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 호텔에 도착한 전이진은 차를 세우고 먼저 내리더니 재빨리 몸을 돌려 조수석 쪽으로 가서 여운초가 내리기를 기다렸다.그녀가 내리자, 그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이진아.”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쪽을 향해 섰다.그가 더 가까이 다가오자 익숙한 남성 향기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전혁진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더니 자기 얼굴에 가져다 댔다.“운초야, 내 얼굴 한번 잘 만져봐 봐. 비록 네가 잠시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못하지만, 손으로 내 얼굴을 더듬으며 내 모습을 상상해 봐. 난 네가 할 수 있다는 걸 알아, 넌 아주 똑똑하잖아.”여운초는 조용히 그를‘쳐다보았다'.한참 후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그는 곧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고 그녀가 손으로 자기 얼굴을 이리저리 만지도록 내버려 두었다.길고 부드러워 보이는 그녀의 손가락은 의외로 거칠었다.온통 굳은살투성이였기 때문이다.그녀의 손은 보기엔 매우 부드럽고 아름다워 보였다.여운초는 손이 가져다주는 느낌에 따라 전이진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그가 자신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왔음을 눈치채고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손을 움츠렸다.전이진의 눈빛은 그녀의 붉은 입술을 깊이 주시하고 있었다.그녀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매우 아름다운 여자다. 심지어 연분홍빛이 나는 입술을 가지고 있다. 그는 가까이에서 그녀의 붉은 입술을 보며 그 입술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처럼 부드러운지 한번 맛보고 싶었지만, 감히 행동하지는 못했다.그녀의 마음속에는 높은 벽이 하나 쌓여 있는데 그는 아직 절반도 오르지 못했으니 너무 건방지게 굴어서는 안 되었다. 아니면 그녀의 마음속에서의 인상이 원점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큰아버지는 오셨을까?”여운초가 먼저 침묵을 깼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애매한 분위기가 남아있었다. “글쎄.”전이진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내 손 잡고 들어갈래?”“아니, 괜찮아.”여운초는 지팡이가 있어서 혼자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전이진도 더
“운초야, 너 어떻게 전이진 씨랑 함께 왔어?”여 대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에 여운초는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 “병원에 예정 씨 언니를 보러 갔다가 우연이 이진이를 만났는데 이진이가 저를 집에 데려다주는 길에 큰아버지 전화를 받은 거예요.”여 대표는 잠자코 있다가 관심 조로 물었다.“하예진 씨는 어떠냐?”“위험은 벗어났어요. 전 엄마 대신 사과드리러 간 거고요.”“운초야, 그 일은 절대 네 엄마가 한 것이 아니다. 판결을 받기 전에 네 엄마가 한 일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여 대표는 불쾌한 듯이 말했다.“증거가 없다면 경찰도 엄마를 집에서 데려가지 않았을 거예요. 그날 일에 참여한 사람은 아무도 도망가지 못하고 모조리 잡혔잖아요. 큰아버지가 방금 돌아왔다고 해도 이 일에 대해 전해 들었을 거 아니에요. 경찰이 아무나 억울하게 잡아가지 않을 거라고 전 믿어요.”사실 그녀도 경찰이 왜 엄마를 붙잡았는지 모르고 있다.경찰은 아주 신속하게 엄마를 데려갔다.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아무리 큰 세력을 손에 쥐고 있다 해도, 나쁜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꼭 잡히게 된다. 악이 어떻게 선을 이길까.물론 그녀는 엄마를 조금도 동정하지 않고, 구할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여 대표는 목이 메어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서둘러 메뉴를 전이진에게 건네주며 주문하라고 했다.“메뉴는 따로 필요 없어요.”전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으로서 자기 집에서 연 호텔에서 식사하는데, 어떤 음식이 맛있는지 그는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다.여 대표가 산다고 하니, 그는 전혀 사양하지 않고 호텔의 메인 요리를 많이 주문했다. 다만 운전해야 하기에 좋은 술을 몇 병 주문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니면 여 대표의 카드를 한번 본격적으로 긁을 수 있을 텐데.그는 주문을 마친 후 여 대표를 향해 말했다.“오늘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거죠? 용건이 있거든 바로 말해요. 난 원래 추측 같은 거 하는 건 질색이라서요.”“참으로 호탕하시네요
