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은 우빈이의 손을 잡고 정자를 나서며 전태윤에게 물었다.“여운초 씨의 두 고모가 찾아온 것은 아마도 뭔가 사정할 일이 있어서겠죠. 전 그 두 고모가 평소에 운초 씨를 배은망덕하다며 욕하며 이 기회를 틈타 여씨 일가의 모든 것을 차지하려고 한다는 것 외에는 몰라요. 자세한 건 신경 쓰지 않아서요, 그건 이진이가 신경 써야 할 일이에요.”여운초는 그저 미래의 제수씨일 뿐이다. 직접 와서 도와달라고 부탁하지 않는 한 전태윤도 그녀의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이진이도 별로 도와주지 못했을 거야. 운초 혼자서도 잘 처리할 수 있을 테니. 이진이는 운초 뒤에 서서 뒷바라지만 하면 돼.”할머니는 자신이 선택한 손자며느리를 매우 신뢰하고 있으며, 여운초가 여씨 그룹에 관한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전태윤은 할머니의 말을 받지 않았다.할머니도 곧 화제를 바꾸었다.둘째와 셋째는 할머니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좋은 아내감을 골라 줬으니, 스스로 알아서 구애하도록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다만 넷째와 다섯째의 아내감은 아직 정하지 못했다.그리고 여섯째 뒤의 손자들은 아직 어려 몇 년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남자아이는 일반적으로 여자아이보다 성숙이 느린 편이다.너무 일찍 결혼하면 한 가정의 무거운 짐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스스로 사업을 잘할 수 있을 때에 다시 아내를 얻어도 늦지 않다. 그때엔 가족의 도움이 없어도 한 가정의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있읕 테니까.“지금 날씨가 딱 좋구나. 태윤아, 얘네들을 데리고 우리집 섬에 가서 며칠 묵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할머니가 젊은이들에게 아이디어를 하나 제안했다.“일단 할머니부터 보고요. 할머니는 어때요? 섬에 가고 싶어요?”“이 늙어 빠진 할미는 빠지겠다. 너희 젊은이들끼리 가서 며칠 놀다 오거라. 동생들도 잊지 말고 부르고.”할머니는 넷째와 다섯째 손자의 아내로 택한 여자들의 인품을 조사하러 가야 했다. 인품이 훌륭하거든 확정할 생각이었다.전태윤은 응하며 고개를 끄
전태윤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이건 하예정이 전씨 일가에 시집온 후 반드시 직면해야 할 책임이니까.남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예정이 입을 열었다.“그럼 요 며칠 태윤 씨가 집에 있는 동안 잘 배워야겠어요. 모르는 부분은 하나하나 물어볼게요.”그녀는 자신이 전씨 일가의 사모님으로서 이런 일들에 대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다만 이 정도로 많은 산업을 직접 관리해야 할 줄은 몰랐다.또한 앞으로 규모가 거대한 서원 리조트도 관리해야 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하예정은 모연정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예진 리조트를 관리하고 있는 것을 보았었다.이젠 하예정의 차례가 되었다. 모연정처럼 시댁의 일에 대해 어느 정도 맡아야 할 듯했다. 모연정은 이미 관리 일을 시작한듯 했지만 하예정은 아직 손을 대지도 않았다.모연정은 패기가 있다. 비록 재벌가라고는 할 수 없는 모씨 가문에서 자랐지만,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집안이었고 온 집안 식구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 자신감이 있었고 성격도 밝았다.나중에 모연정은 친부모를 찾게 되었는데 친아버지는 만성 남씨 가문의 주인이었다. 때문에 남씨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는 것은 고사하고 친아버지의 개인 재산을 물려받는 것만으로도 몇십조의 재산을 가지게 된다.다시 말해 돈도 있고 지위도 있고 패기까지 있는 틀림없는 여자 갑부였다.그녀와 비하자니 하예정은 뭔가 기가 죽을 듯했다.하지만 전태윤과 시댁 식구들의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생각하면 자신감이 솟아났다. 앞으로 관리일을 시작한 후 잘못하여 실수를 저지른다고 해도 시댁 식구들은 그녀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잘못을 교훈 삼아 진보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할 것 같았다.“태윤이는 외부 사업을, 넌 내부 관리를 책임지면 된다. 즉 상가 건물 임대와 일부 체인점의 운영을 책임지는 거야. 얼마 안 되니까 이 할미는 네가 빨리 적응할 수 있을 거로 믿는다.”할머니는 하예정이 너무 스트레스받지 않도록 웃으며 위로했다.