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의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예원은 짧게 심호흡을 했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차림새였지만 묘하게 옷깃을 한 번 더 매만지게 되었다.그동안 권시혁을 만날 때면 늘 분명한 명분이 있었다.
루센 프로젝트의 실무자로서 미팅을 하거나, 7년 전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확인해야 할 사안들이 있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업무 이야기를 나눌 목적도, 서로의 감정이 차재헌에 대한 복수심인지 확인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데이트.
그저 그 평범하고 흔한 두 글자의 단어가 지금 예원에게는 지독히도 낯설고 이질적인 무게로 다가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남자를 왜 만나야 하는지 자신의 내면과 싸우며 끝없이 설명해야 했던 예원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어떤 외부의 이유 없이, 오직 권시혁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자신의 온전한 의지로 이 자리에 섰다
누구의 강요나 허락도 아닌 오직 스스로의 선택.예원의 부드러운 입술이 시혁의 단정한 입술 위에 포개졌다.그 노골적이고 거침없는 접촉에 시혁의 움직임이 찰나처럼 멈췄다.예원이 가볍게 쥔 그의 수트 앞섶 아래로 팽팽하게 굳어지는 시혁의 단단한 가슴 근육이 손끝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그러나 그 짧은 멈춤은 오래가지 않았다.곧 시혁의 고른 호흡이 눈에 띄게 흐트러지기 시작했다.그가 예원의 허리 옆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거칠거나 강압적으로 잡아당기는 움직임은 결코 아니었다.조심스럽지만, 그렇다고 망설임은 없는 묵직한 손길.그 단단한 힘에 이끌려 두 사람의 몸이 조금 더 빈틈없이 밀착되었다.맞닿아 있던 입술의 틈새로 더운 숨결이 고스란히 섞여 들자, 시혁의 입술이 예원을 머금듯 느릿하고 깊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예원의 속도와 각도에 조심스럽게 맞춰주는 듯한 배려였다.하지만 예원이 뒤로 물러서거나 피하려 하지 않자,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키스의 압력이 조금씩 짙어지고 호흡이 거칠어졌다.시혁의 손이 예원의 허리를 조금 더 단단하게 감싸 안았고, 예원의 입술을 파고드는 그의 움직임에 점차 억눌렸던 날것의 욕망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차분하고 건조했던 평소의 모습과 달리, 지금은 뜨거워진 체온과 흐트러진 호흡만으로도 그가 자신을 얼마나 강하게 원하고 있는지 느껴질 정도였다.예원은 비로소 온몸으로 확신했다.자신이 그에게 다가선 것 이상으로, 그 역시 자신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숨이 막힐 듯 아찔하게 이어지던 키스가 절정을 향해 치달으려던 순간이었다.시혁이 먼저 입술을 뗐다.두 사람 사이에 다시 짧은 틈이 생겼다.시혁은 뒤로 완전히 물러서지는 않
"질투해요?"어둡고 조용한 복도, 예원의 직설적인 질문이 허공에 떨어지고 아주 짧은 정적이 흘렀다.그 순간 시혁은 시선을 피하거나 어설픈 변명으로 빠져나갈 틈을 찾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거짓말을 하며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네."낮고 차분한, 그러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분명한 긍정이었다.시혁의 짙은 시선이 예원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곧장 파고들었다."질투했습니다."그는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인정했다. 그 솔직하고 단단한 대답에 예원의 얕은 호흡이 찰나처럼 멈췄다.방금 전까지 예원의 속을 새까맣게 태우던 초조함과 불안이 순식간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시혁의 입술이 다시 한번 느리게 열렸다."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렇게 불리는 걸 듣는 건, 싫었습니다."감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예원을 원망하듯 쏟아내는 감정적인 폭발도 아니었다.그저 자신이 느낀 불쾌함의 실체를 가장 담백하고 명확한 언어로 꺼내놓았을 뿐이었다.예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물었다."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예원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 나왔다."