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여보!” 조금 떨어진 곳에서 토비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리우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스칼렛의 손목을 놓았다.
“가도 돼.” 그가 말했다.
스칼렛은 망설이지 않았다. 몸을 돌려 걸어갔지만, 정원의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너머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걸음만 살짝 늦췄다.
경호원 한 명이 다리우스에게 다가와 손수건을 건넸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다리우스는 손수건을 받아 천천히 손가락을 닦았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그녀가 익숙해 보인다고 생각했어. 그날 밤의 여자와 비슷했거든. 내가 착각한 모양이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시간만 조금 주십시오. 회장님 방에 몰래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제가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알겠어.” 다리우스의 시선이 어둠 속으로 흘러갔다. 그의 얼굴 위로 아득한 표정이 내려앉았다. 그는 그날 밤의 기억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길 아래에서 떨면서도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고, 눈물은 말없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맑고 또렷했으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를 끌어당겼다.
앞쪽에서 스칼렛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토비아스를 발견했다. 그녀는 긴장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그의 시야에 들어섰다.
“여기야.”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토비아스는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와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어디 있었어?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와 거리를 두었다.
“나 괜찮아.”
토비아스는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그녀의 뒤쪽을 힐끗 바라봤지만, 스칼렛은 이미 출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화는 자연스럽게 끊겼다.
**
그날 밤, 스칼렛에게는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그녀는 침대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다리우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호텔 방에서 만났던 그 낯선 남자가 토비아스의 삼촌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계속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스칼렛은 다리우스 알다마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경쟁자들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짓밟아 버리는 남자. 누구도 감히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하는 그런 남자였다.
스칼렛은 한 손을 배 위에 올려놓았다. 이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다. 알다마 가문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후폭풍은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설 게 분명했다.
그녀는 모든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전에 내일 아침 가장 먼저 병원에 가서 조용히 해결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마음을 굳힌 스칼렛은 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계단 꼭대기 가까이에 다다랐을 때, 1층에서 토비아스의 거칠고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프로젝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진행해야 해! 어떻게 처리할지는 네가 알아서 해. 부족한 자금을 메울 방법을 찾아! 여기에 우리가 투자한 돈이 얼마인데. 실패는 절대 안 돼!”
그의 목소리에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묻어났다. 통화가 끝나자 그는 휴대전화를 옆 탁자 위에 거칠게 내리쳤다. 스칼렛은 그의 회사가 대체 어떤 곤경에 처해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며 현관에 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토비아스는 차에 시동을 걸더니 밤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스칼렛은 조용한 주방으로 내려가 물을 한 잔 따랐다. 그때 조리대 위에 놓인 그녀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사설탐정에게서 온 문자였다.
보낸 사람: 탐정 칼
‘알다마 부인, 알다마 씨가 방금 비보리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마 오늘 밤은 그곳에서 머물 것 같습니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하고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아픔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때 가슴을 짓누르던 상처가 있던 자리에는 무감각하고 텅 빈 고요만이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스칼렛은 혼자 병원으로 차를 몰고 갔다. 그녀는 진료가 금방 끝나고 간단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사의 말은 그녀의 계획을 순식간에 산산이 무너뜨렸다.
“정말 낙태를 하시겠습니까?” 의사는 그녀의 진료 기록을 살펴보며 물었다. “자궁 내막이 얇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임신을 중절하면 상당한 위험이 따릅니다. 다시 임신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 경고가 허공에 남아 있는 동안, 스칼렛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시술을 받을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임신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 역시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
의사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먼저 남편분과 상의해 보시는 걸 권합니다. 가볍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스칼렛이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머릿속이 어지러운 채로 진료실을 나왔다. 임신을 중절할 수 없다면 결국 배가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토비아스에게 이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됐다.
앞으로 나아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배가 눈에 띄기 전에 그와 이혼해야 했다.
생각에 잠긴 스칼렛은 복도에 서 있던 사람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그대로 그의 가슴에 부딪혔다.
“알다마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근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칼렛의 심장이 갈비뼈를 세게 두드렸다.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의 눈앞에는 다리우스가 동상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의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어 보듯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퍼즐의 답을 찾아내려는 사람처럼 계산적이고 강렬한 시선이었다.
당황한 스칼렛은 의료 기록이 든 서류철을 재빨리 등 뒤로 숨겼다.
“다, 다리우스 삼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그녀에게 시선을 오래 머물렀다. 전날 밤 그녀가 보였던 이상한 행동이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 생생했고, 지금의 그녀 역시 그때만큼이나 불안해 보였다.
한 경호원이 바닥을 가리켰다.
