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끊은 후 전태윤이 강일구에게 분부했다.“내가 집에 없는 동안 너희 사모님 잘 지켜드려.”“걱정 마십시오, 도련님. 반드시 잘 모시겠습니다.”사모님이 워낙 몸이 날렵하시다 보니 사모님을 보호하는 일은 그야말로 홀가분한 임무였다.게다가 보너스가 두배라니!강일구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이게 바로 사모님 곁에 남아있는 장점이었어!’“사모님이 어려움에 부딪혀 도움이 필요하면 할머니께 말씀드려. 할머니가 알아서 하실 거야. 혹은 전이진한테 얘기해도 돼.”“걱정 마세요, 도련님. 무릇 사모님께서 어려움에 부딪히면 어르신은 반드시 아시게 될 겁니다.”무슨 일이든 어르신의 손바닥 안에 있으니까.전태윤도 할머니의 실력을 되새기며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가 가장 의외인 것은 한동안 보이지 않던 성소현이 또다시 회사 문 앞에 찾아왔다는 사실이다.그녀는 빨간색 스포츠카에 기댄 채 전태윤의 경호팀 차들이 서서히 들어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기사가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도련님, 성소현 씨가 또 왔습니다.”전태윤이 침묵하다가 기사에게 분부했다.“소현 씨 앞에 거의 도착할 때 잠시 차 세워.”기사와 강일구는 모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성소현과 사모님이 친한 친구 사이로 되었지만 도련님은 늘 성소현에게 싸늘한 태도를 선보였다. 그나마 친절하게 대해주는 건 심효진 씨였다. 왜냐하면 심효진 씨와 도련님이 가장 친분이 깊기 때문이다.게다가 심효진 씨가 사모님을 데리고 함께 서점을 운영했다.운전기사는 도련님의 분부를 따랐다.성소현은 아직도 고민 중이었다.‘전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뛰쳐나가서 차를 가로막아버려?’다만 이때 전태윤이 탄 롤스로이스가 그녀 앞에서 저절로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고 전태윤이 안에서 내려왔다.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잘생기고 눈부실 따름이었다.성소현은 넋 나간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얼른 정신을 가다듬었다.‘이 사람은 이젠 유부남이야.’“대표님, 너무 긴장할 거 없어요. 오늘은 대표님한테
성소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다가 고개를 돌려 촉촉해진 눈가를 닦았다. 그렇게 먼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했다. 다시 전태윤을 마주했을 땐 모든 걸 받아들인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태윤 씨 그 한마디면 됐어요. 오랫동안 태윤 씨를 좋아한 게 헛되지는 않았네요.”그녀가 털털하게 악수를 청하자 전태윤도 흔쾌히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태윤 씨, 아내분이랑 평생 행복하게 지내길 바라요.”“고마워요, 소현 씨.”“나중에 두 분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전태윤이 손을 거두며 진중하게 말했다.“결혼식 날짜 잡으면 성 대표님이랑 소현 씨한테 꼭 청첩장 보낼게요.”“그럼 기다릴게요.”성소현이 웃는 얼굴로 계속하여 말했다.“대표님 바쁘실 텐데 더는 귀한 시간 뺏지 않을게요.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녀는 전태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는 곧장 스포츠카를 타고 전씨 그룹을 떠났다.처음으로 이토록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가 다 회복되면 그녀도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전태윤이 차에 올라타자 운전기사가 바로 시동을 걸었다.운전기사는 두 사람이 또 한바탕 실랑이를 벌일 거로 생각했는데 성소현이 축복하러 왔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소현 씨는 사랑에 최선을 다했다가 아닌 건 포기할 줄도 아는 참 대단한 여자야.’운전기사든 전태윤의 경호원이든 성소현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적어도 그녀는 더 매달리지 않았다.성소현은 하예정에게 갈 참이었으나 가던 길에 또 갑자기 생각을 바꿨다. 집으로 돌아가 엄마와 함께 유전자 검사 결과를 가지러 유전자 검사 센터로 가야 했다. 하여 성소현은 다시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집에 도착했을 땐 벌써 오전 9시가 넘었다.이경혜가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어 안절부절못하자 성문철이 말했다.“너무 조급해하지 마. 결과가 나와도 다른 사람이 가져가지 않아.”“한시라도 빨리 예정이가 내 조카가 옳은지 아닌지 결과를 알고 싶어