여 대표는 여운초를 한번 쳐다보고는 말했다.“전이진 씨, 제 의붓딸은 다른 사람과 달라요. 눈이 보이지 않잖아요. 이진 씨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앞으로 평생 시집가지 못할 겁니다.”“큰아버지!”운초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전 누구에게도 시집가지 않아요. 이진이가 나에게 책임질 필요도 없고 나도 아무런 손실도 없어요. 그날 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요. 그러니 이진이도 나에게 책임질 필요가 없어요.”여 대표는 그녀의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그녀의 윗사람이다.의붓아버지이기도 하고.여 대표가 이렇게 전이진에게 요구하자 여운초는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운초야, 내가 네 아버지께 너를 잘 키워 좋은 시댁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했어. 이 큰아버지는 너를 잘 보살피지 못해 네가 장님이 된 것에 이미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어. 만약 네게 좋은 시댁을 찾아주지 못한다면 나는 앞으로 죽어도 네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을 거야.”여 대표의 목적은 전이진이 여운초에 대한 인상을 망치고 전이진과 전씨 일가 사람들이 그녀를 무시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만약 조카딸이 전씨 일가 할머니가 찜한 둘째 손자 며느릿감이라는 것을 안다면 피를 토할지도 모른다.“전이진 씨, 한번 잘 생각해 봐요...”전이진은 여운초를 한번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여 대표님의 말에 따르면 내가 운초에게 책임을 지지 않으면 운초는 평생 혼자 살게 될 텐데, 내가 어떻게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 있겠어요. 운초야...”“이진아!”여운초는 굳은 얼굴로 전이진의 말을 끊었다.“이진아, 난 네가 나에게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그녀는 또 여 대표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진지하게 말했다.“큰아버지, 더 이상 이진에게 나를 책임지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필요 없어요! 큰아버지가 말하고 싶은 건 이게 아니잖아요, 똑바로 말씀하세요. 저를 핑계로 삼을 필요가 없잖아요.”“이진아, 큰아버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네가 나서서 하예정 자매에게 좋은 말을 좀 해서 우리 엄마가 가벼
룸에서 나온 전이진은 여운초를 데리고 다른 룸으로 들어가더니 다시 음식을 주문한 후 그녀더러 밥을 사달라고 했다.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내가 네 큰아버지에게 강요당해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까 당연히 밥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야?”여운초는 웃기면서도 어이없었다.“밥 안 사주겠다고 말한 적 없으니까 핑계 안대도 돼.”“밥 다 먹고 집까지 바래다줄 테니까 물건들 챙겨서 집에서 나와. 큰아버지가 너에게 못되게 굴까 봐 걱정돼.”“집에서 나오면? 갈 데도 없는데.”“우리 집에 와. 나 너희 집 근처에 집이 있으니까 우리 집으로 이사 와. 내가 도우미를 청해서 널 돌봐주도록 할게. 걱정하지 마, 난 그곳에서 살지 않을 거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결혼하기도 전에 동거한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이진아, 더 이상 결혼이라는 말 입에 담지 말았으면 해. 난 큰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을 거니. 그리고 점원에게 가게 안의 작은 방을 치워달라고 부탁할 거야. 잠시 가게에서 지내면 돼. 훨씬 편하기도 하고.”그녀는 큰아버지까지 감옥에 들어가게 되면 그때 다시 여씨 집안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그전에는 나와서 사는 것이 확실히 더 안전했다.큰아버지가 급한 김에 그녀를 죽일지도 모를 일이니까.처음에 큰아버지와 엄마는 짜고 들어 그녀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녀는 두 눈을 대가로 목숨을 건졌다.“그래.”전이진은 자신의 명의하에 있는 별장으로 이사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어둠이 찾아왔다. 또 하루가 지났다.전태윤 부부는 우빈을 데리고 캠핑카를 타고 병원에 왔다.무당의 굿이 정말 유용한 건지, 아니면 엄마가 깨어난 것을 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오후에는 편히 잠들어 지금은 컨디션이 평소처럼 회복되었다.그에 비해 하예정의 컨디션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녀는 이틀 동안 잠을 잘 자지 못하여서 두통이 심했다.집을 나서서 병원에 오기 전에 그녀는 전태윤 몰래 약효가 센 약을 먹었다. 머리가 아플 때는 계속 이 약을 먹었었다. 부작
“이모, 안녕히 계세요.”우빈이는 성소현을 향해 작은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면서 뽀뽀를 날리는 제스처까지 해 주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전태윤이 직접 이경혜 모녀를 병원 건물 밖으로 배웅했다.“전 대표, 요즘 수고했어.”이경혜는 감격스러운 듯 말했다.“자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자네가 도와준 덕분에 예정 자매가 위기를 잘 넘기게 됐어. 고마워.”전태윤은 부드럽게 말했다.“예정이는 제 와이프고 예진 씨는 제 처형이에요. 모두 제 가족이니 제가 그들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그가 하예정 자매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자매가 그와 만난 후부터 시비에 휘말리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자네처럼 책임감 있는 남자에게 예정이를 맡기니 안심이야.”이경혜는 줄곧 전태윤이 관성의 걸출한 인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 딸의 안목은 이만저만 높은 것이 아니니까. 다만 인연이 없을 뿐.