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루시아가 통보하듯이 그에게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뒤로 감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에게 훤히 속을 들킬까봐 두려웠다.
언제나 꿰뚫어보는 듯한 보라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저를 끝까지 따라붙는 것같았다. 방으로 뛰어오다시피 한 루시아가 문을 닫자마자 그 자리에 주르륵 주저앉았다.
놀란 셀레나가 루시아에게 달려왔다.
"루시!"
품안에 손수건으로 루시아의 땀을 닦아 주었다.
"괜찮아. 셀리, 나 데미안한테 말했어."
식은땀을 흘리던 루시아가 그렇게 말하곤 다시 쓰러졌다. 몸살이었다.
더러 악몽을 꿨다. 이미 지나간 시절, 오래된 비명임에도 차마 내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스물이 넘은 삶을 가지고 누구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평화로웠다. 모든 게 끝났음에도 그녀 혼자 폐허에 남아있는 일이 잦았다. 처녀 시절에 구애하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는 그곳에서 저를 꺼내주겠다고 자신했지만 아무도 그러지 못했다. 루시는 작정이라도 한 듯 깨어나지 않았다. 열은 진즉에 내렸지만 삶에 대한 의지가 희박해 그런다고, 에이든이 황궁에서 데려온 황궁의가 그렇게 말했다.
그는 기다렸다. 오래도록 곁에 머물며 그녀를 기다렸다. 어느 세계에서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으면서 늦게 온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아는 루시라면 말도 안 되는 억지라고 하겠지만 그렇게 자신이라고 탓하며 살아줬으면 했다.
루시아는 꿈을 꿨다. 운명, 저에게 그런 게 있다면, 그래서 백마 탄 왕자님이 동화처럼 나타나려면 진즉에 일찌감치 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르테미스 백작에게 학대를 받을 때, 데미안에게 시집가야 했을 때, 그녀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외면 받을 때, 세상에서 더없이 혼자라고 느꼈을 때, 아이를 잃었을 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기에 루시는 더 이상 운명을 믿지 않았고, 늦게 찾아와 미안하다는 남자 디디조차 운명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무리 남들이 둘을 운명이라고 묶는데도.
디디, 에이든. 그가 곁에 있는 걸 내내 느꼈다. 셀레나의 목소리도 들렸다. 두 사람이 있구나. 오직 두 사람이. ‘모두’가 나를 외면하지는 않았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 소리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감은 눈 위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작고 다정한 속삭임도. 마치 그의 머리색같은.
“울지마, 루시아.”
차가운 제 손을 잡아주는, 제 소년의 애원에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루시는 처음으로 아침이 오는 게, 잠에서 깨어나 수면 위로 제 의식을 올리는 게 두렵지 않아졌다.
새벽녘이었다. 한 손은 셀리에게, 한 손은 에이든에게 잡힌 채로 였다. 그 광경을 보니 어쩐지 가슴이 뭉근하게 녹아내리는 것같았다.
“루시...?”
에이든이 먼저 깨어났다. 바다처럼, 현실에는 없는 파란 장미처럼 푸르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저를 올곧게 바라본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는 일이 없어 몰랐는데 어릴 적 있던 눈물점이 없어졌다. 디디의 점을 꽤 예쁘다고 여겼는데, 없어져서 아쉬웠다.
“이제는 눈물점이 없네, 디디.”
“....응, 어른이 되니까 흐려졌어.”
그가 나직하게 말하곤 웃었다. 루시가 그의 결 좋은 머릿결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아주 어릴적부터 그래왔듯이. 에이든도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마치 고양이를 길들이는 기분이라 루시가 빙긋 웃었다.
예전에는 좀 더 날선 고양이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큰 대형견 같다. 어른이 되면서 바뀌는 모양이었다.
“셀리는 언제 깨려나. 나 배고픈데.”
좀처럼 무언가를 먹고 싶다고 하지 않는 루시가 먼저 음식을 찾자 에이든의 표정이 밝아졌다. 며칠간 잠을 설쳤는지 그의 눈가가 퀭했다.
“차라도 줄까? 피곤해 보인다. 디디.”
에이든이 루시의 손을 들어 손바닥에 쪽 입을 맞추고 고개를 저었다. 그게 마치 지금 이 순간 너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듯 한 눈빛이라 루시아의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에이든의 귓가도 붉었다.