“그래, 우리 소현이가 훌륭하긴 하지. 성씨 가문 딸은 시집 못 갈 걱정 안 해.”이경혜는 누구보다 딸을 잘 알았다. 성소현이 마음을 접는다고 했으니 꼭 그렇게 할 것이다.그때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유청하가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아가씨가 돌아왔나 봐요.”밖으로 나가보니 정말로 시누이였다. 차에서 내린 성소현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새언니에게 다가왔다.“언니, 엄마 아직 집에 있어요?”환하게 웃는 시누이의 모습에 유청하는 마음이 아렸다. 차라리 이렇게 웃지 말고 펑펑 울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성소현이 아무렇지 않은 척 해맑게 웃을수록 그녀의 마음이 더 아프다는 걸 뜻하니까.‘어휴.’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데 남자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말이다.“네, 아직 집에 있어요. 아가씨, 괜찮아요?”“안 괜찮아 보여요?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마지막 인사를 하고 왔을 뿐인데요, 뭐.”성소현은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했지만 더는 전태윤의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새언니의 팔짱을 다정하게 끼며 말했다.“언니, 그만 들어가요.”성소현이 돌아오자 이경혜는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이경혜는 가족들과 함께 유전자 검사 센터로 향했다.떨고 있는 이경혜와 달리 하예정은 무척이나 침착했다. 그녀는 카운터에 앉아 공예품을 열심히 만들다가 전씨 할머니와 숙희 아주머니를 힐끗 보고는 심효진에게 말했다.“태윤 씨 출장 갔어. 요 며칠 놀러 갈 데 있으면 나도 끼워줘.”요즘 그녀의 삶은 우울함의 연속이었다. 아무래도 친구들과 신나게 놀면서 기분을 풀어야 할 듯싶다. 가능하다면 언니와 조카도 함께 데려가면 더 좋고.심효진이 웃으며 말했다.“쇼핑하고 맛있는 거 먹는 거 말고 뭐가 있어? 너 상류층의 파티는 싫어하잖아. 소현 씨 실연당했대. 소현 씨랑 술이나 한잔할까?”하예정이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술은 됐어. 나 주량이 별로라 못 마셔. 그리고 언니도 나 술 못
하예정이 피식 웃었다.“소현 씨가 그러는데 소정남 씨는 정보 집안 출신이라 함께 있으면 재미난 구경을 가장 먼저 할 수 있대. 너 그런 거 가장 좋아하잖아. 소정남 씨는 정말 너한테 딱이야. 둘이 아주 잘 어울려.”심효진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가 남자친구를 찾는 게 결혼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재미난 구경을 하기 위해서인가?“예진 언니네 전 시댁 식구들이 또 찾아왔었다고?”심효진은 더는 그녀가 장난하지 못하게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언니가 이혼하고 그 집에서 나오자마자 그 집안사람들이 짐을 챙기고 들어가려고 했대. 그런데 지금은 월세방이나 호텔에서밖에 지내지 못해. 아마 구정도 여기서 보낼 거야. 절대 본가로 돌아갈 사람들이 아니야.”주씨 가문 사람이라면 무조건 올해 설은 시내에서 보낸다고 여기저기 자랑했을 것이다. 하여 머무를 집이 없는 이 상황에 집을 구해서라도 이곳에서 설을 보낼 것이다.하예정은 투명 망토라도 걸치고 그 집안에 들어가 재미난 구경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집 인테리어를 전부 부순 걸 보고 엄청 놀랐을 거야.”하예정이 크게 웃었다.“당연하지.”주씨 가문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각 하 영감을 찾으러 관성 종합병원에 도착했다.하씨 집안 할머니는 수술 후 회복이 꽤 잘 되어 며칠만 더 병원에 있다가 퇴원해도 된다고 한다.김은희가 딸과 사위와 함께 병원으로 쳐들어갔다. 주경진은 호텔에 남아 세 외손주를 챙긴다는 핑계로 오지 않았다. 사실 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창피해서였다.“하 영감!”김은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병실 안으로 쳐들어왔다. 하 영감은 딸과 사위와 함께 온 그녀를 보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우리 아들이랑 손자는 어디 간 거야? 저 미친 여자를 말리지도 않고.’“사돈, 이 사람이 아직 병상에 누워있으니 목소리 좀 낮춰요.”하 영감은 따뜻한 물을 한잔 따라 아내에게 먹여준 후 컵을 침대 머리맡 서랍 위에 덤덤하게 내려놓았다.“사돈, 병문안 왔다는 사람이 빈손으로 왔어요? 나이도 먹을 만큼