“회장님, 약이 떨어졌습니다.”
그제야 스칼렛은 자신의 발치에 놓여 있는 토트백을 발견했다. 안에서 몇 개의 플라스틱 약병이 굴러나와 있었고, 라벨에는 성적 체력을 위한 보충제라고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다리우스는 보기만 해도 위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이런 성능 강화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 호텔에서 보여준 그의 체력은 압도적이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스칼렛은 다리우스를 향해 재빨리 시선을 올렸다. 그녀의 눈에는 희미한 의심이 스쳤다.
다리우스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날카롭고 차갑게 변했다. 그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고요한 복도를 가르며 울렸다.
“뭘 그렇게 쳐다봐?”
그녀는 움찔하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죄송해요. 제가 주워드릴게요.”
그녀는 흩어진 약병들을 주워 담기 위해 몸을 숙였다. 하지만 서두르다 보니 옷의 목선이 앞으로 살짝 내려가며 의도치 않게 훨씬 많은 부분이 드러났다.
스칼렛은 다리우스가 그것을 봤다는 걸 알았다. 그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달라진 것을 놓칠 수 없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아무렇지 않은 척 자세를 가다듬으려 하자, 다리우스가 앞으로 다가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두꺼운 재킷을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옷감에서는 은은하고 깨끗한 샌들우드 향이 풍겨 나왔다.
“토비아스가 나한테 이러려고 이런 옷을 입고 오라고 했나? 아니면 나한테 달려들라고 한 건가?”
그의 말투는 날카롭고 비난하는 기색이 역력해 변명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스칼렛이 단 한마디도 내뱉기 전에 그는 몸을 돌려 걸어가 버렸다. 그렇게 그녀만 복도에 남겨졌다. 스칼렛은 그의 모욕적인 말을 이해하려고 머릿속을 빠르게 굴렸지만, 그 말이 주는 모욕감은 그대로 가슴에 깊이 박혔다. 갑자기 두 뺨이 화끈 달아올랐고, 이내 짜증으로 바뀌었다.
대체 저 남자는 뭐가 문제야?
소문이 괜히 난 게 아니었다. 차갑고, 오만하고,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스칼렛은 서둘러 복도를 따라 그를 쫓아갔다. 그러다 앞쪽에서 다리우스가 경호원과 나누는 대화가 우연히 들려왔다.
“앞으로는 아버지 담당 의사에게 약을 내 거처로 직접 가져오라고 해.” 다리우스가 명령했다. “난 이제 이 병원에 다시 오지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 여자에 대해서는 알아낸 게 있나? 이름은? 나이는? 주소는?”
스칼렛은 눈을 깜빡였다. 숨이 턱 막혔다.
다리우스는 이 일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날 밤의 여자를 찾아낼 때까지 계속 파고들 작정이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그 여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테라스에서 다리우스는 난간에 기대어 조용히 서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스칼렛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만 남아 방해받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곳으로 일부러 그녀를 데려온 듯했다.“오늘따라 왜 갑자기 내 주변을 맴도는 거지, 스칼렛? 무슨 일이야?”그가 물었다.스칼렛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그냥 당신이 여기 서 있는 걸 봐서요. 그래서 들러서 인사나 하려고 했어요.”하지만 스칼렛은 다리우스가 이런 시시한 핑계를 믿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이번이 네 마지막 기회야. 놓치지 마.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다리우스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턱이 살짝 굳어 있었다.스칼렛의 미소가 조금 흐려졌다. 그녀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재빨리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내 다리우스에게 내밀었다.“이건 스카-바이어스 홀딩스의 프로젝트 제안서예요. 우리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셨으면 해요.”다리우스는 피식 비웃었다.결국 이것이 그녀가 진짜로 원했던 것이었다.스칼렛은 서류철을 조금 더 앞으로 내밀었지만, 다리우스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뚝한 콧날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그를 차갑고 거리를 두는 사람처럼, 거의 냉혹하게까지 보이게 했다. 그의 눈에는 무심함과 권위가 서늘하게 뒤섞여 있었다.“스카-바이어스 홀딩스라… 작은 회사잖아.”그가 실소를 흘렸다.“내가 왜 토비아스와 손을 잡아야 하지? 난 자선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스칼렛.”“그럼 호의라고 생각해주세요. 당신이 조금만 도와주시면 방금 당신이 말한 그 작은 회사를 살릴 수 있어요. 게다가 스카-바이어스 홀딩스는 당신에게도 든든한 동맹이 될 수 있고요.”스칼렛이 간절하게 호소했다.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가 더 커지기 전에 토비아스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절박했다.다리우스가 다시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목소리에 조롱이 묻어났다. 그가 그녀를 향해 돌아서자, 시선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 내
