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남의 말에 심효진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이 사람, 너무 조급한 거 아니야?’“그럼 약혼식부터 올리고, 혼인신고를 한 후에 결혼식을 올리는 거로 해요.”소정남은 심효진의 뜻을 매우 존중했고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이에 심씨 가족들을 매우 만족스러웠다.소정남의 신분에 맞춰 그와 심효진의 약혼식은 관성 상류사회의 유명 인사들을 초대하여 떠들썩하게 치를 것이다.그는 먼저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자신이 심효진에게 프러포즈했고 그녀도 이미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고 알렸다. 시간 되면 이리로 와서 장인어른, 장모님과 함께 혼사에 대해 상의해 달라고 부탁했다.아들의 말을 들은 최민주는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의 일이 아무리 바빠도 네 혼사만큼 중요하지는 않아. 알았어, 너희 아빠랑 큰아버지들까지 불러 후한 선물을 준비해서 사돈집으로 갈게.”“고마워요, 엄마.”“고맙긴 뭐가 고마워, 엄마도 기뻐. 정남아, 엄마가 몇 마디 당부할 게 있어. 앞으로 효진이를 잘 대해줘야 한다, 괴롭히면 안 돼. 엄마는 네가 아들이라고 무작정 돕는 사람이 아니니. 효진의 말이 맞는다면 넌 무조건 양보해야 한다. 설사 맞지 않대도 양보해야 하는 거야. 며느리를 얻기 쉽지 않아.”그녀의 아들은 눈이 너무 높은지라, 모처럼 심효진을 위해 솔로 생활을 끝내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미래의 며느리를 매우 중시했다. 게다가 전에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집안 대대로 내려온 보물을 심효진에게 주었고 그녀를 맏며느리로 인정했다.“엄마, 알겠어요.”소정남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런 인생의 큰일에 있어서 그는 결코 장난을 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심사숙고하며 자기 마음속의 진실한 생각을 따랐다.“그래, 엄마는 우리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니, 네가 효진에게 잘해줄 거라고 믿어. 이 정도로만 말할게. 먼저 너희 큰어머니한테 전화해서 대신 후한 선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려고.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사돈집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소정남은 그의 나이 또래에서 처음으로 결
심효진은 말했다.“이제 소지훈 씨가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거든 꼭 나한테 알려줘요. 어떤 여자가 소지훈 씨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궁금하거든요.”소정남은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볼에 뽀뽀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효진 씨도 우리 소씨 가문 사람이에요. 우리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분명 우리가 제일 먼저 알게 될 거예요.”심효진은 그를 가볍게 밀어냈다.“어르신들 계시잖아요.”‘뽀뽀까지 하고...’그녀가 아무리 대담해도 어른들 앞에서 그에게 뽀뽀하기는 부끄러웠다.“우리가 친밀하게 보일수록 어르신들이 더 좋아해요.”심효진은 재빨리 윗사람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한창 약혼 날짜를 의논하고 있었고 전혀 두 사람을 관심하지 않았다.“나가서 산책이나 할까요?”심효진이 제안하자 소정남은 기다렸다는 듯 이내 응낙했다.“엄마, 저 정남 씨랑 산책하러 갈게요.”심효진은 엄마에게 한마디 하고는 소정남을 끌고 집에서 나왔다.문 앞의 꽃바다는 여전했고 밤이 되니 불빛이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그건 소정남이 꽃 위에 여러 컬러의 라이트들을 배치해 놓아 밤이 되면 반짝반짝 빛났다.심씨네 집 앞 가로등들도 켜져 있었다. 온갖 종류의 외제 차가 주차된 것을 보고, 심효진은 곁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나는 우리 집안과 비슷한 남자를 찾아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며 자면서도 돈을 벌 생각은 한 적이 있지만 정남 씨와 함께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나도 상가를 비롯한 부동산이 꽤 있어요. 돈은 은행에 넣어두면 가치가 떨어지니까 모두 투자하는 편이에요. 그러니 효진 씨는 앞으로도 여전히 임대하며 살 수 있어요. 내 명의로 된 그 집들과 상가들을 임대한 후 전부 효진 씨에게 맡길게요. 받은 임대료는 효진 씨가 쓰고 싶으면 쓰고, 쓰고 싶지 않으면 땅을 사서 임대해주고 계속 돈을 벌어도 좋고요.”“지금은 땅을 사서 집을 지으려면 가격이 너무 높아요. 정책이 갓 바뀌었을 때는 아주 저렴한 값에 땅을 사서 집을 지을 수 있었어요. 지금은 임대료가 올라가는