“하 영감, 당신 분명 내가 준 현금 1200만 원을 받았잖아. 그 돈은 내가 엄청 오랜 시간 모은 비상금이란 말이야. 돈 받을 때 하예정을 설득하기로 약속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내 아들이랑 하예진이 결국 이혼했다고.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돈 돌려줘. 안 그러면 신고할 거야.”하 영감이 돈을 받은 걸 인정하지 않자 김은희는 너무도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 영감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신고하고 싶으면 해. 내가 무서워할 줄 알고? 돈을 받았으면 뭐? 그건 그때 못 받은 예물이야. 우리 손녀가 당신 아들이랑 결혼할 때 예물 일전 한 푼도 받지 못했어. 예물을 고작 천만 원이 넘는 돈으로 퉁 쳤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사돈, 사돈도 딸이 있잖아. 딸을 시집보낼 때 예물 일전 한 푼 받지 않고 보낼 수 있어?”김은희가 분통을 터뜨렸다.“예물이라니! 당신 예진이를 키운 적이 있어? 무슨 자격으로 예물을 받으려는 건데? 이혼한 마당에 예물을 준다는 게 말이 돼? 당장 돌려줘!”“없어. 남은 건 목숨밖에 없으니까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봐.”하 영감의 당당한 태도에 김은희는 당장이라도 그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서인이 그런 김은희를 말렸다.“엄마, 저 사람 건드리지 마. 나이가 많아서 바닥에 드러눕기라도 하면 우리만 손해야.”“아이고, 여보. 나 숨을 못 쉬겠어, 너무 힘들어. 저 사람들이 여기서 너무 소리를 질러서 그래. 아이고, 나 죽겠네...”침대에 누워있던 하씨 집안 할머니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얼굴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하 영감은 재빨리 응급 벨을 눌러 의사와 간호사를 불렀다. 그러고는 김은희 일행을 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우리 아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앞으로의 병원비는 당신들이 책임져야 할 거야.”“지금 아픈 척하는 거잖아요!”주서인은 어머니와 남편을 끌고 병실을 나서며 욕설을 퍼부었다.“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또 올 겁니다.”“돈은 무슨 돈! 없어
고급 자동차 여러 대가 관성 중학교 정문을 지나 하예정의 서점 문 앞에 멈춰 섰다.옆집 정씨 아저씨네에서 수다를 떨던 전씨 할머니는 자동차를 보자마자 바로 고개를 숙였다. 혹시라도 차에서 내린 사람이 전씨 할머니를 알아보면 안 되니까.“예정 씨, 예정 씨.”차에서 내린 성소현은 하예정의 이름을 부르며 서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옆집 가게 문 앞에 있는 전씨 할머니를 발견하지 못했다.뒤따라 내리던 성문철은 눈물범벅인 아내를 부축하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유청하는 경호원들에게 문 앞을 잘 지키라고 분부한 뒤 들어갔다.한창 날개를 펼친 독수리를 만들고 있던 하예정은 성소현의 부름에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성소현을 올려다보았다.“소현 씨, 왔어요? 밥은 먹었어요? 아직 안 먹었으면...”성문철의 부축을 받으며 눈물범벅인 채로 들어오는 이경혜를 본 순간 하예정은 바로 알아챘다.‘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왔구나.’이경혜의 표정만 봐도 그녀와 이경혜가 혈연관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예정아.”이경혜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하예정을 품에 끌어안으며 목놓아 울었다.“이모가 얼마나 오래 찾아다녔는지 알아?”그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고 그저 하예정을 안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하예정은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딱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내 여동생 가여워서 어떡해.”일찍 세상 떠난 여동생 생각에 이경혜는 계속하여 목놓아 울었다. 하예정도 그런 그녀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심효진과 주우빈, 숙희 아주머니는 먼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 상황을 알 리 없었던 주우빈은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성소현과 유청하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성문철이 앞으로 다가가 아내를 부축하며 다정하게 위로했다.“그만 울어. 조카를 찾은 건 얼마나 좋은 일인데 기뻐해야지, 울어서야 하겠어?”이경혜는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여동생과 두 조카가 그동안 겪은 고초만 생각하면 마음이 칼로 도려내듯이 아파 가슴을 마구 내리쳤다.“내가 애들