질투가 났으면 화를 내든, 당장 내 손에서 반지를 빼라고 하든, 기분 나쁜 티라도 냈어야 하잖아요. 당신은 그렇게 요구할 수도 있었는데, 왜 내가 먼저 물어볼 때까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거예요?"시혁은 예원의 물음에 아주 잠깐 침묵했다.희미한 조명 아래서 그의 굳은 턱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렸다.이윽고 그의 입술 사이로 낮고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내가 싫다고 해서."차분하게 가라앉은 시혁의 눈동자가 예원의 얼굴을 고스란히 담아냈다."예원 씨가 뭘 바꿔야 하는 건
사람들 너머에서 권시혁과 눈이 마주쳤다. 재헌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제 아내'라는 호칭을 쓴 직후였다.당황하거나 불쾌함으로 굳어진 얼굴일 거라 생각했지만, 예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시혁은 잠시 예원을 응시하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려 옆에 선 관계자의 말에 차분하게 응답했다.애써 화를 억누르거나 기분 나쁜 티를 숨기려는 억지스러움조차 없었다.그는 가볍게 샴페인 잔을 든 채,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평온한 태도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행사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 보았던 완벽하고 단정한 아크온 대표의 얼굴 그대로였다.리셉션이 이어지는 내내 예원은 미온개발의 PM으로서 사람들을 응대했다.곁에 머무는 재헌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공식적인 태도를 허물지 않았다.겉보기에는 조금의 균열도 없는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사회적으로 결함이 없는 부부의 모습이었다.그러나 대화를 나누고 웃음을 짓는 순간순간에도, 예원의 신경은 자꾸만 홀 반대편에 있는 시혁을 향해 뻗어나갔다.가벼운 담소를 나누는 그의 모습과 관계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차분한 손짓을 예원은 무의식적으로 좇고 있었다.차재헌의 그 불쾌한 소개 멘트가 머릿속을 맴돌 때마다, 예원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다시 시혁을 찾았다.그러다 문득 예원은 깨달았다.방금 전 차재헌이 내뱉었던 호칭의 불쾌함보다, 지금 저 멀리서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권시혁의 평온함이 자신을 훨씬 더 곤두서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어젯밤 좁은 차 안에서 그토록 짙은 온도를 나누었고, 계속 만나기로 약속했다.그런데 다른 남자의 입에서 아내라는 끔찍한 단어가 떨어졌는데도, 이토록 폭력적인 방식으로 선을 그었는데도 시혁은 어떻게 저렇게까지 평온할 수 있을까.공식적인 행사가 모두 끝났다.
루센 프로젝트의 중간 보고 겸 파트너사 리셉션이 열린 저녁.넓은 연회장은 건축 및 인테리어 업계 관계자들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예원은 단정한 와인색 실크 블라우스 차림으로 사람들 틈에 서 있었다.가벼운 샴페인 잔을 든 그녀의 얼굴에는 흐트러짐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예원은 누군가의 화려한 아내나 장식품이 아니라, 미온개발 브랜드전략팀을 이끄는 실무 책임자이자 프로젝트 PM으로서 완벽하게 이 공간에 녹아들어 있었다.쏟아지는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고, 필요한 관계자들과 명함을 나누며 자신의 몫과 정체성을 선명하게 증명해 냈다."이쪽 구역 설계가 아주 인상적이더군요. 아크온 측 의견이 많이 반영된 겁니까?""물론 아크온의 구조적인 이해도가 큰 몫을 했습니다만, 루센의 기본 브랜드 경험을 우선시하여 동선을 조정한 결과입니다."예원의 매끄럽고 여유로운 대답에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였다."미온개발 쪽 PM이 워낙 고집이 셉니다."낯설지 않은, 조금은 과장되게 부드러운 목소리가 예원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예원의 굳어지는 어깨 너머로 자연스럽게 다가온 남자는 차재헌이었다.법무법인 세림의 기업자문 변호사인 그가 이런 업계 리셉션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자체는 낯선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예원이 실무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에 굳이 끼어든 것은, 예원에게도 무언가 의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낯선 행동이었다.재헌의 등장에도 예원은 당황하거나 불쾌한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그는 언제나처럼 말끔한 수트 차림에 여유로운 미소를 띤 완벽한 사회적 얼굴을 하고 있었다.조금 전 예원에게 질문을 던졌던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아, 두 분은 아시는 사이인가 보군요. 일행이십니까?"순수하고 일상적인 호기심이었다.예원이 '업무상 아는 사이입니다'라는 건조한 대답을 입술 끝까지 밀어 올린 순간이었다."네. 제 아내, 문예원입니다."재헌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러웠다.예원은 순간적