하예정은 참지 못하고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정말 아직도 질투한다고?”하예정은 다시 전화를 걸지 않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녀는 휴대폰을 카운터에 올려놓고 잠시 침묵에 잠긴 후 뜨개질 도구를 꺼냈다. 할 일이 없을 때는 다시 뜨개질을 시작하게 된다.2분도 안 지나 한 꽃다발이 불쑥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하예정이 고개를 들자, 전태윤의 그윽한 눈과 마주쳤다.“당신... 왜 자꾸 전화를 안 받아요?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을 안 하고.”공예품을 짜는 것을 멈추고 하예정은 그 꽃다발을 받아 들고는 그에게 한마디 불평했다.전태윤은 계속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거의 다 왔으니, 전화 받을 필요가 없었어. 낮에는 일찍 퇴근하기 위해 일이 바빴거든.”그녀가 한 그루의 파키라를 다 짠 것을 보고 그는 그 공예품을 집어 들고 감상했다.“사람을 시키지 않았어? 더 이상 혼자 힘들게 하지 마. 손 좀 주의하고.”전태윤은 그 파키라를 다시 놓고는 전에 다친 손을 잡아 쥐었다. 상처는 이미 나았지만, 흉터가 남아 있었다. 그는 속상한 표정으로 그 흉터를 어루만졌다.전에 그녀가 손을 다친 것은 전태윤 때문이다.“이 꽃다발 참 신선하네요.”그녀는 그가 자책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손을 빼내며 화제를 돌렸다.“관성의 꽃집에 있는 장미꽃을 정남 씨가 다 사 간 거 아니었어요?”소정남이 심효진에게 프러포즈할 때 쓴 꽃이 너무나도 많아 그녀는 꽃집에 장미꽃이 남아있지 않을 거로 추측했다.“내가 이제야 온 이유가 바로 이 꽃다발 때문이야.”하예정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혹시 당신 집에 가서 꽃을 잘라 온 건 아니죠?”전태윤은 귀여운 듯 그녀의 코를 살짝 어루만지고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꼬집으며 말했다.“잘못한 말을 바로잡아줄게. 내 집도 당신 집이니까 우리 집이라고 말해야지. 심효진 씨에게 닭과 오리 한 트럭 사달라고 한 거 기억하지? 리조트 근처 과수원에서 키우고 있었는데 그 닭과 오리가 알을 많이 낳아서
하예정이 고개를 돌리자, 그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볼에 닿았다.그녀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일어서더니 돌아서서 그와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진우는 편찮으신 어머님을 보러 온 것뿐이에요. 이틀 휴가를 내서 주말까지 모두 나흘이나 휴식하니 어머니를 보러 온 거에요. 서점에 온 것도 그저 지나가는 김에 사촌 누나인 효진이를 보러온 거예요, 나 보고 온 게 아니라. 효진이도 진우가 여기 오기 전에 일부러 전화 와서 내가 가게에 있는지 확인한 후에야 왔다고 하더군요. 내가 가게로 돌아와 진우와 마주쳤을 때는 이미 떠나려던 참이었어요. 같이 있은 시간이 5분도 안 되는 걸요. 경호원들도 밖에서 보고 있는데 정말 뭐가 있었으면 당신 집 경호원들이 가만히 있겠어요?”하예정은 다소 어이없다는 듯 그의 얼굴을 꼬집었다.“당신도 참, 질투가 너무 심해요. 예전에 내가 말했듯이, 나와 진우는 그저 남매일 뿐, 남녀간의 감정은 전혀 없어요.”전태윤은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 얼굴에 갖다댔다. 그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김진우와 그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는 것이 신경 쓰인단 말이야. 둘이 알고 지낸 시간이 나보다 더 오랜 데다 김진우는 당신을 깊이 사랑했었잖아.”“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내가 진우를 10여 년이나 더 알고 지냈는데요. 당신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요?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당신이랑만 알고 지내도 좋아요.”이 남자는 지금 그녀가 김진우를 먼저 알게 된 사실까지도 꺼내서 얘기하고 있다.