성문철과 성소현은 이경혜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유청하가 잊지 않고 검사 결과를 챙겼다.유청하가 검사 결과를 하예정에게 건넸다. 결과를 본 하예정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결과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예정아, 넌 내 조카고 난 네 이모야.”이번 생에 여동생과 만날 기회는 없지만 두 조카를 찾은 것만으로도 이경혜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그녀는 하예정의 손을 잡으며 이제부턴 이모라고 부르라고 했다.“예진이랑 우빈이는?”이경혜는 다른 조카를 떠올렸다.“언니 점심에는 안 와요. 저녁 5시 30분에 퇴근해서 와요.”하예정은 얘기하며 심효진에게 눈짓을 보냈다. 심효진이 주우빈을 안고 오자 하예정이 주우빈을 안았다.“아주머니...”하예정이 입을 열자마자 이경혜가 말했다.“예정아, 이모라고 불러야지. 이모는 꿈에서도 너희들을 찾아다녔어. 인제 겨우 찾았는데 왜 낯설게 아주머니라고 불러.”하예정은 잠깐 침묵하다가 이모라고 호칭을 바꿨다.유전자 검사 결과 그녀와 이경혜가 혈연관계가 있다는 건 이경혜가 그녀의 이모란 뜻이었다.이런 드라마틱한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이모라는 소리에 이경혜의 눈시울이 또 붉어지자 성소현이 재빨리 말했다.“엄마, 그만 울어요. 우빈이도 여기 있는데 엄마가 울면 우빈이 놀란단 말이에요.”심효진과 숙희 아주머니가 생수와 과일을 내왔다.이경혜가 주우빈을 안으려 하자 주우빈은 몸을 틀며 하예정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우빈아, 난 우빈이 이모할머니야.”이경혜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우빈을 달랬다.“이모할머니가 우리 우빈이 안아봐도 될까?”그러자 주우빈이 그녀의 손을 밀쳐내며 엉엉 울었다.“싫어요, 싫어요. 이모가 안아줘요.”주우빈의 격한 반응에 이경혜는 하는 수 없이 포기했다. 주우빈이 당한 일을 떠올린 그녀가 매섭게 말했다.“그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들이 우빈이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절대 가만 안 둬!”큰 조카와 주형인이 이혼했고 그녀와 하예정 자매의 관계도 밝혀졌다. 이경혜는 지금이라도 나서서 뭐라도 하
그녀는 나중에서야 자신이 얼마나 재미있는 구경을 놓쳤는지 알게 되었고 자신을 부르지 않은 심효진과 하예정에게 서운한 마음마저 들었다.심효진은 하예정에게 성소현을 부르는 게 어떻겠냐고 귀띔했었지만 부잣집 따님인 성소현에게 난폭한 장면을 보여줄 수 없다면서 하예정이 거절했다고 말했다.성소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부잣집 딸인 건 맞지만 난 성소현이야. 관성의 상류 사회에서 나의 명성이 좋지 않은 걸 모르나? 다들 날 무지막지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런 내가 난폭한 걸 두려워하겠어? 기분 나쁠 땐 일부러 난폭하게 굴기도 하는데.’“받아야 하는 건 다 받았는데 인테리어 비용만 돌려주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언니 부탁을 받고 사람을 데려다가 인테리어를 전부 다 부숴버렸어요.”이경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당연히 그래야지. 주씨 가문이 날로 먹게 해서는 안 되지.”그러더니 또 이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가 진작 알았더라면 친정집 식구로서 사람들을 데려가 인테리어 비용을 받아냈을 텐데. 이젠 명분도 있어 당당하게 요구해도 되니까.”하예정은 갑자기 성소현의 성격이 이경혜와 그야말로 판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예정아, 잠깐만, 이따가 가게 문 닫고 우리 집으로 가서 같이 밥 먹자. 아 참, 네 남편은 시간이 돼? 시간 되면 같이 가고.”하예정이 말했다.“남편이 오늘 출장 가서 며칠 후에 올 거예요. 남편이 오면 그때 이모 뵈러 갈게요.”“출장 갔구나. 그럼 할 수 없지, 오면 봐야지.”조카사위를 지금 당장 만날 수 없어도 이경혜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두 조카에게 있었으니까.조카를 찾았으니 조카에게도 뒷받침해주는 든든한 이모가 생겼다. 나중에 조카사위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제대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예진이가 5시 30분에 퇴근한다고 했지?”“네.”이경혜가 시간을 확인했다.“어느 회사 다녀?”“노씨 그룹이요.”이경혜가 고개를 끄덕였다.“노씨 그룹은 발전할 공간이 커. 노동명은 장사 머리가 좋
