침에 또 읽는 것도 이상할 건 없… 는데, 아니다. 솔직히 좀 이상했다. 내가 원래 이런 인간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은 다음 날 아침, 그 채팅창부터 열어보는 쪽은 절대 아니었다.“하….”나는 베개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미친 거지, 진짜.”그래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오늘 아침, 내가 제일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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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한참을 빈 입력창만 보다 결국 아주 짧게 보냈다.오늘 공기 좋다는 말, 맞네요.조금 걸으니까 생각이 덜 시끄러워졌어요.보내고 나니 묘하게 안심이 됐다.강치열 얘길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점이.답장은 생각보다 바로 왔다.‘다행이네요. 오늘은 이도희 씨가 덜 피곤한 쪽이면 좋겠습니다.’나는 화면을 보다가 아주 천천히 입술을 깨물었다.‘덜 피곤한 쪽.’정말 이 남자는 이상한 데를 정확하게 짚는다.지금 내가 느끼는 건 분노보다 피로였으니까.나는 길가 벤치에 다시 잠깐 앉았다.손에 들린 딸기 우유가 미지근해져 가고 있었다.도화준에게 뭐라고 더 답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아주 문득 묻고 싶어졌다.‘도화준 씨는 원래 누가 지치면 다 이렇게 알아차려요?’보내고 나서야 조금 과했나 싶었다.너무 의미를 실은 질문 같아서.하지만 답장은 의외로 가볍게 왔다.‘아뇨. 지금은 이도희 씨가 티가 많이 나는 편이라서요.’나는 그대로 웃음이 터졌다.“와, 진짜….”말이 좀 심할 수도 있는데, 이 남자는 타이밍이 진짜 좋다.사람이 한껏 진지해질 뻔한 순간, 꼭 그걸 아주 살짝 덜어준다.나는 결국 답장을 이렇게 보냈다.‘그 말 왠지 기분 나쁜데요.’도화준이 곧바로 답했다.‘오늘은 좋은 뜻입니다.’‘아.’그 짧은 문장을 읽는 순간, 괜히 어깨 힘이 빠졌다.좋은 뜻. 나는 그 문장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결국 고개를 젖혔다.공원 가로수 잎 사이로 밤하늘이 조금 보였다. 시커멓고, 가로등 빛 때문에 별은 안 보였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아주 선명하게 알았다.강치열이 다시 끼어들어도 내 하루가 예전처럼 망가지지는 않는구나.그 사실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누군가를 새로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이런 감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내 하루를 망칠 힘을 더는 갖고 있지 않다는 감각. 그리고 그 공백에, 전혀 다른 온도의 사람이 조금씩 들어오고 있다는 감각.강도윤은 낮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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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대로 편의점 문 앞에 멈춰 섰다. 자동문이 뒤에서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몇 번 지나갔다. 손엔 차가운 딸기 우유가 들려 있었고, 핸드폰 화면엔 전혀 예상하지 않은 이름이 떠 있었다.강치열.기분이 아주 빠르게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졌다.“아, 씨.”작게 욕이 튀어나왔다.나는 잠깐 문자창을 열까 말까 망설였다. 안 보면 되지 않나. 차단하면 되잖아. 그런데 사람은 이상하게 자기를 불쾌하게 만들 걸 알면서도 꼭 확인한다. 마치 더 상처받을 이유를 하나쯤 더 찾아야 하루가 완성되는 인간들처럼.결국 나는 메시지를 눌렀다.‘야. 네가 내 친구들한테 뭐라고 했냐?’‘왜 민규가 나한테 전화해서 너한테 잘못한 거 없냐고 물어보는데?’나는 그 문장을 한 번, 두 번 읽고 그대로 웃어버렸다.하도 어이가 없어서. 정말 끝까지 이런 식이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금방 잊고, 상황이 자기 불편 쪽으로만 움직이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나를 의심한다. 민규는 내 쪽 대학 동기이자, 강치열이랑도 몇 번 얼굴을 본 적 있는 애였다. 내가 헤어진 얘길 따로 떠들고 다닌 것도 아닌데, 연수가 분명 어디선가 입을 털었겠지. 그게 그렇게까지 기분 나빴나. 바람 핀 쪽이.나는 길가 난간 옆에 서서 그대로 답장을 쳤다.‘너한테 잘못한 거 있냐고 물어볼 정도면 네가 알아서 찔리는 짓 했다는 뜻 아니야?’보내고 나서도 화가 안 가라앉았다.오히려 손끝이 더 뜨거워졌다.몇 초 뒤, 바로 답장이 왔다.‘야, 진짜 유치하게 굴지 마. 헤어졌으면 끝난 거지 뒷말 나오게 만들지 말라고.’나는 그 문장을 읽다가, 문득 아주 피곤해졌다.분노보다 피로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사람을 너무 오래 지치게 만든 상대를 마주할 때 느껴지는 종류의 감정. 화를 낼 힘조차 아깝고, 설명할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하자니 찌꺼기가 남는 상태.