데미안과 결혼했을 때 읽었던 맹세문과 달랐다. 그때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남편에게 순종하고, 후사를 위해 노력하며, 투기하지 않고 가장의 결정을 따르며 가정을 일구어 내는 안사람의 역할을 해내고 남편의 기쁨을 위해 종사할 것을 맹세합니다. 문장 하나 하나가 그녀의 의지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저 레이루나가 환하게 웃고 있어서 맹세문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저가 또 하자품이라서, 규격외의 인간이라서 그런다고만 생각했다."루시?"어느새 그게 눈물로 고여있을 줄은 몰랐다. 루시아는 자신이 남편에게 그토록 바랐던 게 존중이었다는 걸 결혼식장에 들어와서야 처음으로 들어서 알았다. 그리고 그게 부부 사이에 가능하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았다. 처음이 참으로 많은 날이었다.***에이든은 루시아의 결혼 멩세문을 직접 고쳤다. 순종이니 남편을 잘 따르니 하는 수동적인 이야기는 전부 도려내고, 그가 아는 루시아가 원할 것들을 적어나갔다. 그가 아는 그녀라면 '사랑'을 바랄 것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사랑없는 결혼을 했으니까 말이다. 정작 그가 당연하다고 생각해 적은 존중, 그 기본 조건으로 루시의 마음이 충분했다는 것을 안 건 아주 나중의 일이었다.루시아는 조금 오래 울고, 맹세문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마주 잡은 에이든의 손이 따뜻했고, 전해오는 여전히 뜨거운 그의 체온으로 감정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사랑하고 사랑할 것입니다."어느덧 식순이 거의 다 끝나가고에이든이 루시아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루시아는 장난꾸러기 디디에게 키스를 하는 게 별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을 다시 생각해야 했다.다정한 파란 눈이 의아한 빛을 띄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 안에 뜨거운 열정에 함부로 제 속을 들켰다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큰 일이 날 것같았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벽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고개가 서서히 다가왔다.내내 실처럼 쓰다듬었던 연갈색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려왔다. 시야가 가려졌다고 생각했던 순간, 그가 제 뒤통수를
외국의 유행을 받아들여 가끔 나스의 신부들이 걷는 하얀 카펫 위를 버진로드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루시아에게는 오히려 괜히 안좋은 기억만을 떠올리게 할까봐 에이든은 카펫 대신 꽃을 바닥에 깔았다. 붉은 장미였다. 수북하게 바닥에 깔린 장미가 눈 앞에 펼쳐져 있었고 그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부모의 역할을 해줄 이가 없어 내심 고민했더니, 나스에서는 신부가 혼자 입장하기도 한다며 주례사를 맡은 나다니엘 총리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총리는 솔직히 소문이 실제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소문은 실제를 과소평가 한 것이다. 그보다 훨씬 과장해야 겨우 제국에서 온 아가씨가 겨울의 왕의 차갑고 오만하던 게다가 냉랭하기까지 했던 마음을 녹였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이었다.에이든은 일단 사랑에 빠진 눈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마르기만한 여인이 만약에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나스 제일의 명의를 데려다가 치료를 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문득, 그녀가 제국에서는 어떤 취급을 받았었는지가 나스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에이든이 어떻게든 새어나가는 걸 막아보려고 했으나 사실 나다니엘도 대공이 그렇게 신경쓰는 여자가 궁금해 구태여 막지 않았다.그러니 이렇게 선뜻 소문의 예비 부부를 위해 주례를 서는 것은 저 마음 편하자고 그런 것도 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걸 겨울의 왕의 앞에서 입 밖에 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가 사실 애초에 제국의 황제와 무슨 거래를 했는지도 대충은 짐작하는 바였다. 황권 복권 세력을 지원하는 걸 눈감아주겠다고 했겠지. 나다니엘은 처음에 이 안에 대해 가장 반대하는 사람이고 유일하게 나스의 공식적인 최초의 총리라는 자리엔 앉아있었기에 그나마 에이든의 계획을 들어볼 수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애초에 막을 힘도 없었지만, 적어도 공화정은 지켜야하지 않겠느냐고 그게 그 여자도 바라는 바가 아니겠느냐고 애원하다시피 해서 의회에 제국황실의 행적과 앞으로의 일들을 하우젠 령이 공유하는 걸로 했다. 