전씨 할머니는 묵묵히 전이혁을 바라보았다.이미 모든 말을 털어놓은 전이혁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전부 입 밖으로 내뱉었다.오늘 본가에 온 것도 전씨 할머니에게 확실하게 말하러 온 것이다. 그는 형들처럼 전씨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전이혁에게는 그가 원하는 여자가 있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전씨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의 말도 일리가 있구나. 오래 끌기보다 단칼에 정리하는 게 낫지. 아영 씨도 너에 대한 감정이 아직 깊지 않을 테니 확실히 설명해 주고 마음을 접게 하는 게 좋겠다. 아영 씨의 시간을 더 뺏지 말고.”전씨 할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물었다.“이혁아, 정말 아영 씨를 고려하지 않을 거냐? 할머니의 안목을 전혀 믿지 못하겠어?”전이혁은 진지하게 대답했다.“할머니, 저는 할머니의 안목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여자예요. 그런데 저는 그녀에게 설레는 느낌이 없어요. 아영 씨와 결혼한다 해도 예의만 차리며 형식적으로 살뿐 진정한 부부간의 정은 없을 거예요. 아영 씨도 똑똑한 사람이라 그런 삶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사랑이라는 건 강제적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감정이 생기지는 않는 것 같아요.”전씨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알겠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할머니도 이제는 네 연애사에 간섭하지 않겠어. 원하는 대로 해 봐. 하지만 단 한 가지! 인품이 좋은 여자를 데려와. 아주 뛰어나지 않아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어야 해. 우리 전씨 가문의 이름을 망치지 말고. 만약 인품이 나쁜데도 네가 고집부린다면 난 억지로 막지는 않겠다. 대신 나와 인연을 끊고 전씨 가문에서 나가.”전씨 할머니는 쥐 한 마리가 천 냥 술을 썩히는 걸 용납하지 않으셨다.전씨 가문의 좋은 명성은 몇 대에 걸쳐, 그리고 전씨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평생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것이다.전이혁 하나 때문에 무너지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약속했다.“전씨 할머니, 걱정하
“할머니는 제 마음속에서 저의 부모님보다도 더 중요하거든요. 백 세까지 오래오래 사셔야 증손녀도 안으실 거 아니에요. 우리 형제가 아홉이나 되는데 앞으로 아홉 며느리가 생기면 그중 한 명이 꼭 증손녀를 낳아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증손녀를 안고 키우시면서 나중에 좋은 신랑을 골라주시기까지 하셔야 하는걸요.”전씨 할머니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나도 하느님께 500년 수명을 더 빌고 싶지만 그게 될 일이니? 현실을 직시해야지. 나는 증손녀가 태어나는 걸 보기만 해도 만족해. 증손녀가 시집갈 때까지 살겠다는 건 너무 큰 욕심이지.”전씨 할머니의 건강은 아직 좋으시지만 이미 여든이 넘으신 데다 증손녀가 언제 태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다.어쩌면 막내인 전이율이 결혼할 때까지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어이구, 농담이야. 아까 내가 말했듯이 인품이 좋고 가치관이 바르면 내가 정한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고. 그럼 꿈속의 그녀가 누군지는 아느냐?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네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전이혁은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했다.“제가 너무 무능해서 알아낸 정보가 하나도 없어요. 정남 형에게 부탁해 그녀를 조사해보라고 했는데 이런 일은 신경 쓰기 싫다고 하더군요. 만약 태윤 형이 부탁한다면 무슨 일이든 도와주겠지만 제가 부탁하는 건 싫다고 하더라고요.”“정남이가 네 형의 친구이지 네 친구가 아니잖아.”전씨 할머니는 소정남이 전이혁의 부탁을 거부한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정남은 전이혁에게 빚진 것도 없지 않는가.전이혁은 전씨 그룹 본사에서 일하지도 않고 소정남과도 동료 사이도, 친구 사이도 아니었다. 소정남이 원하면 도와주고 원하지 않으면 안 도와줘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그런 일까지 정남에게 부탁하려고?”전씨 할머니가 다시 물었다.전이혁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그는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라 결국은 바베큐만 먹었다.“2, 3개월 정도의 시간을 더 주겠다. 그때 가서도 여전히 도아