나는 아주 천천히 화면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답장하지 말자. 여기서 끝내자.’그렇게 마음먹는 순간이었다.머릿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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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수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 쪽을 힐끗 봤다.“근데 있잖아.”“왜.”“나는 아직은 답 되게 쉬운 것 같은데.”“무슨 소리야.”“하나는 네 글을 살리고.”“응.”“하나는 네 감정을 살리잖아.”나는 그 말을 듣고 그대로 멈췄다.강도윤은 내 글을 살리고. 도화준은 내 감정을 살린다.그 문장을 마음속으로 아주 천천히 반복했다. 너무 정확해서, 조금 아플 정도였다. 내가 지금 어디쯤 서 있는지, 왜 두 남자가 다 다르게 크게 느껴지는지 단번에 설명해주는 문장 같았다.“근데 그게 꼭 답이 하나라는 뜻은 아니야.”연수가 덧붙였다.“사람은 글도 살려야 하고, 감정도 살아야 되니까.”나는 그제야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복잡했다.그때 핸드폰이 다시 짧게 울렸다.나도 모르게 연수와 동시에 화면을 봤다.도화준이었다.연수가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와, 타이밍 봐라.”“보지 마.”“이미 봤거든.”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황급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오늘 저녁 공기가 괜찮네요.’‘걷고 계실 것 같았습니다.’나는 그 문장을 읽고 그대로 굳었다.‘뭐야, 이건 또. 어떻게 알았지.’물론 추측이겠지. 내가 생각 많을 때 집에 바로 안 들어가는 타입일 수도 있다고 그냥 짚은 걸 수도 있고. 그런데 문제는, 그게 맞았다는 거다.나는 지금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고, 방금 전까지 걸었고, 실제로 오늘 저녁 공기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야, 소름.”연수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속삭였다.“쟤 뭐야? 너 위치 추적해?”“그럴 리가.”“근데 왜 이렇게 잘 맞춰.”나는 입술을 깨물며 화면만 내려다봤다.‘대답을 해야 하나. 안 해야 하나.’연수가 내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빨리 뭐라고 해봐.”“왜 네가 더 신났어.”“재밌잖아. 나는 구경꾼 입장이 제일 재밌어.”나는 어이없어서 연수를 한 번 째려본 뒤, 천천히 답장을 쳤다.‘맞아요. 지금은 걷는 게 좀 낫더라고요.’보내자마자 답이

  • 남친 쇼핑몰   38. 인간 마음은 원래 이상해

    나는 지하철역 계단 앞에 멈춰 섰다가, 결국 방향을 틀었다. 바로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할 땐 조금 걸어야 한다. 나는 늘 그랬다. 생각이 많을수록 좁은 방보다 바깥 공기가 나았다.근처 공원까지 천천히 걸어 들어가 벤치 하나에 앉았을 때, 바람이 아주 살짝 불었다. 여름과 가을 사이 어디쯤의 바람. 차갑진 않지만, 오래 앉아 있으면 얇은 소매 안으로 스며드는 종류의 바람이었다.나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너무 익숙한 동작처럼, 도화준과의 채팅창을 다시 열었다. 방금 나눴던 몇 줄의 문자. 그걸 가만히 보다 말고, 화면을 내렸다 올렸다. 그러다 문득, 강도윤 채팅창도 다시 열어봤다.‘작가님은 생각보다 훨씬 잘 쓰세요.’‘그거면 충분히 좋은 쪽 아닌가요.’그리고 다시 도화준 채팅창. 오늘은 저도 조금 덜 신경 썼습니다.그 정도면 충분한 밤이네요.오늘도 생각보다 괜찮은 하루셨으면 좋겠어서요.나는 그대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정말 미쳐버리겠다.누가 보면 동시에 두 남자랑 줄다리기라도 하는 사람 같지 않나. 물론 현실은 전혀 다르다. 강도윤과는 철저히 일이고, 도화준과는 철저히 서비스여야 한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은 그렇게 깔끔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그게 제일 문제였다.“도희야?”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흠칫했다.고개를 들자 오연수가 공원 산책로 쪽에서 커피 두 잔을 든 채 서 있었다. 정말 사람 인생이란 건, 민망한 타이밍을 정확히 골라 지인을 만나는 데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너 왜 여기 있어?”내가 묻자 연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렸다.“그건 내가 할 말이거든. 이 시간에 혼자 공원 벤치에서 심각한 얼굴 하고 있으면 당연히 수상하지.”“산책 왔어.”“거짓말. 너 방금 누군가 채팅창 번갈아보다가 양심 찔린 얼굴이었어.”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이 인간은 왜 자꾸 쓸데없이 정확하지.연수는 내 옆에 털썩 앉더니 커피 한 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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