하지만 그녀의 조카사위가 되었으니 적어도 남의 집 사위가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이경혜 모녀는 떠났다.전태윤은 그들이 차에 타는 것까지 보고서야 돌아갔다.“태윤아.”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노동명이 한 손에는 과일 바구니를, 다른 한 손에는 꽃다발을 든 채 그에게 다가왔다.“동명아, 처형 병실에 지금 넘쳐나는 게 과일 바구니랑 꽃다발이야.”“그건 다른 사람이 준 거잖아.”노동명은 하예진의 병실에서 어떻게든 존재감을 심어야겠다고 생각했다.“날도 어두워졌는데 또 와서 우리와 자리다툼 할 작정이야? 지금 처형은 깨어나서 네가 다시 남아서 밤을 지새우면 오히려 안정을 취할 수 없게 될 거야. 그러면 처형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거고.”어젯밤, 하예진은 아직 혼수상태라 노동명이 옆에서 밤을 새우며 지켜도 괜찮았다.이젠 그녀가 깨어났으니, 전태윤은 노동명이 다시 밤을 지키는 것을 반대했다.그의 처형은 노동명이 자기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다.노동명은 그에 대답했다.“그냥 보러 온 거야. 안 보면 마음이 놓이지
“싫어. 네가 능력이 있으면 직접 처형에게 고백해. 성공하게 되면 나랑 예정이 지지할 거지만 실패한다면 다시는 치근덕거리지 마, 어쨌든 네 엄마가 동의하지 않으니까.”전태윤은 막지도 돕지도 않을 생각이다.“동명아, 우린 좋은 친구니까 네가 평생을 맡길 만한 남자라는 것을 나도 알아. 하지만 네 엄마는 처형을 깔보고 있고 너와 처형이 같이 있는 것을 찬성하지도 않잖아. 처형은 이미 실패한 결혼을 한번 경험했어. 나는 처형이 재혼해서 또 시댁의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노동명은 황급히 말했다.“내가 어떤 성격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내 일을 언제 엄마가 대신 결정한 적 있어? 다 내 맘대로 해왔어. 엄마가 예진에게 편견이 있다는 걸 알아. 그건 엄마가 예진이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래, 시간이 지나면 받아들일 거야. 혹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진 못해. 난 부모님이랑 같이 살지 않을 테니, 예진 씨가 엄마 아빠한테서 괴롭힘 받을 일도 없어.”전태윤은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넌 아직 솔로라 많은 일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어. 실제로 부닥쳐 보면 어떤 문제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만약 처형과 같이 있게 되면 부모님을 절대 안 볼 수 있을 거로 생각해? 너의 친부모님인데. 내 생각엔 좀 더 기다려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제 처형의 사업이 잘되면 네 엄마가 허락할 수도 있으니. 게다가 처형은 지금 재혼할 마음이 없고 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너에게도 마음이 없다고. 네가 지금 처형에게 고백하면 망설임 없이 너를 거절할 거야. 네 곁에 설 자신도 없을 거고. 처형에게 시간을 줘. 어차피 처형은 지금 네 눈 밑에 있으니까 다른 남자에게 뺏길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잖아.”노동명이 지금 하예진에게 구애하면 실패할 것이 뻔했다.노동명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다시 생각해 볼게. 지금 당장 고백하겠다는 말은 아니야. 먼저 몸이 낫길 기다려야지. 나도 기다리길 원해. 36년 동안 솔로로 살아왔는데
아직 몸이 허약한 하예진은 곧 다시 잠이 들었다.우빈이도 하예정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하예정은 조카를 침대에 눕히고 얇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언니의 링거액이 곧 다 떨어지는 것을 보고 침대 머리맡의 벨을 눌러 간호사에게 와서 바꾸라고 알렸다.링거액을 바꾼 후 하예정은 몇 분 더 보고 나서야 돌아서서 살며시 밖으로 나갔다.문을 열고 들어온 전태윤은 아내가 홀의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다가와서는 그녀의 옆에 앉아 어깨를 감싸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러고 있어? 언니 잠들었어?”“우빈이랑 언니 다 잠들었어요.”그녀는 남편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여보.”“응.”하예정은 그저 한번 불렀을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여보,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전태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그녀는 그를 두 손으로 껴안고는 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부르고 싶으면 얼마든지 불러도 돼.”“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거, 봤어요.”“...여보, 그 파파라치들은 헛소리하는 것을 좋아하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파파라치가 뭐라고 했는지 못 봤어요. 전씨 그룹이 올린 당신의 해명 성명을 봤죠.”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던 것은 모두 철수됐고 하예정은 따로 찾아보지 않았지만 남편의 해명 성명을 보고 그녀는 자초지종을 짐작할 수 있었다.“여보, 날 그렇게 지켜줘서 고마워요. 남들이 믿든 안 믿든, 적어도 당신은 날 지켜줬어요.”남편은 모든 문제를 자신에게 떠맡았다.“당신은 내 아내야, 우리는 평생을 함께할 사이잖아. 내가 당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누구를 보호하겠어? 이 말도 내 진심이야, 난 그렇게 빨리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 우리가 결혼식을 올리고 둘만의 생활을 충분히 즐긴 후에 아이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해. 당신 정말 스트레스받을 필요 없어. 우리 부모님도 그러셨어, 운명에 맡기라고. 그러니 재촉하시지 않을 거야. 엄마는 10년 안에는 우리한테 아이에 대해 재촉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어.”하예정은 고개를 들
