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에이든. 그러면 내가 데미안을 만나볼게요.”저를 납치하려던 남자임에도 여전히 이름을 불러준다. 그것이 어쩐지 자꾸만 에이든은 힘겹게 했다. 외면해온 사실을 마주하게 하는 것같기도 했다.“에이든, 잠깐만. 나 좀 봐봐요.”그가 눈을 필사적으로 피하며 자신에게 표정을 숨기려 하는 걸 루시아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그녀가 고개를 들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고개 들어봐요.”그러면 그는 또 마법에 이끌리듯 그녀의 말을 따르고 마는 것이다.“디디, 불안해요?”한번에 제 기분을 간파한 루시아가 물었다. 자신이 우스워 보일까봐 눈가가 불거진 에이든이 필사적으로 아니라고 부정을 하려 했다. 양손으로 손사래를 치려던 그가 우뚝, 루시아의 눈빛과 맞닥뜨리고 후두둑 눈물을 흘렸다.“......루시, 혹시 돌아가고 싶니?”차마 내내 묻지 못한 질문이었다. 에드윈과의 일을 그녀가 참고 넘어가 줬다고 해도 결국 나스는 타국이다. 루시아를 사랑한다며 이제 와 저를 데리러온 전남편을 따라가고 싶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하지?자유로이 날갯짓하는 그녀가 좋았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자신이 만든 세상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실은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말 것이었다.“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나는 당신이 원하는대로.”루시아는 남자가 어디까지 말하나 두고볼까 생각하다가 점점 눈물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 그의 뺨을 감쌌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에이든, 바보 에이든.”이마를 맞부딪힌 그녀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다정하고 또 다정하게.“아직도 내 마음을 몰라요?”루시아는 자신이 표현이 부족했나최근을 돌아봤다. 나름대로 그가 해오는 애정표현에 적극적으로 반응해온 것같은데 그래도 그를 불안하게 했던 것같아 마음이 안쓰럽고 미안했다.“왜 내가 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해요? 내 사람들은 다 여기 있는데. 우리 뱃속에 있는 작은 꼬마도 있고.”루시아가 에이든의 고개를 끌어당겨 자신의 입술이 있는 곳까지 이끌었
에이든은 루시아가 그날 무언가 오해를 했다는 걸 대충은 짐작했다.그에게서 희미한 피냄새가 나는데 아마도 데미안 벨루아의 것일 거라고 생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저를 끌어안았다는 사실에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하지만 사실은 달랐다.그는 데미안 벨루아를 고문하지 않았다. 고문하기는커녕 그에게 삼시세끼 밥도 제대로 챙겨주라고 간수에게 이야기했다. 에이든은 더 이상 벨루아하고 지긋지긋하게 엮이는 일이 싫었다.그 놈이 루시아를 납치하려고 들었고, 그들의 아이가 위험했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루시아의 가문이 피해를 볼까봐 일부러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참았다. 다만 그러한 조치 이후에는 그에게 다시 지독한 무력감이 찾아왔다. 그는 몇 번이나 성벽에 대고 주먹질을 했다. 손등이 터질 때까지 이어진 자해 끝에 결국 피가 흥건해져 소매에도 묻을 정도였기에 루시아에게는 들키지 않으려고 옷을 갈아입던 찰나였던 것이다.그래서 데미안 벨루아는 그가 저지른 짓 치고는 괘 괜찮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간수들조차 에이든의, 겨울의 왕이 내린 명령을 제대로 수행해 그를 고문하거나 조롱하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서늘한 분노만을 가슴에 간직한 채로 살의만 조용히 내보일 뿐이었다. 분노할수록 차갑고 이성적으로 변하는 것은 하우젠 령 사람들 특유의 민족성이기도 했다.데미안은 그래서 자신이 어째서 사지가 멀쩡한 채로 있을 수 있는지 아이러니했다. 그들이 주는 음식에 독이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해 며칠 째 식사도 거부하고 오로지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자신이 왜 이 곳에 와서 반란 세력과 손까지 잡으며 루시아 아르테미스를 데려가려고 했는지 의문이었기에. 정말로 사랑이라고 하느냐는 카이사르의 반문이 문득 문득 생각나 그를 미치게 했다.그랬다. 그가 저지른 죄보다도 그랬던 동기를 생각하고 마주할수록 제 심연 속에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그 여자에게 말해. 그 여자를 만나야 해.