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유정 씨랑 상관없어요.”서유정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의 진지한 표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직접 황수연 씨에게 물어봐야겠어요?”그녀의 말이 끝나자 병실은 고요해졌고 한참이 지나서야 박수환이 입을 열었다. “정말 유정 씨 때문이 아니에요.”“내가 아니라면 황수연 씨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사고가 났을 때 가족과 통화 중이었어요. 그러니까 내 실수지, 정말 유정 씨와 상관없어요.”그 말을 듣고 서유정은 시선을 바닥으로 보냈다.“알겠어요.”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박수환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계속 캐물어도 소용없을 테니까.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황수연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당시 박수환이 가족과 통화한 내용이 자신과 관련이 있음을 의미했다.서유정은 병상 옆에 앉아 박수환의 얼굴에 난 찰과상과 팔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며 눈가에 안타까움이 스쳤다.“의사 선생님이 며칠이나 입원해야 한대요?”“그냥 가벼운 외상이라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어요.”서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목마르지 않아요? 물 좀 마실래요?”“안 말라요. 급하게 온 것 같은데 좀 쉬어요.”“안 힘들어요. 현우 씨가 데려다줬어요.”말하는 사이 박현우가 진료비 영수증을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작은아버지, 비용은 제가 이미 냈어요. 의사 선생님이 병원에서 이틀 정도 지켜보다가 별일 없으면 퇴원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박수환이 그를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수고했어.”두 사람은 병실에서 잠시 머물렀고 얼마 후 박현우가 서유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정 누나, 내가 데려다줄게요.”“먼저 가요. 난 여기 있을게요.”박현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려던 찰나, 박수환이 서유정을 돌아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가봐요. 난 괜찮아요. 유정 씨가 챙겨주기엔 나도 불편한 점이 많아서요.”특히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서유정이 여기서 그를 돌보면 병원 사람들이 수군거릴 게 뻔했다.“정말 괜찮겠어요?
서유정은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서유정을 데리고 박수환의 병실 문 앞에 도착해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안에서 황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설마 정말 서유정을 사랑하게 된 거야?”이내 박수환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황수연, 내가 전에 경고했지. 유정 씨 곁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이해가 안 되면 내가 알아듣게 해줄까?”“오늘 사고 난 것도 그 여자 때문이잖아! 방금 의사도 말했잖아. 차가 몇 센티미터만 더 빗나갔어도 의사 못한다고.”“너랑 상관없어.”여전히 차가운 말에는 명백한 짜증이 담겨 있었다.“예전에 의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잖아, 잊었어?”병실은 잠시 침묵에 빠졌고 박수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서유정은 손잡이에 가져간 손을 멈칫하다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거두었다. 그녀의 눈에는 당혹감과 충격만이 가득했다.‘박수환 씨 교통사고가 나 때문이라고?’서유정의 넋이 나간 표정을 본 박현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병실 문을 벌컥 열었다.“황수연, 작은아버지 사고가 서유정 씨 때문이라는 게 무슨 뜻이야?”병실에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 앞에 선 박현우와 서유정을 본 황수연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하지만 곧 서유정을 향한 그녀의 시선이 차갑게 변했다. “무슨 뜻이냐고? 오빠가 저 여자랑...”“그만해.”박수환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숨 막히는 압박감을 뿜어내며 황수연의 말을 끊었다.황수연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박수환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난 약 가지러 갈게.”그녀가 막 일어섰을 때 서유정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황수연 씨, 괜찮아요. 약은 제가 나중에 가지러 갈게요. 수환 씨 챙겨줘서 고마워요. 이제 그만 가도 돼요.”황수연은 순간 당황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서유정을 바라보았다.“저보고 가라고요?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서유정이 입술을 달싹이며