진짜 사업상의 일은 전태윤이 맡고 있다.하지만 하예정도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전씨 일가는 하예정이 가족 사업에 손을 댈 수 있도록 안배했다. 이는 인정하고 신뢰하는 표현이다.이에 하예진은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동생은 그녀보다 훨씬 운이 좋았다.처음에 하예진을 안심하게 하기 위해 초고속 결혼을 했던 전태윤과 하예정 부부는 낯선 사이로부터 알콩달콩한 사이로 되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전씨 일가는 재벌가로서 하예정의 출신에 대해 한 번도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었다.만약 다른 재벌 가문이었다면 이는 매우 보기 드문 현상이다.하예진은 마음속으로 동생 대신 기뻐했다.하예정은 시어머니의 한쪽 팔짱을 낀 채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어머니, 우리 방금 돌아왔는데 나 좀 쉬게 해주면 안 돼요?”장소민은 하예정의 이마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그렇게 놀고도 아직도 놀고 싶어? 요즘은 가게를 지키는 것 외에 투자한 채소밭을 드문드문 둘러보는 것뿐이니 바쁘지는 않을 테고.”그녀는 아들을 한눈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태윤이랑 사랑질하느라 바쁜 거지?”하예정은 시어머니의 놀림에 얼굴이 빨개졌다.“가자, 위층으로.”장소민은 며느리가 어리광을 부리든 말든 상관없이 2층으로 데리고 갔다.2층에는 두 개의 서재가 있다.큰 서재는 전태윤 부자가 자주 사용했고 작은 서재는 장소민이 독점하여 쓰고 있다. 작은 서재의 키는 장소민과 할머니만이 가지고 있다.다만 할머니는 며느리인 장소민이 시집온 후로부터 온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 맏며느리인 그녀에게 맡겼고, 작은 서재에도 거의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이 작은 서재에 들어가려면 장소민이나 할머니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둘째 며느리와 셋째 며느리는 시댁의 비즈니스에 관해 잘 알고는 있지만 직접 관리할 필요가 없었기에 자기 집의 개인 사업만 챙겼다. 어쩌다가 도움이 필요할 때만 시댁의 비즈니스에 개입하곤 했다.혹시라도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장소민이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절대 함부로 개입하지 않았다.또한 자기 집안의 사업만으로도 할 일이 아주 많았고, 능
“옛 장부는 이미 새 장부에 다시 베껴 써놨어.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말이야.”장소민은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를 가리키며 하예정에게 말했다.“장부가 너무 많아서 찾기 어려울까 봐 컴퓨터에도 장부를 해놨으니까 컴퓨터로 찾으면 훨씬 편리할 거야.”하예정은 책장들을 둘러보면서 놀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시어머니에게 물었다.“어머니, 이것들 모두 우리 집 비즈니스에 관한 장부예요?”“그래.”“...할머니께선 그저 상가 임대 상황과 체인 스토어 같은 작은 비즈니스를 관리하는 거라고 하셨어요.”장부가 이렇게 많은 것을 보고 하예정은 순간 자신이 요 며칠 휴가일 동안 전씨 일가의 모든 산업 상황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느껴졌다.정말 장부가 엄청나게 많았다.그녀는 회계 관리에 대해 배운 적이 없어 초보자나 다름없다.“할머니 말이 맞으셔. 다 작은 비즈니스들이야. 넌 그냥 어디에 있는지, 누가 그 비즈니스를 관리하고 있는지만 알면 돼. 매달 이윤인지 적자인지는 보고서를 보내오는 사람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지만 너도 어느 정도 몰래 알아둬. 속지 않게 말이야.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약간 탐하는 것에 관해서는 눈감아 주고. 어차피 처벌 받으면 그들도 좋은 일자리를 잃게 되는 거니까 보통은 함부로 손을 대지도 못해. ”전씨 일가의 명성이 보통 높은 게 아닌지라 관리팀은 자신의 일자리를 잃게 될까 봐 함부로 손대지 못했다. 게다가 전씨 일가도 관리팀을 대할 때는 항상 일정한 정도의 이익을 남겨주었다. 일을 잘 하기만 하면 푸대접을 받지 않았다.장소민은 하예정이 너무 꼭 잡을까 봐 몇 마디 주의를 주었다.하예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모를 부분은 어머니께 여쭤볼게요. 이 장부들 다 읽어야 해요?”“잠시 먼저 각 장부의 첫 세 페이지를 보도록 해. 첫 페이지는 각 업종이 처한 위치야.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야. 두 번째와 세 번째 페이지는 일반적으로 인사 안배에 관한 자료야. 그들의 상세한 자료와 사진이 있어. 얼추라도 기억해 두면 후에 관