그런데도 전이혁은 휴지로 할머니의 자리를 닦았다. 그러나 전이혁 자신은 의자에 앉을 거라서 굳이 의자를 닦지 않았다.“할머니는 정말 수재이신 것 같아요. 수재는 집 밖을 안 나가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잖아요.”할머니는 전이혁을 흘겨보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만 아부하고, 어서 말해봐. 도아영 씨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 건데?”“아영 씨 괜찮은 사람이에요. 전 나쁘다고 한 적 없어요. 저도 좋아해 보려고 노력했어요. 아영 씨와 감정을 쌓아보려고 노력도 했는데 전 안 생기고 아영 씨만 강정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먼 길까지 절 찾아와서 따지더라고요.”“아영 씨는 제가 자기 가지고 논 거 아니냐고 하는데, 저도 억울해요. 저도 아영 씨 좋아해 보려고 진심으로 노력했지만,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 걸 어떡해요.”전이혁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입은 쉬지 않고 계속 바비큐를 먹고 있었다.“할머니가 점찍은 사람이라 능력도 좋고 조건도 잘 맞고, 여러모로 저랑 잘 어울린다는 거 알아요. 저도 아영 씨를 싫어하지 않고요. 하지만 함께 있으면 뭔가 찌릿한 느낌이 부족해요. 이미 봐온 시간도 꽤 되고, 이제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전 아영 씨를 사랑할 수 없어요.”“물론 제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아영 씨와 결혼해서 평생 서로 존중하며 지낼 수는 있을 거예요.”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그런데?”전이혁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뗐다.“할머니도 아시잖아요. 제 꿈속에 자꾸 어떤 여자가 나타나 저와 얽힌다는 사실을요. 사실, 현실에서 진짜로 그 여자를 만났어요.”“나도 알고 있어.”전이혁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정말 할머니를 속일 수 없다니까. 제가 그 여자의 물건을 가지고 간 것도 아시잖아요.”“네가 그 물건 가져간 거 인정하면서 왜 아직도 안 돌려줘? 그 여자가 회사까지 찾아가서 네 둘째 형에게 물어봤었다며. 너 없다는 거 알고 나서야 돌아갔다고 하더라.”이 일은 할머니뿐만 아니라 전씨 가문 온 가
전날 밤잠을 설쳐 속이 불편했던 전이혁은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비닐봉지에 먹을 것들을 담고 나서야 할머니의 뒤를 따랐다.“할머니, 여기 구운 닭 다리요.”전이혁은 할머니에게 닭 다리 하나를 건넨 뒤, 고개를 돌려 테이블 앞에 앉아 입가가 번지르르할 정도로 맛있게 먹고 있는 그 여자아이를 바라보더니 할머니에게 물었다.“할머니, 그런데 저 여자아이는 누구예요? 엄청 복스럽게 먹고 있네요.”“소령이라고, 그 애 부모가 여기 꽃밭 관리자야. 난 그 애가 참 마음에 들어.”전이혁은 할머니가 구운 생선 꼬치를 먹으면서 말했다.“할머니는 여자아이면 다 좋아하잖아요. 예씨 가문에 갔을 때도 그 집안에 유일한 증손녀를 데려오고 싶어 하셨잖아요.”할머니는 아쉬운 듯 말했다.“우리는 예씨 가문과 조건도 비슷하고 가풍도 똑같이 좋은 집안이라 지연이가 우리 집에서 살더라도 나쁠 게 없을 텐데, 아쉽게도 그 집 식구들이 허락하지 않더구나. 예준성은 내가 정말 딸을 데려가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나를 경계했는지 몰라. 내가 가면 할 일도 없는지, 맨날 집에 붙어서 나를 감시하는 거야.”“그거야 지연이가 예씨 가문의 유일한 증손녀이니 당연히 아까워하죠. 제가 예준성이라도 할머니가 딸 훔쳐 갈까 봐 감시했을 거예요. 하하하.”전이혁은 눈앞에 그려지는 그 장면을 상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손자인 전이혁이 보기에도 할머니는 진심으로 손녀 아니면 증손녀를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그는 가끔 자기 부모에게 시험관 아기라도 시도해서 넷째는 꼭 딸을 낳으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돌아오는 건 부모의 매질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의 부모는 이제 손주 볼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 그들 형제 셋이 각자 노력해서 딸 한 명쯤은 낳아 보라고 독려하곤 했었다.