예원의 시선이 자신의 왼손 약지에 머물렀다가 천천히 시혁의 얼굴로 올라왔다. 찰나였지만 분명 두 사람의 눈빛이 맞부딪혔다.시혁이 어젯밤 뜨겁게 얽혀들었던 그녀의 손이 아니라, 그 손가락에 빈틈없이 끼워져 있는 차재헌과의 결혼반지를 확실하게 목격했다는 사실을 예원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서늘하고 차분한 시혁의 눈동자가 다시 예원의 눈과 똑바로 마주쳤다.예원은 자기도 모르게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입술이 바짝 말라 들어갔다.그가 입을 열어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왜 아직도 그 반지를 끼고 있느냐고 물을까. 우리가 어젯밤 어떤 약속을 했는데 아직까지 그걸 빼지 않은 거냐고 탓할까.아니면 차가운 눈빛으로 불쾌한 기색이라도 비칠까.짧은 정적 끝에 시혁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회의 내용 정리해서 공유하겠습니다."예원의 굳어 있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방금 전까지 반지에 닿아 있던 그의 서늘한 눈빛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도, 무엇 하나 어긋남 없이 평소와 똑같은 완벽한 업무 모드였다."수정안은 오후까지 보내겠습니다."그 건조하고 사무적인 인사말을 끝으로, 시혁은 짧게 목례를 남긴 채 미련 없이 회의실을 나섰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회의실 안에 홀로 남겨진 예원은 그 자리에 선 채로 한동안 가만히 닫힌 문만 바라보았다.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그는 분명히 보았다. 예원의 손에 여전히 족쇄처럼 끼워져 있는 차재헌의 반지를 똑똑히 목격했다. 그런데도 단 한마디의 질문조차 던지지 않았다. 기분 나쁜 내색은커녕, 그 흔한 왜냐는 물음조차 없이 평소와 똑같이 서늘하고 단정한 얼
"사랑한다는 말은 아직 하지 맙시다."예원의 마지막 규칙에 시혁은 잠시 침묵했다. 당황하거나 어이없다는 기색은 없었다.그는 어둠 속에서 예원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특유의 건조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짧게 대답했다."그렇게 하죠."그것으로 끝이었다.시혁은 그 이상의 확답을 요구하거나, 아쉬움을 핑계로 다시 입을 맞추려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방금 전까지 뜨겁게 얽혀있던 차 안의 공기를 뒤로한 채, 깔끔하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다음 날, 미온개발 회의실.루센 프로젝트의 실무 회의를 위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선 예원은 가장 먼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시혁을 발견했다.창밖으로 쏟아지는 밝은 아침 햇살 아래, 반듯한 수트 차림으로 자료를 검토하고 있는 그를 보는 순간 예원의 머릿속에 전날 밤 차 안에서의 기억이 찰나처럼 스쳐 지나갔다.어둠 속에서 빈틈없이 맞닿았던 입술의 온도, 뺨을 간지럽히던 더운 숨결, 그리고 계속 만날 거냐는 질문에 내뱉었던 자신의 단호한 대답.그러나 예원은 곧바로 시선을 눈앞의 서류로 내리며 미세하게 흐트러지려는 호흡을 다잡았다.시혁 역시 회의실로 들어온 예원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입에서는 사적인 안부 대신 지극히 건조한 업무용 멘트가 흘러나왔다."수정안, 방금 전송했습니다."어제 잘 들어갔느냐는 다정한 안부도, 밤사이 잘 잤느냐는 일상적인 질문도 없었다.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공적인 자리에서, 시혁은 완벽하게 '아크온의 대표'라는 외피를 단단하게 두르고 있었다.예원은 그 차갑고도 프로페셔널한 태도에 서운함을 느끼는 대신, 오히려 묘한 안도감과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아득한 긴장감을 느꼈다.어제 차 안에서 합의했던 첫 번째 규칙이 지금 이 순간 한 치의 오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