“앞으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우리에게 물어봐. 태윤이에게 물어봐도 되고. 비록 주로 외부 비즈니스를 관리하고 있지만 내부에 관한 일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거야.”하예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자신의 뒤엔 남편 전태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그녀는 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내려갈 거야 아니면 여기 남아서 장부를 볼 생각이야?”장소민이 물었다.하예정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언니와 동명 씨가 오셨으니까 먼저 같이 내려가요. 장부는 너무 많아서 짧은 시간 안에 다 볼 수도 없을 것 같아요. 저녁에 시간이 나면 다시 들어와 보도록 할게요.”장소민은 그에 가볍게 응했다.둘은 나란히 작은 서재를 나섰다. 장소민은 내려가기 전에 서재 문을 다시 잠그면서 말했다.“서재는 중요한 곳이라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어. 서재 안을 거두는 일은 우리가 책임져야 해. 네가 집에 없을 땐 내가 청소를 맡을게. 후에 네가 태윤이와 리조트로 돌아와 살게 되면 모든 걸 너에게 맡길 거야.”“알겠어요.”어쩐지 전태윤은 그녀를 리조트로 데려오는 것을 꺼린다 싶었다.거리가 멀어서 출퇴근이 불편한 것은 물론, 중요한 건 아내가 너무 일찍 사모님의 책임을 짊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오래 즐겁게 놀면서 지내기를 바랐다.하예정은 남편의 배려에 깊이 감동받았다.남편은 자신을 정말 사랑했다.장소민과 하예정이 작은 서재에 들어갔을 때 전이진의 친어머니이자 전태윤의 둘째 숙모인 명해은이 침대에서 일어났다.여미란과 여미정이 왔다는 것을 전해 들었지만 그들에 대에 별로 인상이 없었다. 이에 양씨 아저씨가 설명해 주었다.“여씨 일가 큰아가씨의 두 고모님이십니다.”“운초 씨의 고모님이었어요? 그럼 안으로 모셔 와요.”명해은은 소파에 우아하게 앉아 양씨 아저씨에게 분부하여 리조트 입구의 경비실에 알려 오래 기다린 둘을 안으로 들여보내라고 했다.명해은은 여씨 일가의 세 사모님에 대한 인상이 없다. 예전의 여씨 일가는 그저 실력이 조금 있
여운초는 시어머니가 아들에게 택해준 아냇감이라 명해은은 여씨 일가에 대해 높은 관심이 있었다. 그녀는 여씨 일가의 두 고모가 갑자기 방문한 이유가 궁금했다.여운초의 두 고모가 들어왔을 때 명해은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로비 소파에 앉아 패션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양씨 아저씨가 직접 그녀들에게 길을 안내해 주었다.“사모님, 여운초 아가씨의 고모님들이 왔습니다.”명해은은 가볍게 응하고는 잡지를 덮어 테이블 위에 놓고 일어나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사모님.”비록 두 자매도 재벌들과 어울려 다닌다고 할 수 있지만 진정한 상류층 사모님들 사이에는 낄 수 없었다. 전씨 일가 사모님들의 사교 울타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오늘 두 자매는 함께 오기로 약속했다. 둘은 명해은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소리에 아무 말 못 하고 밖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다.이건 그녀들이 너무 일찍 온 탓도 있었다. 두 고모는 명해은도 그녀들처럼 일찍 일어나 온 집안 식구들의 아침을 준비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야 침대에서 일어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결국 몇 시간을 헛되이 기다렸다.“두 분 어서 앉으세요.”명해은은 두 사람을 보고 누가 언니고 누가 동생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여미란은 여동생을 끌고 오더니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사모님, 저는 운초의 큰고모인 여미란이에요. 이쪽은 저의 여동생인 여미정이예요.”명해은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이 자기소개를 다 하기를 기다린 후 앉으라고 청했다.그리고 도우미에게 차와 디저트를 올리라고 분부했다.몇 마디 수다를 떤 후 여미정은 조용히 언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여동생의 뜻을 이해한 여미란은 웃으며 명해은을 향해 입을 열었다.“사모님, 저희 자매가 오늘 실례를 무릅쓰고 방문한 것은 사모님께 드릴 말이 있어서예요.”명해은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두 자매의 눈에 그녀의 미소는 우아하기 그지없었다.“말씀해 보세요.”여미란은 여운초가 전이진의 호감을 샀다는 사실에 질투