“할머니한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자, 이제 말해 봐.”할머니가 물었다.전이혁은 웃으면서 대답했다.“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죠. 그냥 할머니 보러 오면 안 돼요? 꼭 할머니한테 무슨 할 얘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
잠시 후, 차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아이는 고개만 돌려 살짝 보더니 다시 바비큐를 먹기 시작했다.“할머니, 저 왔어요.”멀리서 전이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이혁은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린 후,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풍겨오는 바비큐 냄새는 정말 좋았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 이런 날씨에는 바비큐가 최고죠.”관성의 겨울 날씨는 정말 변덕스러웠다. 어제는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추워서 할머니들은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온이 확 올라와 정오 무렵에는 햇빛까지 쨍쨍하게 비추더니 약간 더운 느낌마저 들었다.관성의 사람들은 겨울에 가끔 이렇게 바비큐를 해 먹긴 하지만 보통은 휴일이 되어야 준비해서 해먹을 여유가 있었다.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생각만 나면 언제든 자유롭게 바비큐를 즐길 수 있었다.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전이혁은 자신이 나중에 결혼하고 아들이 성장하면 당장 사업을 넘겨주고, 자신은 조기 은퇴해 할머니처럼 여유로운 노후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것은 신선놀음보다 더 행복한 삶이었다.“넷째 도련님.”양씨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전이혁에게 안부를 물었다.전씨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여러 할머니도 전이혁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그들은 전씨 할머니가 무려 아홉 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직 사회에 나오지 않은 막내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일곱 명의 손자는 이미 뛰어나고 유능한 인물들로 소문나 있었다. 게다가 막내 두 명은 비록 사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성적이 우수했고 앞날도 창창했다.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었다.전씨 가문은 자손들이 하나같이 훌륭했고 가업도 재산도 어마어마했으니, 그야말로 할머니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그들은 가끔 함께 수다를 떨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그 시절에도 그들보다 훨씬 잘 살았고, 그때부터 이미 가문에서 주름잡는 존재였다. 결국 훌륭한 어른이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전씨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여자아이를 불렀다.“소령이, 이리 와봐.”여자아이는 깡충깡충 뛰어갔다.“어르신, 닭 다리 다 구워졌어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자신에게 닭 다리를 주려고 부른 줄 알았다.전씨 할머니는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웃었다.“아직 다 안 구워졌어. 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 거야.”“그런데 왜 양씨 아저씨의 자리를 잇고 싶다고 했지?”전씨 할머니가 여자아이를 예뻐한다는 건 리조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전씨 가문은 몇 대째 아들만 태어났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딸을 가지길 원했었고, 그것이 안 되자 손녀를 기대해 보았지만, 매번 실망으로 마무리되었다.