그 대단한 일을 하게 만든 여자가 그의 눈 앞에 서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루시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에이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 곳은 나스, 제국이 아닌 에이든의 모국이니 그는 안전할지라도 겨우 추방기간까지 고작 하루 이틀 남은 외국인인 저의 신세는 달랐다. 이 결혼이 엎어지면, 자신은 아르테미스로 혹은 더 나쁘면 벨루아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었다. 루시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난 시간동안 백작가보다 조금 더 넓고 반짝이는 벨루아의 새장에서 만족했던 건, 그를 사랑하려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애먼 사람이라도 사랑하지 않고서야는 견딜 수 없었던 세월이었다. 그러다 목숨을 건 시도로 마침내 그 곁을 떠났는데 결국 그저 화가 났다는 데미안의 변덕으로 이렇게 모든 걸 잃을 순 없었다.정말 급할 땐 급소라도 때려리고 도망가야 한다. 머릿속에 남은 결론이었다. 공작을 해하려 했다는 혐의가 붙겠지만, 적어도 평생 수녀원이나 벨루아에 갇혀 사는 것보다야 잠깐 감옥에 가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불안이 천장을 뚫을 만큼 올라갔을 때 문이 열렸다. 순간순간이 아주 느리게 끊기는 것 같았다.에이든은 그 당시의 루시아의 버석거리는 메마른 시선을 기억했다. 셀레나가 숨도 쉬지 못하고 저에게 달려와 데미안 벨루가 왔다고 일러주지 않았다면 조금 더 늦었다면, 큰일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애초에 그를 초대한 일도 없었고, 그토록 치밀하게 입장객을 골라냈는데도 어디서 구멍이 난걸까. 에이든의 머릿속에 목을 칠 사람들의 명단이 씌어졌다가 지워졌다. 그녀의 일에 관해서라면 그는 자꾸만 더없이 잔인해졌다. 일단은 루시아가 먼저였다. 그녀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그는 이제 나스의 미신 따위에 지지 않았다. 저의 태양이 계신 곳으로 가고 있었다.기사들의 저항은 하우젠의 기사들이 막았다. 애초에 나스의 영토였으니 당연히 그들이 우세했다. 서둘러 신부 대기실 안에 들어가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루시아의 잿빛 눈동자가 보였다. 그 다음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의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벽에 데미안 벨루아를 밀친 것까지는
제국에서도 벨루아 전 공작부인의 거취는 비밀로 부쳐졌지만 이미 나스의 언론들이 대공과의 결혼을 일제히 보도하기 시작했을 때는 빠르게 소식이 데미안의 귀에 들어온 이후였을 것이다. 그래서 루시아에게 에이든이 그가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했을 때 고개를 저었다.다만 이렇게 자기 아내였던 사람의 결혼식에, 그것도 공작씩이나 되는 자가 직접 타국에까지 방문할 줄은 몰랐다. 아내라고는 해도 고작해야 자기 성욕을 풀어주는 인형 역할이나 하던, 사람도 아닌 어떠한 존재를 위해. 루시아는 그래서 새삼 그 저의를 의심했다.셀레나는 무례라는 것도 잊고 그를 노려보았다. 루시아는 벨루아의 기사들이 검집 위로 손을 얹는 걸 보았다.그녀가 친구를 제지했다.“잠깐 나가 있어줘, 셀리.”루시아의 말에 눈이 커진 셀레나가 만류한다.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였다.“하지만.”“괜찮아.”그건 확신이 담긴 목소리였다. 셀레나는 그런 종류의 목소리와 눈빛을 루시아가 아주 어린 시절밖에 보지 못했다. 그것은 친구가 성장함에 따라 빛을 잃었던 귀한 것들 중에 하나였으므로. 셀레나는 그 전조를 믿기로 했다. 더 이상 벨루아 에서의 무기력한 도자기 인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어쩐지 데미안 벨루아가 이곳에 온 보람이 무색하리란 생각이 셀레나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셀레나가 나가고서도 데미안은 벨루아의 기사들을 물리지 않았다. 루시아가 직접 언급하기 전까지.“나는 내 시녀도 물러가라 했는데 기사들은 왜 남아있는 거죠. 나를 납치라도 할 셈인가보죠.”데미안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 구부러졌다. 그가 한 손을 들어 기사들에게 나가라는 명을 내렸다.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그의 명을 따랐다. 벨루아에 오직 그만을 따르며 공작만을 위해 존재했던 이 인력들은 벨루아 공작부인이더라도 루시아의 명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녀를 위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런 이들은 대개 지금 이 신부대기실의 바깥에 있었다. 이를테면 셀레나라든가, 에이든이라든가.그녀의 소년을 생