여미정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우리 운초는 둘째 도련님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전씨 일가 사람들도 운초가 장님이란 사실은 받아들이지 못 할 거 아니에요. 게다가 자기 친어머니를 고소하기까지 하다니, 이런 불효한 일을 저질렀는데 더더욱 어울릴 자격이 없죠.”‘이 일 때문에 온 거였어?’명해은은 두 사람의 의도를 알아챘다.전이진이 여운초에게 잘해주는 것을 지켜볼 수가 없어 직접 찾아와 여운초의 명성을 망쳐 두 사람을 갈라 놓으려는 속셈이었다.‘두 사람, 정말 운초의 친고모 맞아?’이 정도로 자기 조카가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하다니.“운초 씨와 이진의 일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신 거예요?”명해은은 얼굴의 미소를 거두었다.“정말 운초 씨가 이진이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운초 씨의 행동이 불효하다고 생각해요? 친엄마를 고소한 일은 들은 적 있어요. 만약 운초 씨의 친아버지가 정말 친엄마의 손에서 살해당한 거라면 이건 본인이 가장 큰 상처를 받았을 거예요. 고모로서 조카 편이 돼주어야 하는 게 아니에요? 운초 씨의 친아버지도 당신들과 같은 어머니 배에서 태어난 친남매 아닌가요?”“...”“설마 제수가 당신들 동생을 죽인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죽어 마땅할 정도로 큰 죄를 저질렀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게다가 딸로서 아버지가 어머니의 손에 죽었다는 걸 알고도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헛되이 죽도록 내버려둘 수 있었겠냐고요.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지지했을 거예요.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거든요.”두 자매는 말문이 막혔다.잠시 후, 여미란은 입을 열었다.“운초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정말 안 됐어요. 하지만 이 점을 떠나서 운초는 둘째 도련님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우리가 오늘 실례를 무릅쓰고 사모님을 찾아온 것은 사실 우리의 조카를 위해서예요.”여미정도 말을 거들었다.“운초는 감정에 대해 진지한 사람이라 한번 마음이 움직였다 하면 평생 그 사람만을 바
명해은은 말을 마친 후 여씨 자매를 쳐다보았다.두 자매는 이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명해은이 여운초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꺼리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비록 그녀들도 전씨 일가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마음이 넓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토록 훌륭한 전이진이 장님인 여운초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인 명해은도 꺼리지 않아 한다니... ‘재벌 집 시어머니는 모두 성격이 까다로운 거 아니었나?’“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명해은이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별일 없으시면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거로 해요. 저도 약속이 있어 나가봐야 해서요.”이만 떠나가라는 뜻이었다.여미란은 급히 답했다.“우리도 더 이상 할 말은 없어요. 사모님께서 운초가 장님인 것을 꺼리지 않는다고 하시니 우리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을게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말을 마친 후 그녀는 일어서면서 동생에게 일어나라고 눈치를 주었다.그들 자매는 명해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집사 양씨 아저씨의 안내로 화려한 홀을 나섰다.그녀들이 떠난 후 명해은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얼마 후 양씨 아저씨가 들어왔다.“경비실 사람들에게 앞으로 여미란과 여미정이 다시 오게 되면 알리지 말라고 하세요.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네요.”양씨 아저씨는 공손히 응했다.“이진이는 아직 안 돌아왔어요?”