그는 입을 꾹 다문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시간을 되돌릴 방법이 없으니까. 만약 그런 능력이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그와 하예정을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죽마고우로 되게 하여 같이 자라게 했을지도 모른다.그가 여전히 매우 신경 쓰인다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하예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여보, 진우는 이미 다 내려놓은 걸요. 비록 나랑 진우는 알고 지낸 지 십여 년이 되지만, 당신은 이제 나와 함께 남은 인생을 살
전태윤이 물었다.“우리 언니한테 닭과 오리를 가져다주려면 지금 가요.”너무 늦게 가면 쉬는 데 방해할까 봐 걱정됐다.하예정은 서점의 문을 닫고 전태윤의 차에 올라탔다. 그녀의 차는 경호원이 몰고 가기로 했다.차에서 그녀는 전태윤에게 물었다.“동물원 사건은 결론이 났어요? 정말 여씨 가문의 짓이 아니에요?”전태윤은 잠자코 있다가 대답했다.“적어도 여 대표가 한 짓은 아니야.”“그럼 여 대표가 아니라 여 사모님이?”그는 여씨 사모님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소정남이 조사 중이야. 아직 증거는 없지만 우리 모두 여씨 사모님을 의심하고 있어."전태윤은 처음엔 그를 노리고 온 줄로 알았다.하지만 자세히 조사해 보니 그가 아니라 하예정이 타깃이었다.하예정은 여씨 모녀와만 원한을 맺었었다. 그 때문에 자연히 여씨 사모님을 의심하게 되었다.“여 대표 부부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꽤 많은 것 같아. 그들 부부는 신중한 데다 일 처리에 무척 조심스러워서 무슨 일을 하든 꼬투리를 남기지 않아. 소지훈마저도 그 부부에게 관심이 많아졌어.”조사가 어려울수록 소지훈은 더 흥미를 느끼게 되는데, 일정한 정도로 관심을 가지게 되면 직접 나설 것이다.“그때 가서 여운초와 힘을 합쳐 잘 조사하기만 하면 그들 부부의 약점을 잡을 수 있을 거야.”하예정은 여운초의 담담하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을 듯한 성미를 떠올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운초 씨는 눈이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협조해요? 그리로 여씨 사모님은 아무래도 친어머니잖아요.”여운초와 여씨 사모님은 사이가 좋지 않지만, 그녀가 친어머니인 건 사실이다.전태윤은 잠시 침묵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일단 이진이랑 여운초 씨 상황을 지켜보고. 이진이는 일단 신의의 유능한 제자에게 부탁해 여운초 씨 눈을 치료해 주려 해.”“신의요?”하예정은 이런 호칭을 들을 때면 뭔가 미스테리한 느낌이 났다.그녀는 전태윤의 세계에 발을 들인 후 여태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많은 사람과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다.역시, 그녀의
전태윤은 팔을 뻗어 그녀를 꼭 끌어안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말했다.“나중에 내가 급한 업무를 다 처리하거든 며칠 시간 빼내서 함께 A시로 가자. 예씨 가문 예준성 부부랑 한번 만나. 예준성 씨는 어머님 성을 따라 예 씨야.”그는 또 하예정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여보도 소설 속 여주인공이야. 남들이 여보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알아?”하예정은 그를 가볍게 밀쳤다. 매번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며 뜨거운 입김을 불 때마다 그녀는 마음이 간질거려 당장이라도 확 덮쳐버릴 것만 같았다.전태윤 부부는 계란과 닭, 오리를 하예진에게 보낸 후 발렌시아 아파트로 돌아왔다.집에 와보니 숙희 아주머니가 와 계셨다.아주머니는 전태윤이 애초에 하예정에게 준 반려견도 데려왔다. 반려동물들은 줄곧 아주머니가 돌보고 있어 발렌시아 아파트로 함께 돌아왔다.문을 열자 봄이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하예정은 봄이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서 한참 넋 놓고 있다가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전태윤에게 물었다.“봄이 왜 이렇게 살쪘어요?”전태윤은 반려동물을 싫어하는데 하예정을 너무 사랑한 탓에 집에 몇 마리 키우고 있다. 하예정이 강아지와 고양이를 기르고 싶다고 하니 그는 봄이와 고양이 두 마리를 곧장 선물해줬다.