전태윤은 일부러 굳은 얼굴을 하며 말했다.“내가 벌을 받은 거야.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될 때까지 전화를 받았다니까. 심지어 준하까지 나를 신의에게 소개해 치료해 주겠다고 했어.”전태윤이 모두의 관심을 받는 장면을 상상하며 하예정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녀는 웃음을 겨우 멈추고 그에게 물었다.“준하 씨 신의와 아는 사이라 당신에게 소개해 주려 하는 걸 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운초 씨의 시력이 회복할 기회가 있는지 신의에게 보여야 하는데.”“그걸 깜빡 잊어버렸어.”전태윤은 웃으며 말했다.“쏟아지는 관심에 너무 화가 나 이진네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지 뭐야. 운초 씨의 고모도 A 시에 가서 신의를 찾은 적이 있는데 찾지 못했대. 하지만 예준하의 넷째 형 예준영과 신의의 유일한 제자인 정겨울은 무조건 부부로 될 거니, 이제 정겨울이 예씨 가문의 넷째 사모님이 되면 여운초의 눈을 보일 기회도 훨씬 많아질 거야.”“무조건?”전태윤은 가볍게 응하고는 계속 말했다.“정겨울은 예준영을 구한 적 있어. 그 후 임신했는데 별로 결혼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야. 다만 예씨 가문도 우리 전씨 가문처럼 책임감이 강한 타입이라 예준영은 정겨울이 임신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신의를 따라 정겨울을 찾아갔대. 예준하 말로는 아마 결혼할 거래. 정겨울은 아이를 낳기 전에 예준하를 따라 예씨 집안에 갈 거야. 다만 임신 중이라 진료하기가 불편할 테니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끝낼 때까지 몇 달 더 기다려야 할 거야.”하예정은 예씨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범상치 않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흥미진진하게 들었다.그들 부부는 원래 A 시로 여행을 가는 김에 예씨 집안을 방문하기로 했는데 지금 하예진이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하예정도 관성을 떠날 리가 없었다.여행 가는 일은 잠시 접어두었다.“당신 졸려? 먼저 가서 우빈이랑 함께 쉬어. 내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 싶으면 깨울게.”“우빈이 지금 엄청 깊이 잠들었어요. 그 무당 선생 말이에요, 정말 솜씨가 좋으신 것 같아요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
잠시 후, 차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아이는 고개만 돌려 살짝 보더니 다시 바비큐를 먹기 시작했다.“할머니, 저 왔어요.”멀리서 전이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이혁은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린 후,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풍겨오는 바비큐 냄새는 정말 좋았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 이런 날씨에는 바비큐가 최고죠.”관성의 겨울 날씨는 정말 변덕스러웠다. 어제는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추워서 할머니들은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온이 확 올라와 정오 무렵에는 햇빛까지 쨍쨍하게 비추더니 약간 더운 느낌마저 들었다.관성의 사람들은 겨울에 가끔 이렇게 바비큐를 해 먹긴 하지만 보통은 휴일이 되어야 준비해서 해먹을 여유가 있었다.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생각만 나면 언제든 자유롭게 바비큐를 즐길 수 있었다.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전이혁은 자신이 나중에 결혼하고 아들이 성장하면 당장 사업을 넘겨주고, 자신은 조기 은퇴해 할머니처럼 여유로운 노후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것은 신선놀음보다 더 행복한 삶이었다.“넷째 도련님.”양씨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전이혁에게 안부를 물었다.전씨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여러 할머니도 전이혁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그들은 전씨 할머니가 무려 아홉 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직 사회에 나오지 않은 막내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일곱 명의 손자는 이미 뛰어나고 유능한 인물들로 소문나 있었다. 게다가 막내 두 명은 비록 사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성적이 우수했고 앞날도 창창했다.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었다.전씨 가문은 자손들이 하나같이 훌륭했고 가업도 재산도 어마어마했으니, 그야말로 할머니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그들은 가끔 함께 수다를 떨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그 시절에도 그들보다 훨씬 잘 살았고, 그때부터 이미 가문에서 주름잡는 존재였다. 