성하나가 말한 것처럼 장선우가 여기저기 변호사를 찾아 이혼 사건을 맡겼다가 계약을 해지했다면 분명 사건에 문제가 있었다.게다가 그날 밤 파티에서 장한수가 많은 사람 앞에서 큰아들이 아내와 이혼한다고 말했을 때부터 이미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그 생각에 서유정이 시선을 내렸다.“네, 알겠어요. 이번 일에 대해 잘 생각해 볼게요. 하나 언니, 고마워요.”“별것 아니에요. 비록 우리 로펌은 그만뒀지만 난 서 변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내가 서 변에게 갈 수도 있잖아요.”“언제든 환영해요.”“하하, 그래요. 기억하고 있을게요. 그럼 난 할 일이 있어서 이만 끊을게요. 안녕.”전화를 끊은 뒤 서유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서씨 가문의 본가 번호를 눌렀다.“할머니, 장 씨 할아버지 큰아들이 왜 아내와 이혼하려는지 아세요?”방금 장선우가 이혼 소송을 준비한다고 말했을 때 그가 한 말 중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모순되는 부분이 몇 군데 있었으니까.장선우가 모든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챈 서유정은 함부로 이 사건을 맡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변호사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 의뢰인이라면 사건도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다.서유정이 사건을 맡는 궁극적인 목적은 사건에서 승소하거나 의뢰인이 만족할 만한 조건을 얻어내는 것이었다.장선우는 그녀를 믿지 않는 듯했고 말에도 숨기는 게 있었다.“나도 잘 몰라. 아무튼 전에는 사이가 좋았어. 몇 년간 난 밖을 돌아다니지 않고 이런 일에 신경도 쓰지 않았어. 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이혜숙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유정아, 그날 장 씨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들이 이혼한다는 이야기를 꺼내니까 내가 차마 거절하기 어려웠어. 하지만 네가 이 사건을 맡고 싶지 않다면 내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저에게는 할머니의 생각이 가장 중요해요.”서유정이 시선을 바닥으로 보냈다.“알겠어요. 할머니.”전화를 끊고 서유정은 휴대폰을
“괜찮아요. 가까워서 지하철 타고 다섯 정거장만 가면 돼요. 먼저 가요.”박수환은 오늘 오후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지나친 기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요. 그럼 도착하면 연락해요.”“네.”두 사람은 백화점 입구에서 헤어졌다. 서유정의 모습이 지하철 입구에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 뒤 박수환은 비로소 돌아섰다.서유정이 로펌에 도착했을 때 만나기로 한 의뢰인은 이미 와 있었다.상대가 장한수의 큰아들 장선우임을 알게 되자 서유정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장선우는 서민형과 나이가 비슷해서 서유정이 그를 아저씨라고 불러야 했다.그 앞으로 다가간 서유정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저씨,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네요. 죄송해요. 아저씨인 줄 미리 알았으면 제가 직접 찾아뵈러 갔을 텐데 괜히 여기까지 오시게 했네요.”장선우가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서 변호사님, 제가 오는 게 당연하죠. 어떻게 변호사님이 직접 오시게 하겠습니까.”그가 서유정을 이혼 변호사로 선임하려는 것이었고 게다가 서씨 가문 딸이기에 아무 배경도 없는 작은 변호사를 부리듯 서유정을 대할 수 없었다.서유정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회의실 가서 얘기하시죠.”“네.”서유정은 노트와 펜을 들고 장선우와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아저씨, 사모님과의 구체적인 이혼 사유와 주요 요구사항을 가능한 한 상세히 말씀해 주시면 사건 승소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물론 가장 중요한 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지만 서유정은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다.장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내와의 이야기를 시작했다.한번 말하기 시작하니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가 이어졌다.그동안 서유정은 거의 말하지 않고 대부분 그의 이야기를 듣고 가끔 요약하거나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이야기가 끝난 후 서유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저씨 상황은 어느 정도 알겠어요. 이 사건은 제가 좀 더 생각해 봐야 답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장선우는 잠시