“그녀를 찾았어?” 던이 초조할 정도로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깜짝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거의 어린아이 같은 말투였다. “누구야?”그렉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소파 가장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스칼렛에게 향했다.스칼렛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이 방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싶기라도 한 듯, 숨조차 거의 쉬지 않았다.그렉은 그녀에게 다가가 당분간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다고 조용히 귀띔하려 했다. 하지만 다리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이의를 제기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그녀들을 데려와, 그렉.”스칼렛은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자리를 떠날 구실을 생각했다. 자신이 이런 상황을 목격하고 있어서는 안 됐다.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한 여자를 찾는 일에 신경 쓸 게 아니라, 사업 제안에 집중했어야 했다.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말을 꺼낼지 생각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그렉이 여러 명의 여자를 데리고 개인실 안으로 들어왔다.방 안의 공기가 더욱 무거워진 듯했다. 향수 냄새가 여자들의 긴장감과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노골적인 노력과 뒤섞여 퍼졌다. 여자들은 한 명씩 안으로 들어왔다. 억지로 미소를 짓는 여자도 있었고, 혹시 자신이 다리우스가 찾고 있는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은 채 주위를 살피는 여자도 있었다.스칼렛은 조용히 숨을 내쉬며 그제야 조금 긴장을 풀었다. 분명 이 일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기 전까지는.데바인 사로자.그녀의 이복자매였다.스칼렛의 심장이 갑자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너무 세게 뛰어서 귓가에서도 그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마치 바닥이 갑자기 갈라져 자신을 통째로 집어삼킨 듯한 느낌이었다.데바인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왜 이 여자들과 함께 있는 거야?“이게 전부야?”던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실망이 역력했다. 기대가 얼마나 크게 떨어졌는지 숨길 수 없었다. 그는 심지어 낮게 중얼거렸다.“아무도 토비아스 아내의 미모에는 근처에도
“회장님!”버니스 비보리는 두꺼운 서류 뭉치를 손에 꼭 움켜쥔 채 급하게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시선이 스칼렛에게 닿자, 눈동자에 득의양양한 빛이 스쳤다.토비아스는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억지로 눌러야 했다.“무슨 일이야?” 그가 조용히 물었다.“메리디안 인베스트먼트 파트너스에서 거절했습니다. 초청장과 함께 모든 프로젝트 자료를 돌려보냈습니다.”“쓸모없는 것!”토비아스가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스카-바이어스 홀딩스는 이미 파산 직전이었다. 한편 C 얼라이언스는 담보로 잡힌 상태였다. 그들에게 남은 자원은 거의 없었고, 선택할 수 있는 방법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메리디안 인베스트먼트 파트너스만 나서 준다면 모든 상황이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곳의 수장이 바로 토비아스의 친삼촌이라는 사실이었다. 토비아스는 삼촌의 인맥만으로도 자신들이 필요한 지원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버니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회장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빨리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면 스카-바이어스 홀딩스는 끝입니다.”토비아스는 스칼렛에게 시선을 돌렸다. 회사의 가장 큰 거래들을 늘 맡아 처리해 온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침착하고, 날카롭고, 결코 물러서지 않는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토비아스는 즉시 버니스의 손에서 서류를 낚아채 스칼렛 쪽으로 내던졌다.“이혼하고 싶잖아? 네가 메리디안 인베스트먼트 파트너스를 설득해서 승낙을 받아낸다면, 네가 원하는 걸 생각해 볼게.”스칼렛은 서류를 받아 들고 토비아스를 똑바로 바라봤다.“당신이 한 말을 정말 지킬 수 있는지 확실히 해. 설마 나중에 말을 바꾸지는 않겠지.”그녀는 남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서류들을 챙겨 토비아스의 사무실을 그대로 빠져나갔다.문이 닫히자마자 버니스가 재빨리 토비아스에게 다가가 그의 팔에 매달렸다.“어떻게 저 여자를 믿어요? 당신조차 다리우스 삼촌을 설득하지 못했는데, 정말 저 여자가 해낼 수 있
병원을 나온 스칼렛은 곧장 스카-바이어스 홀딩스로 차를 몰고 갔다.그녀는 자신과 토비아스가 함께 이 이름을 정했던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저 꿈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의 뛰어난 사업 감각과 날카로운 전략 덕분에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고, 토비아스는 단숨에 상류층의 반열에 올라섰다.총지배인실에 가까워지자 복도 너머로 희미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볍고 장난스러운 웃음소리에 이어, 여자의 부드럽고 능글맞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스칼렛은 노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대로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그곳에는 버니스가 있었다. 그녀는 토비아스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더 이상 상상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노골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다.스칼렛을 본 순간 버니스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블라우스는 중간까지 풀려 있었고, 깊게 파인 네크라인 사이로 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두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달콤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었다.“알다마 부인, 오셨네요.”버니스는 지나치게 상냥한 척하는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토비아스는 아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여, 여보?”스칼렛은 문간에 그대로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눈앞의 광경을 하나하나 담아냈다. 강한 역겨움이 치밀어 오르며 속이 뒤틀렸다.“내가 뭔가 방해했어?”그녀가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두 사람 끝날 때까지 나중에 다시 올까?”“뭐? 아니야. 내 펜이 떨어졌을 뿐이야. 버니스가 그냥 주워주던 거야.”토비아스는 다급하게 앞으로 나서며 버니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나가. 아까 내가 시킨 일이나 마저 해.”버니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칼렛의 곁을 스쳐 지나갔고, 익숙한 향수 냄새를 남겼다. 지난 몇 주 동안 스칼렛이 토비아스에게서 맡아 왔던 바로 그 꽃향기였다.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너무나 분명했다.토비아스는 아무렇지도