“아직입니다. 다른 도련님들은 속속들이 돌아오는 중이에요.”명해은은 그에 가볍게 응하고는 잡지를 집어 들어 몇 페이지 뒤적거리다가 다시 테이블 위에 던지고는 휴대폰을 꺼내 전이진에게 전화했다.양씨 아저씨는 그녀가 전화하는 것을 보고 말없이 물러갔다.전이진은 곧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엄마.”전이진은 의외라고 생각했다.평소 부모님은 큰일이 없으면 거의 전화를 하지 않는다. 아들이 어떻게 지내건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네 형들은 모두 리조트로 돌아왔는데 넌 돌아올 생각 없어?”“잠시 돌아가지 않으려고요. 무슨 일 있어요?”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
잠시 후, 차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아이는 고개만 돌려 살짝 보더니 다시 바비큐를 먹기 시작했다.“할머니, 저 왔어요.”멀리서 전이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이혁은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린 후,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풍겨오는 바비큐 냄새는 정말 좋았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 이런 날씨에는 바비큐가 최고죠.”관성의 겨울 날씨는 정말 변덕스러웠다. 어제는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추워서 할머니들은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온이 확 올라와 정오 무렵에는 햇빛까지 쨍쨍하게 비추더니 약간 더운 느낌마저 들었다.관성의 사람들은 겨울에 가끔 이렇게 바비큐를 해 먹긴 하지만 보통은 휴일이 되어야 준비해서 해먹을 여유가 있었다.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생각만 나면 언제든 자유롭게 바비큐를 즐길 수 있었다.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전이혁은 자신이 나중에 결혼하고 아들이 성장하면 당장 사업을 넘겨주고, 자신은 조기 은퇴해 할머니처럼 여유로운 노후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것은 신선놀음보다 더 행복한 삶이었다.“넷째 도련님.”양씨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전이혁에게 안부를 물었다.전씨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여러 할머니도 전이혁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그들은 전씨 할머니가 무려 아홉 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직 사회에 나오지 않은 막내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일곱 명의 손자는 이미 뛰어나고 유능한 인물들로 소문나 있었다. 게다가 막내 두 명은 비록 사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성적이 우수했고 앞날도 창창했다.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었다.전씨 가문은 자손들이 하나같이 훌륭했고 가업도 재산도 어마어마했으니, 그야말로 할머니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그들은 가끔 함께 수다를 떨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그 시절에도 그들보다 훨씬 잘 살았고, 그때부터 이미 가문에서 주름잡는 존재였다. 결국 훌륭한 어른이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전씨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여자아이를 불렀다.“소령이, 이리 와봐.”여자아이는 깡충깡충 뛰어갔다.“어르신, 닭 다리 다 구워졌어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자신에게 닭 다리를 주려고 부른 줄 알았다.전씨 할머니는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웃었다.“아직 다 안 구워졌어. 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 거야.”“그런데 왜 양씨 아저씨의 자리를 잇고 싶다고 했지?”전씨 할머니가 여자아이를 예뻐한다는 건 리조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전씨 가문은 몇 대째 아들만 태어났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딸을 가지길 원했었고, 그것이 안 되자 손녀를 기대해 보았지만, 매번 실망으로 마무리되었다.