하예정이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자 봄이는 신나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전태윤은 개털이 몸에 묻을까 봐 얼른 저 멀리 피했다.“숙희 아주머니가 얘네들 너무 잘 돌보셔서 개자식이 점점 더 살찐 거지. 고양이 두 마리도 살찐 것 좀 봐. 저렇게 세 마리가 한데 있으니 꼭 새끼돼지 같아.”하예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쏘아붙였다.“봄이라고 불러요. 개자식이 뭐예요, 우리 봄이 욕하는 거예요?”전태윤은 입을 삐죽거렸다.“그래, 알았어. 개자식 아니고 봄이지.”숙희 아주머니가 웃으며 부부에게 인사했다.“아주머니, 이 물건들 냉장고에 넣어두시면 돼요.”전태윤은 엄마가 챙겨주신 닭을 아주머니께 건넸다.비닐봉지를 받은 아주머니가 그에게 물었
“손자들만 해치는 할머니야.”하예정이 할머니를 옹호해 나섰다.“할머니가 당신 뭘 해쳤는데요? 할머니가 하신 모든 일은 다 당신들 잘 되라고 그런 거예요. 말해봐요, 할머니가 대체 태윤 씨를 어떻게 해쳤냐고요?”그녀는 전태윤을 밀치려 했고 이에 전태윤이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예정아, 너 방금 뚱땡이 봄이 만진 손도 안 씻었는데 얼른 가서 씻어. 개털 묻은 손으로 날 밀치지 말고. 나 이런 개털들 딱 질색이야.”“...”숙희 아주머니가 웃으며 답했다.“예정 씨, 얼른 가서 손 씻으세요. 제가 야식 준비했으니까 손 씻고 바로 와서 드세요.”야식 먹으란 말에 하예정은 더이상 남편과 개털 문제로 따져 묻지 않고 손 씻으러 화장실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녀는 손 씻으며 아주머니께 물었다.“야식 뭐 했는데요?”“아무튼 다 사모님 좋아하시는 거로 만들었어요.”숙희 아주머니는 봄이더러 얼른 개집에 들어가 자라고 눈치를 줬다.똑똑한 봄이는 전태윤이 자신을 싫어하는 걸 알고 감히 집안에서 뛰어다니지 않은 채 얌전히 개집으로 들어가 엎드려 있었다.전태윤은 야식을 먹지 않고 TV를 보려 했는데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아 방에 들어가서 샤워를 마치곤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부부가 집에 돌아온 뒤 일상이 곧 이러했다.그렇게 어두운 밤이 흘러갔다.오늘은 하예진 자매가 고향 마을에 돌아가 하 영감 일행과 다시 계약서를 체결하는 날이라 하루 토스트는 문을 닫았다.엄마의 끈질긴 다그침에도 꿋꿋이 전태윤의 집에 들러붙어 있는 노동명은 하루 토스트로 가서 아침을 먹으려고 늦잠을 자다가 허겁지겁 일어나 세안을 마치고 운전해 나갔다.결국 가게 문 앞에 도착해서야 문이 닫힌 걸 발견했는데 누군가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그 사람은 노동명도 아주 눈에 익은 바로 서현주였다.하예진을 찾아온 듯싶었는데 아마도 그녀한테서 소식을 캐내고 싶은 모양이다.이름 모를 여자가 서현주에게 내린 미션이었으니.상대는 전태윤과 성기현이 대체 어디까지 조사했는지 알고 싶었다.요
노동명은 서현주를 내쫓은 후 굳게 닫힌 가게 문을 보면서 하예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예진아, 오늘 왜 가게 문 안 열어?”노동명이 살짝 엄숙한 말투로 물었다.“예정이랑 함께 고향 마을에 일 보러 내려왔어요. 부모님 집 문제도 해결했겠다, 오늘 하루 휴식하느라고요. 왜요?”노동명이 알겠다며 대답한 후 질문을 이어갔다.“부모님 집 문제가 해결됐다고? 더이상 소송 안 걸어도 돼?”그는 하예진을 도와 소송문제도 해결해주려 했다.“협상으로 해결했어요. 대표님, 저 일 봐야 해서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그래.”노동명은 전화를 끊었다.하예진이 고향 마을의 일을 다 해결했는데 노동명은 아무런 소식도 못 들었다. 그녀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하긴, 말해줄 이유도 없잖아!노동명이 뭐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하예진이 사사건건 말해줄 필요가 있을까?생각을 마친 노동명은 왠지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했다.하루 토스트가 문을 안 여니 노동명은 어쩔 수 없이 허기진 배를 안고 회의하러 회사로 가야만 했다.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은경이 하루 토스트 문 앞에 나타났다.물론 가게 문을 안 열었으니 손은경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하루 토스트가 하예진 가게라는 것도 몰랐다.그녀는 단지 노동명에게 사랑의 도시락을 보내주려고 왔을 뿐이다.저 멀리서 노동명의 차가 이 가게 앞에 세워진 걸 보고 손은경도 차를 세우고는 그의 행동을 빤히 쳐다봤다.그가 서현주를 놀라게 하고 줄행랑치게 한 것도 똑똑히 지켜보았고 휴대폰으로 사진 찍어 윤미라에게 보여주며 그 여자가 대체 누군지 여쭐 생각이었다.서현주가 허겁지겁 떠나긴 했지만 노동명과 꽤 길게 대화를 나눈 터라 두 사람은 지인임이 분명했다. 손은경은 원래 마음만 먹으면 노동명을 바로 낚아챌 거라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윤미라의 조언을 들은 후에도 자신감을 잃진 않았지만 노동명의 곁에 나타난 어떠한 여자도 경계를 늦출 순 없었다.그와 아는 사이이고 대화도 나누는 여자라면 철저하게 뒷조사하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