그 여자, 도자기 인형같은 얼굴로 제 앞에 나타나 제대로 웃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레이루나는 아르테미스 백작대부인이 되어 루시아를 가장 가치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더 이상 브리짓 아서의 장난질 따위에 놀아나지 않게 내내 누구도 그 애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없게.하지만, 그걸 루시아가 바랐을까?이제와서 그런 걸 생각해보게 만들었다.디디라는 소년이 오두막에 머무르고 있을 때부터 내내 가지고 있던 의문이었다.국경에서 건너온 의문의 소년이아르테미스 영지의 숲에 머무르고 있다는 걸 안건 루시아가 유난히 자주 바깥을 나돌 무렵에 뒤늦게 알게 되었다.당시에 윌리엄의 바람기가 하늘을 찔러서 미처 딸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 사이 나타난 소년은 그녀가 어루만져주지 못한 부분들을 다정하게 도닥여주고, 루시에게 필요한 말들을 해준 모양이었다.그 애가 누구인가에 대해 조사를 해야했다. 하지만 숲에서 멀리서 보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아주 예전에 나스의 황족들을 대면할 일이 있었다.에드윈 하우젠. 나스의 3황자였다. 그가 어쩐 연유로 이곳까지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루시아에게 새로운 구명줄이 된다면 상관없었다. 이참에 빚을 하나쯤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같았다. 그래서 레이루나는 알고도 에드윈과 루시아가 함께 서로를 만나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 일부러 루시아에게 주던 음식을 넉넉하게 주기도 했다. 소년에게 제 것을 건네느라 어느 순간 말라가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녀가 에드윈을 마침내 찾아간 날은 비가 내렸다.“황자님을 여기서 뵐 줄은 몰랐지요.”에드윈이 굳은 표정으로 오두막의 문을 연 여인을 바라봤다. 백금발의 초록눈. 루시아의 묘사대로라면 분명 아르테미스 백작 부인일터.“백작부인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만.”에드윈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소년이 부러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아 닳고 닳은 귀족 여인인 레이루나가 빙긋 웃었다. 차라리 순진함이 말간 얼굴에 드러날 정도인 게 나았다. 루시아의 곁에 머물 친구라면.“티베리우스 황자의 세력에 습격당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찾는
윌리엄 카셀 아르테미스. 레이루나는 그와 결혼을 할 때 만해도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꿨다. 백작 부인이 되어 아이들과 함께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일을 앞두어 기뻤다.첫 아이가 아들이라 무사히 귀한 후계를 이었다는 생각에 기뻐할 때도 잠시, 그 다음에 딸인 루시아가 태어난 다음날, 그가 데려온 것은 사생아 브리짓 이었다.루시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는 붉은 머리였지만, 윌리엄 카셀의 잿빛 눈동자를 닮아있었다. 루시아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졌다. 레이루나도 윌리엄도 닮지 않아 바깥에서 씨도둑질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태생부터 루시아는 그렇게 출생을 의심받았다.레이루나의 권위, 백작 부인으로서의 권위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았다.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이 맞았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루시아는 윌리엄 카셀 아르테미스의 적통한 피를 이은 아이이고, 브리짓이야말로 바같에서 온 사생아라고. 그래서 루시아가 아버지에게 인정받게 하기 위해 최대한 귀족 여자아이처럼 키우려고 했다. 어떻게든, 브리짓보다 나아야 했다. 브리짓은 일찍이 아르테미스 백작가의 방계인 아서 남작가에 호적에 입적하여 후계와 혼인을 치렀다. 어릴 적부터 이미 아서 남작부인이었던 브리짓은 종종 저택을 방문해 루시아의 속을 긁었다.“어머니, 아서 남작부인이 자꾸만 저더러 자기를 언니라고 부르게 해요. 싫다고 하면 제 머리를 잡아 뜯어요.”레이루나는 그럼에도 브리짓의 눈밖에 나게 뜻을 거슬러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처음에야 여러 번 루시아가 정실의 피를 이은 아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작 윌리엄에게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루시아를 향한 윌리엄의 잣대가 엄격해질 따름이었다. 말끝마다 브리짓은, 네 언니는 안그런다며 루시아를 깎아내렸다.레이루나는 제 분신인, 자신의 한몸인 그 뽀얗고 어여쁜 아이가 그런 취급을 받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언제부터인가 부부관계조차 하지 않았던 어느 시기에, 루시아는 아버지 윌리엄에게 뺨을 맞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꾸미는 걸 힘들어 해