할머니는 이제 증손녀를 기대해 보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증손녀를 안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종종 직원들에게 집에 여자아이가 있으면 관성으로 데려와 학교도 보내고 같이 생활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리조트에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오라고도 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여자아이들이 리조트에 놀러 오게 되면 손주며느리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한테 증손녀를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양씨 아저씨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양씨 아저씨가 사는 집도 아주 예뻐요. 저도 양씨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요.”그 여자아이는 겨우 세 살밖에 안 됐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말도 잘해서 가끔 그 여자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어른들이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여자아이는 부모도 가르친 적이 없는 말을 스스로 내뱉곤 했었다.우빈이도 가끔 서원 리조트에 올 때마다 리조트에서 내려와 그 여자아이와 함께 신나게 놀곤 했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여자아이가 리조트에 올라와 우빈이와 함께 놀기도 했었다.“아까 양씨 아저씨가 한 말 잘 들었지? 네가 컸을 때는 양씨 아저씨는 이미 은퇴하고 다른 사람이 저 자리에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은퇴한 다음에야 네 차례가 오게 돼. 그보
할머니는 함께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말했다.“날씨가 좀 쌀쌀하네. 우리 따뜻하게 몸도 데울 겸 한 잔씩 할까?”“어르신.”전씨 할머니가 술을 마시자고 하자 양씨 아저씨는 바로 할머니를 제지했다.“어르신 술 마시면 안 됩니다. 큰 도련님께서 아시면 또 어르신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며 저를 혼내실 거예요.”“양 집사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태윤이는 점점 자기 할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아. 온갖 걸 다 간섭하려 들어.”할머니는 손자인 전태윤이 자신을 간섭하려 든다며 투덜거렸다.그러자 함께 있는 몇몇 할머니들이 웃기 시작했다.“큰 도련님께서 어르신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저희 나이에는 술도 적게 마시는 게 좋잖아요.”“과일주는 괜찮아. 양 집사, 가서 과일주 두 병 가져와. 바비큐에는 술이 있어야 제맛이지.”양씨 아저씨는 더 이상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리조트에 전화해서 과일주 몇 병을 가져오도록 했다.그들이 직접 잡은 생선 외에도 양씨 아저씨는 몇몇 어르신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바비큐용 식재료를 다양하게 준비했다. 어르신들 옆에는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양씨 아저씨는 그들을 위해 과일 주스를 준비해 두었다. 덕분에 그들은 기분 좋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전씨 할머니는 이렇게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생활을 참 좋아했다. 게다가 내년엔 첫 증손주가 태어나니 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할머니는 자신이 구운 소시지 한 꼬치를 여자아이에게 건네주고 그 아이의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소령이 갈수록 예뻐지네. 반짝이는 눈 좀 봐. 네 엄마가 너를 ‘소령이’라고 부르는 게 딱 맞아.”그 여자아이는 소시지를 건네받으며 귀엽게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어르신.”전씨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또 뭐 먹고 싶어? 할머니가 구워줄게.”“닭 다리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익숙한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씨 할머니에게 닭 다리를 구워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