할머니는 이제 증손녀를 기대해 보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증손녀를 안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종종 직원들에게 집에 여자아이가 있으면 관성으로 데려와 학교도 보내고 같이 생활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리조트에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오라고도 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여자아이들이 리조트에 놀러 오게 되면 손주며느리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한테 증손녀를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양씨 아저씨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양씨 아저씨가 사는 집도 아주 예뻐요. 저도 양씨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요.”그 여자아이는 겨우 세 살밖에 안 됐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말도 잘해서 가끔 그 여자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어른들이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여자아이는 부모도 가르친 적이 없는 말을 스스로 내뱉곤 했었다.우빈이도 가끔 서원 리조트에 올 때마다 리조트에서 내려와 그 여자아이와 함께 신나게 놀곤 했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여자아이가 리조트에 올라와 우빈이와 함께 놀기도 했었다.“아까 양씨 아저씨가 한 말 잘 들었지? 네가 컸을 때는 양씨 아저씨는 이미 은퇴하고 다른 사람이 저 자리에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은퇴한 다음에야 네 차례가 오게 돼. 그보
할머니는 함께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말했다.“날씨가 좀 쌀쌀하네. 우리 따뜻하게 몸도 데울 겸 한 잔씩 할까?”“어르신.”전씨 할머니가 술을 마시자고 하자 양씨 아저씨는 바로 할머니를 제지했다.“어르신 술 마시면 안 됩니다. 큰 도련님께서 아시면 또 어르신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며 저를 혼내실 거예요.”“양 집사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태윤이는 점점 자기 할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아. 온갖 걸 다 간섭하려 들어.”할머니는 손자인 전태윤이 자신을 간섭하려 든다며 투덜거렸다.그러자 함께 있는 몇몇 할머니들이 웃기 시작했다.“큰 도련님께서 어르신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저희 나이에는 술도 적게 마시는 게 좋잖아요.”“과일주는 괜찮아. 양 집사, 가서 과일주 두 병 가져와. 바비큐에는 술이 있어야 제맛이지.”양씨 아저씨는 더 이상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리조트에 전화해서 과일주 몇 병을 가져오도록 했다.그들이 직접 잡은 생선 외에도 양씨 아저씨는 몇몇 어르신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바비큐용 식재료를 다양하게 준비했다. 어르신들 옆에는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양씨 아저씨는 그들을 위해 과일 주스를 준비해 두었다. 덕분에 그들은 기분 좋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전씨 할머니는 이렇게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생활을 참 좋아했다. 게다가 내년엔 첫 증손주가 태어나니 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할머니는 자신이 구운 소시지 한 꼬치를 여자아이에게 건네주고 그 아이의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소령이 갈수록 예뻐지네. 반짝이는 눈 좀 봐. 네 엄마가 너를 ‘소령이’라고 부르는 게 딱 맞아.”그 여자아이는 소시지를 건네받으며 귀엽게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어르신.”전씨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또 뭐 먹고 싶어? 할머니가 구워줄게.”“닭 다리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익숙한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씨 할머니에게 닭 다리를 구워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