주희정은 서민아를 바라보며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민아야, 난 너와 서유정 사이에서 너를 선택했으니까 절대 나를 실망하게 하지 마.”서민아가 서유정에게 지는 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네, 안 그래요. 걱정하지 마세요.”“그럼 다행이고.”주희정의 눈빛은 다시 다정함을 되찾았지만 서민아는 마음속으로 역겨움이 밀려왔다.서유정이 서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 주희정은 서민아를 버리지 못해서 친딸처럼 아끼는 것보다 서유정이 시골에서 10년 넘게 자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더 컸다.그래서 도시에서 키운 서민아가 서유정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그동안 주희정은 줄곧 알게 모르게 서유정에게 뒤처져서는 안 되며, 반드시 서유정보다 뛰어나야 한다고 강조했기에 서민아는 그 말이 지겨웠다.서경 그룹을 차지하기 위해서만 아니면 주희정에게 살갑게 굴 이유가 없었다.“네, 엄마. 저 배고파요. 이만 집에 가요.”“그래, 뭐 먹고 싶어? 네가 좋아하는 갈비찜 해놓으라고 할까?”“좋아요.”미소를 머금은 서민아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비웃음이 스쳤다.갈비찜은 진작 싫증이 났지만 주희정은 변함없이 요리사에게 그걸 준비하도록 했다.그래서 주희정이나 서경 그룹을 상대로 전혀 심리적 부담이 없었다. 어차피 그들도 자신을 진짜 가족으로 여기지 않으니까.한편, 식당으로 향하던 서유정과 박수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유정 씨, 아까 어머님 만나서 기분이 안 좋아요?”서유정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네, 좀 그러네요.”주희정에겐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서민아와 함께 있을 때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그 다정함을 보면 여전히 부러움을 느꼈다.예전이나 지금 서씨 가문에서나 그녀는 엄마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사람은 얻지 못한 것에 대해 늘 갈망하는 것 같다.하지만 그저 갈망할 뿐,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한때 노력했어도 돌아오는 건 상처뿐이었으니까.“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기
하지만 오늘 다시 박수환을 만나자 또다시 익숙함이 느껴져 분명 어디선가 박수환을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서민아가 골똘히 생각하며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를 포착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주희정이 차갑게 말했다. “서유정, 네가 항상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니까 너도 예의 없이 행동하는 거야!”서유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주희정이 평소에도 그녀를 깎아내리는 건 참을 수 있지만 그녀 주변 사람까지 같이 비난하고 있었다.“확실히 서민아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죠. 친딸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계속 곁에 두고 키우잖아요. 여사님도 참 책임감 넘치고 교양 있는 분이세요.”주희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서유정, 나한테 삐딱하게 굴지 마. 네가 민아처럼 사랑스러웠으면 나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을 거야.”서유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여사님,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전 여사님 호감 따위 필요 없어요.”16살에 서씨 가문에 막 돌아온 서유정은 필요했을지 몰라도 26살의 서유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넌 정말 답이 없구나!”주희정은 분노가 치밀었다. 공공장소가 아니었다면 서유정에게 제대로 본때를 보여줬을 거다.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 분노를 억누르던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민아는 이미 서경 그룹에 입사했고 머지않아 서경 그룹을 물려받을지도 몰라. 네가 운영하는 그 허접한 로펌으로는 평생 얘를 따라잡을 수 없을 거야!”서유정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요?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서민아에게 조금도 주식을 넘겨주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여사님 손에도 서경 그룹 지분은 없죠 아마?”서민아가 이제 막 서경 그룹에 들어갔는데 벌써 회사를 물려받을 거라고 허풍을 떨다니, 이러다가 조금만 지나면 이혜숙이 모든 지분을 서민아에게 줬다고 할지도.주희정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발끈했다.“입 다물어!”주희정의 감정이 격해지는 걸 본 서민아는 재빨리 그녀를 말렸다.“엄마, 화내지 마세요. 언니도 일부러 화나라고 말하는 건 아닐 거예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