“여보!” 조금 떨어진 곳에서 토비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다리우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스칼렛의 손목을 놓았다.“가도 돼.” 그가 말했다.스칼렛은 망설이지 않았다. 몸을 돌려 걸어갔지만, 정원의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너머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걸음만 살짝 늦췄다.경호원 한 명이 다리우스에게 다가와 손수건을 건넸다.“회장님, 괜찮으십니까?”다리우스는 손수건을 받아 천천히 손가락을 닦았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그녀가 익숙해 보인다고 생각했어. 그날 밤의 여자와 비슷했거든. 내가 착각한 모양이군.”“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시간만 조금 주십시오. 회장님 방에 몰래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제가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알겠어.” 다리우스의 시선이 어둠 속으로 흘러갔다. 그의 얼굴 위로 아득한 표정이 내려앉았다. 그는 그날 밤의 기억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길 아래에서 떨면서도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고, 눈물은 말없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맑고 또렷했으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를 끌어당겼다.앞쪽에서 스칼렛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토비아스를 발견했다. 그녀는 긴장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그의 시야에 들어섰다.“여기야.”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토비아스는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와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어디 있었어?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와 거리를 두었다.“나 괜찮아.”토비아스는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그녀의 뒤쪽을 힐끗 바라봤지만, 스칼렛은 이미 출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화는 자연스럽게 끊겼다.**그날 밤, 스칼렛에게는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그녀는 침대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다리우스의 얼굴을 떠올렸다.호텔 방에서 만났던 그 낯선 남자가 토비아스의 삼촌일 거라고는
스칼렛은 마른침을 삼켰다.“응… 괜찮아. 그냥 오늘 날씨가 너무 더워서 그래. 나… 좀 불편해서.”안뜰에 있는 그 누구도 다리우스를 외면할 수 없었다.키가 크고 눈에 띄게 잘생긴 데다, 가만히 있어도 강렬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애써 시선을 끌려 하지 않아도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매끈하게 떨어지는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절제된 고급스러움 그 자체였다.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고, 날카로우며, 차가웠다.스칼렛이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순간, 그녀는 얼어붙었다.압도적이었다.지나치리만큼 침착하고 날카로운 얼굴이었다.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스칼렛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조수석 안쪽으로 몸을 움츠렸다.다행히 다리우스의 시선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그는 경비원에게 차 키를 던져주고는 그대로 대문을 지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정말 다리우스가 그날 밤의 남자였을까?혹시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닐까?다른 남자들도 팔에 장미 문신을 하고 있을 수 있잖아.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확실히 알아내야 했다.토비아스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고 다른 손님들과 함께 줄을 섰다.주차장은 이미 차들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는 뒤편 쓰레기통 근처에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안으로 들어갈까?”그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스칼렛은 거리를 유지한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나 혼자 가도 돼.”토비아스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그냥 넘어갔다.여기서 괜히 소란을 피워 봐야 골치 아플 뿐이었다.“마음대로 해.”그가 중얼거렸다.**연회는 다리우스의 모습이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채 지루하게 이어졌다.스칼렛은 가슴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소문대로라면 그는 가족 행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니, 아마 자신의 개인 공간에 있을 터였다.만약 그가 식당에 함께 있었다면, 스칼렛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는 자신이 왜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