잠시 후, 차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아이는 고개만 돌려 살짝 보더니 다시 바비큐를 먹기 시작했다.“할머니, 저 왔어요.”멀리서 전이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이혁은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린 후,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풍겨오는 바비큐 냄새는 정말 좋았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 이런 날씨에는 바비큐가 최고죠.”관성의 겨울 날씨는 정말 변덕스러웠다. 어제는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추워서 할머니들은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온이 확 올라와 정오 무렵에는 햇빛까지 쨍쨍하게 비추더니 약간 더운 느낌마저 들었다.관성의 사람들은 겨울에 가끔 이렇게 바비큐를 해 먹긴 하지만 보통은 휴일이 되어야 준비해서 해먹을 여유가 있었다.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생각만 나면 언제든 자유롭게 바비큐를 즐길 수 있었다.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전이혁은 자신이 나중에 결혼하고 아들이 성장하면 당장 사업을 넘겨주고, 자신은 조기 은퇴해 할머니처럼 여유로운 노후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것은 신선놀음보다 더 행복한 삶이었다.“넷째 도련님.”양씨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전이혁에게 안부를 물었다.전씨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여러 할머니도 전이혁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그들은 전씨 할머니가 무려 아홉 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직 사회에 나오지 않은 막내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일곱 명의 손자는 이미 뛰어나고 유능한 인물들로 소문나 있었다. 게다가 막내 두 명은 비록 사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성적이 우수했고 앞날도 창창했다.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었다.전씨 가문은 자손들이 하나같이 훌륭했고 가업도 재산도 어마어마했으니, 그야말로 할머니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그들은 가끔 함께 수다를 떨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그 시절에도 그들보다 훨씬 잘 살았고, 그때부터 이미 가문에서 주름잡는 존재였다. 결국 훌륭한 어른이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전씨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여자아이를 불렀다.“소령이, 이리 와봐.”여자아이는 깡충깡충 뛰어갔다.“어르신, 닭 다리 다 구워졌어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자신에게 닭 다리를 주려고 부른 줄 알았다.전씨 할머니는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웃었다.“아직 다 안 구워졌어. 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 거야.”“그런데 왜 양씨 아저씨의 자리를 잇고 싶다고 했지?”전씨 할머니가 여자아이를 예뻐한다는 건 리조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전씨 가문은 몇 대째 아들만 태어났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딸을 가지길 원했었고, 그것이 안 되자 손녀를 기대해 보았지만, 매번 실망으로 마무리되었다.