결국 훌륭한 어른이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전씨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여자아이를 불렀다.“소령이, 이리 와봐.”여자아이는 깡충깡충 뛰어갔다.“어르신, 닭 다리 다 구워졌어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자신에게 닭 다리를 주려고 부른 줄 알았다.전씨 할머니는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웃었다.“아직 다 안 구워졌어. 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 거야.”“그런데 왜 양씨 아저씨의 자리를 잇고 싶다고 했지?”전씨 할머니가 여자아이를 예뻐한다는 건 리조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전씨 가문은 몇 대째 아들만 태어났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딸을 가지길 원했었고, 그것이 안 되자 손녀를 기대해 보았지만, 매번 실망으로 마무리되었다.할머니는 이제 증손녀를 기대해 보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증손녀를 안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종종 직원들에게 집에 여자아이가 있으면 관성으로 데려와 학교도 보내고 같이 생활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리조트에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오라고도 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여자아이들이 리조트에 놀러 오게 되면 손주며느리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한테 증손녀를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양씨 아저씨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양씨 아저씨가 사는 집도 아주 예뻐요. 저도 양씨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요.”그 여자아이는 겨우 세 살밖에 안 됐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말도 잘해서 가끔 그 여자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어른들이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여자아이는 부모도 가르친 적이 없는 말을 스스로 내뱉곤 했었다.우빈이도 가끔 서원 리조트에 올 때마다 리조트에서 내려와 그 여자아이와 함께 신나게 놀곤 했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여자아이가 리조트에 올라와 우빈이와 함께 놀기도 했었다.“아까 양씨 아저씨가 한 말 잘 들었지? 네가 컸을 때는 양씨 아저씨는 이미 은퇴하고 다른 사람이 저 자리에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은퇴한 다음에야 네 차례가 오게 돼. 그보
할머니는 함께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말했다.“날씨가 좀 쌀쌀하네. 우리 따뜻하게 몸도 데울 겸 한 잔씩 할까?”“어르신.”전씨 할머니가 술을 마시자고 하자 양씨 아저씨는 바로 할머니를 제지했다.“어르신 술 마시면 안 됩니다. 큰 도련님께서 아시면 또 어르신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며 저를 혼내실 거예요.”“양 집사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태윤이는 점점 자기 할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아. 온갖 걸 다 간섭하려 들어.”할머니는 손자인 전태윤이 자신을 간섭하려 든다며 투덜거렸다.그러자 함께 있는 몇몇 할머니들이 웃기 시작했다.“큰 도련님께서 어르신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저희 나이에는 술도 적게 마시는 게 좋잖아요.”“과일주는 괜찮아. 양 집사, 가서 과일주 두 병 가져와. 바비큐에는 술이 있어야 제맛이지.”양씨 아저씨는 더 이상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리조트에 전화해서 과일주 몇 병을 가져오도록 했다.그들이 직접 잡은 생선 외에도 양씨 아저씨는 몇몇 어르신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바비큐용 식재료를 다양하게 준비했다. 어르신들 옆에는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양씨 아저씨는 그들을 위해 과일 주스를 준비해 두었다. 덕분에 그들은 기분 좋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전씨 할머니는 이렇게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생활을 참 좋아했다. 게다가 내년엔 첫 증손주가 태어나니 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할머니는 자신이 구운 소시지 한 꼬치를 여자아이에게 건네주고 그 아이의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소령이 갈수록 예뻐지네. 반짝이는 눈 좀 봐. 네 엄마가 너를 ‘소령이’라고 부르는 게 딱 맞아.”그 여자아이는 소시지를 건네받으며 귀엽게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어르신.”전씨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또 뭐 먹고 싶어? 할머니가 구워줄게.”“닭 다리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익숙한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씨 할머니에게 닭 다리를 구워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