마리아의 말이 불씨가 되어 번졌다. 비요른은 루시아 하우젠을 반기지 않는 윌과 달리 오히려 그녀를 반기는 쪽이었기에 사적으로도 분노가 있었다. 에이든 하우젠이 오직 그 여자 하나 때문에 일으킨 변화로 평민 출신인 비요른이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결국 모든 시작이었고, 모든 일의 끝인 루시아 하우젠에게 어떤 식으로든 비요른도 스스로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장 데미안 벨루아를 찾는 제국의 황후라니.이보다 좋은 먹잇감이 어디있을까?“마리아, 나가 있어.”카이사르가 황후라는 호칭도 잊어버린 채 그녀를 내보내려고 했다. 그러자 마리아가 더없이 성난 표정으로 그에게 외쳤다.“아뇨, 나는 알아야겠어요. 데미안 벨루아 공작은 내 하나뿐인 친우이기도 했어요.”상황이 점점 악화되어가는 걸 느끼며 카이사르는 제 이마를 짚었다.“......황후 폐하, 루시아 님께서는 대공 전하의 아이를 임신 중이셨습니다.”그 말에 마리아 지젤이 창백해졌다. 아이를 품은 여인을 건드렸다는 건 그 자체로 이미 세습 사회에서 금기에 속했다.“하지만 아이가 잘못되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비요른의 눈썹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표정관리를 해야하는 걸 알지만 역시 이렇게 머리가 텅 빈 제국의 황후를 대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 사랑만 받고 자라 그림같은 인생을 사느라 머릿속이 꽃밭인 게 티가 나서불쾌했다.“그러면 루시아 대공비께서는 무사하지 못하셔도 상관없다 이런 말씀이십니까?”비요른의 언성이 높아지던 그때 카이사르가 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마리아 지젤 황후, 이후 내가 따로 이를 때까지 처소에서 근신하시오.”황제는 황후와 동등한 존재라고 늘 카이사르는 마리아에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만은 달랐다. 그는 뼛속부터 지배자였다. 마리아 지젤이 제 행보에 방해가 된다면 얼마든지 뒤로 물릴 수도 있었다. 제게 사랑이란 이득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으므로.“카이!”그녀가 애칭을 부르며 기사들의 손에 끌려나갔다. 그 모습이 자뭇 속을 시원하게 해줬지
“3년이었어. 고작 광산에 팔려와 허울뿐인 공작부인으로 지내며 수치를 견디고, 네 애를 품어야 한다는 주변의 모욕 속에 결국 아이마저 떠나보낸 시간들.”에이든은 이제 데미안의 멱살을 잡았다. 그는 결혼식 때 루시아를 보았을 때,그러니까 더는 그녀에게 닿을 수 없으리라고 느꼈을 때 크게 절망하면서도 감히 빌었다. 오직 루시아만은 행복하기를. 그녀만은 행복해서 자신은 에드윈이 바람처럼 들려준 루시아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평생을 살아가리라고.“그 여자는 처음부터 벨루아와 아르테미스간에 거래의 대가에 불과했다.”점점 고통으로 표정이 일그러지는 건 정작 데미안이 아니라 에이든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네가 그렇게 희생하고, 또 희생했어. 루시아.그의 침실에서 겨우 잠들면서도 마지막까지 제국에 남아있을 어머니와 오라비같지 않은 제 오라비를 생각하는 선량한 여인.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어떻게 그 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지?”그러자 마치 처음 듣는 단어의 조합인양 데미안 벨루아가 고개를 삐걱거렸다.“뭐라고?”“고작해야 이미 결혼까지 한 친구의 여자에게 빠져 정작 네 옆에 있는 보석보다 빛나는 사람은 사랑하고 아껴줄 줄도 몰랐지.”데미안이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처럼 에이든을 바라봤다.“이제와 그러는 게 꼭 지금에서야 그 애를 뒤늦게 사랑한다는 것처럼 구는 꼴이 우습단 건 아나?”카이사르도 그렇게 말했었다. 이제와 사랑이라도 하냐고. 데미안은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제 속에서 울컥 비어져 나오는 애증이 제 주인을 찾듯 점점 더 존재감을 나타냈다. 머리가 이리저리 아파왔다. 끔찍한 두통이 머리를 가르는 듯했다.“마리아 지젤이 아닌 여자를 사랑할 수가 있나? 너야말로?”방금 전까지 자신의 말에 흔들리더니 금세 석고상이라도 된 듯 무표정해지고 담담해졌다. 마치 기분이 제거되고 이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던 정신 마법에라도 걸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하, 그래. 그러면 앞으로의 처분은 내가 원하는대로 해도 되겠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