할머니는 이제 증손녀를 기대해 보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증손녀를 안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종종 직원들에게 집에 여자아이가 있으면 관성으로 데려와 학교도 보내고 같이 생활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리조트에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오라고도 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여자아이들이 리조트에 놀러 오게 되면 손주며느리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한테 증손녀를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양씨 아저씨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양씨 아저씨가 사는 집도 아주 예뻐요. 저도 양씨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요.”그 여자아이는 겨우 세 살밖에 안 됐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말도 잘해서 가끔 그 여자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어른들이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여자아이는 부모도 가르친 적이 없는 말을 스스로 내뱉곤 했었다.우빈이도 가끔 서원 리조트에 올 때마다 리조트에서 내려와 그 여자아이와 함께 신나게 놀곤 했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여자아이가 리조트에 올라와 우빈이와 함께 놀기도 했었다.“아까 양씨 아저씨가 한 말 잘 들었지? 네가 컸을 때는 양씨 아저씨는 이미 은퇴하고 다른 사람이 저 자리에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은퇴한 다음에야 네 차례가 오게 돼. 그보
할머니는 함께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말했다.“날씨가 좀 쌀쌀하네. 우리 따뜻하게 몸도 데울 겸 한 잔씩 할까?”“어르신.”전씨 할머니가 술을 마시자고 하자 양씨 아저씨는 바로 할머니를 제지했다.“어르신 술 마시면 안 됩니다. 큰 도련님께서 아시면 또 어르신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며 저를 혼내실 거예요.”“양 집사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태윤이는 점점 자기 할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아. 온갖 걸 다 간섭하려 들어.”할머니는 손자인 전태윤이 자신을 간섭하려 든다며 투덜거렸다.그러자 함께 있는 몇몇 할머니들이 웃기 시작했다.“큰 도련님께서 어르신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저희 나이에는 술도 적게 마시는 게 좋잖아요.”“과일주는 괜찮아. 양 집사, 가서 과일주 두 병 가져와. 바비큐에는 술이 있어야 제맛이지.”양씨 아저씨는 더 이상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리조트에 전화해서 과일주 몇 병을 가져오도록 했다.그들이 직접 잡은 생선 외에도 양씨 아저씨는 몇몇 어르신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바비큐용 식재료를 다양하게 준비했다. 어르신들 옆에는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양씨 아저씨는 그들을 위해 과일 주스를 준비해 두었다. 덕분에 그들은 기분 좋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전씨 할머니는 이렇게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생활을 참 좋아했다. 게다가 내년엔 첫 증손주가 태어나니 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할머니는 자신이 구운 소시지 한 꼬치를 여자아이에게 건네주고 그 아이의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소령이 갈수록 예뻐지네. 반짝이는 눈 좀 봐. 네 엄마가 너를 ‘소령이’라고 부르는 게 딱 맞아.”그 여자아이는 소시지를 건네받으며 귀엽게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어르신.”전씨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또 뭐 먹고 싶어? 할머니가 구워줄게.”“닭 다리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익숙한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씨 할머니에게 닭 다리를 구워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