결혼식 날이 밝아왔다. 세간에서는 아주 졸속으로 치를 거라며 비웃는 언론도 있었지만 대개가 그토록 여성을 멀리하던 에이든의 일사천리로 진행된 소문의 신부와 납치결혼에 대해 궁금해 하는 기사를 냈다.이른 새벽부처 화장과 목욕, 가꾸기로 여념이 없던 루시아는 그래도 오늘은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에이든이 전에 했던 말 덕분이었다. 전날 찾아온 그는 루시아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게 있다고 찾아왔다. 다음날 신부로서 꾸며야할 때 하고싶지 않은 게 있냐고. 루시아는 이제 그게 나스의 관습이 아니라 에이든 개인의 다정함, 호의, 선량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눈치챌 정도는 되었다.“......코르셋은 차지 않았으면 해.”평생 이런 말을 해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그 말에 에이든도 고개를 끄덕였다.“기절 한적도 있었지.”벨루아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 일 테다. 그의 낯빛이 조금 어두웠다.“괜찮아. 자주 입었던 건 아니야.”거짓말.에이든은 때때로 루시아가 저에게 마음을 많이 열어놔도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자신의 상처를 담담하게 말할 때면 그가 어찌할 수도 없이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걸 일일이 말로 표현하자면 아마 루시아가 저에게 질릴지도 몰라 가만히 입을 다물고 안쓰러운 눈빛만 보낼 뿐이었지만.“그리고?”루시아는 첫 번째 결혼식을 생각했다. 레이루나의 기대 가득한 눈빛과 뭇사람들이 그녀를 위 아래로 재단하며 남몰래 비교하던 시선. 그 모든 것을 다시 겪으려니 끔찍했다.“초대된 손님들의 명단을 볼 수 있을까?”일전에도 윌을 통해 확인은 했지만 한 번 더 봐두어도 나쁠 건 없어보였다. 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이쪽에서도 대응할 것 아닌가.에이든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저 빙긋 웃고 별말 없이 루시아의 곁을 떴다. 대개 그는 결혼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루시아에게 담백하게 굴었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아주 작은 의심의 싹을 지울 수 있었다. 결론은 전혀 그의 마음을 예측해내지 못했지만. 어쨌든 당시의
셀레나가 자신에게 그런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줄 몰랐던 루시아는 큰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나서야할 때라는 걸 알았다. 그녀가 문을 열고 그의 서재에 들어서자,에이든이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몇 주간 어른이 된 그의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하면서 그의 사소한 습관 몇 가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어도 상대가 무안하지 않게 일부러 아는 체 하지 않는 편이라는 것. 물론 이런 사사로운 것들까지 그녀가 알던 유일한 남자와 또 아버지와, 제레미와도 아주 비교가 된다는 걸 모를 것이었다. 그는 여태껏 그녀의 주위에 없던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남몰래 마치 그를 때때로 구전되는 신화 속 전설의 동물을 목격한 것처럼 바라보기도 했다.물론 에이든은 그 뜻모를 시선을 두고 그저 귀엽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아마 이미 자신의 인기척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가 그녀를 향해 눈을 접어 활짝 웃는다.“루시.”“디디. 나도 야간 대학에 갈 수 있을까?”그녀가 건넨 말에 사뭇 놀란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셀레나가 급하게 덧붙였다. 그곳은 주로 평민 출신의 여성들이 가는 곳이라고. 사립학교나 아카데미를 가는 게 나을 거라고.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나도 너와 함께 할 거야. 셀레나.”에이든은 루시가 배움에 대한 열정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아주 오랜만에 조우했을 때조차 도서관에서 잠들어 있었고 그때 읽었던 책들도 대부분 사회과학 분류의 도서들이거나 아주 어려운 철학서가 대부분이었다. 귀족 여성들의 애독서라는 낭만 소설이나 그런 쪽은 없었다.어쩌면 루시아다운 대답이라서 에이든은 그것마저도 납득하고 말았다. 사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한데도 그는 고개를 끄덕여 어떻게든 이해할 이유를 하나라도 더 만들었을 것이다.“그럼 수도에 좀 더 남을까?”에이든은 마치 오늘 아침은 좀 걸을까 같은 여상한 어투로 물었다. 그건 앞으로의 일정에 대대적인 변화를 줄지도 모를 중대한 결정이었음에도. 셀레나는 내심 경악했다. ‘겨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